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5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여호와의 식탁 》
말 1:6~9
<기준과 캐논>
“안방에 들어가면 시어머니가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가 옳다” 한국 속담입니다.
시어머니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면 시어머니가 옳습니다.
며느리의 말을 끝까지 들어보면, 또 며느리가 옳습니다.
이런 경우 황희 정승은 “둘 다 옳다!”라고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상담사들도 이렇게 말합니다. “둘 다 옳다! 그러니 서로 양보하고 끝내라!”
더 이상 파고들어봤자 싸움만 커지고, 갈등만 깊어지니 적당한 선에서 포기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그러니 모두의 가슴에는 앙금이 있습니다.
부부간에도, 부모자식간에도,, 이웃 간에도,,, “적당히 손해보고 살자!” 서글픈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해결해야 합니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 핵심은 “기준”에 있습니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로서 며느리에게 바라는 기준이 있습니다.
며느리는 며느리로서 시부모 공양에 대한 기준이 있습니다.
시어머니의 기준과 며느리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꿰뚫어야 합니다.
안방의 기준이 있고, 부엌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 기준이 서로 달라요!
상대를 향한 기준이 서로간에 다르다는 것을 안다면 반은 해결 된 것입니다.
‘나를 향한 부모님의 기준이 있는데, 내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기준과 차이가 있구나~’
서로의 기준이 있음을 알면서, 기준을 좁혀가면 해결책이 보입니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거기에는 반드시 기준이 있습니다.
내가 설정한 기준, 상대가 설정한 기준이 있습니다. 집단과 집단 간에도 기준이 있습니다.
지역과 지역간에도 기준이 존재합니다. 한국의 기준이 있고 미국의 기준이 있습니다.
이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지지고 볶고, 아웅다웅합니다. 그래서 전쟁도 일어나요!
☞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합리적인 기준이 무엇일까요?
성경입니다. 성경이 기준입니다. 성경을 그래서 “캐논”이라고 합니다.
잣대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잣대이고, 성경이 기준입니다. 할렐루야~
<말라기에서 드러나는 기준의 문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다툼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이런 현상이 말라기서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보면 하나님이 옳습니다.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의 말이 옳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6절)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6절)
하나님의 기준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기준을 제시합니다.
너희는 창조주이며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인 나를 공경해야 한다.
너희는 창조주이며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인 나를 두려워해야 한다.
“공경하고 두려워 하라!” 두 글자로 줄이면요? ~ 경외 敬畏 공경할 공, 두려워할 외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기준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기준은 “여호와를 경외하라!”
☞ 하나님이 “나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라” 말씀하시니 이스라엘이 뭐라 대답하죠?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6절)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7절)
멸시하지 않았다고, 더럽히지 않았다고 항변합니다.
왜 이렇게 말합니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대로 기준이 있었어요!
(7절)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이 대목을 유심히 봐야 합니다. 그런데 얼른 와 닿지 않아요, 제가 공동번역을 봤습니다.
(공동번역 7절) “너희는 제단 위에 더러운 빵을 바치면서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제단을 더럽히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야훼의 제사 상쯤이야 아무러면 어떠냐고 하는구나.”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기준>
공동번역을 읽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기준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 야훼의 제사 상쯤이야 아무러면 어떠냐” 여호와의 식탁은 아무려면 어때?
이것이 말라기 당시 이스라엘 제사장들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기준이었습니다.
☞ 한국인들은 설날, 추석날, 그리고 조상의 제삿날, 제사상을 차립니다.
한국인들이 어떤 기준으로 제사상을 차립니까?
한때 종갓집에서는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종갓집 며느리는 “죽었다” “날샜다”
중매할 때 종손, 장손, 맏이는 신랑감 후보에서 뒤로 밀렸습니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요즘 한국인들, 제사상 차림, 안 해도 무방하다는 의견이 많아졌습니다.
명절날, 제삿날 “제사상 차림 아무려면 어떠냐?” 그리고 한단 말이, “마음이 중요하지!”
☞ 우리 기독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부인합니다. 왜지요?
사람의 영혼은 이 세상에 떠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영혼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 결정됩니다.
아무리 지극정성으로 제사상을 차려도 조상은 먹을 수도, 와서 볼 수도 없어요!
그런 제사를 왜 지냅니까?
다행히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점차, 제사는 의미가 없다는 쪽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제사,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다녀가신 후, 제사에서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요즘 한국의 기독교인들 ‘예배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주일 예배쯤이야, 수요예배쯤이야” ‘쯤이야’가 된 것 같아서 참 서글픕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기준이 뭐라 했지요? “공경과 두려움” “경외”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하신 기준입니다.
<좋은 것은 어디에 썼을까?>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제사장들, ‘여호와의 식탁’을 ‘쯤이야’로 여겼습니다.
7절에 보면 ‘더러운 떡’을 여호와의 식탁에 올렸습니다.
8절에 보면 ‘눈 먼 희생제물’ ‘저는 것’ ‘병든 것’을 올렸습니다.
‘여호와 식탁’을 이렇게 차리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겁니다.
말라기 선지자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궁금증이 생깁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무엇을 경외했을까
☞ 여호와 식탁에 하찮은 것들을 올렸는데, 그러면 좋은 것은 어디에 빼돌렸을까요?
☞ 좋은 것은 어디에다 썼을까? “그것이 궁금합니다!”
어디에 썼는지 단서가 8절에서 드러납니다.
(8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 총독을 섬겼음을 은연중 드러내십니다.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조악한 것, 상한 것, 더러운 찌꺼기를 세상의 권세 잡은 자에게 가지고 갈 수 없지요.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려면 극상품을 권세 잡은 자에게 바쳐야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갖다 바쳤습니다. 갖다 바치면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남편의 승진을 위하여 갖다 바치고, 자식 출세를 위하여 갖다 바쳤습니다.
8절 말씀은 “중의적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이중적 의미가 있다는 뜻입니다.
① “너희가 나에게 가져오는 것, 그것을 총독에게 갖다 줘 봐라, 그가 네 청을 들어주더냐?”
안 들어줍니다. 그걸 아는 이스라엘 제사장들, ② 사실은 좋은 것을 총독에게 바치고 있습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려고 하나님보다 총독을 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한 마디로 세상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은 뒷전으로, 눈에 보이는 총독은 최고로 섬기는 현실의 질타입니다.
<대가로 살아야 할까, 은혜로 살아야 할까>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참으로 안타까운 말씀을 선포합니다.
(9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여호와의 식탁에 올리는 제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은 “은혜”입니다.
귀한 것을 총독에게 바치고 이스라엘 백성이 반대급부로 얻는 것은 “대가”입니다.
8절에서는 총독에게 뇌물 바치고 받는 대가를 중의적 의미로 띄웁니다.
9절에서는 하나님께 제물 바치고 받는 은혜를 중의적 의미로 띄웁니다.
너희가 대가로 살 테냐, 너희가 은혜로 살 테냐?
이 질문이 8절과 9절에 스며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대가’로 살아가는 길을 택합니다.
대가를 받으려면, 그만큼 갖다 바쳐야 합니다. 갖다주지 않으면 대가는 없습니다.
그러니 한 평생 허리가 휘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함은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뜻합니다.
☞ 우리는 대가 아닌, 은혜로 사는 주님의 백성이요, 주님의 자녀요,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8절에 보면,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식탁’에 올린 제물의 실상이 나옵니다.
‘눈 먼 희생제물’ ‘저는 동물’ ‘병든 동물’을 여호와의 식탁에 올렸습니다.
☞이 부분에도 “중의적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도 앞 못보는 시각장애인, 다리를 저는 지체장애인, 그리고 병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장애인과 노약자도 함께 살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출 4: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 ~ 참 많이 생각하고, 묵상하고, 고민한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허락하신 이유는 “이 세상은 ‘대가’가 아닌 ‘은혜’로 살아야 한다.”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은혜가 아니라 ‘대가’로써 평생 살아가겠다고 큰 소리 떵떵치는 비장애인들이 있어요!
그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태어나고 30년간, 누구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아직 홀로서지 못합니다.
그리고 30년은 그런데로 능력을 가지고 ‘대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30년은 다시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똑똑한 사람은 중간 30년, 그 시기도 ‘대가’가 아니라 ‘은혜’로 삽니다.
오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은 ‘똑똑한 사람들’입니까, ‘어리석은 사람들’입니까?
똑똑한 사람들, 은혜로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맺음>
오늘 설교제목이 “여호와의 식탁”입니다.
여호와의 식탁에 무엇을 올릴 것인가?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공경함, 두려워함”을 기준으로 세우셨습니다.
“공경과 두려움” 두 글자로 “경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것, 여호와의 식탁에 차려내야 할 것은 “경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시대 이스라엘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식탁이야 아무려면 어때?’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여호와의 식탁을 멸시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들의 기준이 서로 달랐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식탁’ 멸시하면서 삽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편의에 따라 세웠던 기준을 버렸습니다.
‘내 기준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살겠다’ 다짐하고 살아갑니다. 할렐루야~
세상 살아가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기준이 있고, 상대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둡니다.
상대에 따라 상대의 기준에 맞춰줄 것인지, 그냥, 내 기준대로 살 것인지 결정합니다.
상대가 자기 기준에 맞춰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가지는 것, 있는 그대로 인정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 하나님에게는요?
철저히 하나님의 기준에 맞춰주는 삶, 그 삶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은혜’임을 우리가 압니다.
우리는 최고로 좋은 것, 최고의 헌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