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행복
천영필
조건있는 행복이 있는가?
돈이 있어야 행복한가?
날개 같은 옷이 있어야 행복한가?
먹을 게 있어야 행복한가?
집이 있어야 행복한가?
명예가 있어야 행복한가?
건강해야 행복한가?
시간이 많아야 행복한가?
친구가 있어야 행복한가?
아니다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니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
내가 행복해야 행복하다
그렇다 그렇다
행복은 지금 부터 가는 길
반야바라밀다,수행의 길
그 자체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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悟道
천영필
천상천하유아독존
세상이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는게 아니다
내 안에 세상이 있는 거다
불이법이 견성법 이다
어쩌다 인연으로
이 세상에 내가 왔다가
바람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살다가
지수화풍 인연따라
자연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몸, 마음이 해탈하는 게 다.
내가 곧 세상이요
내가 전부요
내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습니다
내 몸뚱이랄 것,
五蘊도 없고
내 마음이랄 것,
意識도 없다
이렇게 통찰할 때 중도요
苦에서 해탈
무지, 無明에서 탈출합니다
자등명 법등명으로 존재합니다
세상의 중심에 나를 두고 통찰해야
사성제가 팔정도가 수련 됩니다
이게 中道論입니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는다는건 무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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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으로 보면 모습으로
분별하는 것이고,
모습을 모습 아니게 보면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다.
분별하면 둘로 나누는 것이고,
분별하지 않으면
둘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
마음을 모습으로 보면
이법(二法)이고,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불이법(不二法)이다.
모습으로 보면 어떤 모습이 있고,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모습 있음이
곧 모습 없음이다.
마음을 모습으로 보면 마음이 있고,
마음을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마음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마음을 모습으로 보면
망상이고,
마음을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망상도 아니고
실상도 아니다.
마음을 모습으로 보면
상(相)이라 하고,
마음을 모습으로 보지 않으면
성(性)이라 한다.
마음은 본래 하나이다.
본래 하나인 마음을
상(相)과 성(性)으로 나누어 말하니,
비유하면
상(相)은 물결을 보는 것이고
성(性)은 물을 보는 것이지만
물결과 물은 둘이 아니다.
모습은 모습이 아니라는 말은
연필은 연필이 아니라는 말처럼
논리적으로 무의미한 말이니,
분별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분별이 끊어졌으니
불가사의(不可思議)이고
불이중도(不二中道)이다.
불가사의한 불이중도의 법
즉 불이법(不二法)을 보는 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견성에서는
분별이 끊어지고,
마음이라고 할 만한
물건도 없으니
무심(無心)이고,
얻을 만한 것이 없다.
마음이라고 할
무엇이 있고
얻을 것이 있다면,
곧 분별이고 이법(二法)이다.
육조혜능은 “이법(二法)이기 때문에
불법(佛法)이 아니다.
불법은 불이법(不二法)이다.”라고
명백하게 선언하고서,
다시 말하기를
“불성(佛性)을 명백히 보는 것이
곧 불법이 불이법(不二法)인 것이다. …
불성은 선하지도 않고
선하지 않지도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불이(不二)라고 한다.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를
범부는 둘로 보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 자성(自性)에
둘이 없음을 밝게 안다.
둘이 없는 자성(自性)이
곧 불성(佛性)이다.”라고
밝혔다.
불이법이므로,
있다거나 없다고 분별할 수 없고,
취하거나 버릴 수 없고,
이것이라거나 저것이라고
나눌 수 없고,
부처니 중생이니 하고
이름 붙일 수 없고,
알거나 모른다고 할 수 없고,
얻거나 잃을 수 없고,
맞거나 틀리다고 할 수 없고,
옳거나 그르다고 할 수 없고,
좋거나 나쁘다고 할 수 없고,
어리석다거나 깨달았다고 할 수 없고,
머물 곳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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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멸도
['고통임을 알고
고통의 원인이
집착임을 깨달아
집착에 의해
일어난 번뇌를 없애
열반에 이른다'는
붓다 말씀의 진수
4가지 성스러운 진리]
그것 마저도없다
[無苦集滅道]
불교는 자기를 불태운다
자기를 죽인다
숭고한 자기 희생이다
무아이기에
부처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부처님도
'나를 따르지 마라
아공이고 법공이기에
추종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마음의 등불을 밝히고
진리의 등불을 따라라
진리로부터 자유로와 지고
금지를 금지해야 진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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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ㅡ둑카ㅡ 불만족스러움
이는 인간 또한 마찬가지라서,
고정된 '나'는 존재하지 않고
색수상행식의 오온이
무상하게 끊임 없이 변한다.
'무아'라고 하는 한문식 번역을 보면
'나'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단멸론적인 시각을 가지기 쉬운데,
원래의 팔리/산스크리트어로는
anatta/anatman이라고 하여
'아트만'이라고 불리는
힌두교 교리의
'절대적/고정적, 영원한/불변하는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알고 보면 받아들이기
훨씬 더 쉬운 내용이다.
하지만 의외로 우리가 가지고 사는
'아상'은 뿌리가 깊어
'나'가 존재한다는 상견이나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단견에 빠지기 쉽다.
이 두 사견을 초월하는 것이
중도.
이렇게 계속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에,
'이것이 항상 고정되어 같았으면
좋겠어'라거나
'인과에 의해
어쩔 수 없는 것이어도
겪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좋고 싫음으로
매달리거나 집착하면
고통이 생긴다는 것이
일체개고의 의미다.
사실 이 '고' 또한
팔리어로는 dukkha라고
불리는 것으로,
더 정확한 의미는
'불만족스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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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이걸 몰랐네 [무명 無明]
천영필
알아차림[無無明]
아, 맞다. 이걸몰랐네. 이제야 알았다.
머리가 환해지며 대명천지가 확 달려 들어 왔다
깨닫는 순간이다
아주 찰나다
부처님은 *활등 처럼 말씀 하시고
조사는 활줄 처럼 말씀하신다
짧지 않은 시간
반야심경을사경하면서 느껴 본 거다
불교란 *해탈을 목표하는 가르킴,
나를,
내 내면을 관찰[洞察]하면서
지혜를 끌어내고
넓히는 실용, 실천덕목을 수행
[般若波羅蜜多]해야 한다
중생도 보살도 조사도 부처도
나와 같은 수행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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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자의 어리석음에 3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의 근기(根機: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능력)에 3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자가 좋아하는 것에 3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의 수행자의 어리석음의 3가지 유형과 해당 유형의 수행자들에 대해 고타마 붓다가 가르친 법체계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마음작용[心所]에 어리석어 마음작용을 모두 나[我]라고 집착하는 유형:
마음작용을 수(受: 지각) · 상(想: 표상) · 행(行: 思라고도 한다, 욕구와 의지)으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하는 5온을 설하였다.
유독 물질[色]에 어리석어 물질을 나[我]라고 집착하는 유형:
물질을 5근(五根)과 5경(五境)으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하는 12처를 설하였다.
물질[色]과 마음[心: 여기서는, 마음과 마음작용을 합한 것] 모두에 어리석어 물질과 마음(여기서는, 마음과 마음작용을 합한 것)의 개별 또는 화합체를 나[我]라고 집착하는 유형:
물질과 마음(여기서는, 마음과 마음작용을 합한 것)을 각각 10가지와 8가지로 나누어 상세히 설명하는 18계를 설하였다.
두 번째의 수행자의 근기(根機: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의 3가지 유형과 해당 유형의 수행자들에 대해 고타마 붓다가 가르친 법체계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예리한[利] 근기의 유형: 5온을 설하였다.
중간[中] 근기의 유형: 12처를 설하였다.
둔중한[鈍] 근기의 유형: 18계를 설하였다.
세 번째의 수행자가 좋아하는 것의 3가지 유형과 해당 유형의 수행자들에 대해 고타마 붓다가 가르친 법체계는 다음과 같다고 한다.
간략한 글[略文]을 좋아하는 유형: 5온을 설하였다.
중간의 글[中文]을 좋아하는 유형: 12처를 설하였다.
자세한 글[廣文]을 좋아하는 유형: 18계를 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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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을 목표로 수행
환멸문 ㅡ12 연기의 역관
12연기는
보통 거꾸로 가면서
설명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이에 따라 원인과 결과를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늙고 죽는 것의 전제가 되는 것은
태어남이다.
우선 태어나야지 이후에
늙고 죽기 때문이다. ㅡ生
태어남의 전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있음이다.
뭔가가 있어야
태어나기 때문이다.ㅡ有
있음의 전제가 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해서 상기하는
집착이다.
그것을 잊지 않고
계속해서 반복하여
확인하는
그 '집착'에서 '
있음'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없다'면 집착할 이유도 없다.ㅡ집착
집착의 전제가 되는 것은 원함이다.
어떤 것에 대한 갈증이야말로
'집착'의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ㅡ원함
원함의 전제되는 것은 느낌이다.
좋은 느낌을 받으면
그것을 '원하게' 되고,
나쁜 느낌을 받으면
그것을 '원하지 않게' 될 것이다.
느낌의 전제가 되는 것은 접촉이다.
실제로 접촉해야 느낄 수 있다.ㅡ접촉
접촉의 전제가 되는 것은
감각기관이다.
감각기관이 있어야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ㅡ감각기관
감각기관의 전제가 되는 것은
물질에 대한 정신의
관심(명색)이다.
그 감각기관에
정신이 주의와 관심을 기울여야
감각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ㅡ명색
물질에 대한 정신의 관심의
전제가 되는 것은
구분하는 의식이다.
감각을 받아들이는 정신은
그것을 구분하고 정리하는
의식을 통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ㅡ분별의식
구분하는 의식의 전제가 되는 것은
이 때까지 해온 것들이다.
'구분'하는 대상은
'이 때까지 해온 것들',
즉 경험이다.
우리가 해온 것들에서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다.ㅡ경험
이 때까지 해온 것들이
의식 판단 기준이 된다는 것의
전제가 되는 것은,
절대적으로 변하지 않는
명확한 지식이란 없다는 것이다. ㅡ무명
오직 '변하는' 지식만이 있을 뿐이다.
첫댓글 무무명 이 답이다
해탈을 위해서
박살내야만 하는 수행항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