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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복음 7장 12절 완전해진 율법과 선지자
오늘 말씀은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마태복음 7장 1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누군가로부터 대접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군가로부터 대접을 받으면 자신의 존재감이 높아지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대접받는 것을 대접하는 것보다 더 좋아합니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본능에 역행하는 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너희가 먼저 대접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뜻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이 먼저 남을 대접하려면 자기가 누군가에게 베풀고 있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베푸는 모든 사람들이 대접을 받는 사람보다 윗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접함으로써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너에게 대접하고 있어. 그러니 너는 나에게 감사해야 해” 이런 마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지금 이렇게 너를 대접하고 있으니까 다음에는 네가 나를 대접해야 해”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을 자신이 대접했는데도 그에 합당한 대접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마음이 서운하거나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대접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대접했던 사람에 대하여 말할 때 “아 말도 마! 그 사람은 통 남을 대접할 줄을 몰라”합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대접한다고 생각하면 대접하는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또 “어차피 내 것도 아닌데 뭐 생색이나 내는 거지”합니다. 자기의 것을 대접할 때는 아까워하다가 남의 것으로 대접할 때는 인심을 팍팍 씁니다. 특히 교회의 재정을 가지고 누군가를 도울 때, 교회의 행사를 할 때 자기 돈을 쓰는 마음과 교회 재정을 쓰는 마음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엄밀히 생각해보면 자기의 것도 하나님의 것이며, 교회의 것도 역시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것을 가지고 대접해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가를 생각하면서 대접해야 하고, 교회의 재정을 쓸때도 역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신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기분대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대접이 되고 상대방의 마음에 사랑을 심어줄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 35-40절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을 시험했던 한 율법사의 질문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35-36절을 보면 율법사의 질문이 나옵니다.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는 율법사답게 질문을 율법적으로 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율법적인 형태로 대답하셨습니다. 37-40절까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강령은 강한 명령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그 가운데 이웃을 사랑하는 데는 그들을 대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선지자가 가리키고자 했던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나라의 섬김의 본질입니다. 남을 섬기는 사람은 남을 대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남을 대접하려면 그만큼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또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소중한 얼마의 부분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대접하는 대상에게 베푸는 것이 아깝지 않습니다. 많은 것을 주고 큰 것을 주어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을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자녀를 위해 자기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줄 수도 있는데 무엇은 주지 못하겠습니까? 대접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자신이 가진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대접은 사랑하는 마음과 비례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마태복음 5장 17절에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5장 17절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에 대하여 설명하신 후에 마무리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3-16까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소금으로써, 빛으로써 착한 행실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착한 행실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바로 사랑으로 섬기면서 남을 대접하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남을 사랑으로 대접하는 삶이야말로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강하게 명령하는 것, 그리고 선지자가 강하게 명령한 것은 바로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이며, 그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바로 남을 사랑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곧 강한 명령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진실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대접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던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7절을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로마서 13장 10절을 보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것을 가지고 남을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얼마만큼 대접하라고 하십니까?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만큼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누군가로부터 얼마만큼의 대접을 받으면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 많이 받을수록 좋고 크게 받을수록 좋아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대접하는 삶을 살려면 몇 가지 명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로, 대접하는 것은 사랑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대접받는 삶을 사셨을까요? 아니면 대접하는 삶을 사셨을까요? 정답은 둘 다입니다. 여러분들 역시 이 둘 다를 할 줄 아셔야 합니다. 대접하기도 하시고 대접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대접하는 것은 상대방을 창의성을 가지고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대접이라는 말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이 대접하다는 원어는 ”만들다“, ”창조하다“, ”행하다“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갖은 노력을 다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다, 율법을 행하다, 일을 하다, 어떤 것을 만들다, 무에서 창조하다' 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결국 남을 대접한다는 것은 있는 것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생각해내서 섬긴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필요를 채우신 예수님의 삶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눈을 고쳐주시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걷게 하시고, 배고픈 사람들은 먹이시고,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집에서는 포도주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온전히 채워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남을 대접하신 방법입니다.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너희 발을 이렇게 씻겨준. 것처럼 너희도 역시 남을 섬겨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을 섬길 때는 창의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대접할 때 갖는 마음은 기쁨입니다. 대접은 하나님께로 받은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행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기쁩니다. 사랑이 없는 대접은 대접한 후에 아까운 마음을 갖습니다. 대접할 때까지도 참된 마음으로 했다가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기쁘기도 하고 아깝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나온 대접은 하나님의 기쁨이 동반됩니다. 예수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네 번째로 남을 대접하는 데는 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필수적입니다. 여러분들이 남을 대접할 때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너는 내 밑에 사람이야 그렇기 때문에 주는거야”하는 것은 참된 대접의 마음이 아닙니다.
참된 대접은 예수님처럼 상대방에게는 대접받을 수 있는 의자에 앉혀놓고 자신은 바닥에 내려 앉아 허리에 수건을 차고 무릎을 꿇고서 먼지 뭍은 발을 씻겨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대접받는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귀한 존재라는 것과 교회 앞에서 귀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로인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세 살짜리 손자가 왔습니다. 거실에 앉아 있는데 손자가 와서 고사리같은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면서 “할아버지 같이가요”합니다. 그래서 일어서서 따라갔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아이들 실로폰 앞에 앉습니다. 그러더니 실로폰을 치는 막대를 들고는 나에게 “반짝 반짝”합니다. 그래서 “반짝 반짝 작은 별~”하면서 초등학교때 배웠던 노래를 여러 차례 불렀습니다. 그러면 열심히 노래에 맞춰서 두드립니다. 그리고 노래를 마치면 저도 실로폰 채를 위에 들고 딱 멈춥니다. 그렇게 해서 그 노래는 물론이고 다른 초등학교 때 배운 노래를 여러 곡 불렀습니다. 어떤 노래는 부르다가 가사를 잊어서 중단된 것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또 저에게 “할아버지 교회가요”합니다. 교회에는 교회집사님 중 한 분이 손자들이 가지고 놀던 자동차 장난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같이 가서 같이 차를 가지고 놀아주었습니다. 이것이 손자에 대한 존중입니다.
손자와 놀면서 무릇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도 내가 “하나님 저랑 같이 가요”하고 말씀드리면 같이 가실까?’ 여러분들이 기도하시면서 하나님께 여쭈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가셨다면 그 간증을 교회에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24장 44절에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예수님을 가리켜 말한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그래서 요한복음 1장 45절에서 빌립은 나다나엘은 찾아가서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결국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졌습니다. 그 전에는 불완전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완전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완전하게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사랑으로 섬기면서 다른 사람을 대접하십시오. 그리고 대접하는 삶을 살기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은 복이 여러분들의 삶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이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