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상선현들은 족보를 통해 후손들에게 무엇을 전해주려 했을까 우리들은 전혀 보지도 못할 후손들에게 무엇을 전해줄 수 있을까 뵙지도 못한 선배제현들에게, 보지도 못할 후학들에게 전해줄 무엇이 있을까 AI 시대에 학문은 데이터베이스로 전해져 계승되는데 우리들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자존이라도 전해질 수 있을까 궁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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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甲午仲秋譜 券之1, 券之2, 券之3, 券之4, 券之5, 券之7, 券之8
光山金氏
광주광역시[2] 및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시조 김흥광에 대해 김씨 분관록에는 헌강왕의 왕자로, 동국만성보 및 조선씨족통보에는 신라 49대 헌강왕의 3자로, 광산김씨 정유보에는 신라 45대 신무왕의 3자로 기록되어 있는 등 선계를 정확하게 상고할 수 없다.
시조 김흥광(金興光)은 통일신라 말기 나라가 장차 어지러울 것을 알고 금성(경주시)을 떠나 무진주 서일동(현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3][4] 평장리)에 은거하였다. 손자 김길은 고려에 귀의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개국공신이 되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고려 태조 왕건은 김길의 조부인 김흥광을 광산부원군에 봉하였다. 이후 조부의 작호이자 세거지인 광산(光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 왔으며, 후손들 중 평장사(정2품)가 8명이나 배출되자 사람들이 서일동을 평장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명칭은 지금까지도 남아 평장리로 불리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와서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문묘(文廟)에 종사된 현인 중 김장생, 김집 부자를 배출하면서 국반(國班)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또 정치가로서 최고 영예인 종묘(宗廟)에 배향된 김집[5], 김만기와 및 문신 김만중을 배출하면서 으뜸가는 명문가가 되었다.[6]
이밖에도 정승이 5명, 청백리가 4명, 왕비가 1명, 대제학이 8명[7] 나왔다. 또한 문과 갑과 장원급제자 12명, 문과 급제자 263명을 배출했다.
김장생(金長生)의 4대 조부 김극뉴의 묘는 '천마(天馬)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이라는 말(馬) 명당으로 유명하다.
일제강점기 때 활동한 독립운동가도 있다. 대표적으로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가 있고 그녀의 삼촌인 김필순도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다 살해 당했으며 그의 아들이자 김마리아의 사촌동생인 중국 배우 김염도 독립운동을 지지하며 항일영화 촬영만을 고집했다.
현대에 와서 인구수를 보면 김해 김씨, 경주 김씨에 이어 김씨 본관 인구수로는 3위이다.[8][9] 광주광역시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 집단이라 수도권을 제외하면 전라도 지역에 거주 비율이 높다. 반면 경상도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적다.[10]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일 뿐 실상은 전국에서 8번째로 많은 성씨답게 경상도 지역에도 많이 살고 있다. 김수환 추기경도 마찬가지이다.
종가 중에는 남북분단으로 인해 종손과 종부가 이산가족이 되어버린 사례도 있다. 안동의 유일재(惟一齋) 종가의 종손인 김용진 씨는 해방 직후 좌익 활동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한국전쟁 때 월북을 했고, 종부인 김후웅 씨는 종가에 남았다. 2003년 이산가족 상봉 때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자식도 병으로 일찍 죽어서 없고 종가를 김후웅 씨 혼자서 지킨다고. 광산 김씨 유일재 종부 김후웅 “왜 살아도 살아도 끝이 안나노?”
대략적으로 근현대에 분포하고 있는 항렬자는 다음과 같다. 항렬자를 철저히 지키는 가문으로 유명한데 보통 37~41세손 항렬자를 쓰는 사람이 많다. 김씨 여자 이름에 중, 용, 환, 규 등의 글자가 들어있다면 십중팔구 광산 김씨.
아래 항렬자는 최근 광산 김씨 상대 계보를 정리하면서 한 세대씩 위로 올린 것[11]일 뿐, 항렬 자체를 바꾼 것은 아니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현대인물도 모두 기존의 세수에서 한 세대 올라가는 것으로 정정되었다.
33세 | ○기(箕) |
34세 | 재(在)○ |
35세 | ○현(鉉) |
36세 | 영(永)○ |
37세 | ○수(洙) |
38세 | 용(容)○ |
39세 | ○중(中) |
40세 | 선(善)○ |
41세 | ○순(淳) |
42세 | 동(東)○ |
43세 | ○환(煥) |
44세 | 규(奎)○ |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또한 광산 김씨 일문이다. 부친 김용하의 경우 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하귀1리 출신이지만 김우중의 경우 출생은 대구에서 했다. 대통령 박정희가 김우중의 아버지 김용하를 사사했다. 당시 김용하씨는 소년 박정희를 매우 총애하여 비가 오는 날이면 귀가시키는 대신 관사에서 숙식시키면서 유명한 박정희의 글씨를 가르쳤다고 한다. 김용하씨는 이후 1940년대 말에 제주도지사를 역임했으나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실제로 36세손이나 조부 대부터 3세 아래의 항렬을 쓰면서 부친, 자신, 아들, 손자까지도 3세 아래의 항렬을 써왔는데, 실제로 제주 지역의 경우 대체로 타 지역보다 항렬들이 2~3세대 높다[12]. 현재 나이로 40대 연배에 33세손인 사람 또한 생존해 있다. 김○중(中) 항렬인 39세손인 경우 원래 토박이인 문정 문간공파인 한 아무리 빨라도(거의 각 가지의 종손 중에도 드물다) 30대 후반~40대 초반 연령이다. 참고로 제주 지역에 광산 김씨가 정착한 것은 문정공 김태현의 3남 문간공 김광재의 2남 김윤조가 신돈 집권기에 제주로 피신하면서부터이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광산 김씨가 항렬자를 철저히 지키는 가문으로 유명한데, 김용(容)○(38세손), 김○중(中)(39세손), 김선(善)○(40세손)을 쓰는 사람이 많다. 그러니까 이름에 김용(容)○이 들어가 있으면 70%[13]가 광산 김씨라 보면 되겠고, 특히 김○중(中)이 들어가 있으면 김대중[14] 등 희귀 사례를 제외한 8~95%가 광산 김씨라 보면 되겠다. 다만 울산김씨도 중자돌림을 쓴다. 그리고 고성 김씨도 게다가 중자돌림이있다 그래서 이걸로는 알수가 없다. 이 중(中)자는 가운데가 오행상 토(土)에 해당하기 때문에 배정된 것이다.
이럭저럭 광산김씨 갑오중추보가 7권정도가 모였다
족보의 연원은 신라 왕들의 계보에서 출발하기 마련이다
박혁거세부터, 석탈해, 김알지의 순으로 시작되는 족보의 흐름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흥망성쇠에 의해 파보를 형성하게 되고
잦은 외세의 침략에 의해 양반제도의 파고높은 변천으로 점차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양반제도의 붕괴가 시작되고
일제시대와 한국동란 전쟁으로 양반제도는 봉괴가 완성이 된다.
최근 호주제의 폐지로 인해 남성중심사회가 해체되면서 남성중심의
종친회와 족보가, 그 찬란했던 양반 중심의 대동보가 빛을 잃게된다.
이제 종친회가 열리면 여성종친 100여명만 모이면 종친회장 및 이사들을
재선임하고 수백년 유서깊이 자손대대로 내려온 종친회 재산도 일거에 팔아
여성분들 손으로 골고루 분배하는 지경에 이룬다.
이 후 종재없는 종친회들은 흔적도 없이 이름만 남기고 사라지게 마련이다.
나는 이렇게 선조들이 돌아가신 후 엿장수에게 버려져 고서점에서 헌책 취급받는
족보들을 걷으러 다닌다.
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족보 전질을 준비하던 지난 날과 달리, 요즘은
대동보 제일권과 제2,제3권 정도만 수집하기로 했다.
가문의 영광, 발문이 적혀있는 제 1권과 가문의 전승과 유래가 자세히 적혀있고
슬금슬금 가문의 내력과, 파보의 형성과정, 조선시대의 벼슬과 문집을 읽다보면
당시의 유명했던 벼슬아치들과도 만나 격세지감을 따지기도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한다.
수십권에 달하는 권문세가의 족보로부터. 단 한권밖에 없는 단촐한 족보도 보게 된다.
어려서부터 할아버님 손에 이끌려 대전 희상사에서 간행하는 대동보를 간행했던
기억이 새롭다. 종묘배향, 문묘배향공신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사재를 털어
대동보를, 파보를, 문집을 간행했던 조상들의 위업을, 이제는 대동전자보를 간행하는
수치스러움에 조상님들에게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나는 광산김씨가 아니다. 다만 족보를 통해 광산 김씨의 내력을 추적해 만나는
선배제현들을 마중할뿐이다.
일제시대와 한국동란으로 대동보들은 분실, 멸실을 피하기 위해 자손들에게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과정에서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종친회들이 수두룩하지만
이제 겨우겨우 모으는 과정에서 족보의 가치가 예전만 못해 안타까울 따름이다.
첫댓글 옛날 엿장수에게 버려져 고서점에서 수집하는 좋은 취미 인가 봅니다.
앞으로 좋은 결실이 맺어 졌으면 좋겠읍니다.
감사 합니다.
올바르게 자기의 관향(貫鄕)과 항렬자(行列자)를
알고 계시는 분이 그리 많지 않으리라 봅니다.
자기의 복보(族譜)를 찾아보는 분도 그리 많지 않으리라 보며
족보를 모시고 있는 분이 몇이나 될지 알 수가 없네요.
족보를 잘 모시고 있는 분은 자기의 조상(祖上)도
잘 모시고 있으리라 봅니다. 감사합니다.
뵐 수 없고 볼 수도 없는, 과거와 미래를 유추하기 위해
족보를 봅니다. 선인들의 살아오신 내력과 그들이 살아온 문집을 통해
그 분들의 생각 속을 잠시 들여다 볼뿐입니다.
本鄕의 대대로 전승된 족보들은 종친회로 보냈습니다.
靑襟世寶 및 朴氏史略등은 직계 조상님들의 손길때문에
미련하게 보관중입니다. 이것도 보내야겠지요.
세종대왕때 하사받은 봉토인 고덕아파트단지를 강제 토지수용당하고
가문의 영광은 쇠락의 길로 접어드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