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에 청원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6.25 사변 때 30살 나이로 지원 입대해서 목숨 걸고 싸운 공로로 금성 화랑 무공 훈장을 받았던 임봉래(林奉萊)님 장남 임길성입니다. 제가 이 청원서를 보내는 까닭은 찾지 못한 훈장의 정장을 찾아서, 고인이 되신 제 아버지의 명예를 찾아드리고 싶고, 아버지 참전으로 4년 넘게 혼자 2자녀를 키우느라 많은 고생을 하신 어머니(작년 별세)와 최전선에서 적과 싸우는 아들의 생사 걱정으로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많은 눈물을 흘리며 노심초사하다 생을 마감하신 제 할머니 영혼을 위로해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제 아버지는 6.25 사변으로 국가가 위태로울 때 마을 유지들의 요청을 받아서 피난선 선장으로 일본으로 피신하려고 떠났다가 거제도 앞을 지나면서, 도저히 양심이 허락지 않아, 30살의 늦은 나이에 자신의 안위와 사랑하는 가족들을 돌보는 일보다, 애국 애족하는 마음이 컸던지, 모두가 꺼렸을 입대를 지원해서 생사를 알 수 없는 군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내 아버지는 군 복무 중에 받은 금성 무공 화랑 훈장 약장을(전시라 약장) 제대할 때‘약장을 반납하면 정장을 집으로 보내주겠다.'라는 선임하사의 권유에 반납하고 제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고, 제대 후 바쁘게만 지냈던 아버지는 미처 훈장을 찾지 못하다가, 은퇴한 후 찾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국가에 충성해서 받은 금성 화랑 무공 훈장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라는 이유로, 반세기가 지나고 아버지께서 고인이 된 지금까지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국민의 순수한 애국충정을 이해하고 명예를 회복해주는 것이 조국 대한민국이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1987년 아버지와 함께 육군본부 상훈과에 신청했고, 2010년 10월 28일 국방부를 제가 직접 방문해서 신청했으나 아직 찾지 못한 훈장을, 최근에 옛 서류를 정리하던 중 찾은 제 아버지가 군 복무 중에 찍은 사진을 첨부해서, 그것을 근거로 해서 찾으려고 하니 더 큰 관심을 두고 찾을 수 있게 도움을 주시길 청원합니다. 내 아버지의 인적 사항과 금성 화랑 무공 훈장 받은 근거 이름: 임봉래(林奉來). 생년월일: 1921년 9월 21일 군 번: 0144282 병과: 보병 계급: 1 중사 소속: 수도사단 기갑연대, 3사단 18연대 입대 일자: 1950년 8월 15일(제대증서에는 9월 5일로 표기됨) 제대 일자: 1954년 12월 20일(제대증서 번호: 제 87053호) 제 아버지가 6.25 사변이 일어난 후 지원해서 입대를 했을 때는 전세가 아군에게 매우 불리해서 낙동강까지 후퇴할 때였고, 갓 입대한 아버지는 부산에서 8일 동안 기초 훈련을 받은 후, 수도사단 기갑연대 (연대장 백남권) 3대대 (대대장 임관묵) 11중대(중대장 이종진, 선임하사 홍종표) 3소대, 3분대에 소속해서, 나이가 많아선지 부분대장으로 군 복무를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후 1950년 9월 초 경북 안강전투에 참전해서 아군이 후퇴할 때 분대원 30명과 마지막까지 최전선에 남아, 적의 진격을 막으면서 본대 후퇴를 돕다가, 고지에 고립 포위되었고 분대원 중 15명은 전사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15명 병사는 어쩔 수 없이 각자 흩어져 각개 전투를 하면서, 적의 진격을 늦추며, 며칠을 적과 대치했으며, 그때 소나기처럼 퍼붓는 적탄을 피하며 여러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포항 쪽으로 후퇴한 본대를 찾아서 합류했으며, 그때 본대에서는 30명 전 분대원이 이미 전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전사자로 처리 하려고 했고, 살아서 귀환한 것을 천운으로 여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런 후 곧바로 전세가 회복되어 아군이 북진할 때 1950년 9월 아버지는 수도사단 기갑 연대 소속으로 38선을 돌파했다고 말했고, 그 공로로 얼마 후 전 부대원에게 대통령 기장이 수여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눈 속을 헤치며 계속 북진을 해서 1950년 11월 말경에는 함경북도 성진까지 북진했으나, 보급이 끊겨서 며칠을 굶으며 행군했다고 했고, 가까스로 마을을 발견해서 진입했으나, 부락민은 피난을 떠나 마을 전체가 비어 있어서 식량을 구하지 못해 더 큰 배고픔을 겪었으며, 그때 마침 장독대에 있던 간장독을 발견하고는, 극심한 허기를 달래려고 빈속에 간장을 마신 탓에 그만 정신을 잃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천만 다행히 아군에 의해 후송되어, 의식을 회복했을 때는 부산 5. 6 육군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1950년 12월 초로 알고 있었음) 그러나 건강을 어느 정도 회복했을 때 아버지는 입원한 환자 중 몇 환자들이, 회복된 상태에서 받은 약을 먹지 않고 변기에 버리는 것을 보고, 크게 울분을 터뜨렸고 말했습니다. 왜냐면 그 약은 최전방에서 싸우는 병사에게 너무 소중한 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본 아버지는 곧바로 병원장을 찾아가서 그런 사실을 알리면서. 아버지 자신은 다시 전선으로 복귀신청을 했다고 회고했습니다. (1,4 후퇴로 전선이 아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된 것을 알게 된 까닭) 그때 아버지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병원장은 모든 환자를 강당으로 모이게 한 후,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약을 함부로 버리지 말도록 경고했고, 회복된 병사는 모두 복귀할 것을 종용했다고 들었습니다. 1951년 1월 20일 다시 최전선 보충대로 돌아간 아버지는 2월 초순 강원도 원주에 있던 3사단 18연대(백골 부대) 3대대 11중대로 배치되었으며, (당시 군단장은 유재흥 장군으로 기억하나, 사단장은 자주 바뀌어 이름은 잊었고, 연대장은 김덕중 대령이었다고 기억함) 그곳에서 복무 하던1951년 4 월 아버지는 금성 화랑 무공 훈장을 받았으나 (안강전투 수훈으로 알고 있었음) 전쟁 중이라 약장이었고, 휴가를 왔을 때는 다른 약장과 함께 달고 왔으며, 그때 내가 졸라서 간혹 나의 상의에 옮겨 달리기도 했습니다.
휴전이 된 후 내 아버지는, 계속 군에 복무하기를 권하는 상관들의 요청을 들었으나, 4년 4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의가사 제대를 했고, 부대를 떠날 때 선임하사가 ‘약장을 남겨두고 가면 정장으로 바꿔 집으로 보내주겠다.’라는 권고를 받고는 약장을 남겨두고서 제대를 하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내 아버지가 군 복무 중에 받은 기장은 *최다 공격 대통령 기장 (18연대 백골 부대원 전체에 수여됨) *최다 노획 대통령 기장 (상 동) * 6.25 사변 종군 기장 * 유엔 종군기장 *공비 토벌 기장이며 *보통 상이 기장 (1950년 12월 초~1951년 1월 20일까지 5. 6 군 병원에 입원)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할아버지 병간호로 몇 개월을 보냈고, 그 후 선장 시험에 합격해서 일본을 오가는 활어무역선 선장이 되었습니다. 그런 아버지는 나이 60이 넘어 퇴임한 후에야 자신이 받은 훈장의 정장을 받지 못한 것을 깨닫고는, 그때야 손자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려고 훈장을 찾으려고, 나와 함께 1987년 3월 20일 용산 육군 본부를 방문해 정문 면회실에서 상훈과 직원 손영진(전화 번호 446-738)을 만났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금성 화랑 무공 훈장을 받게 된 연유와 당시의 부대 이름과 직속 상관들 관등 성명을 밝히면서 정장을 신청했으며, ‘확인한 후에 집으로 연락해주겠다’라는 담당자 말을 믿고 돌아와 기다렸습니다. 그 후 육본 상훈 과에서 온 편지에 ‘ 기록이 없어 금성화랑 무공 훈장을 수여하지 못합니다.’라는 내용을 읽은 부친은, 매우 상심해 하면서 다시 신청하자고 말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6.25 참전 기장, UN 종군기장, 상이기장, 공비 토벌 기장 4개 정장을 받았으며, 아버지가 속했던 18연대 백골 부대 전 부대원에게 수여된, 최다 공격상, 최다 적의 무기 획득으로 받게 된 대통령 표창 3회에 관해 알았지만, 정작 아버지가 찾으려던 금성 화랑 무공 훈장은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후 아버지는 사업실패 어려움으로 힘들게 지냈고, 나 역시 건축사로 바쁘게 지내다가 아버지의 훈장 찾기를 돕지 못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으며, 아버지께서1993년 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10년 동안 병상에 누워계시다가 2002년 2월에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그런 내 아버지는 매우 정직한 분이며, 애국 애족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목숨을 국가에 바칠 각오를 한 분이고, 용기 있게 실천한 분입니다. 어느 누가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랑하는 어린 아들딸과 젊은 아내를 잘 돌보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랬던 사람이 어찌 최선을 다해 싸우지 않았겠습니까? 더구나 북진 중 정신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갔던 나이 많은 사병이, 회복되자마자 다시 최전방으로 달려가 적과 싸웠으니, 2번이나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했던 용감한 군인 아니었습니까?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란 나(임길성 군번 62011256) 역시 군 복무 중, 편안한 병원 근무 대신에 특전사를 택해 은빛 공수 윙을 달았으며, 조국과 민족을 위해 ‘죽어도 좋습니다.’ 라고 외치며, 부끄럽지 않게 35개월 20일 동안 사병으로 군 복무를 했습니다. 그리고 내 아우(임길주 1953.12.16?)도 해군 하사관으로 7년이 넘도록 군 복무를 했으니, 우리 집 3 부자는 거의 15년 동안 국방의 의무를 마쳤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내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떳떳한 마음으로 잃어버린 훈장을 찾아드리려고 아버지께서 군 복무 중에 찍은 사진을 첨부해서 다시 내 조국 대한민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2018년 6월 25일 임길성 드림
많은 나이에 사병으로 지원 입대한 장교처럼 보이는 내 아버지 (맨 우)
인터넽으로 본 너무나 눈에 익은 금성 화랑 무공 훈장 약장
아아니 이 귀엽고 잘 생긴 녀석이 누구당가 잉? ㅎㅎㅎ (아버지 약장을 달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