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심 정규한 p112-114
‘할렐루야’를 작곡한 헨델이 건강이 매우 나빴을 때, 그는 병을 고치기 위해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다른 사람의 돈을 빌려 쓰기까지 했지만, 건강도 찾지 못했고 돈도 갚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결국 비참한 상태로 매우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 할렐루야를 작곡할 수 있었다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나는 듯한 그 깊은 어둠까지도 내려놓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설가 오 헨리도 은행원으로 근무할 때 부정대출에 관련되어 감옥에 들어가야 했지만, 거기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기에 그 유명한 ‘마지막 잎새’를 쓸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루스벨트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한창 정치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루스벨트는 39세 때에 갑자기 소아마비에 걸려 보행이 곤란해졌다. 그는 다리를 쇠붙이에 고정시킨 채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했다.
절망에 빠진 그가 방에서만 지내는 것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아내 엘레나는 비가 그치고 맑게 갠 어느 날 남편의 휠체어를 밀며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비가 온 뒤에는 반드시 이렇게 맑은 날이 옵니다.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뜻하지 않은 병으로 다리는 불편해졌지만 그렇다고 당신 자신이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요. 여보, 우리 조금만 더 힘을 냅시다.” 아내의 말에 루스벨트가 대답했다. “하지만 나는 영원한 불구자요. 그래도 나를 사랑하겠소?”“아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을 해요? 그럼 내가 지금까지는 당신의 두 다리만을 사랑했나요?”.
헨델, 헨리 그리고 루즈벨트는 모두 고난을 겪으며 몸과 마음이 마비되는 상태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고통의 심연 속에서도 몸과 마음의 중풍을 극복하고 위대한 음악, 위대한 글 그리고 위대한 업적을 건져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내려 놓은 채 평정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몸의 중풍을 없앨 수는 없지만 영혼의 중풍은 잠심의 삶을 통해 극복할 수 있습니다.
* 동아일보|오피니언 입력 2021-05-20 03:00
[김도연 칼럼]형평성과 수월성, 펼쳐야 할 교육의 두 날개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수
서울시내 중학교 신입생 선발이 추첨제로 바뀌면서, 동시에 명문(名門) 7개교가 폐교된 것은 1969년 일이다. 이듬해 부산 등에서도 중학교 입시는 사라졌고 이는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1974년 서울과 부산의 고등학교들이 추첨으로 신입생을 받으며, 형평성을 지향하는 중등 교육이 우리 사회에 자리 잡았다. 이미 반세기 전이다. 부모의 사회 경제적 배경과 상관없이 어느 학생에게나 동일한 교육을 제공하자는 뜻이니, 이는 국민 모두가 주인인 민주국가에서 너무 당연하다.
우리가 추구한 형평성 교육의 성과는 객관적으로 확인되었다. 수년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주요 33개국 청년들의 언어능력, 수리능력 등을 조사해 발표한 ‘국제 성인 역량 조사 보고’에 의하면 우리 청년 역량의 평균치는 세계적으로 상당히 상위권이었다. 또 다른 특징은 역량 분포곡선에서 찾을 수 있는데, 우리 청년들의 능력은 다른 나라처럼 편차가 크지 않으며 중간 평균치에 많이 모여 있었다. 그 결과, 하위 1% 청년의 역량을 비교하면 우리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분포곡선의 또 다른 한쪽, 즉 상위 1% 청년의 역량은 세계 최하위권이었다. 아쉬운 점이다.
형평성은 교육에서 지향해야 할 가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21세기를 살아 갈 미래 인재 교육에서는 수월성도 놓쳐서는 안 된다. 세계무대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국부(國富) 창출에 크게 기여한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한 명의 인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이야기했다. 노벨상 수상 등을 통해 국격(國格)을 높이는 데도 상위 1% 청년의 역량을 더 끌어올리는 수월성 교육은 꼭 필요하다.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진보정치 진영은 교육 형평성에, 그리고 보수 진영은 수월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그런데 현 정부는 여러 정책에서 타협 없는 독주를 하고 있으며, 이는 교육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형평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학교가 동일한 교육과정 등을 제공해야 하므로 결국 획일적 인재 양성에 치우칠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과거 산업사회에 필요한 인재 양성은 획일적 교육으로도 가능한 면이 있었지만, 미래 디지털 사회를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능력을 지닌 인재 양성이 필수적이다. 이런 측면을 고려해 우리는 과학고, 외국어고, 자율형사립고 등을 설립해 교육의 다양성 및 수월성을 보완해 왔다. 이러한 특목고 교육이 명문대 입시에 치중하면서 왜곡된 점은 분명 있으며 이는 바로잡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폐교를 추진하는 것은 교각살우(矯角殺牛)와 다름없다.
실제로 고등학교 교육은 대학과는 다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대학에서 전문가로서의 지적 능력을 크게 신장시키지만, 10대 후반기를 보내는 고등학교에서는 삶에 대한 가치관과 인간적 품성을 구축한다. 미국 동부지역 명문 사립고들은 치열한 경쟁을 통해 빼어난 영재들을 선발하고 이들에게 엄청난 교육비를 투자하는데, 이들은 대학 입학을 포함한 여러 측면에서 일반고와는 격이 다른 ‘특권’을 지니고 있다. 해당 고교 졸업생들은 하버드대 등 명문대 입학을 거의 보장받는데, 그러나 누구도 폐교를 이야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파키스탄 이민자의 아들로서 ‘세인트폴’이라는 미국 명문고를 졸업하고, 대학의 사회학 교수가 된 셰이머스 라만 칸이 다시 모교를 관찰해 최근 출간한 책의 제목은 ‘특권’이다. 미국 사회 특권층의 별다른 세상이지만, 여러 인종과 다양한 계층을 수용하면서 학생들을 개방적 품성의 소유자로 키우는 사립 고등학교 이야기다. 종합적인 인문학 교육과 방대한 독서 학습 등을 통해 국가 발전에 기여하며 사회에서 사랑받는 리더를 길러내는 시스템은 배워야 할 부분이다.
그간 우리 사회에서도 전주 상산고, 횡성 민사고 등 자사고가 연륜을 더하며 발전하고 있었는데, 정부의 방침은 이들을 모두 2025년에 일반고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자사고 지정을 취소당한 10개 학교가 그간 제기한 네 건의 행정소송에서 교육청 취소 처분은 모두 위법으로 판결이 났다. 적법하지도 않은 방법으로 자사고를 없애는 것이 과연 우리 교육 문제를 해결하며 밝은 미래를 여는 길일까? 교육은 정치가 아니다. 형평성과 수월성은 활짝 펼쳐야 할 교육의 두 날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