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역사의 서문
미셸 푸코/ 김부용 역
파스칼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광기에 걸려 있다. 따라서 미치지 않았다는 것은 아마도 미쳤다는 것의 또다른 형태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가일기}에서, “인간은 자신의 이웃을 감금함으로써 자신의 건전성을 확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광기라고 하는 또다른 형태, 즉 광기라는 타자성의 역사를 기술해야만 한다. 바로 이 타자성을 통해서 인간은 지배적인 이성의 작용 속에서 자신의 이웃을 감금하고, 비광기라는 냉혹한 언어를 통해서 서로를 인지하고 서로 교통한다. 또한 우리는 이 언어가 진리의 영역에 확실히 정착하기 전에, 이 언어와 이성의 공모의 순간을 규정해야 한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광기의 진행과정에 있어서의 영점(Zero point)에로 복귀해야 한다. 그 지점에서는 광기는 무차별적인 미분화된 경험이었으며, 분리 자체에 대한 아직 미분화된 경험이었다. 우리는 광기의 궤도에서부터 출발하여 이 ‘타자성의 형태’를 기술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타자성의 형태는 광기와 이성을 각각 한편에 두고서 각각의 활동에 대해서 타자성으로, 즉 일체의 교통의 밖에 있는 사물로, 서로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아 듣지 못하는 것으로, 나아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규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편안치 못한 영역이다. 이 영역을 개발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원한 진리라고 하는 편의를 포기해야 하고 우리 자신이 광기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는 것에 현혹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심리학의 어떤 개념도, 심지어는 그리고 특히 회고라고 하는 내적 과정에 있어서는 구성적인 역할을 할 수 없다. 본질적인 것은 광기를 구분하는 행위이다. 일단 이 구분이 이루어진 후 조용히 복원됨으로써 체계화된 과학은 어떤 본질적인 의미도 갖지 못한다. 원초적인 것은 이성과비이성의 거리를 확립시키는 단절의 지점이다. 이 지점은 이성이 비이성으로부터 광기, 질병, 범죄라는 비이성의 진리를 박탈함으로써 비이성을 명백하게 정복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나 승리에 대한 권리를 전제함이 없이, 이 원초적인 투쟁에 관해서 기술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결론이라든가 진리에로의 피난과 같은 것은 모두 유보해 두고, 역사 속에서 재검토된 투쟁과 관련된 활동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이성과 이성이 아닌 것을 분리시키는 작용, 양자 간의 거리, 양자 사이에 제정된 공간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위해서 이성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주장하는 것의 실현에는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에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이성의 인간과 비이성의 인간이 서로 떨어져 작용해도 여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은 영역을 규정할 수 있다. 이 영역에서는 매우 조야한 초기의 언어를 통해서 과학의 언어를 예견하면서 이성과 비이성 간에 불화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 대화의 과정에서 양자는 여전히 서로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일시적으로 검증된다. 여기서 광기와 비광기, 이성과 비이성은 서로 교묘히 얽혀들며, 존재하지 않는 그 순간에도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서로를 분리시키는 상호교통을 통해서 서로를 위해서 그리고 서로에 대해서 존재하게 된다.
고요한 정신병의 세계에서는 근대인은 더 이상 광인과 교통할 수 없다. 한편에서는 이성의 인간은 광기에 정신과 의사를 파견하고, 그럼으로써 질병이라는 추상적 보편성을 통해서만 관계를 정당화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광기의 인간은 똑같이 추상적인 이성의 매개에 의해서만 사회와 교통한다. 여기서 이성은 질서, 물리적, 도덕적 제약과 집단으로부터의 익명성의 압력, 일치에 대한 요구로서 규정된다. 이성의 인간과 광기의 인간 사이에는 공통의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18세기 말 광기를 정신병으로 규정함으로써 대화는 명백히 단절되었고 양자의 분리는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그럼으로써 광기와 이성 사이의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구체적인 구문론도, 더듬거리는 불완전한 단어들도 침묵 속으로 사라져갔다. 광기에 대한 이성의 독백에 불과한 정신분석학의 언어는 그와 같은 침묵에 근거해서만 확립될 수 있었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언어의 역사가 아니라 이러한 침묵의 고고학을 기술하고자 한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휘브리스(방탕함)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했었다. 그것은 단순한 비난의 것은 아니었다. 트라시마커스나 칼리끌레스의 존재가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한다. 비록 그들의 언어는 이미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에 가리워진 채 우리에게 드러났었다 할지라도, 그러나 그리스어의 로고스는 어떤 반의어도 갖지 않았다.
증세가 시작된 이래로 유럽인들은 무차별적으로 광기, 정신분열, 비건전성이라고 불리워진 것과 모종의 관계를 갖고 있다. 아마도 서구의 이성은 이 모호한 현존 덕분에 그 심층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소크라테스적 사유의 소포스우이게(정신의 평정)가 휘브리스의 위협에 기여한 것과 같다. 어쨌든 이성과 광기의 연계는 서구문화에 대해서 원초성의 한 차원을 형성한다. 이러한 연계는 이미 이에로니무스 보쉬 이전부터 오랫동안 서구문화의 동반자였으며, 니체와 아르토 이후에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성의 언어 심층에 있는 이 관계는 무엇인가? 이성의 수평적인 진행을 따라 이성을 탐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럽문화를 자기 자신이 아닌 것과 대면시키고, 유럽문화 고유의 혼란을 통해서 유럽문화의 영역을 확립시키는 지속적인 수직성을 그때 그때마다 추적하고자 하는 탐문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 지식의 역사도 역사 자체도 아닌 어떤 영역에로 우리는 들어서야 하는가? 지식의 목적론에 의해서 통제되는 것도 아니며, 합리적인 인과론에 의해서 통제되는 것도 아닌----왜냐하면 원인은 이미 단절 이후의 것이므로----어떤 영역에로 우리는 진입해야 하는가?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문화의 동일성이 아니라 문화의 한계가 문제가 되는 영역이다.
고전주의 시대----윌리스에서 피넬에 이르는, 라신느의 오르스테가 일으키는 광포한 발작에서 사드의 줄리에트와 고야의 퀸타 델 소르도(광인의 집)에 이르는----는 광기와 이성 사이의 교통이 시대의 언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바로 그 시대이다. 광기의 역사 속에서 발생한 두 사건이 똑같이 분명하게 이 변화를 지적하고 있다: 1657년 오삐딸 제네랄(구빈원)의 탄생과 ‘빈민의 대감금’ 그리고 1794년 비세트로에서의 수감자의 해방이 그것이다. 이 두 개의 독창적이고 대칭적인 사건들 사이에서 그 애매성 때문에 의학사가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 발생했다. 혹자는 그것을 절대주의적 체제에서의 맹목적인 억압으로, 혹자는 과학과 순례를 통해서 광기를 그 실증적인 진리 속에서 발견해낸 점진적인 과정으로 표현한다. 사실상 이러한 전도된 의미들의 심층에서 애매성을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애매성을 규정하는 하나의 구조가 형성되고 있었다. 이 구조에 의해서 우리는 광기에 대한 중세의인간주의적 경험이 광기를 정신병으로 국한시키는 오늘날의 경험으로 전이한 것을 설명할 수 있다. 중세와 르네상스 때까지 인간의 광기에 대한 투쟁은 세계의 비밀스러운 힘을 직면하게 만드는 하나의 투쟁이었다. 광기의 경험은 타락, 신의 의지, 야수, 변태의 이미지들로,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인식의 비밀들로 가려져 있다. 우리 시대의 경우 광기에 대한 경험은 광기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망각하고 있는 지식체 속에서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들이 진행하는 동안 사상들도, 실증적인 등장인물도 갖지 못한 세계에 하나의 위대한 부동의 구조----무성의 제도, 논평이 없는 행위, 즉각적인 지식으로서---를 드러내는 일종의 무언의 간명성을 통해서 하나의 변환이 일어났다: 이 부동의 구조는 드라마도 지식도 아니다. 이것은 역사를 수립시키는 동시에 배격하는 비극적인 범주 속에 역사가 고정되는 지점이다.
* 이 책은 김부용 역의 {광기의 역사}(인간사랑, 1991년)이며, 독자 여러분들 꼭 이 책을 구입해서 정독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