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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37) 벤치에서 샌드위치를 먹는 주교
공원 벤치에서 샌드위치로 끼니 때우며 후원 호소
- 1979년 7월 독일 쾰른교구 방문 중 성체거동 행렬에 참가한 정진석(가운데 점선 안) 주교.
정진석 주교가 청주교구에서 사목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한 분야 중 하나는 사회복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 주교의 성소 못자리가 바로 보육원이었기 때문이다. 청년 정진석은 선종한 김영식 신부와 보육원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사제로서의 삶을 결심했다.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은 사제로서의 삶에 밑바탕이 돼 있었다.
정 주교가 큰 애정을 가진 곳이 바로 한국 가톨릭 특수학교의 효시이자 장애 학생들의 요람인 성심농아학교(현 충주성심학교)와 성심맹인학교(현 충주성모학교)다. 정 주교는 교장을 선임하면서 큰 고민을 하다가 1971년 2월 1일 성심농아학교 교장으로 강성숙 수녀를 임명했다. 특수학교뿐만 아니라 1971년 3월 14일에는 매괴여자중ㆍ상업고등학교 교장으로 정영금 수녀를 임명했다.
이 사건으로 충북 지역이 술렁거렸다. 1970년대 초는 여성이 학교장 같은 기관장에 임명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충청북도 교육감뿐 아니라 사제들, 그리고 도민들도 놀라워했다. 그러나 정 주교는 학교를 가장 잘 알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 교장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아이들을 향한 애정이 용기를 줬다.
그러나 용감한 주교도 가난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여파가 여전했던 가난한 교구의 교구장 정진석 주교는 또다시 하느님의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자식을 위해 길에 나와 구걸하는 어미의 심정으로 곳곳에 간절한 편지를 썼다. 특히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위해 설립한 성심농아학교와 성심맹인학교를 도와달라는 편지를 해외로 여러 번 보냈다. 학교 신축이 시급한 상황이었고 이왕이면 좋은 환경에서 아이들을 교육하고 싶은 소망이 있었다.
- 1979년 독일 쾰른 신학교에서 정진석 주교(가운데) 일행이 장인산(정 주교 오른쪽) 신부의 사제 수품 축하식을 마친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독일 구호기관에 원조 요청
‘야훼 이레’의 심정으로 편지를 보낸 곳 중에는 독일의 미제레오르(Misereor)란 곳이 있다. 미제레오르는 독일에서 인종, 종교, 국적, 또는 성별과 관계없이 인간의 권리를 침해당한 채 고난받는 사람들을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 파트너로서 도와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1959년에 설립된 구호단체다. 독일 미제레오르의 설립 배경에는 2차 세계대전 중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참회와 전후 원조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다.미제레오르는 긴급 구호보다는 ‘개발 지원’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그들은 특별히 6ㆍ25 전쟁 전후 복구 시기가 아닌 경제개발 시기에 우리를 도와줬다. 미제레오르 회원들은 사순시기 헌금과 후원 기금, 정부 지원금으로 기금을 조성해 제3세계 가난한 이들과 질병에 시달리는 빈곤계층을 위한 개발원조 사업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 교회에서는 1960년대 이후 20여 년간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농어민, 노동자, 도시빈민 단체들이 주로 지원을 받았다. 독일 교회의 미제레오르는 일시적 신앙쇄신이나 참회 운동 단체가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한 지속적 개발원조기관으로 발전해 오늘에 이른 모범적 사례로 꼽힌다.
정 주교의 편지는 독일 교회의 또 다른 해외원조기구인 미씨오(MISSIO)에도 보내졌다. 이곳은 주로 사목적 사업을 지원했다. 미씨오는 1990년대까지 한국 사제들과 신학생들이 유럽에 유학할 때 장학금을 제공함으로써 한국 교회가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곳이다.
1979년 정진석 주교는 마침 독일을 방문하게 됐다. 10년여간의 공부를 마치고 박사 학위를 받은 청주교구 장인산 신부의 서품식이 독일 쾰른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정 주교는 장인산 신부의 동생인 장인남 신부를 데리고 독일 쾰른에 가서 사제 서품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서품식이 끝나기 무섭게 독일 미제레오르 본부에 방문하겠다고 약속을 잡았다. 더 지체할 시간도,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약속 당일 정 주교와 장인산 신부 등 일행은 다 함께 미제레오르 본부로 향했다. 가난한 주교와 신부들은 직접 만들어온 샌드위치로 공원 벤치에 앉아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 미제레오르 본부로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해 이곳 직원들에게 가볍게 인사하니 직원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벤치에서 샌드위치를 먹던 동양 남자가 주교였다니!”
직원들은 선교지에서 온 정진석 주교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유럽 교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 주교는 아랑곳하지 않고 충주 성심농아학교 신축 기금 보조를 부탁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인데 교육 공간이 너무 낡아서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도와주세요.”
가엾은 주교의 간청에 그 자리에서 “예스(Yes)”라는 답이 나왔다. 정 주교는 무척 기뻤다. 이제 농아학교를 제대로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해외에서 전해진 온정의 손길
한국 교회는 실로 하느님의 사랑이 차고 넘친 교회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많은 단체가 세계 각국 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주요 선진국 교회가 한국에 보내준 실제 지원액 1538만 달러(약 175억 9000여만 원) 가운데 3분의 2는 미제레오르가 보내준 것이었다. 미제레오르의 원조는 사라호 태풍 수재민 구호부터 제주도 양모가공공장 건축, 부산 성모의원 건립, 한센병 환자 마을 양계사업, 북한강댐 건설 지원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하느님은 다른 이들을 통해 한국 교회에 자비의 은총을 거저 주고 계셨다.
[추기경 정진석] (38) 주님께 영광
스무살 된 청주교구, 신앙의 힘으로 한 단계 성숙
- 미사를 집전하고 있는 노기남(왼쪽부터) 대주교, 교황대사 루이지 도세나 대주교, 정진석 주교.
1978년은 정진석 주교에게 너무나 특별했다. 사랑하는 청주교구가 20년이 돼 어엿한 청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교구에 내려주신 은총에 감사하면서 설립 20주년인 1978년 11월 5일에 20주년을 기념하는 신앙대회를 개최하기로 계획했다.
5월에 열린 교구 사제단 총회에서 20주년 기념 신앙대회에 대해 논의하면서 기념 성당으로 무극성당을 건립하기로 했다. 또 10월 22일부터 11월 5일까지를 ‘신앙대회를 위한 특별 기도 기간’으로 선포하고, 이 기간에 ‘교회 발전을 위하여’라는 지향으로 교회 구성원이 다 함께 묵주기도 5단을 봉헌하기로 했다. 교회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는 ‘기도’라는 것을 정 주교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 주교는 한 가지를 더 제안했다.
“이왕이면 선교도 할 겸 청주체육관을 빌려 외부에서 대대적으로 행사하는 게 어떨까요?”
정 주교의 말에 준비하는 신부들은 난색을 보였다
“어이쿠! 주교님, 체육관에는 적어도 6000명이 참석해야 합니다. 우리 교구 실정상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만약 자리를 채우지 못해 휑하게 보이면 밖에 큰 망신이 될 수도 있어요!”
“여러 가지 시뮬레이션을 해보면 자리를 못 채울 수도 있어요!”
20주년 행사를 주교좌성당에서 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신중론도 많았다. 그러나 정 주교는 며칠 동안 고민하다 "지역사회에 선교하는 의미가 중요하니 청주체육관에서 해야 한다"고 결심을 굳혔다. 그래서 주제도 일찌감치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로 정했다.
목표가 생기면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법이다. 본래 계획은 조금 높게 잡아야 한다는 것이 정 주교의 지론이었다. 그리고 한번 결정한 다음에는 신부들을 설득하고 신자들을 격려했다. 정 주교의 강한 의지에 신부들도 마음을 모았다. 20주년 행사를 하는 당일 아침까지도 사제들은 최선을 다했다.
교구가 설립된 후 처음 있는 행사였기에 걱정도 많았지만 신자들에게는 자부심도 안겨줄 수 있는 행사였다. 사실 정 주교는 어떻게든 신자들을 모시고 와 교구의 20살 생일을 좀 알려보자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정 주교는 그날 그곳에 인파를 모아주실 분은 성모님이라 굳게 믿었다. 점점 그런 확신이 더 생겼다.
- 1978년 11월 청주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청주교구 설립 20주년 기념 신앙대회 전경.
드디어 1978년 11월 5일, 주일이 밝았다. 청주교구 곳곳에서 신자들이 행사장인 체육관으로 모여들었다. 청주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는 본당의 신자들도 팻말을 앞세우고 속속 입장했다.
행사 직전, 신자들이 얼마나 모였는지 궁금했던 정 주교는 식장 안으로 들어가 눈을 들어 관람석을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1층 플로어부터 2층 관람석까지 신자들이 꽉꽉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자들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구약성경에서 백성들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구절이 떠올랐다. 신자들의 밝은 얼굴과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 무엇보다 기뻤다.
청주교구 20주년을 기념하는 신앙대회는 오전 10시에 시작했다. 제1부 기도와 특별 강론, 제2부 축하 미사, 제3부 20주년 기념식 등 3부로 나뉘어 진행됐다. 이날 미사는 정 주교를 비롯해 주한 교황대사 루이지 도세나 대주교, 전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와 교구 사제단이 공동 집전했으며, 여기에 사제와 수도자, 신자 1만여 명이 참가했다.
강론 시간이 되어 정 주교는 강론대에 섰다. 체육관을 꽉 채운 신자들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의 자녀가 된 모든 신자는 그의 명령을 준수할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모인 것은 아직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므로 모든 신자가 다른 이의 모범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열심히 노력해주십시오.”
손뼉을 치는 신자들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감격에 겨워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고 찬미의 노래가 절로 나왔다.
밤이 되어 숙소로 돌아온 정 주교는 늘 그랬듯이 이날의 일을 자신의 일기장에 꼼꼼히 기록했다.
“10:00-18:00 청주체육관에서 청주교구 설립 20주년 기념 신앙대회, 10,000명 참석, 교황대사와 노기남 대주교, 김남수 주교….”
정 주교는 이날 참석한 지역장 여러 명의 이름과 직함을 한 글자 한 글자 눌러쓰며 이들을 잊지 않기로 다짐했다. 서울에서 온 이들과 합창단도 적어두고 감사를 표현하기로 했다. 정 주교는 일기를 쓰면서 일종의 안도감과 감사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그야말로 ‘야훼 이레’, 하느님께서 이끌어주시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보여준 셈이었다.
청주교구가 교구 설정 20주년을 기념해 건립하기로 한 무극본당은 ‘교구 최초로 외국의 도움 없이 교구 신자들의 봉헌금과 사제들의 성금, 타 교구 신자들의 후원금만으로 완공한다’는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동안 교구가 추진해온 ‘교구 자립 운동’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교구 모든 신자들은 본당 건립을 위한 물적 봉헌 운동과 함께 ‘묵주기도 10만 단 봉헌 운동’을 진행했는데, 본당 봉헌식을 앞두고 묵주기도가 30만 단을 넘어서게 됐다. 신자들의 한마음이 무극본당에 모였고, 그 상징과 같은 본당을 보며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무극본당 신자를 비롯해 청주교구 24개 본당 전 신자, 300여 명의 타 교구 사제들과 본당, 교회 기관ㆍ단체 등 전국적으로 많은 신자들이 성금을 보내왔다.
바오로 6세 교황은 본당 건축에 특별 강복과 함께 1만 5000달러(약 1700만 원)의 지원금을 보냈다. 교회 안의 관심과 사랑으로 6600㎡(2000평)의 사과밭을 정비해 드디어 건물을 올릴 수 있었다. 전체면적 443㎡(134평)에 약 7000만 원의 공사비가 투입됐다. 그리고 2년 후인 1980년 5월 5일 정 주교의 주례로 무극본당 봉헌식이 거행됐다.
이어 신축한 교구청사와 가톨릭회관도 개관했다. 교구 설정 2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한 교구청사 신축은 단순히 건물을 신축한다는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청주교구는 그때까지 본래 청주본당 사제관이었던 건물을 교구청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가톨릭회관의 개관으로 피정이나 교육을 마음껏 진행할 수 있게 돼 청주교구는 내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지는 발판을 마련했다. 정 주교는 이러한 기쁨의 순간을 신자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이 참으로 영광스러웠다.
[추기경 정진석] (39) 배티성지
잊힌 순교자의 땅 배티성지 살리기 박차
- 복원된 옛 성당. 가톨릭평화신문 DB.
전임 교구장이었던 파디 주교가 초창기 청주교구의 기반을 다지는 데 집중했다면 한국인인 정진석 주교는 기반을 다지는 데서 나아가 교구의 순교자들에게 애정을 쏟아부었다. 메리놀회 신부들은 전교에 전념하느라 순교자 영성까지 관심을 쏟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을 알고 있던 정 주교는 교구장에 임명되자 교구 내 순교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구교우 집안에서 자라난 정 주교가 순교자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신앙은 전수되어 내려온다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정 주교는 신자들에게 특히 순교자들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마침 교구의 이중건 신부가 정 주교를 찾아왔다. 군종 신부였던 그는 배티성지 출신이었다. 정 주교가 어린 시절부터 존경했던 사제 윤형중 신부의 저서 「은화」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배티성지였다. 정 주교에게는 괜스레 친근함이 드는 곳이었다.
군종에서 사목하다가 제대를 한 이중건 신부가 불쑥 정 주교에게 말했다.
“주교님! 저희 고향에 순교자들과 연관된 곳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그곳에 한번 같이 가볼까?”
- 배티성지 잔디광장에 건립된 최양업 신부 동상. 가톨릭평화신문 DB.
이전부터 궁금했던 곳이었기에 단번에 이 신부가 운전하는 지프에 몸을 실었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산 중이라 길이 사라져버렸다. 이 신부와 정 주교는 차에서 내려 더듬더듬 산비탈을 올라갔다. 곧이어 이 신부와 약속을 한 공소 회장이 나타났다. 그는 익숙한 듯 정 주교 일행을 안내하더니 이내 한 묘지 앞에 다다랐다.
“주교님! 이것이 순교자 묘입니다.”
정 주교는 깜짝 놀랐다. 묘가 어찌나 오래 방치됐던지 묘 옆에 커다란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정 주교는 선조들에게 면목이 없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후 장봉훈(현 청주교구장 주교)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진천본당 보좌로 임명됐다. 두 달 동안 보좌 생활을 하던 장 신부는 주임 신부가 떠나면서 진천본당 주임이 됐다. 정 주교는 장 신부에게 신신당부했다.
“이 근방이 성지니까 성지 개발에 관심을 가져줘. 우리 교회에 매우 귀중한 곳이야.”
장 신부는 정 주교의 애정에 버금가는 열성으로 성지 지키기에 나섰다. 그는 최양업 신부에 대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인 최석우 신부를 한달음에 찾아가 최양업 신부에 관한 자료를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러한 장 신부의 열성 덕분에 그동안 찾지 못했던 최양업 신부의 편지들까지 발견하는 큰 소득이 있었다.
- 1981년 9월 배티성지 순교자 현양대회 미사에서 강론하는 정진석 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 제공.
그런데 새로운 문제에 부닥쳤다. 라틴어 편지 원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어찌하다 보니 정 주교가 그 번역을 맡게 됐다. 정 주교는 뜻밖의 일이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최양업 신부의 편지를 번역했다. 임충신 신부의 의역본을 참고해 번역할 수 있었다.
탁덕 최양업 신부의 편지를 번역하면서 정 주교는 글의 첫 장에서부터 푹 빠져버렸다. 최양업 신부의 라틴어 문장은 그 구조나 표현에서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글씨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조금이라도 빨리 번역하고 싶은 마음에 정 주교는 일상 업무 시간을 피해 틈틈이 작업했다. 이른 아침이나 업무 이후 잠깐 짬이 나는 낮 시간, 그리고 퇴근 이후인 저녁에 번역 작업을 이어갔다. 한 글자 한 글자 번역하다 보면 어느새 정 주교 자신이 그 시대와 그 상황에 가 있는 특별한 느낌이 들었다.
날은 자꾸만 더워져 갔다. 당시엔 에어컨도 없었고 선풍기도 잘 틀지 않았던 정 주교는 땀을 뚝뚝 흘리며 작업에 몰두했다. 낮에는 땀이 흘러 원고지 종이가 손에 들러붙기 일쑤였다. 정 주교는 고육지책으로 새벽 3시에 일어나 번역에 매진했다. 어떤 날은 술술 번역이 잘 됐고 어떤 날은 단어 하나를 어떤 한국어로 번역할까 고민하다가 동이 튼 적도 있었다. 단순히 단어를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저자의 의도와 시대 상황, 역사와 풍속 등 모든 것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만 좋은 번역이 나온다는 생각에 당시 시대상을 공부하고자 꾸준히 노력했다.
또한 그는 국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국어를 정확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좋은 번역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전을 뒤적이며 조금이라도 정확한 단어와 바른 어법으로 글을 쓰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아름다운 문장을 쓴 최양업 신부에 대한 후손의 최대한의 예우라는 생각에서였다.
번역한 원고는 가장 먼저 최석우 신부에게 감수를 부탁했다. 그랬더니 얼마 후 김대건 신부의 원고 번역도 부탁한다는 전갈이 왔다. 선배 신부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정 주교는 그렇게 김대건 신부의 편지 번역도 이어가게 됐다. 그렇게 정 주교는 번역자로서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났다. 정 주교는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라고 믿었다. 이후 이 번역물들은 책으로 출판됐고, 많은 이들이 두 신부의 편지를 읽을 수 있게 됐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장봉훈 신부 조상이 최양업 신부의 복사였다고 한다. 그런 사연이 있던 장 신부는 자료 수집에도 큰 열성을 보였고 많은 결과를 냈다. 그런 도움으로 정 주교는 드디어 배티성지의 땅을 확보할 수 있었다. 신앙 선조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이후 청주교구는 유서 깊은 배티성지 성역화에 박차를 가했다. 한국 교회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현양하기 위해 최양업 신부 사제 서품 150주년을 맞은 1999년에는 양업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다. 이 연구소는 우선적으로 ‘하느님의 종’ 최양업 신부의 선교 활동과 신앙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현양 활동과 시복시성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
장봉훈 신부가 성지담당 사제로 사목하는 동안 주교로 부르심을 받았다. 정 주교는 최양업 신부 현양 사업에 앞장섰던 장 주교를 최양업 신부가 지켜주셨을 것으로 생각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