2020년5월27일(수)맑음
혜광거사와 일곱명 보살들과 연암공전 뒷산 숲을 산책하다.
2020년5월28일(목)맑음
자아란 거울에 나타난 이미지mirror image다. 자아란 환상이며 기만이며 완전함을 욕망하는 불완전 존재의 열망이며 좌절이며 환멸이다. 거울에 나타난 자아 이미지를 보는 눈으로 타인과 세상을 본다. 자아란 조작된 이미지image이니 원래부터 없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완전한 자아와 완전한 세계를 찾는가? 없는 것을 아무리 개량하고 조작하고 가공해본들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림자를 아무리 갈고 닦더라도 그림자일 뿐이다. 완전함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똥을 버리듯 자아 관념을 버려라. 똥을 주물럭거릴수록 고약한 냄새가 퍼져가듯 자아를 보듬고 날뛸수록 깊은 어둠으로 빠지리라. 당신은 물 위에 나타난 제 얼굴이 사랑스러워 물에 빠져 죽은 나르시스이다. 사람은 자아라는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차라리 완전히 죽을 수 있다면 안식이라도 누리겠지만, 그렇지도 못하여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중음의 상태에서 욕망의 바람(object a/대상 a) 따라 날려갈 뿐이다.
2020년5월29일(금)맑음
부처님 오신 날 준비로 보살님들이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인다. 점심 공양으로 국수를 먹다. 내일 오실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부침개와 나물을 준비한다. 방을 닦고 창과 문틀도 깨끗하게 청소한다. 연등을 처마 밑에 내걸어 바람에 가벼이 샤르르 샤르르 흔들리는 모습이 허공에 핀 연꽃 같다. 아기 부처님 목욕을 위한 꽃장식과 수반을 준비하다.
2020년5월30일(토)맑음
<불기2564년 부처님 오신 날 법문요지>
사랑하는 자여, 반갑고 고맙고 기뻐하여라.
그대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부처님이 오셨다는 건 어마어마한 일이다.
부처님은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오늘 그리고 다함이 없는 미래까지 모든 생명을 안아줄 능력과 지혜와 무한한 자비심을 품고 오셨기 때문이다.
1. 출리심. 욕계에 빠진 삶에서 욕계를 넘어가는 삶으로. 자본주의 세상에서 비자본주의적으로 살기를 결심하라. 세상을 짊어지려 하지 말고 세상을 타고 가라. 세상에 빠지지 말고 세상과 함께하라. 세상에 갇히지 말고 세상을 넘어가라. 세상 끝에 서서 한발은 세상을 밟고 한발은 세상 밖을 딛고 가라.
2. 남을 발견하고 남을 대접하라. 나와 남을 동등하게 생각하라. 나와 남이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만들어가는 공생의 삶을 추구하라. 인간관계의 공공성을 회복하라.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라. 나는 유한한 일개의 존재이나, 남他은 한계가 없는 무한한 존재이다. 자아와 타인, 가족과 사회, 집안과 집 밖, 자기와 사회, 자기와 국가, 인간과 자연을 동등하게 보는 관점에서 행동하라. 자아가 죽어야 세상이 산다. 나의 죽음이 세상을 살린다. 마치 부처님의 전생인 보살이 배고픈 호랑이에게 몸을 던져 호랑이를 살려주었듯. 자아를 죽임으로써 남을 살린다. 내가 남을 향하여 던질 때 남이 나를 받아준다. 내가 사라진 곳에 무한한 세계가 나타난다. 자기가 사라져야 남이 보인다. 자아가 죽어야 남이 살아난다. 자아가 사라진 자리에 무한한 여백이 드러난다.
3. 선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라. 자기가 뿌린 불선한 씨앗의 결과를 기꺼이 감당하고, 다시는 불선의 씨앗을 뿌리지 않을 것을 다짐하라. 당신은 인생이란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 한 손에 전지하는 가위를 한 손에 물 조리개를 들라.
4. 죽음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죽음은 우리 발밑에 이미 도달해 있다. 태어날 때 이미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죽음을 품고 살아간다. 나는 죽는다. 나는 반드시 죽는다. 나는 반드시 혼자서 죽는다. 죽는다는 것은 나의 일이다. 죽음이란 선구적 결단을 하고, 매일 새로이 주어지는 하루, 그러나 곧 없어질 오늘을 의미 있게 살라.
인간은 완성되지 않은 채로 태어난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가능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있음을 결정하며 살아가야 한다. 인간은 결정되지 않은 채로 태어나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완전히 결정되지 않는다. 계속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 ‘가능성의 존재’이다. 인간은 ‘그가 되려고 마음먹은 바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많은 사람이 타인을 흉내 내며 살아간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남 따라, 세상 따라 타협하여 살아간다. 그건 주인 된 삶이 아니고 노예의 삶이다. 자신이 지은 업을 상속받아 청정한 업으로 변화를 시키는 선업의 주인이 되어라.
나는 한 번뿐이다. 나는 고유하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나는 대체불가능한 유일무이한 존재이다. 지금 이 몸과 마음이 내가 가진 원천적 재료이다.
이 원자재를 유익하게 사용하여 나와 남을 이롭게 하자.
나로 태어나서 행복하고 감사하다. 지금의 나의 존재는 만물과 연결되어 함께 존재한다.
모든 것과 연결된 나의 존재는 신비 그 자체이며, 알 수 없는 선물이며, 기회이다.
5. 현재 종교의 비판: 한국의 종교는 자본주의에 물들어, 물신화, 상업화되었다. 교조의 본질적인 가르침에 희석되었다. 근본으로 돌아가라.
이제 세상은 교회와 절과 성당이 없이도 얼마든지 건전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붓다와 예수는 사찰과 교회에 있지 않으며, 부처님과 하느님은 절과 성당에 계시지 않는다. 중들은 부처님을 등에 업고 불교를 팔아먹지 말라. 목사와 신부들은 예수님을 교회와 성당에 가두어 놓고 예수를 팔아먹지 말라. 붓다와 예수는 세상으로 들어가서 선한 친구들의 모임을 만들어 사람을 섬기며 일깨우라고 하셨다.
붓다와 예수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심지어 종교권력을 행사하려는 자들은 사회의 기생충이며 민중의 아편이다. 붓다와 예수는 말씀하신다.
세상에 갇히지 말고 세상을 넘어가라. 세상에 빠지지 말고 세상과 함께하라.
세상 끝에 서서 한발은 세상을 밟고 한발은 세상 밖을 딛고 가라.
붓다와 예수는 세상에 주어진 고귀한 선물이다. 붓다와 예수를 본받아 그와 같은 삶을 살자.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부산에서 전병익 선생님과 김태화 교수(부경대 응용수학과)부부 참석하다. 김태화 선생은 <문학과 수학>이라는 저서를 선물로 가져왔다. 독경과 법문, 헌공과 발원을 끝으로 관불의식을 하다. 점심공양 마치고 둘러앉아 자유로운 환담을 나누다. 정광거사 부부가 마지막으로 다녀가다.
2020년5월31일(일)흐림
김태화 선생이 주고간 <문학과 수학>1, 2권을 읽다. 그는 수학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상(李箱)의 시를 해석했다.
佛誕節後却疲困, 불탄절후각피곤
休打一眠對竹淸; 휴타일면대죽청
李箱夢遊劫外心, 이상몽유겁외심
雨前一茶打金剛. 우정일다타금강
부처님 오신 날 지내느라 피곤해져서
한바탕 잠잔 후 대나무 바라보니 정신이 든다,
이상(천재시인)은 시공을 초월한 환의 경계를 노닐었구나,
우전차 한 잔 마시며 금강살타를 때린다.
허균(許筠, 1569~1618)의 삶을 생각한다. 호: 단보(端甫), 교산(蛟山), 학산(鶴山), 성소(惺所), 백월거사(白月居士). 광해군 시대에 개성과 자유와 평등을 꿈꾸었던 개인주의자면서 낭만주의자, 휴머니스트였다.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 북경 유리창에서 4,000여 권의 서책을 구해서 최신 문물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不如世合. 세상에 야합할 수 없는 자유 사상가였다. 명대의 양명학 좌파사상가 이탁오李卓吾(이지李贄,1527~1602, 그는 당시의 도학자들을 겉으로는 도를 말하나 속으로는 부귀를 바라며, 유학자의 고상한 옷을 걸쳤으나 행동은 개, 돼지나 다를 것이 없다고 맹렬히 비난했다)의 삶과 같은 길을 걸었다. 호민豪民이 항민恒民과 원민怨民을 이끌고 나라를 새롭게 할 것이라 주장했다. 사명대사와 형제지간의 교유를 하였다. 허균과 이탁오가 자기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은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인격과 사상에 허물이 없다는 건 아니다. 그들은 장점과 단점을 함께 갖추고 있기에 인간적이다. 그들은 자기 삶이 비극적으로 끝날 것을 예감하면서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본성대로 솔직하게 살았을 뿐이다. 그들은 자기 시대의 알을 깨고 날아가고자 했다.
어제부터 미국 전역에서 흑인폭동 일어나다. LA 코리언 타운도 약탈의 위험에 직면해있다.
2020년5월31일(월)맑음
운암거사가 점심공양을 내다. 산청 내원사 주지를 맡고 있는 일광스님 와서 차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가다.
<도인과 깨달음에 대한 환상을 버려라>
숨은 도인이란 없다. 설령 그런 도인이 있더라도 그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아니 그는 애초부터 욕계를 벗어나기보다는 출세지향적 도인병에 걸린 사람일지도 모른다. 깨달았다고 세상을 바꿀 수 있거나 다른 사람을 구원해줄 수 없다. 깨달음이란 자아중심성을 넘어선 경지와 세상을 넘어가는 삶의 방향을 알았다는 것일 뿐이다. 우리에겐 도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가리키며 그 방향으로 함께 가는 친구가 필요할 뿐이다.
마음이 본래 텅 비었음을 이야기하기는 쉽지만 자아중심성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 실감하는가!
참나를 깨달았다고 우쭐하기는 쉽지만 나를 내려놓는 용심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하는가!
세상을 외면하고 떠나기는 쉽지만, 세상 속에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는가!
화엄과 不二法問불이법문을 들먹이면서 세상 이대로 조화롭고 완전하다고 미화하기는 얼마나 쉬운가!
一超直入如來地일초직입여래지를 말하지만 작고 작은 한 가지 습관도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하는가!
見性成佛견성성불을 주장하지만 사람이 어찌 하루아침에 부처가 될 수 있으리오!
부처가 마음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 저편에 있는 것도 아니다. 히말라야 동굴에도, 산중 절에도 불상에도 선방에도 부처는 없다. 부처를 찾지 말라. 부처가 되려고 하지 말라. 오직 부처님 가신 길을 따라가라. 부처의 길은 잘 닦여진 도로가 아니라 온몸을 던져 어둠을 뚫고 나갈 때 새벽빛에 어스름하게 드러날 오솔길이다. 불교적으로 살 것을 결단하라. 그런데 불교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자신의 삶을 던져 답을 구할 일이지 다른 사람이 대신 말해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