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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평창의 의병과 동학 (1) 평창동학
1. 평창의 동학운동
1. 동학의 역사적 의의
동학이란 조선 철종 때인 1,860년 수운(水雲) 최제우가 민간신앙을 바탕으로 유·불·선(도교)의 교리를 합하여 만든 민족적 종교로 근본사상은 `인내천(人乃天)’즉 사람은 곧 하늘과 같고, 사람을 섬기는 것은 하늘을 섬기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신분과 계급을 초월한 모든 인간의 평등과 인도주의를 부르짖었다. 동학이란 서학(천주교)에 대응하여 동토(東土)인 한국의 종교라는 뜻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이러한 동학교단을 매개로 피지배계층인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삼정의 문란 등 폐정개혁(弊政改革)과 신분제 폐지와 토지의 균등분배 등을 요구하며 전국적으로 일어난 반봉건(反封建) 개혁운동이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당시는 일본의 조선침략이 본격화하던 시기였는데, 농민군이 분연히 들고 일어나며 반외세 민족운동으로 국권회복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이로써 동학농민혁명은 이후 3·1 독립운동과 항일무장 투쟁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자주적 국권 수호운동으로써, 오늘날 평등사상과 자유민주화의 지평을 연 근대화와 민족민중운동이었다라며 정부는 2,019년 국무회의에서 매년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의결 ·공포하였다. 따라서“동학농민혁명”의 용어를 사용하며, 비공휴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
2. 동학의 전개양상
1863년 12월 수운 최제우가 대구 장대에서 정학(正學)을 어지럽힌다는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이후 1871년 이필제 에 의해 영해(영덕) 교조신원운동이 주도되었고, 동학교도들은 영해부 관아를 습격하고, 영해부사 이정을 붙잡아 처형했다. 따라서 동학교도들은 토벌군에 의해 이필제와 100 여명이 붙잡혀 처형당한다. 이로써 2 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강원도로 운둔하게 되었다.
최제우의 순도 이후 동학교단은 남접과 북접으로 분파되고, 교단을 이끌던 최시형은 영해교조신원운동 의 실패 이후 강원도에 은거하면서 비밀리에 포교를 하였다. 이후 1870 년대는 강원도를 중심으로 동학을 재건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강원도 동학은 충청과 호남으로 포교가 이어지는 가교 역할도 하였 .
1) 남접 동학봉기의 배경
1864년 (고종 1) 동학 교조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명으로 처형당한 뒤, 그의 죄명을 벗기고 교조의 원을 풀어 줌으로써 종교상의 자유를 얻기 위해 동학 교도들이 1892 년에 교조신원운동 벌인 운동이다. 해월신사(최시형)와 이필제 등 600 여명의 동학도들이 창수면 신기리 병풍바위 아래 모여 조선왕조의 전제정치에 항거해 현재 영해면사무소가 위치한 영해부를 점령 탐관오리 영해부사 이정을 처단하고 곡간을 열어 주위 백성들에 식량과 돈을 나누어 주며 새로운 시대 개혁을 주창한 사건을 말한다. 이필제는 처형되고 동학교도들은 100 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동학 상층부의 순수 종교적인 측면과 하층부 농민들의 반봉건·반외세적 저항이 복합된 운동이다. 이후 제4차 운동은 대중적 시위운동으로 전환되어 서학과 외세를 배격하는 갑오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894년 봄 전봉준 등 남접세력은 동학조직을 이용하여 농민군을 결집시키고 삼정의 문란 등을 이유로 고부민란을 기도하였지만, 동학교단은 남접농민군의 고부민란 무장봉기를 승인하지 않았다.
동학의 최초의 봉기는“영해교조신원운동”으로 동학의 교세를 비약적으로 키워온 제2세 교주 최시형은 영해교조신원운동으로 兵亂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남접농민군의 봉기에 대하여“아직 운이 열리지 않았고, 또 때가 오지 않았다”고 때를 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최시형과 동학교단은 고부 무장봉기를 보고 동학교도들에게 修道者 로서 正業 에 힘쓰며 天時를 기다리기를 요구하였다. 9월에 들어서도 최시형의 우려는 그치지 않고 침탈하는 일이 두드러졌으며, 동조하지 않는 북접 교도들을 상해하는 등 용납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일어났다. 사태는 점차 충청도와 경상도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이에 최시형은 전국의 敎友들이 오로지 각 포 두령의 지시와 단속에 따르도록 하라는 통유문을 발하게 되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2) 고부민란과 1차 동학농민군 봉기 결과
남접에서는 1894년 2월 15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봉기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에 주변의 세력들이 일어난 것이 고부민란으로 동학 2대 교주로부터 기포령이 내려지지 않은 상태로 봉기하였으며, 이 결과 조정은 청에 진압 군대를 요청했다. 청의 군대가 들어오며 텐진조약 에 의해 일본이 군대 파견 사실을 알리자 일본은 자국 영사관과 자국민 보호라는 명분으로 일본군도 조선에 들어온다.
고부농민봉기 이후 조선은 청일 양군의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일본군은 4 월에 들어와서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하여 국왕 고종을 포로로 잡고 조선군대의 무장을 해제하였으며, 다음에는 명성황후를 시해하여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친일개화파 정권을 세워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였다.
이때에 조선군 궁궐 수비대 17명이 전사하였고 60 여명이 부상당하였다. 즉, 고부민란은 피지배층인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반봉건 개혁운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부봉기는 일본의 군대가 다시 조선에 들어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부동학 봉기로 인해서 일본 군대가 다시 들어와 합방으로 이어지는 수모를 당하게 된다. 이러한 일제의 무단 경복궁 점령사건은 일제가 일으킨 국권침탈 사건이었다.
경복궁 침탈사건 10일후 3만의 동학교도들이 모인 보은집회에서 경복궁 침탈소식을 들은 북접교단 산하의 동학 조직을 분격시켰다. 6월 말부터 동학 조직들은 일본세력을 조선 안에서 내몰기 위해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판단하고 전쟁준비에 나섰다. 이로써 해월 최시형은 9월 18일에 총기포령을 내리고 동학농민운동은 전국화로 번져 나가게 되었다.
3) 2차 동학농민군 운동
보은집회에서 항일(抗日)의 반외세에 대항하겠다는(척왜양창) 총 기포령을 내린 동학교주 최시형은 충청세력의 북접을 이끌고 논산에서 남, 북접이 합류하여 1894년 음력 11월 공주 남쪽의 우금치(牛禁峙)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큰 격전을 벌였다. 약 1주일 간 50 여회의 전투에서 농민군은 일본의 신식무기에 다수의 전사자를 낳고 패하였다. 당초 북접은 남접을 '사문난적 '(斯文亂賊)이라고 부르며 경멸했고, 항일이라는 과제 앞에 남접과 북접이 한데 뭉친 것이다.
3. 강원도 동학농민군 운동
강원도에서도 일본의 조선 침략에 항거해 강원과 충북세력에 의해 강릉관아 점령에 이어 홍천과 평창. 정선 등지에서 일본군에 대항해 반봉건·반외세의 동학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그동안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어 고립 또는 분산적이라 소통의 어려움을 겪고있던 강원도의 민중들은 비로소 조직적이고 확실한 지휘계통에 따른 혁명군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강원도 지역은 다른 곳보다도 강한 민보군이 형성되어 있었고 관군의 활약이 역시 대단하여 농민군 토벌부대의 주축을 이루었다.
강원도 동학농민운동은 1894 년 9 월부터 약 3개월간 크게 두 세력에 의해 전개됐다. 홍천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 내륙세력과 하나는 평창, 정선, 영월세력이었다. 이들은 충청도 제천 , 청주세력과 연계하여 강원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연합세력이다 .
4. 강원도의 동학운동 배경
강원도에는 2세 교주 최시형에 의해 동학이 1,869 년부터 전파되기 시작하여 농민들을 중심으로한 동학 조직이 만들어졌다. 강원도는 동학과 매우 밀접하다. 동학이 많은 탄압 속에서도 성장하고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주역이 되기까지 강원도는 동학과 함께 하였다.
최시형은 산악지형의 강원도로 은신하였고 그가 처형을 당할 때까지 35년간 주민들의 도움과 협조 덕에 동학은 유 ·발전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강원도 포덕 이후에 동학이 본격적으로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경기도 지역 등의 평야지대로까지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은 이후 동학농민혁명의 원천이 되었다.
최시형과 유족들이 관군의 추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강원도는 피난처 역할을 해줬고, 최시형은 오랜 꿈이었던 동경대전까지 인제에서 간행할 수 있었다. 이 점이 동학농민혁명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즉 강원도가 없었다면 동학은 존재할 수 없었으며 1,894 년의 동학농민혁명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강원도에서 동학농민 봉기는 최시형의 총기포령에 따라 기포를 하였다. 오랜 기간에 걸쳐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에 저항하던 농민들이 동학에 입도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군이라는 대오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
◎ 강원도에서 동학의 역사적 사건들
● 1864년 3월 수운선생의 제자 이경화가 영월로 귀양, 소밀원의 장 기서에게 첫 포교.
● 1864년 4월 수운선생의 유족 박씨부인 및 장자 세정과 세청, 딸 셋 이 민사엽의 주선으로 정선 문두곡에 이주.
● 1869년 2월 해월선생은 양양지역을 순회 포교.
● 1870년 10월 수운 선생의 유족 강원도 소밀원(영월)으로 이주.
● 1,872년 9월 수운선생 유족, 정선 미천(米川, 싸내)로 이주.
● 1880년 5월 해월 선생, 인제 갑둔리 김현수의 집에서 동경대전(東 經大全) 간행.
● 1893년 보은 장내리에서 전개된 척왜양창의 운동에 강원도 지역 의 동학교인은 관동의 이원팔(李元八), 홍천의 차기석(車基錫) 참가
● 1894년 동학혁명이 삼남지역에서 전개되자 이에 호응하여 강원 남 부 지역을 중심으로 반봉건 반외세 투쟁에 적극 참여.
● 최시형은 관의 눈을 피해 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고산리 송골마을로 피신하였다. 이곳에서 최시형은 1898년 4월 체포되었고 같은 해 6 월 처형되었다.
<출처-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동학학보 37 호 | 199>
5. 평창의 동학과 의병활동
1) 강원도지역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 4일 강릉관아를 점령하였다.
9월 5일 이들은“삼정(三政)의 폐단을 개혁하고, 보국안민 한다”는 방문(榜文)을 내걸었으며, 농민군을 지휘한 사람은 평창의 전좌수 이치택, 지관 권모(權某), 진사 박재회, 영월 나(羅) 교장(敎長), 삼척 황 찰방(察訪), 정선 여량역의 지왈길(池曰吉, 강릉 대화면의 김상오·공계정·김순길·손영팔 등이었다.
2) 이들은 다음날 영동 일대의 최대 지주이자 대표적인 사족가문이었 던 강릉부 정동면 배다리(船橋)의 전 승지(承旨) 이회원(李會源)의 집을 습격하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9월 7일 선교장의 이회원은 곧바로 농민군들이 점심과 저녁거리로 쓸 백미 100 석과 돈 300 냥을 보내 농민군을 안심시키는 한편 각 마을로 사람을 보내 반농민군을 결집시켰다.
3) 점막들과 관아 건물에 나누어 숙식하고 있던 농민군은 비가 몹시 많이 내리는 날 밤 8 시경 도사 최윤정이 지휘하는 8 개 읍의 대소민 (大小民) 4~5 천명의 기습을 받고 강릉관아에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들은 20 여명이 현장에서 전사하는 등 많은 희생자를 내었으며, 총 7 자루, 창 157 자루, 말 3필 등을 빼앗긴 채 대관령을 넘어 평창으로 물러났다.
4) 1894 년 10월 20일경이 되자 수천 명으로 불어난 영월·평창·제천 ·청풍지역의 농민군 수천 명이 평창으로 몰려들었다.「동비토론」에 따르면 이 때 정선읍에 3 천명, 평창·후평에 1 천명의 농민군이 모여 있었다. 정선 군수는 도주하였으며, 농민군들은 이방의 머리를 베고, 9 월 8 일 강릉에서 공격당한 일을 복수하기 위해 다시 강릉으로 쳐들어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이 무렵 정선 지역의 농민군을 이끈것은 청풍의 성두환 (成斗煥)과 유도원(劉道元)이었다.
5) 또 같은 무렵 정선 여량에서도 지왈길·이중집 등이 농민군을 결집하고 이웃한 강릉부 임계 지역의 부자들을 잡아들여 재물을 빼앗아 군량에 사용하였다. 정선·평창지역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강릉에서는 10 월 22 일 전 중군 이진석이 이끄는 관군과 민보군을 보냈고, 11 월 1 일에는 감영에서 감영중군과 관군을 내려 보냈으며, 11 월 3 일에는 감영토포사가 인솔하는 관군과 이시모리(石森) 대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2 개 중대가 평창 운교참(云交站)에 도착하였다.
6) 이들은 11월 5일 평창 후평리의 농민군을 진압한 다음 정선으로 향하였다. 11월 6일 강릉 민보군 중군 이진석이 이끄는 부대는 여량으로 쳐들어가 10 여명을 죽이고 접사(接司) 이중집 등 5 명을 체포하여 이 가운데 이중집·임순철·김윤언 등 3 명은 강릉으로 압송되었다가, 11 월 22일 포살되었다.
7) 일본군과 감영군은 곧장 정선으로 공격해 들어갔다. 녹도전투는 바로 이때 정선의 농민군과 일본군 및 감영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녹도 전투의 상세한 상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많은수의 농민군이 전사하였고, 체포된 농민군들은 녹도 둔치의 소나무 숲에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많은 수의 농민군이 전사하였고, 체포된 농민군들은 녹도 둔치의 소나무 숲에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6.평창읍 후평리 전투
(출처 ; 한국데이타 베이스 / 동학농민혁명사일지 )
평창 후평 등지에서 이시모리(石森)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 2 개 중대 및 관군과 동학농민군 1만 여명 사이에 2 시간 넘게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접주 이문보를 비롯하여 동학농민군 백여 명이 전사하였다 .
● 1894 년 12 월 1 일 / 1894 년 11 월 05 일(음) 평창 후평 등지에서 이시모리(石森)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 2 개 중대 및 관군과 동학농민군 1 만여 명 사이에 2 시간 넘게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접주 이문보를 비롯하여 동학농민군 백여 명이 전사하였다 (「東匪討論」『叢書 』12, 185 쪽).
● 봉평 등지에서 동학농민군을 공격하여 지도자급 인물 7 명을 체포하여 효수한 양양의 소모사 종사관 유학 이석범이 정선 , 평창 등지에 동학농민군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민보군 300 명을 이끌고 평창, 정선 등지로 갔다 (양 )(「東匪討論 」『叢書 』12, 157-158 쪽 ).
● 제 18 대대 [1 중대 ]가 강원도 평창에 머물러 있었다. 1894 년 12 월 10 일 / 1894 년 11 월 14 일(음).
● 차기석과 연계하여 봉평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 윤태열·이창문 ·김대영·김희열·용하경·오순영·이화규 등 7 명이 봉평의 강위서 (姜渭西)에게 체포되었다 (「臨瀛討匪小錄」『叢書 』12, 261-262쪽).
1)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인 1894 년 11 월 평창지역 농민군과 일본 군 및 관군·민보군의 연합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위치는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후평리 일대이다 .
2) 평창,정선지역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11 월 1 일 감영에서는 감영 중군을 내려 보냈으며, 11 월 3 일에는 감영토포사가 이끄는 관군과 이시모리(石森) 대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2 개 중대가 평창 운교참 (云交站)에 도착하였다 .
3) 이들은 11 월 5 일 양양의 소모사 종사관 유학 이석범이 이끄는 민보군 등과 합세하여 평창 후평리의 농민군 진압에 나섰다. 관군측의 추산에 따르면 당시 후평리에 결집해 있던 농민군의 수는 1 만 여 명에 달하였다. 일본군과 관군·민보군의 공격을 받은 농민군은 100 여 명이 전사하고 접주 이문보 등 5 명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후 평창의 농민군은 성두환이 정선으로 후퇴하는 등 평창·정선일대와 삼척지역으로 후퇴하여 12 월까지도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후평리 전투 이후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어 갔다.
<출처 ;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동학학회 37 | 209>
평창의 동학농민군 활동은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백서』,2009의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동학특별법’)이 2004 년 3 월 5 일 제정되었다. 동학특별법에 따라 정부기구로서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이하‘심의위원회’)가 2004년 9월 구성되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유족들에 대한 명예회복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심의위원회가 등록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3,644 명에 달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내고 심의위원회는 2009 년 12 월 활동을 종료하였다. 따라서 현재 공식적으로 확인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총 3,644 명인 것이다 . 이는 『 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백서 』(2009)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백서 』(2009)에 따르면 강원지역에서는 총 76 명의 동학농민군이 확인된다. 지역별로 보면 강릉 8 명, 봉평 12 명, 원주 6 명, 인제 2 명, 양구 1 명, 정선 4명, 평창 6 명, 홍천 36 명, 횡성 1 명으로 홍천에서 가장 많은 동학농민군이 확인된다.
7. 평창 봉평의 사리평 전투
<출처 ; 동학학보 제 37 호 . 200. 평창 사리평 전적지 >
1)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인 1894 년 10 월 말경 봉평지역 농민군과 포수들로 구성된 이 지역의 민보군간에 전투가 벌어졌던 곳으로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원길리 767-1, 767-2, 773, 774 번지 일대이다.
2) 봉평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북접 교단의 기포령이 내려진 이후인 9월말부터였다. 홍천의 차기석 휘하에 있던 윤태열 등이 농민군을 모으고 창고 옆에 목채를 세워 도소를 마련한 다음 각 촌으로 전령을 보내 군량등을 거두어 들였다.
강릉부사 이회원 (李會源)은 10 월 22 일에 군정을 징발하여 중군(中軍) 출신 이진석(李震錫) 등에게 관군과 민보군 150 명을 인솔하여 봉평의 농민군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3) 10 월 26 일 이들이 봉평에 도착하자 이미 봉평에 살던 강위서가 민보군을 모집하고 농민군을 공격하여 윤태열 등 13 명을 체포해두고 있었다. 중군 이진석은 이 가운데 봉평에서 체포되었던 윤태열 과 이창문·김대영·김희열·용하경·오순영·이화규 등 7 명을 포살하였다. 11 월 2 일에도 농민군을 추격하여 정창해를 총으로 쏘아 죽였고, 안영보와 김순복 2 명을 체포하였다. 이에 대해 홍천의 차기석이 봉평을 쳐들어가 도륙을 내려한다는 소문이 돌자 관군과 민보군은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게 된다.
4) 평창과 정선 등지의 농민군 진압이 시급해지자 관에서는 홍천 농민군에 대한 공격은 강위서 등에게 맡기고 이진석이 이끌던 군병은 대화 로 가서 감영의 중군이 이끌고 온 관군과 합친 후 11 월 3 일에 도착한 일본군과 합세하여 11 월 5 일 평창 후평동에서 농민군을 진압하고 다음 날 정선으로 가서 정선읍내와 여량 등지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5) 봉평에 남은 민보군 지휘자인 포수대장 강위서는 11 월 6 일경 신배령을 넘어 홍천 내면으로 들어갔다가 차기석 부대의 기습을 받고 봉평 으로 패주하였다. 11 월 10 일경 다시 홍천으로 넘어가서 양양에서 온 이석범, 홍천 유생 허경이 이끄는 민보군 등과 함께 내면 일대에서 차기석이 이끌던 농민군을 진압한 후 11 월 중순 경 다시 봉평으로 돌아와 흥정리 등지의 농민군을 공격하여 임정호 등 38 명의 농민군을 포살하고 100 여 명을 체포하였다.
6) 봉평면 무이리에 살던 이광섭 옹(1990 년 당시 72 세 )이 그의 조부 (이명화, 1864 년생 )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사리평 전투는 창동 북 쪽 회령봉과 흥정산 일대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 600 여 명과 창동 쪽에 병력을 집결해 있던 관군및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였다고 하였다. 전투 상황에 대해서도 일본군이 총을 쏘자 화승총 2 자루 밖에 없던 농민군들이 놀라 구목령을 넘어 홍천 서석 방면과 횡성의 태기산 쪽으로 도주한 것으로 기억하였다. 그러나 관군이나 일본군 , 민보군이 남긴 자료에는 사리평 전투에 대한 언급이 없다. 정황상 사리평 전투는 이진석이 이끄는 강릉의 민보군이 도착하기 전 강위서가 지휘하던 포군과 봉평의 농민군 사이에 벌어진 격전인 것으로 보인다.
(필자 주 : 화승총은 알명 조총으로 유효사거리 20m 라 하며 약실에 화약을 넣고 불을 붙여서 쏘기에 비오는 날은 사용하지 못함)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01)
8. 동학 농민혁명군의 평창항쟁 유적지
◎ 봉평 사리평 전적지
• 사리평 전적지 ; 동학농민혁명 당시인 1894 년 10 월 말경 봉평지역
동학농민군과 포수들로 구성된 이 지역의 민보군 간에 전투가 벌어 졌던 곳
• 출처 ;『동비토론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 12),『임영토비소록 』('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 12) 등에 이 지역 동학농민군과 민보군의 활 동 및 전투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전투지 ;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원길리 767-1, 767-2, 773, 774 번지 일대 >
• 이광섭옹 (1990 년 당시 72 세 )이 자신의 조부 (1864 년생 )로부터 전해들은 사리평 전투상황을 증언하였다.
(※ 주 : 증언에서는 성능좋은 일제 총에 농민군 60 여명 정도가 사살 되었으며 농민군은 화승총 2 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며 증언자는 사리 평 야산 속에 숨어서 현장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 현재 기념시설이나 표지석이 없다 .
< 전투지 ; 봉평면 사리평 >
◎ 평창읍 후평리 전적지
< 전투지 ; 평창군 평창읍 후평리 일대 >
• 동학농민혁명
전순길은 1894년 9월 4일 영월, 평창, 정선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東匪討論』, 189시인 1894년 11월 평창지역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및 관군,민보군의 연합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던 곳.
•『동비토론,『임영토비소록』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현재 기념시설이나 표지석이 없다.
* 이 원 팔(李元八):1894 년 6 월 강원도 평창에서 동학에 입교하여 관동대접주 (關東大接主)로서 같은 해 8 월 충청도 보은에서 최시형 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900 년 전라도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4월 처형됨
발행기관 : 동학학회 (재편집)
간행물 : 동학학보 , 37권 0호 - 발행년도 : 2015 – 페이지 : pp.73-122 ( 총 50 페이지 )
◎ 평창 동학농민군 활동
<226 | 동학학보 제37호.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29>에서 평창 동학농민군 발췌>
○ 김상오(金相五)
김상오(異名: 尙五)는 접장으로서 1894년 9월 4일 영월, 평창, 정선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東匪討論』,1895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398~400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37~140쪽)
○ 공계정(孔啓正)
공계정은 1894년 9월 4일 영월, 평창, 정선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東匪討論』, 1895
『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398~400쪽
『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137~140쪽)
○ 전순길(全順吉)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398~400쪽>
『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137~140쪽)
○ 손영팔(孫永八)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15
손영팔은 1894년 9월 )4일 영월, 평창, 정선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2008, 398~400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37~140쪽)
○ 박재회(朴載會)
박재회는 1894년 9월 4일 강릉, 영월, 정선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398~400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137~140쪽)
○ 이치택(李致澤)
이치택은 1894년 9월 4일 강릉, 영월, 정선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릉부 관아를 점령하였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2008,398~400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137~140쪽)
○ 윤태열(尹泰烈)
윤태열은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
형되었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2~404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43~145,202~206쪽)
○ 이창문(李昌文)
이창문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2~404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43~145,202~206쪽)
○ 김대영(金大永)
김대영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 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匪討論』,1895,
『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2~404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강원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와 동학농민군 | 217 1996, 143~145쪽, 202~206쪽)
○ 김희열(金喜烈)
김희열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匪討論』,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2~404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史芸硏究所,1996, 143~145쪽, 202~206쪽)
○ 용하경(龍河京)
용하경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匪討論』,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2~404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43~145쪽, 202~206
○ 오순영(吳順永)
오순영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匪討論』,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2~404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43~145쪽, 202~206
○ 이화규(李和奎)
이화규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26일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 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匪討論』,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2~404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218 | 동학학보 제37 1996, 143~145쪽, 202~206쪽)
○ 정창해(鄭昌海)
정창해(異名 :丁昌海)는 동학농민군 지도자 윤태열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하순경 강원도 봉평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匪討論』,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4~405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45~147쪽, 202~206
○ 안영보(安永甫)
안영보는 동생 안영달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하순경 강원도 봉평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었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 2008, 404~405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45~147쪽, 202~206
○ 안영달(安永達)
안영달은 형 안영보와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하순경 강원도 봉평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었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4~405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45~147쪽, 202~206
○ 김순복(金順卜)
김순복은 아들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년 10월 하순
경. 강원도 봉평에서 민보군에게 체포되었다.
『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04~405쪽, 441~443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史芸硏究所, 1996, 145~147,202~206쪽)
○ 오덕보(吳德甫)
오덕보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1894년 8월 강원도 평창에서 활동하였다.
『( 東匪討論』, 1895,
『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
회, 2008, 438~439쪽, 439~440쪽, 448~449쪽, 450쪽
『;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199쪽, 199~200쪽, 214~215쪽, 216~217쪽)
○ 임정호(林正浩)
임정호는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894
년 11월 강원도 봉평에서 강위서가 이끄는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東匪討論』,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
회,2008, 441~446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202~211쪽)
○ 박재호(朴在浩)
박재호는 강원도 강릉 출신으로 진사였으나 강원도 평창으로 이거한
뒤1894년 동학농민군 지도자가 되어 군자금과 군수품을 모으는 활동을 하였다.
『臨瀛討匪小錄』, 이회원, 1895,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475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249쪽.
○ 조원중(趙元中)
조원중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동학농민군 윤태열 등과 함께 군사를모으고 군량, 군물을 마련하는 활동을 하였다.
『臨瀛討匪小錄』, 이회원, 1895,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4,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2008, 482쪽
『東學農民戰爭史料叢書』12, 史芸硏究所, 1996, 256쪽)
○ 박규협(朴圭夾)
박규협은 1894년 강원도 평창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司法稟報』5(1899~1900), 亞細亞文化社, 1988, 447~448쪽)
○ 이원팔(李元八)
이원팔(異名 :關東)은 1894년 6월 강원도 평창에서 동학에 입교하여 관동대접주(關東大接主)로서 같은 해 8월 충청도 보은에서 최시형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1900년 전라도에서 체포되어 같은 해 4월 처형되었다.
『( 司法稟報』5(1899~1900), 亞細亞文化社, 1988, 447~4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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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과 의병에 대한 이해>
(위 본문의 『평창역사의 이해』에 기록한 역사이며, 에에 대하여 별도로 필자의 이해를 밝힙니다.)
동학은 봉기 또는 동학운동으로 표현하였는데 2019년 국무총리는 "동학농민혁명"으로 비공휴 국경일로 제정하였다. 여기에서 혁명이란 단어의 용어적 사용 범위는 아니다.
혁명(革命)이란 기존의 사회 체제를 변혁하기 위하여, 이제까지 국가 권력을 장악하였던 계층을 대신하여 그 권력을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탈취하는 권력 교체의 형식 . 즉 종래의 관습 , 제도 등을 단번에 깨뜨리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동학은 반 봉건 ·반외세적 저항이 복합된 운동이다. .
( 동학 끝)
********************
다음 글은 의병전투 최초로 제천과 평창의병이 충주전투에서 승리하는 평창의병의 우리가 몰랐던 많은 사실들을 약 2~30곳의 출처에서 발췌하여 재분류한 작업으로 쉽지 않은 작업으로 여기에는 평창사람들의 義와 또한 의병 제일의 勇의 이야기도 발굴하였습니다.
우선 다음장에서는 책은 정부 예산으로 하기에 동학이 혁명도 아니고 전봉준은 대원군과 결탁한 것이고 정읍의 고부 동학은 민란이며 동학운동의 원조는 영해(영덕)에서 교조敎祖 (최제우의 억울한 사형)에 대한 신원운동이란 점과 역사에서는 동학운동 단편적으로 배우지만 분명 역사는 원인, 경과 그리고 받드시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동학운동의 결과는 일본군이 두번째로 조선에 들어와 민비 시해후 바로 합일합방으로 가게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합방은 달리 끈어서 배우며 임오군란때나 그후 10년후의 동학때도 미치관이들 민비와 고종은 자기 안위만 생각하다 나라를 팔아먹고 돈방석에 앉게 되는데 두어명의 역사학자는 지금도 고종을 현명한 군주로 논문을 쓰고 있다.
구한말의 역사는 일본과의 양자간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인도 태평양시대는 2차 그레이트 게임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그레이트 게임은 백년전에 식민지 제국사의 역사로 그레이트의 게임의 마지막으로 세계속에 고문관 고종의 미치광이 리사이틀로 일본에 식민지가 되며 끝나는데 이 역사는 이미 썼지만 다음 한국사에서 다루기로 하며 분명 동학에 청나라 군대의 청병을 조정은 극구 말렸으나 고종과 민미는 자신의 안위로 임오군란에 이어 두번째로 청군을 요청하자 청과 일본은 임오군란에서 각자 돌아가며 텐진조약에서 어느나라 군대라도 다시 조선에 들어갈때는 상대국에 알린다는 조항으로 일본은 조선에 들어오게 되며 결과적으로 동학은 일본군이 다시 들어오며 식민지로 가는 결과를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는 그레이트 게임과 조선 근대사 에서 소상하게 기술합니다.
다음장에선 책에서 논고하지 못한 동학에 대한 여러 문제들을 기술합니다.
현제 우리나라는 좌우의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학회는 일제 식민의 잔제로 일제가 왜곡한 역사만을 주장하여 우리는 모두 고려말 이전의 삼국사는 모두 잘못배웠으며 어느 학자는 고조선사 책을 출판하니 연대 늙은 박사놈이 감사원에댜가 예산 회수하라 신고하고, 언 박사는 고조선사를 저연구하기 위해 북한의 "이지린" 학자의 역사책을 봤다고 국정원에 신고해 조서를 꾸미는 등 민족 중앙학 연구소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제합니다.
저는 <평창의 역사이해> 책에서 평창의 워원은 공자의 고향 곡부가 창평현이란 점은 고려사에 고려시대의 창평현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썼다가 특히 송호정 ( 자신은 고조선 1호 박사라 하며 고조선을 부정하는 자)의 제자들에 이러한 점이 보이면 바로 신고하고 소를 걸고 사달나기 때문에 바른 역사를 쓸 수 없기에 동학도 그런대로 무난하게 서술하였던 것입니다. 다음 의병사도 그 자체는 숭고하지만 전체적인 해석은 다음에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