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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믿나이다] (48) Filioque(필리오케)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
-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신다”와 “성령께서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발하신다”는 신앙 고백은 성령의 발출에 관한 동·서방 교회의 교리적 차이가 아니라 표현의 차이로 교회는 받아들이고 있다.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는 성령’, 프랑스 불봉 생 마르셀랭 성당 제단화 일부,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이번 호에는 ‘Filioque’(필리오케, 그리고 성자에게서)에 관해 좀더 집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두 번째 보편 교회 공의회인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는 성령의 완전한 신성을 인정하면서 “성령께서는 성부에게서 발하신다”고 선포합니다.
문제는 이 신앙 고백문을 해석하는 데 있어 지역 교회와 교부 간에 표현의 차이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주로 동방 교회 지역에서는 성령께서 ‘성자를 통하여’(per Filium) 성부에게서 발하신다고 이해했고, 서방 교회는 ‘성자에게서’(Filioque) 발하신다고 이해했습니다.
“성령의 발출 방식과 관련해서 서방이 동방과 다르게 생각하게 된 것은 오랜 사고 과정의 결과였다. 물론 서방에서도 신적인 원천은 오직 성부 한 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5세기부터 7세기 사이에 사변적인 사고 과정을 거치면서 성자께서 성부에게서 태어나실 때 성부께서는 성자에게 모든 것을 전달하셨다(마태 11,27 참조)는 점이 강조되었고, 신적인 원천이 되는 것까지도 성자에게 전달하셨다는 견해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는 하나의 원천으로 간주되었다. 곧 성부께서는 본래부터 원천이시고, 성자께서는 성부로부터 전달을 받아서 원천이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서방에서는 성령의 발출과 관련해서 성부와 성자를 전적으로 동등하게 생각하면서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하신다는 이해에 이르게 되었다. 마침내 이런 입장을 담은 ‘필리오케’란 표현이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 삽입되었다.”(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올바른 성령 이해」 37쪽,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Filioque’에 관한 동·서방 교회의 논의를 좀더 깊이 들여다보겠습니다. “신경의 저자도 그것을 선포한 공의회 교부들도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발하신다’는 주장을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미 그 당시에 그리스 교부들 사이에서는 성령께서 ‘성부에게서 성자를 통하여’ 발하신다는 신학적 정식과 또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신다’는 정식이 사용되었다. 물론 이때에 동방에서는 두 가지 정식 중에 마지막 정식이 첫 번째 정식보다 덜 사용되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저자로 추정되는 에피파니우스는 직접 이 정식을 심지어 여러 번 사용했었다. 마찬가지로 피렌체 공의회는, 이 두 가지 정식들이 다양한 어감 안에서도 똑같은 신학적 내용을 표현하고 있다고 증명하였다. 가톨릭 신자이거나 갈라진 이교 신자이거나 동방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성자와 관련된 ‘Filioque’라는 삽입구가 들어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결코 알려지지 않은 채로 있게 된다.”(이냐시오 오르티츠 데 우리비나,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 277쪽, 황치헌 신부 옮김,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Filioque’는 아이러니하게 교회 일치를 가져다주지 않고 동·서방 교회를 갈라지게 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그 결과 1054년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동방과 서방 교회로 완전히 갈라지는 ‘동서 대이교(大離敎)’의 비극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이 비극을 치유하고 하나인 교회로 봉합하려 했습니다. 그 대표 사건이 1439년 2월부터 8월까지 개최된 피렌체 공의회입니다. 피렌체 공의회에서 서방 교회는 신앙 고백은 영구히 완결된 것이 결코 아니고 교의 발전 과정에서 역동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 근거해 신경에 새로운 것을 첨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모든 공의회는 신앙의 완전성과 통일성을 훼손하지 않고 신앙 고백을 새로이 정식화하고 첨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지요. 서방 교회 교부들의 이러한 주장에 반해 동방 교회 교부들은 ‘신경의 불가침성’을 고집했습니다.
마침내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한 동·서방 교회 교부들은 ‘성령의 발출’에 관해 일치된 의견을 도출해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은 ‘그리스도인들과의 일치’ 교령을 1439년 7월 6일 반포합니다.
“성령께서는 영원으로부터 성부와 성자로부터 계시고 그 본질과 그 자립적 존재를 성부와 성자로부터 동시에 가지고 계시며, 하나의 근원과 유일한 발출을 통하여 마찬가지로 영원으로부터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신다. 더불어 우리는, 거룩한 학자들과 교부들이 말하는, 곧 성령께서는 성자를 통하여 성부에게서 발하신다는 진술을 다음과 같은 이해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곧 성부와 마찬가지로, 성자 또한 그리스인들에 따르면 성령의 자립적 존재의 원인이시고, 라틴인들에 따르면 근원이시다. 그리고 성부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낳으시면서 성부임을 제외하고는 당신께 있는 모든 것을 그에게 주셨기 때문에, 성부에게서 영원으로부터 나신 성자께서는 몸소 이것을, 곧 성령께서 성자에게서 발하신다는 것을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갖고 계신다. 나아가 우리는 저 낱말의 해석, 곧 ‘Filioque’가 진리를 명확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그리고 당시에 절박한 필요성에서 정당하고 합리적으로 신경에 첨가되었다고 결정한다.”(덴칭거,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선언 편람」 385쪽,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회는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신다”와 “성령께서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발하신다”는 신앙 고백을 성령의 발출에 관한 동·서방 교회의 교리적 차이가 아니라 표현의 차이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10월 28일은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입니다. 시몬과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일원이었습니다. 이 두 사도는 열두 제자의 명단에서 항상 앞뒤로 소개되는데,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서는 유다 이스카리옷 바로 앞에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마르 3,18; 마태 10,3-4)이라 나오고, 루카 복음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루카 6,15-16)라고 나옵니다.
시몬에게는 “열혈당원”이라는 별명이 붙습니다. 우리말로는 같은 ‘열혈당원’이지만, 복음서가 쓰인 그리스어로 루카 복음에서는 [젤로테스] (ζηλωτής),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서는 [카나나이오스] (Καναναῖος)로 나옵니다. 이 두 단어와 관련해 엇갈린 주장이 있는데, 대부분 ‘카나나이오스’를 열혈당원이라는 뜻의 아람어 [케나나]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걸로 여깁니다. 반면, 일부 학자들은 이 단어가 종교심이 강한 열정적 자세 또는 광신자를 의미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시몬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 실제 열혈당원으로서 유다 민족주의 해방 운동에 가담하였기에, 이 별명이 붙은 걸로 봅니다. 열혈당원 시몬은 훗날 예루살렘의 주교로 활동하는 예수님의 친척 형제 시몬(마태 13,55; 마르 6,3)과 구별되는 다른 인물입니다.
성경에서 시몬에 관한 더 이상의 정보는 없습니다. 서방 교회 전승에 의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탄생 때 천사에게 구세주의 탄생 소식을 들은 목자 중 하나라고 합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집트에 갔다가, 유다 타대오와 함께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로 갔으며, 페르시아에서 함께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십자가형을 받았다고도 하고 톱에 잘려 순교했다고도 하여 그를 표현할 때는 십자가 또는 큰 톱이 같이 묘사됩니다.
유다 타대오는 주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과 이름이 같지만, 다른 인물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를 “야고보의 아들 유다”(루카 6,16; 사도 1,13)라고 소개하는데,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은 그 명칭 대신 “타대오”라는 이름을 사용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다식 이름과 함께 그리스식 이름을 갖는 일이 흔했으므로, 유다와 타대오는 동일 인물이라고 봅니다. 요한 14,22에 등장하는 “이스카리옷이 아닌 다른 유다”가 바로 “야고보의 아들 유다” “타대오”입니다.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르면, 유다가 유다서를 썼다고 전해지지만, 최근 성경학계는 단지 그의 이름을 빌린 ‘가명 작품’이라고 간주합니다. 그는 유다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고, 앞서 말한 바대로 시몬과 함께 시리아 등지를 다니며 복음을 선포하다가 페르시아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도 하고 참수되었다고도 하여 그를 표현할 때는 창 또는 도끼가 함께 묘사됩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34) 주교단과 그 단장인 교황, 「교회헌장」 제22항
「교회헌장」 제22항은 ‘주교단의 본성과 그에 따른 권한(potestas, 권력)’을 다루고 있습니다. 직무의 권한과 관련하여 중세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참된 몸 안에 있는 권한’(potestas in corpus Christi verum), 곧 성찬례와 관련된 ‘성사적 권한’이 우선이었고,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있는 권한’(potestas in corpus Christi mysticum), 곧 교회와 관련된 ‘다스리는 권한’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직무에 대한 개념이 변화되고 18항에서처럼 ‘거룩한 권력’이라는 표현이 나타나면서, 거룩하게 하는 직무, 가르치는 직무, 다스리는 직무를 포괄하는 양 떼를 돌보는 목자의 직무, 곧 사목적 직무가 중요시되었습니다.
22항의 첫 번째 단락은 주교단의 존재와 단체성에 관하여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을 “하나의 사도단”으로 부르신 것처럼,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과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이 서로 결합하여 구성된 단체가 “주교단”입니다. 이러한 주교단의 단체성은 예로부터 주교 서품 등을 통해서 주교들이 서로 유대하고 교황과 친교를 이루던 옛 규율과 교회의 중요한 사안을 공동으로 결정했던 세계 공의회들에서 드러납니다. 공의회는 주교단의 구성원이 되는 조건으로 “성사적 축성”의 힘과 주교단의 단장과 그 단원들과 이루는 “교계적 친교”를 말합니다. 성사적 축성이란 봉사 직무가 그리스도의 봉사를 대표한다는 의미이고, 교계적 친교는 봉사 직무가 다수의 주교들에 의해서 수행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두 번째 단락은 주교단의 권한 행사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먼저 공의회는 주교단이 단장인 교황과 함께할 때만 권위를 가진다고 말하는데, 왜냐하면 모든 목자와 신자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은 온전히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대리”이며 “온 교회의 목자”인 교황은 “최고의 보편 권력”을 가지며 이를 언제나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이’는 ‘마음대로’가 아니라, 복음을 기준으로 하는 권한의 자유로운 행사를 의미합니다. 주교단은 교도권과 사목적 통치권에서 사도단을 계승하며, 단장인 교황과 함께 보편 교회의 최고 권력의 주체가 됩니다. 다만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교황 없이는 그렇지 않으며, 교황의 동의가 있을 때만 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주교단의 다수성은 다양성과 보편성을 드러내고, 한 교황 아래 모여 있기에 단일성을 보여줍니다.
온 교회의 선익을 위한 주교단의 고유한 최고 권력은 세계 공의회(Concilium Oecumenicum)를 통해서 장엄한 양식으로 행사되며, 이 역시 교황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고 주재하며 확인하는 것은 교황의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교단은 교황과 함께 동일한 합의체적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나 그 단장인 교황이 요청하거나 승인하거나 자유로이 수락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언어] Salve(살베), Ave(아베)
“Salve, Regina!(살베, 레지나!)”, “Ave, Maria!(아베, 마리아!)”는 성가와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정말 많이 접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라틴어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Regina”와 “Maria”가 성모님을 나타내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Salve” 와 “Ave”가 어떤 뜻인지는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단어는 “즐기다”, “기뻐하다”, “샘솟다”라는 뜻을 지닌 “salvere” 동사와 “잘 지내다”라는 뜻을 지닌 “avere” 동사의 명령법으로 라틴어는 인사말을 명령법으로 사용합니다. “Ave!”는 만날 때, “Salve!”는 만나거나 헤어질 때 모두 사용할 수 있고, 헤어질 때만 사용하는 인사말은 “Vale!”입니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인사를 명령법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인사를 받는 사람이 참으로 기쁨이 샘솟는 축복의 삶을 살기 바라는 진실한 마음을 인사에 담았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나누는 인사는 물론이고, 미사 때마다 나누는 평화의 인사에도 나의 인사를 받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축복이 충만히 전달되기를 바라는 진심을 담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가톨릭교회의 성인으로 추대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나요? 김수환 추기경님을 성인품에 올리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던데,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까요?
성인품에 오르는 과정은 점점 좁아지는 사다리를 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최종 단계인 성인품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종, 가경자, 복자의 단계를 차례로 밟아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정한 시복시성의 과정은 크게
① 교구 단계 심사,
② 로마 단계 심사,
③ 시복 심사,
④ 시성 심사의 총 4단계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인 교구 단계는 자료 조사로 시작합니다. 해당 교구는 시성을 추진할 후보자의 성품과 덕행에 대한 자료를 모아, 교황청에 보내 검토받게 됩니다. 교황청에서 ‘장애없음’ 답신을 받으면, 교구 차원의 심사부터 본격적인 시복시성 과정이 시작되고, 후보자는 이윽고 ‘하느님의 종’이라고 불리게 됩니다. 현재, 김수환 추기경님은 이 교구 단계의 심사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 교구는 지난 9월 3일에 교구 차원의 심사를 진행할 법정을 열었습니다. 앞으로 1~2년에 걸쳐 진행될 심사를 통해, 교구에서 모았던 김수환 추기경님에 관한 자료나 증인들의 증언이 확실한지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 단계가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교구 단계에서 입증된 자료는 모두 교황청 시성부로 전달됩니다. 로마 단계의 심사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시성부에서 이 자료를 더욱 엄밀히 검토하게 되는데, 여기서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면 교황님께서는 후보자를 ‘가경자’로 선포하십니다. 순교자라면 직후에 곧바로 복자가 되는데, 그렇지 않다면 이제 시복시성은 시복을 위한 기적 심사 단계에 진입합니다. 이 단계에 도달한다면 김 추기경님도 기적 심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현재, 최양업 신부님이 이 과정 중에 계십니다. (순교 자체를 하나의 기적으로 인정하는 등의 예외 규정에 적용되지 않는다면) 기적 심사는 두 번 통과해야 하는데, 첫 번째 기적 심사가 동반되는 시복 심사를 통과한다면 ‘복자’가 되는 것이고, 한 번 더 기적 심사를 요구하는 시성 심사를 통과하면 ‘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현재 김수환 추기경님은 교구 단계의 심사가 시작되어 ‘하느님의 종’이 되셨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그다음 단계인 로마 단계의 심사를 끝내고 ‘가경자’가 되셨으며,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한 124위는 시성 심사를 기다리고 있는 ‘복자’이십니다. 마지막으로 김대건 신부님이 ‘성인’이신 것은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결과인 것입니다.
(교구 단계의) 심사에 앞서 모든 신자의 의견을 듣는 공시 절차도 병행합니다. 교황청 시복 절차법 “주교들이 행할 예비 심사에서 지킬 규칙” 제11조 나항에 따르면, “주교는 (시성을 청하는) 청원인의 청원을 자기 교구에서 공표하고, 모든 신자에게 그 안건에 관련된 유익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자기에게 제출하도록 권유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합니다. 따라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관련 정보를 가지고 있는 신자는 서울대교구 시복시성위원회를 통하여 제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의 참다운 제자의 모범을 보여준 김수환 추기경의 시복 추진 여정은 우리가 참다운 신앙인이 되어가는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김수환 추기경의 삶과 영성을 심화시키는 기도와 현양 활동에 적극적으로 함께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아울러 하느님의 종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시복 여정에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과 한국교회의 103위 순교 성인 및 124위 순교복자와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전구를 청합니다.
[가톨릭 신학]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이사 41,10)
맹자는 ‘생어우환 사어안락’(生於憂患 死於安樂)이라 했습니다. 번역하면 ‘우환에 살고, 안락에 죽는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어려움과 근심이 많을 때 분발하고 노력하고, 편안함과 즐거움 속에서는 오히려 나태해져 죽음에 이릅니다. 어려움이 사람을 성장시키고, 안락함은 사람을 퇴보시킨다는 말입니다. 물론 이 말은 늘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삶 안에서 절실함을 발견해야 하고, 그 절실함 안에서 또한 초연하고 당당하게 살길 바라는 말입니다.
인간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 고통을 느끼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다른 무언가를 갈구합니다. 동시에 욕망의 부재 역시 고통을 안겨줍니다.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을 때 권태가 시작되고, 권태는 결국 존재의 공허함을 마주하게 합니다. 권태가 일상이 되면 삶이 무의미해지고 결국 절망에 이르게 됩니다. 또한 인간 존재의 목적이 그저 행복이 되면, 그때부터 더 많은 불행과 고통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삶의 목표는 자기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하라는 것입니다.
윤리적인 삶은 결핍의 고통과 권태의 허무함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데, 윤리적 삶의 가장 적극적 형태가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하느님과 맺는 관계입니다.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유지하면, 인간은 똑바로 서는 것이 가능합니다. 유다가 저지른 가장 큰 죄는 스승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베드로를 포함한 모든 제자입니다. 유다의 가장 큰 죄는 절망입니다. 즉 죄에 대한 판단을 본인이 했고, 본인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 단죄했습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고, 오직 신앙만이 인간을 절망에서 구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절망’(絶望, 희망을 끊어버리다)하지 마십시오. 절망은 유다가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 즉 ‘경외’는 하느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경외하는 마음이 있을 때 신앙이 시작되고, 신앙이 우리에게 힘이 됩니다. 그리고 침묵은 하느님 경외의 첫 단계이자 지혜에 이르는 첫 단계입니다. 침묵은 듣는 것입니다. 신앙은 눈을 감아야 보이고, 귀를 닫아야 들립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요한 6,20)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과 함께한다면 이 세상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책임지실 것입니다. 그분을 알아보고 함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사입니다. 즉 그분의 말씀을 머리와 마음에 새겨듣고, 그분의 몸을 우리 안에 정성스럽게 모시는 것입니다. 미사는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며,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