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수락산 둘레길/靑石 전성훈
새벽에 눈을 뜨자 거실로 나와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오지 않는다. 계속되는 장마로 습도가 높아 답답한 기분으로 지냈는데 오늘은 아침에 비가 그치고 하늘이 시꺼멓다.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비가 멈춘 틈새에 땀을 흘리며 기분 전환을 하려고 둘레길로 나선다. 어디로 갈까 잠시 생각하다가 주저 없이 수락산으로 향한다. 출발은 1호선 도봉산역 대신 4호선 당고개역이다. 당고개역에 내려서 둘레길 입구로 들어서니, 수락산 아침 공기를 맡으며 공원에 매트를 펼쳐놓고 요가를 하는 여성이 눈에 들어온다. 돌계단을 몇 개 올라가니 바로 숨이 가쁘다. 습도가 너무나 높아서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비를 품고 있는 여름 숲속의 진한 향기를 마시며 천천히 호흡을 조절하며 한 걸음 한 걸음씩 옮긴다. 한 시절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알렸던 수락산 채석장터에 이르러 탁 뜨인 앞을 바라보니, 건너편 멀리 구름 속에 잠기어 보였다가 사라지는 불암산 정상이 고개를 내밀며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듯하다. 불암산 정상 모습을 보면서 짧은 미소를 지어본다. 오르막은 숨이 막히고, 내리막은 다리가 불편해도 평탄한 길은 부담 없이 걸을 만하다. 바위투성이에 모래가 많은 수락산 둘레길을 맨발로 걷는 여성분에게 발이 아프지 않은지 물어보니까 괜찮다고 한다. 평일 이른 아침이라서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자주 사람을 만난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며 조용하고 한적한 숲길을 걷다 보니까, 산길에 온갖 쓰레기 비닐봉지가 널려있기에 이게 도대체 뭔가 하니, 금방 생각이 떠오른다. 바로 북한에서 보낸 쓰레기 풍선이 이곳에도 떨어진 것이다. 정말 어처구니없고 한심하고 유치하기 그지없는 몹쓸 짓거리를 하는 북한 정권이다. 그런 북한 정권을 좋다고 손뼉 치고 누군가를 잡아먹을 듯이 눈을 부릅뜨며 이빨을 내놓고 소리치고, 고귀한 영혼을 헐값에 파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지금까지 1.3km 정도 걸었고 앞으로 5km 이상 땀을 흘리며 걸어야 한다. 쉼터에서 쉬면서 물 한 모금 마시는데 심심치 않게 날파리가 찾아온다. 지팡이를 왼손에 쥐다가 오른손으로 쥐다가 하면서 40분 정도 걷고 나서 두 번째 쉼터에서 한숨을 돌린다. 옷이 땀에 흠뻑 젖어 몸에 착 달라붙어서 척척하고 기분도 찝찝하다. 눈에서 땀방울이 쏟아지고 안경도 습기가 차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수건으로 열심히 닦아도 그때뿐이다. 땀 냄새 때문인지 반갑지 않은 손님이 신나게 시간차 공격을 한다. 배낭에서 시원한 매실차를 꺼내서 마셔봐도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만 시원하다. 숲길에는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조금씩 스며든다. 따사로운 햇볕 덕택인지 매미들의 합창 소리가 들린다. 애벌레에서 성충이 되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후손을 남기기 위한 절체절명의 짝짓기를 위해 저토록 신명 나게 노래하는 매미들의 몸놀림이 너무나 처연하게 느껴진다. 숲속 여기저기 계곡에는 장마철이라 그런지 물이 많이 흐른다. 파랗게 물이끼가 낀 바위틈을 이리저리 돌고 돌아가며 흐르는 물소리가 제법 우렁차다. 가던 길을 멈추고 옷을 입은 채 그대로 물속에 들어갔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늙어서 그런지 생각은 그저 단순한 생각으로 그치고 몸은 전혀 반응이 없다. 옷을 훌훌 다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차가운 계곡 물속에 들어앉았으면 좋겠다. 이른 시간에 둘레길을 찾은 탓에, 아직 오전 9시가 되지 않았다. 지금쯤 저잣거리에서는 삶의 수레바퀴를 끌고 미는 시끄러운 소리가 요란하겠지만 숲속에는 그저 고요한 적막만이 흐른다. 오늘처럼 땀을 흘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보는 게 얼마 만인가?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땀이 시원한 탄산음료처럼 느껴지는 황홀한 순간을 맛보고 싶다. 비록 짧은 순간이지만, 호젓한 숲에 나 홀로 숨 쉬며 숲의 향기에 빠져 보는 것도 자주 접할 수 없는 소소한 행복이다. 세상이 늘, 어느 때나,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중생에게 자연의 소리와 모습을 통하여 어떤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듯하다. 세월은 가고 온다지만, 이 세상 나그네의 길은 한 번 떠나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혼자만 가는 외길이다. 힘들고 만사가 귀찮아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질 때도 있지만, 몸이 아파 드러눕기 전까지는 걷고 또 걸으며 자연과 하나 되는 연습을 언제까지나 하고 싶다. (2024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