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축구 A매치를 텔레비전으로 보다보면 감탄사를 연발할 수밖에 없다. 훌륭한 경기력으로 유럽의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들은 마치 우리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 주변에는 밥 먹자마자 누워서 텔레비전 보는 게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연예가 중계' 리포터 김태진과 비키니 입은 여성들이 빼곡한 피서철 모래사장에서 부루마블이나 하고 앉아 있는 김동혁, 거기서 우대권으로 무인도도 통과할 수 있다고 박박 우기는 강승우 같은 사람들만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뛰는 축구선수들은 우리 주변 사람들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런데 만약 유럽 국가의 대표 선수가 우리 주변에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우리와 같은 땅에서 우리와 같은 밥을 먹고 우리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숨 쉬고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빌 게이츠 사채 쓰는 소리하지 말라고 하려면 아서라. 정말로 있다. K-리그 구단 소속이면서 유럽의 그라운드를 달굴 ‘K-리그 대표’가 있어 오늘은 이들을 소개하려 한다. 고국에서는 해외파 대접을 받을 우리의 자랑스러운 K-리거 이야기다.
싸비치가 인천 유니폼이 아닌 마케도니아 대표팀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어떨까. 이번 주말 우리는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인천유나이티드
최근 K-리그에 반가운 소식이 날아들었다. 인천과 강원 구단이 마케도니아 축구협회로부터 대표팀 차출 공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인천의 두산 싸비치와 강원의 바제 일리요스키가 유로2012 예선 경기에 나서야 하니 마케도니아 대표팀으로 차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마케도니아 측은 “싸비치가 부상 중이지만 팀 닥터 소견을 들어보고 경기 출전 여부를 결정하겠다”며 차출을 부탁했을 정도다. 싸비치는 현재 4차례 마케도니아 대표로 나서 1도움을 기록 중이고 바제는 5경기 출장에 한 골을 기록 중이다.
우리가 새벽 늦게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열광했던 바로 그 대회에 K-리그의 일원이 나선다고 생각하니 놀랍다. 마케도니아 예비군 훈련장에서 부른 게 아니라 마케도니아 대표팀에서 부른 것 아닌가. 이번에 싸비치와 바제가 함께 뛸 마케도니아 대표팀 명단에는 고란 판데프(인터밀란)와 니콜체 노베스키(마인츠), 고란 포포프(디나모 키예프) 등 유럽 무대에서도 그 실력을 인정받은 선수들이 즐비하다. 인터밀란과 마인츠, 디나모 키예프 사이에 우리의 K-리그 인천과 강원이 끼어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이들은 판데프에게 “고란 형”이라면서 어깨동무도 할 것 아닌가.
K-리그에서 뛰는 외국인 국가대표는 이들만 있는 게 아니다. 서울의 데얀도 몬테네그로 국가대표팀의 확실한 공격 자원이다. 데얀은 지난 2010 남아공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에서도 국가의 부름을 받고 팀에 합류했었다. 당시 미르코 부치니치(AS로마)와 스테반 요베티치(피오렌티나)에 이은 제3공격 옵션으로 벤치를 지켰지만 막판 두 경기에서는 요베티치를 밀어내고 선발 출장해 부치니치와 좋은 호흡을 보이면서 두 골을 몰아넣었다. 데얀이 부치니치에게 “슈팅하지 말고 패스해 달라”고 주문하는 모습도 현실이다. 인천의 베크리치도 보스니아 국가대표를 역임했고 지난 시즌까지 K-리그에서 뛰었던 스테보(前포항)와 슬라브코(前울산)도 모두 마케도니아 국가대표 출신이다.
배구 선수라고 놀리지 말자. 명색이 파라과이 국가대표 축구선수다. ⓒ울산현대
더 놀라운 사실도 있다. 남미의 강호 파라과이 대표팀에 발탁된 K-리그 선수도 있다. 바로 울산에서 뛰는 오르티고사다. 오르티고사는 파라과이가 최근 일본과 중국을 상대로 한 평가전 대표팀 명단에 합류했다. 파라과이 23세 이하 대표팀 출신인 그는 이번 명단 20명 중 첫 성인 대표팀에 승선한 세 명 중 한 명이다. 오르티고사는 호케 산타 크루즈(맨체스터 시티), 루카스 바리오스(도르트문트) 등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공격진에 나서게 됐다. K-리그에서 배구만 하는 줄 알았더니 고국에서도 그 축구 실력을 인정받은 모양이다. 오르티고사도 팀 동료 산타 크루즈와 함께 소개팅에 나갈 수도 있다.
성남의 몰리나와 울산의 까르멜로도 콜롬비아 대표팀을 수시로 들락거린다. 비록 지금은 콜롬비아가 남아공 월드컵 예선 탈락 후 리빌딩 작업을 위해 어린 선수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국가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브라질 월드컵 예선을 앞두고는 대표팀에 합류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브라질 명문 산토스에서 10번을 달고 뛰었던 바 있는 콜롬비아 대표팀 ‘에이스’ 몰리나는 13차례의 콜롬비아 대표팀 경기에 나섰고 까르멜로도 세 경기에 나선 상태다. 눈을 아시아로 돌려봐도 펑샤오팅(전북)과 제파로프(서울) 등 중국과 우즈베키스탄 현직 대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다. 리춘유(강원)도 중국 올림픽 대표 출신이다.
K-리그는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한 리그다. ⓒ연합뉴스
세계 축구의 주류와 K-리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인정하는 게 리오넬 메시의 아르헨티나와 페르난도 토레스의 스페인뿐이라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유럽과 남미 무대를 수놓을 여러 국가의 대표 선수 중 K-리그에서 뛰는 선수가 수두룩하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대단하다. 우리와 한 공간에서 숨 쉬고 우리의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이 유럽과 남미 무대에서 당당히 그라운드를 누비는 모습에 자부심을 가져도 충분하다. 이번 주말에는 오랜 만에 해외 축구도 좀 꼼꼼히 챙겨봐야겠다. 울산의 오르티고사와 인천의 싸비치, 강원의 바제가 K-리그를 대표해 경기에 나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