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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성당 → 천주교124위시복터 → 형조터 → 의금부터→전옥서터→ 우포도청터→경기감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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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광화문 124위 시복터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 북측광장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 집전으로 이곳 광화문 광장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열렸습니다.
52. 형조터
서울시 종로구 세종대로 175 세종문화회관 앞 바닥돌
광화문 앞은 조선시대 육조거리가 위치했던 곳입니다.
형조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행정기관
6조(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중 하나로
법률의 제정과 시행을 맡은 기관이었습니다.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명례방 집회(김범우의 집) 참석자들이 형조로 압송되었을때부터
이곳에서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문초가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중앙 행정조직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의정부와 6조이다.
의정부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합좌기관으로 3정승은
나라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하고 그 합의를 거쳐 국왕에게 품달하며
왕의 결재는 의정부를 거쳐 해당관서에 전달되었다.
6조는 의정부 아래의 나라의 행정 실무(정무)를 나누어 맡은 기관으로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가 있으며
그 장관을 판서, 차관을 참판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형부가 형조이다.
형조는 사법의 감독 기관인 동시에 복심의 재판 기관이기도 하다.
조선 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형조의 예하에 전옥서를 두었다.
형조는 ‘추관’ 또는 ‘추조’라고도 했으며,
사헌부, 한성부와 아울러 삼법사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형조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남명혁 다미아노,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네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다.
형조(刑曹)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積善坊) 에 있으며,
현재의 종로구 세종로 81번지 3호 (세종문화회관자리)에 있었다.
형조는 광화문 앞 우측으로 병조(兵曹)의 남쪽, 공조(工曹)의 북쪽에 있었다.
형조의 문 밖에는 우물이 있었고, 청사(廳舍) 뒤에는 연당(蓮塘)이 있었다.
형조를 추관(秋官)으로도 부르는데
그것은 1년 4계절 중에서 바람이 차고 서리가 내리는 가을을
엄한 호령 냉정한 마음으로 죄인을 다스리는 형관(刑官)에 비하기 때문인 것이었다.
형조 터 표시는 5호선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에서
세종로공원 쪽 도로 바닥에 매입되어 있다.
53. 의금부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47 (종각역1번출구 SC은행 본점 앞 화단)
의금부(義禁府)는 조선 시대에 중대한 범죄를 다루던 사법 기관입니다.
박해시대 천주교신자들은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지방의 각 진영과 군, 현에서 문초를 받았는데
그 중 중죄인, 주교와 신부 평신도지도자들은 의금부에서 국문(鞠廳)을 받았습니다.
위치는 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출구 우측 화단에 표석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조선 시대 법을 다루는 사법 기관은
일반적으로 형조, 한성부, 사헌부 등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외에 노비의 소송 문제를 다루는 장예원(형조 소속)과
국가 중요 사건을 판결하는 의금부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조선 초기에는 경찰 업무를 맡게 하고 사법권은 형조에서 장악하였는데,
정종 때 그 기능이 확대, 강화되어 본래의 경찰 업무 외에
형옥을 다스리는 일까지 겸하게 되었다.
의금부는 어명으로 사형 선고를 내리던 최고 재판소이다.
의금부는 ‘봉교추국(奉敎推鞫)’만을 맡는다하여
왕명에 의해서만 죄인을 추국하는 기관으로 규정하고 있다.
형조·한성부와 함께 3법사(三法司)라 하였다.
금부옥(禁府獄)은 의금부 구내에 함께 설치하였으며,
하느님의 종들 중에 정약종 등 지도층 신자들이 끌려가
신앙을 증거하였던 곳이 의금부다.
천주교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 중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임금의 특별한 명령으로 의금부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박해 당시, 이승훈(베드로, 1756-1801),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년), 조동섬 유스티노(1738∼1830) 등
많은 천주교 신자가 의금부에서 고초를 겪었고
대부분 이곳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54. 전옥서 터
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41 (1호선 종각역 6번출구 화단)
전옥서는 형조 아래에서 감옥과 죄수를 관리하던 관서입니다.
미결수를 구류하는 곳으로 형조에서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구금되었습니다.
조선 시대에 죄인을 수감하였던 감옥으로 문종 때 전옥서로 개칭하였다.
전옥서는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였다.
형조 예하에는 전옥서(典獄署) · 장예원(掌隸院)의 두 관서가 있었는데,
전옥서는 중부 서린방에 있었으며,
그 업무는 옥수(獄囚)를 관장하는 것이었으며,
장예원(掌隸院)은 공조 남쪽 서부 적선방에 있었으며,
그 업무는 노예의 장부 · 소송관계 등이다.
전옥서(典獄署)는 개국 초부터 영 · 승 · 사리 등의 관원을 두고,
죄인의 옥수(獄囚)를 맡아하던 관서로서
전옥과 함께 중부 서린방 즉 지금 서린동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후에
그 부근에는 전옥동 · 전옥계 · 전옥전동 · 전옥후동 등의
동(洞) · 계명(契名)이 생겨 전하였다.
전옥서에 수감되는 죄수의 대부분은 상민이었지만 때에 따라
의금부나 육조, 왕실의 계보를 편찬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였던
종부시, 사헌부 등의 죄인인 왕족이나 양반, 관리들도 수감되었다.
전옥(감옥)과 함께 풍수지리적으로 길지라는 중부 서린방(서린동)에 설치하였다.
당시의 전옥은 기결수(旣決囚, 이미 재판을 통해 형이 결정된 죄수)를 감금하는 경우가
사형 죄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고,
우선 피의자를 수감하여 공판이 있을 때 압송하고, 판결이 나면
유형(流刑) · 도형(徒刑) · 장형(杖刑) · 태형(笞刑) 등으로 구분하여 처벌하였다.
전옥서의 옥사는 남자 옥사와 여자 옥사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남옥과 여옥은 각각 담장이 둘러져 있고 각 담장에 출입문이 있었다.
또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분리 수용하도록 하였다.
박해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유관검 등이
형조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었다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강완숙 골롬바, 최필제 베드로, 김현우 마태오 등은
형조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에서 순교하였다.
기해박해 때에는 남명혁 다미아노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가
형조에서 심문을 받은 후 참수되었고,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4개월 동안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옥사하였다.
병인박해 때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전장운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 등은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전옥서 터 표지석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에 있다.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중에는
전옥서에서 강완숙 순교자의 위대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같은 날 9명의 순교자가 서소문 밖으로 끌려 나가 망나니의 칼 아래 쓰러졌다.
이 영광스러운 무리의 선두에는
이미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적이 있는 강 골룸바가 있었다. .....
오히려 그녀는 옥 안에서 그녀의 사도직을 계속하였고,
재판관들 앞에서까지 공자와 이 나라의 다른 철학자들의 글을 근거로
천주교의 신성함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증명해 보였다.
관리들도 감탄하여 그녀를 '유식한 여인', '유일무이의 여인'이라고 불렀으며,
기가 막힌다고 말하곤 했는데....."
55. 우포도청 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6 (광화문 우체국 앞 화단)
포도청은 조선시대의 경찰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좌포도청, 우포도청으로 한성부를 나뉘어 관할하였습니다.
좌·우포도청은 조선 중종 때 인 16세기 초
서울과 인근 지역의 포도와 순라를 담당하도록 설치한 기관으로,
임금 거동시의 호위를 맡거나
유언비어 유포, 위조 엽전 제조, 도박, 밀주 행위 등을 단속하였다.
포도청은 이후 350여 년간 존속되다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에 폐지되었으며, 이후 경무청으로 개편 되었다.
포도청은 죄인을 잡거나 다스리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었으나,
북산사건(北山事件)을 계기로 천주교 문제에 직접 관여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북산(즉 북악산) 아래의 계동에 숨어 지내던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거처가 밀고 되면서 시작되었다.
이때 좌포도청(좌포도대장 조규진)에서는 주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포교와 포졸들을 계동으로 급파했으나
지도층 신자들의 기지로 체포에 실패하고 말았다.
대신 신부 댁 주인 최인길(마티아), 밀사 윤유일(바오로)과 지황(사바) 등 3명을 체포하여
좌포도청에서 혹독한 매질로 순교에 이르도록 했으니,
이것이 을묘박해(乙卯迫害)이다.
을묘박해로부터 6년이 지난
1801년에는 신유박해(辛酉迫害)가 발생하였다.
박해령이 내려지자 조정에서는 양 포도청에 명하여
서울과 경기도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도록 하였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서 지도층 신자들은 형조와 의금부로 압송되었고,
남은 신자들 대부분은 좌·우포도청으로 끌려가
모진 문초와 형벌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신자들에 대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에 의한 처형은
주로 포도청의 옥에서 이루어졌다.
한국 성인 103위 가운데서도 23명이나 이곳에서 옥사했다.
즉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는 <순교자 일람표>에 따르면,
좌·우포도청의 옥에서 교수형이나 백지사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의 수가
형장에서 참수형이나 효수형을 받아 순교한 신자들보다 훨씬 많았다.
56. 경기감영 터
서울시 종로구 새문안로9 적십자병원 정문 옆 (서대문역 4번출구)
경기도 도청이라 할 수 있는 경기감영은 조선시대 외관(外官)의 하나로서
경기감사 또는 경기관찰사가 있던 관아입니다.
경기지방의 신자들은 서대문밖 반송방에 위치한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형벌과 문초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종 조용삼 베드로가 옥중에서 세례 받고
신자들을 감동시킨 순교 터
조용삼 베드로는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나
집이 가난한데다가 몸과 마음이 모두 약하였고,
외모 또한 보잘 것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만나면 비웃기만 하였다.
그는 여주에 사는 임희영(任喜永, ?~1801)의 집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교리에 대해서 들었는데,
이때부터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을 스승으로 받들고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조용삼 베드로가 아직 예비신자였을 때인 1800년 4월 15일,
그는 부활 대축일을 지내기 위해 부친과 함께
여주 정종호(鄭宗浩, 1752~1801)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중배(李中培, ?~1801, 마르티노),
원경도(元景道, 1774~1801, 요한) 등과 함께
대축일 행사를 갔다가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모진 박해로 마침내 굴복하여 석방되었으나
관청에서 나오다가 이중배를 만나게 되었고,
그가 권면하는 말을 듣고는 즉시 마음을 돌이켜
다시 관청으로 들어가 신앙을 고백하였다.
1800년 5월에는 양근 지역에서도
천주교를 배척하는 무리들이 신자들을 밀고함으로써
윤유오(尹有五, ?~1801, 야고보), 유한숙(兪汗淑, 일명 사겸, ?~1801) 등
7명이 체포되었다.
이때 체포된 양근과 여주의 신자들은 그곳의 옥에 갇혀 문초와 형벌을 받다가
10월에는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감사 앞에서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다음해 초에 신유박해가 일어나 곳곳에서 신자들이 체포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는 크나큰 시련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제주의 첫 순교자 김기량(金耆良, 1816~1867, 펠릭스 베드로)도
이곳에서 문초를 받은 적이 있었다.
뱃사람인 그가 중국에 표류하게 된 상황을 조사받았다.
표류 후 1858년 1월에 귀국한 뒤 그는
의주와 경기 감영, 강진 등에서 표류 전말에 대해 조사를 받았지만
의심할 만한 점이 아무것도 없어서 즉시 석방되었다.
첫댓글
정성과 사랑이 가득한
작품을 마중드립니다
대단하십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