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치는 세레자 요한 -
☆ 2014년 가해 1월19일 (녹) 연중 제2주일
[수원] 죄는 피로서만 씻겨진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제1독서 : 1사무엘 9, 1 - 4. 17 - 19 ; 10,
† 제2독서 :
† 복음 : 마르 2, 13 - 17
오늘 전례
연중 제2주일인 오늘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서 그분을
증언하는 장면을 전해 줍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
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우리는 구원의 부르심을 받은 이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자신의 삶을 살피며 정성껏 이 미사에 참여합시다.
★ ‘주님의 종’의 둘째 노래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이 어디에
희망을 두는지를 노래한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셨고
힘이 되어 주셨음을 깨달은 것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인사하며 그들을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라고 일컫는다(제2독서).
★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라고 증언한다. 또한 그가 그분을 알아본 것은 세례 때
성령께서 그분 위에 내리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겨울날은 축제 없이는 지내기가 더 어렵습니다. 추운 날씨에 겪는
육신의 고통이 힘들 뿐 아니라 외로움과 스산함이 가슴속으로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축제의 풍성한 분위기와 작은 선물을 주고받는 따뜻한
관계들이 이 차가운 계절의 움츠러든 마음을 달래 주니 그나마 나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탄의 황홀한 설렘도, 연말연시의 떠들썩함도
아련하고 설날은 아직 먼 요즈음에는, 한겨울의 거리에 혼자 서 있는
느낌이 자주 듭니다.
이럴 때에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라는 연가곡이 잘 어울리겠지요.
독일의 유명한 성악가가 부른 이 곡에 대한 얘기를 몇 해 전 저희
교구의 주교님에게서 들은 뒤로 이 곡이 자주 떠오릅니다. 본디의
곡명이 ‘겨울 여행’인 이 곡은 실연한 청년의 방랑을 표현한 한 작가의
연작시에 곡을 붙인 것입니다. 마지막 곡 ‘거리의 악사’는, 마을 어귀에
맨발로 서서 곱은 손으로 손풍금을 연주하는 늙은 악사 앞의 접시는
텅 비어 있는 가운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겨울의 한산한 풍경보다 더 외롭고 가슴 아픈 사람들의 모습이 선히
그려집니다.
이렇게 황량한 겨울의 스산한 마음을 주일 미사를 봉헌하며 주님의
성령과 공동체의 온기로 채워 봅니다. 추위에 곱은 손과 외로움에
얼어붙은 마음들이 얼마나 많은 절망과 우울함으로 저 모퉁이에 서
있을지 헤아려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하느님의 어린양 : 반신부의 복음묵상 @@@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19일 연중 2주일(요한1,29-34)
하느님의 어린양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해
주십니다. 그 사랑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이 시간 사랑이신 주님의
희생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은총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어린양에
관해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구약성경에서 보면, 어린양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제사
때 제물로 사용된 동물입니다. 제물로서의 어린양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제단에 올려졌고, 그때 제물의 피는 속죄의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죄의 용서를 청한 것입니다.
둘째는 파스카의 어린양(탈출12,3-13)이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때 이집트 왕 파라오가 완고하게
말을 듣지 않자 하느님은 모세를 통해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는데
마지막 재앙이 이집트에 있는 모든 맏이의 죽음이었습니다.
“왕좌에 앉은 파라오의 맏아들부터 맺돌 앞에 앉은 여종의 맏아들까지
이집트 땅의 맏아들과 짐승의 맏배들이 모조리 죽을 것이다.”(탈출11,5)
이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여 살리기 위하여 한
집에 한 마리씩 새끼 양을 잡아 제사 지내고 그 피를 집의 좌우
문설주와 문 상인방에 바르도록 하여 이스라엘이 죽음의 재앙이라는
심판을 면하고 노예생활에서 자유롭게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에게 어린양은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건너뛰다.”라는 의미의 파스카 축제가 지속되고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대신 죽은 희생양을 파스카의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주님의 종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깍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53,7).을 얘기합니다. 여기서는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받음으로써 그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주실 주님의
종이 도살자의 칼 아래 죽음을 당하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비유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예언되신 주님의 종이 바로 그분입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3.6)
신약성경에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분의 죽음이 지닌 속죄적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는 속죄의 양이자
파스카의 양, 곧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없애시는 참된
어린양이십니다. 예수님은 사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씻기
위한 속죄의 제물로 세상에 보내신 분이십니다(1요한4,10).
미사 안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의 어린양을 찾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사제가 축성된 빵을 나누는 동안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평화를 주소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간절한 청원과 평화를 갈망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성체를 영하기 직전 사제는 성체를 높이 들어 외칩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그리고 우리는 응답합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이 말씀 안에 담긴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을
통한 죄의 용서와 평화의 선물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영성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생의 삶을 오늘 여기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속죄와 희생양이 되신 어린양을
모시는 우리의 행위에는 우리도 어린양이 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양식을 받아 모셔도 효과가 없는 것은
하느님을 직접 모신다는 중대한 사실에 별로 주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그러므로 “준비된 마음 없이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깊은 신심을
가지고 모시도록 하십시오.”
어떻게 보면 우리를 위해 밥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이웃의
밥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너는 내 밥이야! ’하면서 남을 무시하고
깔보며 내 뜻대로 움직이려 합니다. 내가 “네 밥이 되어 줄께!”한다면
그야말로 바보천치가 되는 세상입니다. 자기 이익과 권리만 주장하고
남의 권리는 아랑곳하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이 팽배해 있습니다.
이웃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을 감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똑똑한 사람은 넘쳐나고 갈수록 각박하고 메마른 사회가 되어갑니다.
참고 인내하며 기다려 주는 마음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하느님의 어린양의 삶이 필요합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희생은 핀 한 개를 줍는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지금 삶의 자리에서 다가오는
희생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만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그분의 삶을 따르는 길만이 세상을 바로잡아
줄 수 있음을 믿고 희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
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어린양의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서 자주 주님 앞에 무릎 굻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구원자이시며 희생제물이 되신 주님은 살아있는
성교회의 심장인 감실 안의 성체로 현존”(교황 바오로 6세)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결코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하루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바오로 사도를 봅니다.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8-9).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 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5,2).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주님께 꼭 붙어서
2014년 가해 1월19일 연중 제2주일
어제 오후에는 바람도 불고 꽤 쌀쌀한 날씨였습니다. 저는 묵주기도를
하면서 제가 살고 있는 동네를 걷고 있었지요. 그런데 토요일이라
그런지 연인들이 동네 공원에 많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팔짱을 끼든 두 손을 마주 잡든 꼭 붙어 다닙니다. 단 한 명의 연인도
몇 미터씩 떨어져 다니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상당히 추운 날씨였기
때문에 더욱 더 붙어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연인들이 단순히
춥기 때문에 붙어 다니는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춥다고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꼭 붙어 다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한 것을 넘어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함께
다닙니다.
이 꼭 붙어 다니는 사랑의 관계를 생각하다가 어느 집에 붙어 있는
담쟁이 넝쿨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리의 나무는 모두 앙상한 가지만을
보이고 있는데, 벽에 붙어 있는 담쟁이 넝쿨들은 봄날의 푸르름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그 모양 그대로를 다 간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집 벽에 꼭 붙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 역시 주님께 꼭 붙어 있는 사랑의 관계를 유지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필요할 때에만 주님을 찾는 이기적인 신앙이 아닌,
언제나 주님과 함께 하는 변하지 않는 신앙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 있게 “주님”이라고 외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며,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주님께 꼭 붙어서 변하지 않는 사랑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기적이 있어야 믿음이 생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적 뒤에 생기는 믿음은 금방 사라질 수 있는 믿음입니다. 진짜
믿음은 오히려 기적이 없을 때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기적이 없어도 주님을 붙잡을 수 있는 것, 자신의 뜨거운 외침에도
침묵하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신앙이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받고 있었지요.
그가 보여준 금욕적인 행동과 힘이 넘치는 말씀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그래서 그의 제자 역시 점점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알리는 것이 아닌, 예수님을 더 훌륭하신 분이고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
말에 이제 사람들은 자신을 떠나 예수님께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었고 모든 이들이 예수님께로 향하도록 인도했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었던 진짜 믿음.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이 아닌 주님을 높이는 그 믿음이 ‘하느님의 어린양’
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주님께 꼭 붙어서 모든 삶을
주님 중심으로 살았던 세례자 요한이지요. 그에 반해 우리들은 과연
주님께 꼭 붙어서 변하지 않는 사랑과 주님 중심의 굳은 믿음을
간직하며 살고 있었을까요?
당신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는 내가 있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당신 있음에 영원을 수놓는 아름다운 동행이어라(황덕식).
벽에 꼭 붙어있는 담쟁이 넝쿨. 우리는 어디에 꼭 붙어 있어야
할까요?
의미를 부여하는 삶
제가 살고 있는 인천 중구에는 ‘우리나라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이 많습니다. 최초의 근대주화가 이곳에서 만들어졌으며, 최초의
근대공원도 이곳에 있습니다. 최초의 기관차가 이곳에서 처음
출발했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세워진 개신교 교회도 이곳에 있습니다.
최초의 축구경기, 최초의 자장면, 최초의 우체국, 최초의 등대
등등……. 최초라는 이름 붙은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최초’라는 이름이 붙으니 어쩐지 의미가 남다른 것 같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특별한 의미가 붙은 이 ‘최초’라는 말에 더욱 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으며, 또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내 삶 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해서 관심 가지고 바라본다면 소중한
나의 삶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오늘은 내가 최초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겠다고 굳은 약속을
한 날, 오늘은 내가 최초로 누구를 도운 날, 오늘은 내가 최초로
미사에 온전히 집중한 날, 오늘은 내가 최초로 사랑 고백을 한 날.....
항상 똑같은 삶의 패턴으로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는 듯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느낌은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부여하는 삶. 보다 더 풍요로운 나의
삶이 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소나무 신부와 함께하는 마음의 산책
'사랑으로 항상 지켜보시는 하느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2014년 가해 1월19일 연중 제2주일 복음묵상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요한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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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저녁 식사 후에는 솔과 밤 산보를 하러 바깥으로 나갑니다.
솔은 저와 함께 사는 1년 반 된 포메라니언(Pomeranian)종인
암컷 강아지입니다. 보통 솔을 안고 걸어서 십분 거리의 공민관
운동장을 찾습니다. 바닥이 고운 모래로 된 운동장이고 넓기
때문에 솔이 실컷 뛰어 놀기에는 최고인 셈이지요. 운동장에
도착하면 솔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면 신이 나서 이것저것 냄새
맡으며 여기 저기 뛰어다니지요. 그렇게 혼자서 뛰어다니다
보면, 저와의 거리가 멀어지기 마련이지요. 그러다가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면서 저를 찾게 됩니다. 밤이니까 제가
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저를 찾을 수가 없지요. 그러면 얼음처럼 굳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저를 찾는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잠시 후,
제가 솔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 넓은 운동장을 쏜살같이 달려와서
온갖 애정을 다 표현합니다.
이러한 솔의 모습을 보면서, 잠시 우리의 삶을 생각해봅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이라는 커다란 운동장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운동장은 결코 간단하지 않은 관계로 이루어진
운동장이지요. 모든 삶의 의미도, 희로애락도 결국은 그 관계
안에서 대부분 만들어집니다. 서로 다른 각자의 역사를 가진
마음들이 서로 만들어 나아가야 하는 것이 관계이니,
셀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분명한 것은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그 어떤 일이든 우리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에는 늘 한계라는
벽을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고통의
경험이 많을수록 종교적이고 신앙적이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그래서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한 마리의 강아지가 신나게 이것저것 하면서 운동장을 뛰어 놀다가
갑자기 주인과 떨어진 것이 생각나고,
갑자기 몰려오는 두려움 속에 주인을 찾습니다.
그러다 주인의 모습을 확인한 후, 전력을 다해서 달려갑니다.
우리도 무엇인가를 하며 지금을 살고 있습니다.
찾던지, 구하던지, 원하던지 무엇인가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느님을 자주 잊고 지내게 되지요.
사랑하는 딸 솔의 움직임을 끝까지 쫓아가던 저의 시선과 같은 시선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주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인가에 마음을 빼앗겨 하느님을 잊고 있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나 여기 있다.”라며 무엇인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신호를 보내주실 겁니다. 방황하며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우리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결코 놓쳐서도 잊어서도
안 되는 것은 우리에게 보내시는 그분의 신호일 것입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이 외침이 지금의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복음의 메시지임을 확신합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제대로 된 이정표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19일 연중 제2주일
요한 1장 29-34절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제대로 된 이정표>
등산을 다니면서 체험하는 바입니다. 열심히 앞만 보고 산을 오르다
보면 길을 잃어버리거나 헤맬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해라도
떨어지면 상황은 심각해집니다. 길 잃고 헤매다가, 해 떨어지고,
체온 떨어지고, 비상식량 떨어지고, 그러면 꼼짝 없이 사면초가에
빠지고 말지요. 생명의 위기상황 앞에 직면합니다.
그런데 산에 자주 다니면서 요즘은 요령이 좀 생겼습니다. 길이
애매해지면, 전반적인 산세나, 계곡의 흐름이나, 나무들의 모양새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대충 산길의 방향을 잡는데 거의 틀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산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이정표’처럼
고마운 것이 다시 또 없습니다. 하산 길에 한참 길을 헤매다가
‘매표소’ 몇 Km 라고 정확하게 적힌 이정표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그제야 안심이 됩니다. 산행하는 사람들에게
이정표는 정말 고마운 존재입니다.
어떤 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야할 길을 정확하게 제시해준 제대로 된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제대로 된 안내자 하나 없이 캄캄한 밤길을 걸어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위험하게도 이정표 하나 없는 험한 산길, 폭설이
내린 깊은 골짜기를 헤매던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기 저기 암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가짜 메시아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해 백성들을 현혹시켰습니다.
불안한 표정의 백성들은 이리 우르르 몰려갔다 저리 우르르 몰려갔다
하며 오합지졸처럼 행동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깎아 지르는
낭떠러지인줄도 모르고 직진만 하다가 부지기수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런 어둠과 방황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백성들 앞에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다른 예언자들과는 달라도 무척 달랐습니다. 헛된
맹세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진지했습니다. 말과 행동에
신뢰가 갔습니다. 백성들도 제대로 된 예언자임을 직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자,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자신을 향해 다가오시자, 세례자 요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확하게 안내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예수님에게로 쏠립니다. 세례자 요한만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 마침내 나타나신 진짜 주인공을 향해
삶의 방향을 돌리는 순간입니다. 그간 세례자 요한에게 집중되어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이제 제대로 방향을 잡는 순간입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어두운 밤길을 걷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한 훌륭한 이정표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 수도자의 삶, 사제의 삶은 어찌 보면 이정표로서의
삶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시는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해도 성공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나날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뒤에, 우리 삶의 배경이 자리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흔적을 발견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삶 안에서 구원에로의 화살표를 발견합니까?
우리의 생활은 세상 사람들 앞에서 생명에로 향하는 이정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습니까?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2주일
2014년 가해 1월19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 1,29-34
‘그들은 왜 천주교회로 갔는가!’ 이 책은 개신교 목사님들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천주교 신자는 늘어나는데
개신교 신자는 줄어들고 있다고 합니다. 또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천주교로 개종을 하는데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 이런 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천주교회는 친절하지도 않고, 선교를 위해서
개신교만큼 노력하지도 않는데 어째서 천주교 신자는 늘어나는가!
목사님들이 연구한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천주교는 성스럽고 신비하다는 느낌을 준다고 합니다.
둘째 천주교는 조직이 잘 되어 있어서 체계적이라고 합니다.
교황, 주교, 사제, 신자로 이루어지는 조직이 있고, 본당을 옮겨도
곧 적응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셋째, 헌금을 강요하지 않고, 제사, 술, 담배 등에도 관대한
편이라고 합니다.
성스럽고 신비하다는 것, 엄숙한 전례 등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천주교회도 내부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 미사 참례 숫자가 점차 감소하고, 쉬는
교우가 증가하며, 교회 내에서 상처받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경우에 상처를 받는지, 그런 상처에서 자유로워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상처의 유형은 대략
3가지입니다.
첫째 어떤 상처는 오해나 개인적 다툼에서 일어납니다. 본당의
새로운 신자들은 기존의 본당 조직 안으로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을 하곤 합니다. 자발적 봉사자들은 때로 그들의 봉사를 너무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에 허탈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농담으로 한
이야기가 상처를 주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본당 신부가
바빠서 함께 이야기 나눌 시간을 갖기 어려울 경우 거부당했다는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원하고 필요로 할 때 교회에서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할 경우에도 사람들은 상처받곤 합니다.
둘째, 때로 규칙과 규정들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부모가
미사 참례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 아기에게 세례를 주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학생은 미사 때 모자를 썼다는 이유로
신부님께서 야단을 치셨는데 그 때문에 상처를 받아서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회는 커다란 조직이기 때문에
많은 규정과 규칙들이 있습니다. 이런 규정과 규칙이 교회를
보호하기도 하지만 마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하는데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처럼 느껴지면 상처를 받곤 합니다.
셋째, 변화가 충돌과 대립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본당에 새 신부가
온 후에 의견의 불일치가 분출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의 아이디어가
거부되기도 하고, 본당에서 운영하는 학교나 유치원이 문을 닫는
경우도 있고, 일부에서 본당의 모금 활동에 심하게 반대하는 경우,
제의실의 리모델링 계획에 반대하는 경우,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대하는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실망감을 드러내게
됩니다. 상처받는 이유는 교회가 부족함을 지닌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데서 비롯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대해 갖는 이상은 매우
높지만 현실은 교회가 실수를 저지르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오해하고 부인하며 배반하는 제자들, 당신께서
기도할 것을 요청했을 때 잠을 자고, 붙잡혀 가실 때 도망가는 제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초기 그리스도 공동체에서도 신앙과 그 실천에 관한
논쟁이 잦았습니다. 역사를 통해서도 거룩한 사람들이 교회의 일부
사람이나 어떠한 사건 때문에 고통을 겪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인간적 약점에도 2천 년 동안 지속되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께서 교회를 이끌고 성장시키셨기 때문입니다.
2000년 3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의 이름으로 과거와 현재에
교회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공식적으로 용서를 청했으며, 다른 많은
주교들도 그들 교구에서 벌어지는 인간적 잘못들에 대해서 용서를
청했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우리들은 상처를 바로 보고, 용서를
청하며, 이를 바로잡아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이는 말처럼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커다란 힘은 용서입니다. 용서는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또한 우리가 용서하면 우리 자신도 용서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34)
라고 기도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용서하는 방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우리는 상처를 덮어 버리고 지나치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용서하는 데에는 우리가 옳은지 그른지,
상대가 그 용서를 바라는지, 그가 용서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의
여부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노와 화, 좌절, 배신감 등의 감정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용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는 우리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용서하는 것이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며,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인내와 끈기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느님께 청하면서
용서를 해야 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못이 없으면, 용서도
없습니다. 용서가 없으면, 사랑도 없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나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대한 나의 반응으로 만들어 진다.”
용서를 청하고 용서를 할 때, 우리는 만국의 빛이 될 수 있으며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 주님을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거룩하신 분으로 고백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이 또한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주게 됩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죄는 피로써만 씻겨진다
2014년 가해 1월19일 연중 제2주일
<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복음 : 요한 1,29-34
< 죄는 피로써만 씻겨진다 >
초등학교 4학년인 정태는 마음이 여리고 착한 아이입니다. 그렇지만
또래 아이들보다 행동이 어눌하고 조금 바보스러운 데가 있어서,
친구들은 그런 정태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미워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무 때나 엉뚱하게 나서서 친구들을 피곤하게 만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사이에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정태는 따돌림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리고 정태네 반 아이들 중 몇 명은 정태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교실에서 정태를 때리기도
했습니다. 정태가 멍든 것을 보자 정태 엄마는 학교를 찾아왔고,
그래서 정태를 때린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불려갔습니다. 선생님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아이들을 단단히 혼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서둘러 학교를 빠져
나갈 때였습니다. 정태네 반에서 못됐기로 소문난 남자 아이
셋이 정태를 화장실로 끌고 갔습니다. 아이들은 화장실 바깥문을
잠근 채 정태를 윽박질렀습니다.
“우리가 때렸다고 너네 엄마한테 일렀지? 나쁜 놈!”
“너네 엄마가 학교에 왔다 가고 나서 우리가 선생님한테 얼마나
혼났는지 알아?”
정태는 잔뜩 겁에 질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습니다.
“너네 엄마가 학교에 한 번만 더 오면 그 땐 너, 학교에 못
다니게 될 줄 알어.”
“알았어. 엄마한테 이르지 않을게. 제발 때리지 마.”
“때리면 흔적이 남을 테니까 때리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넌 말로
해선 안 통하는 애야! 우리한테 혼 좀 나야 돼!”
아이들은 정태의 얼굴을 화장실 변기에 밀어 넣고 물을 내렸습니다.
정태의 얼굴은 화장실 변기의 물을 흠뻑 뒤집어썼습니다.
“이번엔 한 번이지만 다음엔 다섯 번이다. 알았지?”
그 때 다른 반 남자 선생님이 화장실로 들어왔고, 이 사실은 온
학교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징계를
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담임선생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아이들은 징계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선생님은 매일 학교에 일찍 출근하여 손수 화장실
변기들을 닦았습니다. 한 달이 넘게 선생님은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변기 속에 아이의 머리를 처박았던 아이가 와서 용서를 청했습니다.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친 탓이지. 정태는
여기에 머리가 박혔었는데 선생님이 고무장갑 낀 손으로 변기를
닦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니. 선생님이라도 이 더러운 변기를
깨끗하게 닦아 놓아야지. 그래야 가엾은 정태가 또다시 변기에
얼굴을 디밀어도 상처를 덜 받을 테니까.”
선생님을 바라보는 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연탄길 3 中 선생님의 눈물]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큽니다. 그만큼
하늘나라는 완전하고 깨끗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이들은 자신의
두루마기를 어린양이 흘리신 피로 깨끗이 빨아 희게 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참조: 계시 7,14) 피로 옷을 빨면 붉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희게 될까요? 희게 되었다는 뜻은 하나의 상징인데, 나의 더러움,
즉 나의 죄는 ‘피’로써만 깨끗해 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이에게 벌을 주는 것보다 아이를 더 깨끗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선생님의 눈물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눈물은 아이들을
죗값을 위해 대신 흘려주는 피였습니다. 이 피만이 사람을
죄인에서 의인으로 깨끗이 씻어줄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1882년 프레드릭 카벤다쉬와 토마스 버크를 찔러 죽인 브라디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 전날, 한
수녀님이 그에게 면회 신청을 했습니다. 수녀는 그를 만나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브라디씨, 저는 어떤 사람을 몹시 미워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해도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데 사실 나의 신앙으로도 그를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수녀에게도 그런 일이 있습니까? 용서하는 데는 까닭이 없지요.
그냥 마음을 풀어 버리면 되는 게 아닙니까?”
이때 수녀는 브라디의 손을 잡으면서,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습니다. 나는 뵈닉스 공원에서 버크를 죽인 당신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는 바로 나의 오빠입니다.”
그러자 브라디는 그 큰 눈을 한참 감고 있더니, “죄송합니다.
그리고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저를 고발한 사람을
지금 용서합니다. 이제는 마음이 후련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를 체험하고 브라디는 조용히 숨을
거뒀습니다.
사실 나의 죄 값은 내가 다 치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란
이미 엎질러진 물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비싼 화분을 깨서
아무리 혼내도 그 화분은 다시 붙지 않습니다. 고해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부님이 내 준 보속을 한다고 죄가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피로서 온전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용서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나의 삶의
변화로 증명이 되어야 합니다.
라디오에서 나온 사연인데 자신이 아는 대학 선배의 이야기
였습니다. 그 선배의 부모는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특히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시고 어머니를 때리기도 하며 못살게
굴었습니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고등학생
이었던 그 선배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으로 점점 안 좋은
길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한 번은 패싸움에 말려들어 모두 경찰서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불려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경찰들에게 무릎을 꿇고 아들을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경찰들도 당황했지만, 제일 당황했던 것은 그 선배였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 선배는 마음을 잡고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에 있는
일류대학에 수석으로 합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피의 값을 조금이나마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면 우리는 그만큼 더 깨끗해 질 것입니다. 삶도 이전과는
같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만찬 상에서 왕이시며
스승이시지만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그러나 그 중에 가리옷 유다에게는 예수님의 눈물도 피도
소용없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죗값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흘려주는 눈물이,
나를 위해 흘리는 피가, 나를 위해 당하는 수고와 고통이 진정으로
나를 위한 사랑임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런 수고도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미사 때마다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러면서도
내 삶에 대한 후회의 눈물이 나지 않고 삶의 변화가 없다면 그
피는 나에게는 가치가 없게 됩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러 오셨음을 믿으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을 믿읍시다.
그분의 사랑을 믿읍시다. 그 믿음으로만 나는 그 피를 통하여
깨끗해지고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셉 신부님 홈페이지: http://www.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19일 연중 제2주일,
이사49,3.5-6 1코린1,1-3 요한1,29-34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 1,29-34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영화 ‘변호인’의 관객 수가 1.18일 밤 1000만을 돌파했다는
소식입니다. 주연 배우 송강호의 인터뷰 내용 중 한 대목이
신선했습니다.
- 배우란 무엇인가? -
초년병 기자의 질문에 송 배우의 다음 답변이 깊은 깨달음을
줍니다. “배우란 ‘우리가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주는 직업’이다.”
잃어버린 얼굴을 찾아 영화관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잃어버린 참 나를 찾고자 성당이나 수도원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나 마음 깊이 잠재해 있는 참 나를 찾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참 나를 살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첫째, 주님을 뵈어야 합니다.
세상에 볼 것도 많지만 우선 찾아 뵈어야 할 분이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보고 체험하라 있는 눈이요 주님을 찬양하라 있는 입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눈과 관련된 ‘본다.’라는
단어들입니다. 참으로 깨어 영안이 활짝 열린 요한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자 감격에 벅차
소리칩니다.
“보라, 세상에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자기 제자들이 열린 눈으로 주님을 뵙도록 안내하는 요한입니다.
바로 이 말씀에서 연유된 미사 중 영성체 전 사제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요한은 또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성령이 내려와 늘 그분 위에 머무르셨던 분이 바로 주님이시요
성령으로 눈이 열려 이런 주님의 정체를 알아 보고 증언한
요한입니다.
눈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일 때 성령은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어 주님을 뵙게 합니다. 우리 마음의
눈이 열려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주님을
뵙고 모시는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둘째,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잃어버린 내 얼굴을 찾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는 까닭 역시 잃어버린 내 얼굴을 찾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이기에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참 나의 얼굴을 찾을 수 있습니다.
모든 성인들은 주님을 만남으로 제 얼굴을 찾았던 분들입니다.
주님을 만날수록 주님을 닮아 참 내 얼굴이 되어간다는 사실이
놀라운 신비요 은총입니다.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바로 이 대목을 통해 예수님과 요한의 관계가 분명히 들어납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 분명히 들어나는 요한의 신원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떠나 선 내 정체성을 찾기는 불가능합니다.
“너는 나의 종이다. 이스라엘아, 너에게서 내 영광이 드러나리라.”
이사야나 예수님은 물론 우리 모두의 신원은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항구히 살아갈 때 참 나의 실현입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떠난 참 나의 발견과 실현은 요원합니다.
하여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 중에 방황하는 무수한 자기를 잃은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거룩하게 된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신자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의 종으로 살아갈 때 거룩한 삶이요
참 나의 실현입니다. 저절로 내적안정과 평화, 기쁨이 뒤따릅니다.
셋째, 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종으로, 세상의 빛으로, 주님의 빛나는 종으로 살라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주님을 만나 참 나를 알 때 주님의
빛나는 종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문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과연 나는 빛입니까, 어둠입니까?
나는 문입니까, 벽입니까?
주님의 다음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5,14-16참조).
예수님 친히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의 문이 되어 사셨습니다.
주님을 닮을수록 우리 또한 주님의 빛과 문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마태6,23ㄴ). 주님과 함께 할 때는 빛이요 문이지만 주님을 떠나선
어둠이요 벽임을 깨닫습니다.
이사야서 마지막 말씀 역시 우리 모두 세상의 빛으로, 주님의
빛나는 종으로 살 것을 촉구합니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주님은 당신의 구원이 우리 주변 세상 모두에 미치도록 우리를
당신 빛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은 연중 제2주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주셨습니다.
1.주님을 뵈어야 합니다.
주님의 신비를,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보라고 있는 우리의
눈입니다. 성령의 은총으로 마음의 눈만 열리면 어디나 가득한
주님의 얼굴입니다. 내 잃어버린 얼굴이 바로 주님의 얼굴입니다.
2.자기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잃어버린 내 얼굴을 찾습니다. 비로소 겸손과
지혜, 순수와 열정, 무욕과 자비의 참 나의 삶입니다.
3.세상의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대낮 같은 세상이라지만 속은 캄캄한 어둠입니다.
세상이 어둠이라면 주님은 빛입니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주님의 빛나는 종들로 살라고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참 나를 찾은 당신의 종들인 우리
모두를 세상의 빛으로 파견하십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1코린1,3).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예수님을 가장 잘 표현하신 세례자 요한
2014년 가해 1월19일 연중 제2주일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요한 1,29-34
예수님을 가장 잘 표현하신 세례자 요한
대개 사람들은 신을 믿는다 하면 세상살이 도움 받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서 부족한 것, 얻고 싶은 것, 살기에 도움 되는 것들 말입니다.
그러니 수능시험, 사업시작, 아플 때 등 도움을 청하는 것 아닙니까.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양이라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속세 생활을 돕는 심부름꾼으로 대하면 되겠어요?
예수님을 가장 잘 설명하신 세례자 요한님께 참 감사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9)”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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