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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로의 시무28조에 나타난 유가경세사상
(1) 시무28조를 제시하게 된 동기
최승로(崔承老)는 경주에서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쳐들어오기 몇 개월 전, 고려 태조10년(927) 신라 귀족 최은성(崔殷誠)의 아들로 태어나 고려 성종11년(989)에 세상을 떠났다. 최은성은 경순왕이 고려에 투항하여 귀순했을 때 함께 고려에 들어왔다. 왕건은 최승로가 신라 귀족의 자제로서 12세에 논어를 읽는 것을 보고 원봉성(元鳳省) 학사(學士)에 올렸다. 그는 그 후 차츰 벼슬이 높아져 성종 때에는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는 6대에 걸쳐 왕실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광종(光宗)대에 이르러 지나친 불교행사와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를 우대하고 아울러 투화한 중국인들을 후대한 데 대하여 기존의 정치세력과 함께 불만을 지니고 있었다. 고려 제4대 광종은 쌍기의 건의에 따라 958년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본격적인 과거제도를 만들었으며, 쌍기를 우대했다.
이러한 쌍기에 대한 우대를 보고 많은 중국인들이 투하하였으며 광종은 이들을 후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신하들의 가택이나 딸을 골라 주어서 기존 정치세력의 불만과 반발이 컸다고 한다.1) 최승로는 후에 이점에 대하여 하찮은 유랑인에 지나지 않는 그들을 그 지혜와 재주를 논하지 않고 모두 특별한 은혜와 특별한 예로써 대하니 그들을 따라 들어오는 사람들이 다투어 나와서 옛날의 덕이 쇠하게 되었다고 상소문에서 지적하고 있다.
물론 쌍기의 건의에 의하여 시행된 과거제도는 공정한 관리의 등용을 목표로 하여 생긴 제도이며, 이를 통해서 고려는 태조 때부터 호족 중심의 체제에서 중앙집권체제로 이행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광종의 이러한 왕권중심의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와 쌍기 등 중국인들에 대한 지나친 후대로 인하여 기존 정치세력들은 약화되었고 그들의 불만도 높았다.
최승로는 성종 원년, 성종이 5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각각 봉사(封事)를 올려 역대왕조의 이해득실을 논하게 하자, 그는 태조에서 경종에 이르는 다섯 왕의 치적에 관한 평가와 시무(時務) 28조를 올렸다. 다섯 왕에 대한 평가는 태조(太祖) · 혜종(惠宗) · 정종(定宗) · 광종(光宗) · 경종(景宗)의 치적에 대한 평가로서 그것은 마치 당나라 현종(玄宗) 때 오긍(吳兢)이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지어 현종에게 태종의 정치를 본받도록 한 것과 같은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최승로의 이러한 다섯 왕의 치적에 대한 평가는 성종으로 하여금 현군이 되어야 한다는 입지(立志)를 심어 주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유가경세사상에 있어서는 군주가 현군이 되어야겠다는 입지가 왕도정치를 실현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무 28조는 성종만이 볼 수 있도록 봉해진 내용으로서 성종의 정치개혁을 촉구하는 것들이었다. 이 28개조의 시무책 가운데 22조만이 오늘날 전하며, 6개조는 경술년(庚戌年, 1010) 거란족의 침입 때 분실되었다.
요컨대 그가 시무28조를 제시한 직접적 원인은 성종의 요청이 있었지만 광종조의 치정에 대한 불만과 불교의 폐단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어 그것을 거울삼아 성종의 개혁을 권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개혁의 목표는 짜임새 있고 체계적인 것은 아니지만 유가적 왕도정치를 모델로 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의 시무책을 중심으로 그의 경세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2) 불교의 폐단에 대한 시정과 억불숭유정책
최승로는 그의 시무책 가운데 8개조에서 배불론(排佛論)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태조의 십훈요(十訓要)에서 보여주는 여러 내용 가운데 불교를 국가정책으로 장려한다는 숭불정책(崇佛政策)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그는 유학의 음양관(陰陽觀)에 입각하여 불교의 폐단을 지적했다. 그에 의하면 세계는 음양과 같은 천지의 기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지 결코 불신(佛神) 따위가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광종 때부터 불교의 폐단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광종은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잘 믿고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인데다, 불교의 인과설에 현혹되어 백성들의 고혈을 빼앗아 대부분 불사(佛事)에 탕진했다고 비난하고,2) 또한 불교사원의 착취와 승려들의 만행을 비판하고 그것을 금해줄 것을 건의했다.3)
이러한 최승로의 시무책은 우리 나라 최초의 억불숭유정책(抑佛崇儒政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불교를 배척한 것은 교리적 측면보다는 불교의 현실적 폐단 때문이다. 사실 그는 불교신앙 자체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불교를 수신하는데 필요한 학문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 그의 척불론은 정도전의 그것과 다르다.
“(유 · 불 · 도) 삼교는 각각 맡은 바가 있으니, 이를 받들어 행하는 모든 사람은 이를 혼동하여 하나로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불교는 수신의 근본이요,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원천입니다. 수신은 내생(來生)의 바탕이요,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금일의 임무입니다. 금일은 지극히 가깝고 내생은 지극히 먼데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것은 또한 그르지 않겠습니까?”4)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수신하는 데에 있어서 불교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으나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는 유교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현실이고 현실은 가까운데 있으므로 그는 현실 정치를 위해서는 유가에 기본을 두고 유가의 정치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승유정책을 펴고 있다. 특히 그는 유가의 경세사상에서 중시하고 있는 군주의 자질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주역』에 ‘성인(聖人)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면 천하가 화평한다’고 하였고, 『논어』에는 ‘무위(無爲)로 세상을 다스린 자는 순임금이라 하였으니, 대저 그는 무엇을 했는가? 다만 그는 몸을 공손히 하여 남면(南面)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인이 하늘과 사람을 감동시키는 까닭은 순일한 덕과 사심이 없는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상께서 마음을 겸양하게 가지고 항상 경외함으로써 신하를 예우하시면 누가 마음과 힘을 다하여 나아가 모유(謀猷)를 고하고 물러나 광찬(匡贊)하기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이른바 임금은 신하를 예로써 쓰고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써 섬긴다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날마다 하루하루를 삼가 교만하지 말고 신하를 접함에 공손함을 생각하며, 설사 혹시 죄를 짓는 자가 있더라도 그 경중을 법대로만 처리하면 태평의 위업을 서서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5)
“『논어』에 ‘자기 집 귀신이 아닌데도 제사하는 것은 아첨이다’라고 하였고, 『좌전』에는 ‘귀신은 자기의 족류(族類)가 아니면 흠향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음사무복(淫祀無福)이 그것입니다. 제사의 비용은 모두 백성들의 고혈과 노역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백성들의 재물과 힘을 쓰지 않고 백성들의 환심을 얻는다면 그 복은 귀신에게 비는 복보다 실재적인 것입니다. 성상께서 기원하는 제사를 버리고 자신을 공경하고 자신을 문책하는 마음을 가져서 상천(上天)에 다다르면 재해는 없어지고 복록이 저절로 올 것입니다.”6)
이와 같이 그는 유가경전인 『주역』, 『논어』, 『좌전』 등의 내용을 예로 들어 군주의 자질과 애민사상을 강조하고 있으며, 특히 군주의 자질이 태평의 위업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는 유가경세사상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 그는 구체적으로 고려의 역대 군주 특히 태조의 치적에서 군주의 자질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 고려 태조가 군주의 체통과 덕을 갖추었다고 생각하고 예찬했다.
첫째, 거란과의 대외관계에 있어서 보여준 심원한 계책, 둘째, 발해가 멸망했을 때 그 지배계층을 받아들인 포용력, 셋째, 유금필과 같은 훌륭한 장수를 파견하여 북방경계를 안정시킨 데서 보여준 인재등용의 능력과 자기와 먼 사람을 회유하는 능력, 넷째, 신라의 임금과 신하가 항복하기를 자청했을 때 처음에 사양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결과적으로 더 많은 지방호족의 투항을 가져오게 한 예양심(禮讓心), 다섯째, 후백제의 평정과정에서 보여준 넓은 도량 등이었다.
이 밖에도 태조의 장점으로는 평안함에 있어 일락(逸樂)함이 없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도 공손하며, 절약 검소함을 숭상하고, 적시에 신상필벌을 시행함으로써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였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여 신임하고 사악한 자를 주저 없이 제거한 사실 등을 제시하고 있다.7)
이와 같이 그는 태조에 대해서는 군주의 자질을 가졌다고 예찬한 반면 광종에 대해서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극단적인 혹평을 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광종은 쌍기를 중용하여 지나치게 우대하고 유랑인이나 다름없는 투화(投化)한 중국인들을 후대하고 그들에게 귀족들의 집이나 딸들을 주어 정착케 하고, 쌍기의 권유에 의하여 과거제도를 마련하여 과거의 호족중심의 제도에서 중앙집권제도를 시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존의 귀족계급과 마찰을 불러 일으켜, 측근세력 외에는 군신간의 대화가 단절되었다. 그리고 광종은 지나친 불사를 행함으로써 국가재정의 악화와 국민의 원성을 불러 일으켰다. 최승로는 이러한 광종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광종뿐만 아니라 경종도 비판했다.
그가 절대군주국가에 있어서 역대왕조를 그렇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성종의 신임이 그만큼 컸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에게는 또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유가적 신념과 용기와 기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점에 있어서 그는 조선조의 성리학자들의 사생취의적(捨生取義的) 선비정신과 같은 투철한 유학정신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3) 민족자주의식과 국방론
대체로 유가경세론자들은 모화 내지 사대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최승로는 조선조 초기의 유가경세론자들인 정도전 · 변계량 · 양성지 등과 같이 비교적 중국에 대해서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고려의 지배층이 사대주의에 빠져 중국의 풍속이나 문물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중국의 제도는 따르지 않을 수 없으나 사방의 습속은 각기 토성(土性)에 따라 다르므로 모두 변화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 예 · 악 · 시 · 서의 가르침과 군신 · 부자의 도는 마땅히 중국의 것을 본받아 비루한 것은 고쳐야 하나, 그 나머지 거마(車馬) · 의복과 같은 제도는 우리의 풍속에 따라 사치와 검약의 중용을 얻게 하되 꼭 중국의 것과 같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8)
위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승로는 유가 경전의 가르침과 그 정신에는 마땅히 따라야 한다고 보면서도 그 나머지 우리의 고유한 제도는 변경하면서까지 중국의 것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민족 자주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자주의식은 태조의 십훈요 중 제4조에도 나타나고 있다. 태조는 십훈요에서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당나라의 풍속을 사모하여 문물 · 예악에 있어서 모두 그 제도를 따랐으나, 방위가 다르고 땅이 다른 만큼 인성도 다른 것이니, 반드시 구차스럽게 그들과 같이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최승로의 자주의식은 태조의 이러한 중국관에서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9) 이러한 자주의식 때문에 광종이 중국인 쌍기 등을 우대하고 중국의 문물을 지나치게 숭상한 것에 대하여 광종의 치적을 혹평한 일면도 있다. 그는 이러한 자주의식을 가지고 국방문제에 있어서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거란과 여진의 끊임없는 침입을 격퇴시키기 위해서는 북방경계를 확정하고 방어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0)
최승로는 이밖에도 여러 문제에 관하여 개혁안을 제시했다. 특히 그의 경세사상에 있어서 위민 내지 애민사상은 시무책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백성은 특권층, 사원, 그리고 지방호족에 의하여 부당하게 유린되고 있다고 보고, 이의 시정을 위하여 11개조에 걸쳐 시정안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의 경세사상이 유가의 애민사상에 근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주
- 1 『高麗史』卷93, 徐弼傳의 記事 參照.
- 2 『高麗史』, 卷93, 「列傳」, 崔承老條, ‘此弊始於光宗 崇信讒邪 多殺無辜 惑於浮屠果報之說 欲除罪業浚民膏血多作佛事.’
- 3 同上, “諸寺僧人各於州郡 差人句當逐年利息 勞擾百姓 請皆禁之.”
- 4 『高麗史』, 권93, 「列傳」, 崔承老條, 時務20조 참조.
- 5 같은 곳, 시무14조.
- 6 같은 책, 시무21조 참조.
- 7 최승로의 정치사상, p.177 참조.
- 8 같은 곳, 시무11조 참조.
- 9 같은 책, p.190 참조.
- 10 시무1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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