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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5일 주일 [(자) 사순 제1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 오늘은 사순 제1주일입니다. 인간 본성이 원죄에 물들어 나약해졌음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말씀의 사순 시기의 여정에 나아가게 하시어,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이기게 하십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이르러 성령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시기를 하느님께 간청합시다.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빚으신 사람이 뱀의 유혹으로 선과 악을 아는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눈이 열려 알몸인 것을 안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는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을 단식하신 뒤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지만 성경 말씀으로 이를 물리치신다(복음). <사람의 창조와 원조들의 죄>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7-9; 3,1-7 7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8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9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3,1 뱀은 주 하느님께서 만드신 모든 들짐승 가운데에서 가장 간교하였다. 그 뱀이 여자에게 물었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 2 여자가 뱀에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먹어도 된다. 3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마라.’ 하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4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6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7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12-19<또는 5,12.17-19>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형제 여러분, 12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 <13 사실 율법이 있기 전에도 세상에 죄가 있었지만, 율법이 없어서 죄가 죄로 헤아려지지 않았습니다. 14 그러나 아담부터 모세까지는, 아담의 범죄와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지 않은 자들까지도 죽음이 지배하였습니다. 아담은 장차 오실 분의 예형입니다. 15 그렇지만 은사의 경우는 범죄의 경우와 다릅니다.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운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충만히 내렸습니다. 16 그리고 이 선물의 경우도 그 한 사람이 죄를 지은 경우와는 다릅니다. 한 번의 범죄 뒤에 이루어진 심판은 유죄 판결을 가져왔지만, 많은 범죄 뒤에 이루어진 은사는 무죄 선언을 가져왔습니다.> 17 사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 18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듯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 일을 단식하시고 유혹을 받으신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11 1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2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3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6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7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이렇게도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8 악마는 다시 그분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며, 9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하고 말하였다. 10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11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받으시는 장면입니다. 오랫동안 단식하며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배고픔을 심하게 느끼시자, 달콤한 유혹이 들어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유혹은 늘 당사자의 입장을 합리화시켜 줍니다. “그러다 건강을 해친다면 어떻게 큰일을 하겠습니까? 일단 먹고 기운을 내야 합니다. 그러니 이 돌을 빵으로 변하게 하십시오.” 물론 먹어야 살지만 그렇다고 돌로 만든 빵을 먹을 수 있습니까? 부정직하게 번 돈으로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까?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는 또다시 유혹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낄수록 자신을 드러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에게 자신을 과시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있지요. 이런 경향이 성전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에 넘어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마지막 유혹입니다. 땅에 엎드려 악마에게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주겠다는 것이지요. 이는 ‘내가 찾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주님께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내가 주님 뜻에 맞추려 하는지, 아니면 주님께서 내 뜻에 따라 주어야 만족하는지?’ 이 점을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아울러 신앙생활의 불편함, 나아가 하느님에 대한 서운함과 같은 부정적 요소를 떨쳐 버리고 신앙생활의 장점,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늘 떠올려야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알다가도 모를 나 이제는 벌써 흘러간 옛 노래가 되었네요. 젊은 시절 영화 ‘건축학 개론’ 주인공들처럼 ‘마이마이’나 CD 플레이어를 끼고 많이 듣고 부르던 노래 중에 ‘가시나무새’(하덕규 작사·작곡, 조성모 노래)라는 가요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아니고 그 이후인가?’ 노래가사 내용이 상당히 시적이고 철학적이어서 고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습니다.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당신이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당신이 편할 곳 없네 내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당신에 쉴 자리를 뺏고 내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음미할수록 수긍이 가는 가사구절입니다 헤아려보니 참 그렇습니다. 내속에 뭐가 그리 내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때로 태평양보다 더 넓은 마음의 내가 있는가 하면, 때로 송곳 하나 들어갈 수 없을 정도의 속 좁은 내가 있습니다. 때로 시속 500킬로의 테제베같이 성급한 성격의 내가 있는가하면, 때로 나무늘보보다 더 느긋한 내가 있습니다. 때로 비단결보다 더 고운 너그러운 천사 같은 내가 있는가 하면, 눈빛이며 얼굴이 무섭고 기괴한 사탄 같은 내가 있습니다. 오늘 비록 내가 천사로 산다할지라도 내일 사탄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변화무쌍한 우리네 삶입니다.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나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인내 또 인내입니다. 심호흡하고 또 심호흡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것입니다. 비우고 또 비우는 것입니다. 수시로 내안의 사탄을 몰아내는 작업입니다 ‘엑소시스트’ 비슷한 영화들을 보면 라스트신에서는 언제나 연세 지긋하신 노사제가 사탄과의 최후 대결을 위해 마늘과 성수 그리고 십자가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끔찍한 최후의 일전을 벌입니다. 우리도 내안에 사탄이 움직이기 시작할 때를 대비해서 늘 준비하고 있어야겠습니다. 그런데 그 준비는 다름 아닌 깨어있음입니다. 말씀 안에 늘 살아있음입니다. 보다 자주 성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사탄아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안에는 내 평소 모습과는 다른 너무나 다른 또 다른 내가 많이 들어있습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나, 결국 사탄과도 같은 내가 뱀 또아리 틀듯이 틀고 앉아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내 안의 사탄’입니다. 형제적인 진솔한 대화나 부드러운 소통을 통한 문제 해결보다는 극단적 감정 대립을 통해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싶은 폭력성이 내 안의 악령입니다. 보편적이고 통상적인 룰이 아니라 편법이나 부정적인 방법을 이용한 지름길 역시 악령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모두에게 선익이 되며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공동체 의식보다는 나 홀로 빛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 곧 악령의 얼굴입니다. 움직이지 않고 그저 퍼질러 앉아 울적한 얼굴로 아까운 인생 허송세월하려는 게으른 마음이 곧 또 다른 악령입니다. 우리는 그런 마음이 들 때 마다 수시로 외쳐야겠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마태오복음 4장 11절)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프리즌 브레이크
예전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가 우리나라에서도 큰 선풍을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형이 살인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받아 삼엄하기로 유명한 교도소에 갇혀있는데 동생이 일부러 그 교도소에 들어가 형을 탈옥시키는 이야기입니다.
동생은 그 교도소의 설계도를 확보해 그 지도를 자신만 아는 암호로 만들어서 온 몸에 문신으로 새겨 넣습니다. 아무리 탈옥이 불가능한 교도소라 할지라도 빈틈은 있는 법이어서 동생은 이미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된 계획에 따라 형을 빼내어 자유를 줍니다.
감옥 안에 갇힌 사람들의 힘만으로는 탈옥이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그 교도소의 구조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구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교도소 밖에 있는 사람이고 그 교도소를 손금 보듯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번 싸워도 패하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적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적에 대한 정보를 듣는 것도 좋지만 적과 직접 맞대면해 보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도 직접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들어가 본 것보다 더 철저한 고증을 거치고 끊임없는 시뮬레이션 작업을 거쳐 언제 들어가도 혼자서는 거뜬히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을 갖춥니다. 자신도 빠져나오기 힘들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데리고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사탄은 마귀의 우두머리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유혹하지 않아도 죄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작은 마귀인 자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죄를 안 지으면 마귀가 직접 덤빌 것입니다. 마귀들도 이기면 사탄을 맞서야하는데 예수님 정도나 돼야 마귀 우두머리를 이길 수 있습니다.
유혹은 그 자체라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인간이 유혹받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예수님도 유혹 받으라고 광야로 내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죄의 종살이에서 구해 주시려 오셨는데 그분이 죄를 이기실 수 없으면 인간을 구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겨봐야 죄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이겨보지도 못하면 적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저 그 사람만 나타나면 두려움 속에 노예처럼 살아야 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인간이 당하는 유혹을 이기는 법을 스스로 유혹과 맞서 이기심으로써 배우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도구로 쓰시려고 하는 이들을 부르실 때 언제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쌓도록 교육하십니다. 모세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느님은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거부합니다. 파라오가 무서워서 도망 다니는 주제에 어떻게 파라오를 이기고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 힘으로 ‘모세가’ 파라오를 이기게 하십니다. 사람이 파라오를 이겨야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도 이길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파라오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예수님께서 유혹을 이기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되셔서 사탄을 이기셨기에 사람인 우리들도 이길 수 있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죄를 이기셔서 당신 자신이 죄를 아셔야합니다. 운동을 할 때 상대를 이겨보지 못하면 상대를 온전히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여 언제라도 상대를 누를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을 때 ‘아, 상대가 이정도였구나!’라고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또한 유혹에 떨어지면서 다른 이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숲을 벗어나야 숲이 보이는 법입니다. 죄를 이겼다면 죄에서 벗어난 것이고 죄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다른 이들도 구해 낼 수 있습니다.
부산교구 소속 김홍석 신부님이 용호 성당 보좌 할 때 겪었던 이야기가 참 마음에 와 닿습니다. 폐암 말기 환자의 병자성사를 간 이야기입니다. 이미 암 세포가 머리까지 전이되어 사람도 못 알아보는 상황이었습니다. 혹시 성체를 보면 그 순간 정신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병원으로 향했는데 그 순간 신부님과 성체를 알아보기는 했지만 성체를 영하는 순간 가래침과 함께 뱉어버렸습니다. 이래서 오지 않으려고 했다며 좀 짜증을 부리고 영대로 가래가 묻은 성체를 싸서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성체를 땅에 묻으려는 생각을 했는데 오는 중에 수녀님이 자신이 영하겠다고 하는 것을 자존심상 뿌리치고 사제관으로 들고 왔습니다. 그러나 폐암 환자가 가래침과 함께 뱉은 성체를 어떻게 할지를 오래 고민했습니다. 이사람 저사람에게 물어보며. 묻어도 되고 영해도 되는 상황. 묻는다는 것은 그분을 서운하게 해 드리는 것 같고, 영한다는 것도 너무 힘들고. 그런데 사제서품 받을 때의 결심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영하는 걸로 했습니다. 그런데 심한 고열과 함께 24시간을 깨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290이하로 떨어져보지 못한 혈당 수치가 100으로. 100점 사제가 된 것입니다. 성체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혹을 이긴다는 것은 분명 자신에게도 좋고 타인에게도 좋습니다. 이제 이 신부님은 그런 상황이 오면 자신은 물론 남도 도와줄 수 있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겨보았으니 말입니다. 우리도 이기지 못하면 누구도 도와줄 수 없게 됩니다. 피해만 주게 됩니다. 이것이 유혹과 끝까지 싸워내어 맛보아야 하는 기쁨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유혹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쳐서 결국 자신의 가족을 살릴 수 있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가신 이유는 광야의 삶이 유혹을 이기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유혹 자체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광야’입니다. 죄를 짓는 것을 보고는 인간적이라 하지 말고, 죄를 이겨보도록 합시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하라고 모범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의 창조자이시라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가장 행복한지도 아십니다. 노예보다 자유인이 행복하고, 자유인만이 누군가를 구해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예의 종살이를 벗어나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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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5일(일) 음2/8 십자가의 聖 요한 요셉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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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성 요한 요셉(Joannes Josephus a Cruce)은 이탈리아 나폴리(Napoli) 연안의 이스키아(Ischia) 섬에서 태어나 카롤루스 가에타누스(Carolus Gaetanus)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의 부모는 교양 있는 모범적인 부부였다. 그들의 집은 거의 항상 가난한 사람들에게 열려있었는데, 어머니인 마우라 부인은 음식을 미리 준비해 놓고 걸인들에게 나누어주곤 하였다. 이 부부의 일곱 아들 가운데 다섯 명이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그들 중에서도 카롤루스가 가장 뛰어났다. 카롤루스는 에스파냐 출신의 작은 형제회 회원들이 지키는 엄격한 청빈에 큰 감명을 받고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불과 16세의 어린 나이로 지원기를 시작했으나 그의 절제나 신심은 훌륭한 수도자의 모범으로 인정되었다. 그는 서원하면서 십자가의 요한 요셉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는 천사적 사부인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를 본받고자 부제로 남아 있기를 간절히 바랐으나 장상들의 결정에 따라 사제품을 받았다. 한없이 순결한 마음을 지녔던 그는 악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특별한 통찰력과 영적 지혜가 충만하여 고해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그즈음에 그는 수도원 가까운 곳에 은둔소를 세울 계획을 장상에게 말씀드려 허락을 받았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에게 수련장이란 중책을 맡겼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 당시의 엄격한 규율을 수련자들에게 적용시킬 허가를 받고서야 그 직책을 맡았다. 그는 가끔 이미 세상을 떠난 형제들의 환시를 보았는데, 그때부터 이상한 기적까지 행하곤 하였다. 그는 치유의 은사로 병을 고치는가 하면, 음식을 많게 하는 기적까지도 베풀었다. 그는 자신이 죽으리라고 예언했던 산타 루치아(Santa Lucia)에서 운명하였다. 그는 1789년 복자품에 올랐고, 1839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Gregori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 자료집에서 발췌 |
모범적인 부모 아래서 일곱 형제 가운데 다섯이 수도자의 길을 걸었으며 한없이 순결하여 악을 모른채 성장하여 엄격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모범으로 살았던 십자가의 성 요한 요셉 사제시여 저희도 주어진 특성대로의 아름다움을 잘 가꾸어 주님의 사랑받는 일꾼이 될 수 있도록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