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명칭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영화 한 편의 개봉으로 인해 지금 우리나라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치악산’이라는 영화인데요. 강원도 원주시가 치악산국립공원의 이미지 훼손을 우려하여 법원에 이 영화에 대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고 합니다. 영화 시작이 치악산에서 토막 난 시체를 발견했다는 괴담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이 영화가 실제 치악산 토막 살인 사건으로 오해되어 이미지가 훼손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원주시청 관계자들은 이같은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원주시는 법원에 제목 변경과 극중 ‘치악산’이라는 명칭의 대사 처리 삭제 및 묵음 요청을 신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원주시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기각했고 지난 9월 13일 영화가 개봉되었습니다. 영화 작품중 이렇게 지명이 영화제목이지만 배경이나 내용은 그 지명과는 별 상관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2019년에 개봉된 ‘가버나움’ 이라는 영화도 그런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이스라엘 땅 가버나움이 배경이 아닌 레바논의 도시 베이루트와 그 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영화입니다. 주인공인 자인이라는 소년은 열 살이라는 나이로 거리에서 배달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동생은 거리에서 껌을 파는 소녀였습니다.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우울하고 참혹한 도시 빈민의 삶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휘황찬란한 국제도시 베이루트에서 가장 어두운 도시빈민의 모습을 통해 ‘가버나움’이라는 명칭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생각 해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거점으로 사역하시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은 다메섹에서 이집트로 내려가는 무역로, 요단 동쪽의 도시에서 지중해로 건너가기 위한 교통로 중심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 도시는 이스라엘에서 여러 지역을 가는 사통팔달의 지역이며 가장 상업이 발달했고 갈릴리호수의 큰 항구가 만들어져 있어 어업과 무역업이 발달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중 대부분이 이 지역 사람이고 그들은 어업에 종사했던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무역이 발달했던 탓에 무역에 관련된 세금을 걷어들이던 관세청이 이곳에 있었고 관세청에 근무하던 세금공무원 마태도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가버나움은 로마군대가 주둔해서 치안을 유지했던 만큼 이스라엘의 여러 도시중 너무나 중요한 도시로 로마제국은 특별하게 생각했던 도시입니다. 외형적으로는 갖춰질 것을 다 갖춘 국제무역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는 주후 8세기 큰 지진이 일어나 완전한 폐허가 되었고 19세기 발굴되기 전까지 전혀 역사속에서 사라진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주후 1838년 미국 성경신학자이며 고고학자인 에드워드 로빈슨이 성경속에서 단서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추정되는 곳에 가서 폐허속에서 유적들을 발견하고 발굴작업을 진행했고 그 곳에 있던 회당, 베드로의 집터 등 신약시대 유적을 발견하였습니다. 현재 이곳은 예수님 당시의 마을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하여 수많은 성지순례객들이 찾는 유명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이 마을의 입구에는 ‘가버나움, 예수의 마을’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습니다. 왜 이 가버나움이 ‘예수의 마을’이라고 불려질까요? 그 근거로 볼 수 있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가버나움과 예수님의 관계를 발견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한 곳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4장 13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우리는 흔히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이적 포도주사건을 기억하면서 가나 혹은 나사렛이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점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공생애가 이 가버나움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일은 예수님의 공생애중 첫 번째로 고향을 방문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요청으로 가나의 친척 결혼잔치를 방문했을 때 있었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지 그것이 공생애 시작을 알린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고향 나사렛 사람들로부터 배척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어떤 사람이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외쳤고 예수님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고향사람들은 메시지보다 예수님의 육신적 신분, 예수님의 육신적 혈연관계의 사람들에 집중하며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이런 사람들 보며 예수님께서는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받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서 생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공생애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둘째로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사역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을 거점으로 복음을 전하며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과 누가복음 7장에 기록된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었던 곳, 열병으로 앓아누운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신 곳이 가버나움입니다. 또한 이 곳에 살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사건이 마가복음 1장, 누가복음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9장과 마가복음 2장에는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고친 사건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3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얼마나 많은 기적과 권능을 이 곳에서 행하였는 지 그 악한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 사람들이 이런 기적을 체험했다면 제 빨리 회개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며 또 하나 생각되는 것이 없습니까?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제일 많이 볼 수 있었던 곳임에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앞에 말씀드렸던 그 많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 예수님의 수 많은 기적들을 보고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가버나움입니다. 일들과 기적들을 행하셨음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방금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저주하신 것처럼 가버나움은 천 여년동안 흙속에 묻혀 존재조차 잊혀진 채 폐허로 남아있던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여 사역의 중심지로서 ‘예수의 마을’로 불려졌던 가버나움, 그 곳은 축복과 비극이 공존했던 신비한 땅입니다. 복과 저주가 함께 하는 신기한 땅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의 가버나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신앙적 교훈을 깨닫고 우리 또한 축복의 삶을 살 것인지, 저주와 비극의 삶을 살 것인지 우리 자신의 신앙,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하게 된 가버나움, 첫째로 예수님께서 그 곳에 사셨기에 축복의 땅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세례요한이 잡힌 후에 우리 주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며 공생애를 시작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등장하여 활동했던 세례요한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오심을 증거하며 메시아 사역을 준비하게 하신 마지막 선지자였습니다. 마지막 선지자 요한이 감옥에 투옥되어 활동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구약부터 존재하며 오실 메시아를 준비하였던 선지자가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세례요한이후로는 이젠 이 땅에 선지자는 존재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할 일을 다 했고 이제 메시아가 등장하는 것으로 선지자의 역할과 존재필요성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와 광야시험을 통해서도 완전히 하나님의 아들, 오실 메시아로서의 활동에 대한 준비가 다 되었음을 보여주셨고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이 사역의 출발점이 바로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을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하게 된 말씀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마태복음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가버나움을 공생애의 시작점으로 염두해두시고 계획을 가지고 가버나움에 가신 것이 아닌 듯한 뉘앙스의 말씀이 기록된 것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4장 12,13절을 같이 다시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이 갈릴리로 물러가셨습니다. 여기서 ‘물러가셨다’는 말은 잠시 피신했다는 말씀입니다. 왜 피신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잡혀서 고난받는 것이 두려워서 피하셨을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아직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공생애도 시작하지 않은 때, 아직 복음의 구체적인 선포도 하지 않고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잡히고 고난받으면 정말 이상한 상황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한 목적을 위한 어떤 과정도 시작하지 않은 때였습니다. 아직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행하실 일을 위해 잠시 물러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잡힌 후에 고향 나사렛으로 피신하셨고 다시 그 곳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왜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지 않고 가버나움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였을까?’라는 궁금증을 가지고 예수님의 움직임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궁금증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을 가버나움에서 하게 될 것이 구약의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예언되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서북쪽에 있는 해변 마을로 납달리 지역에 속했고 스불론에서 멀지 않았습니다. 이 가버나움은 창세기때부터 특별히 강성할 땅, 축복된 땅으로 예언되어 졌습니다.
창세기 49장 1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이 말씀을 보시면 야곱이 스볼론에 대해 예언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예언에 “해변에 거주하며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에서 지칭하는 해변이 바로 가버나움입니다. 그 곳은 배 매는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 해변에는 배를 맬 수 없죠. 항구여야 배를 맬 수 있습니다. 배가 정박할 수 있는 부두를 만들어야 하는 곳입니다. 갈릴리호수중 배를 맬 수 있는 곳이 몇 곳 되지 않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가버나움입니다. 특별히 스볼론이 차지하게 되는 땅이 바로 이 가버나움 근처였다는 사실도 이 해변이 바로 가버나움이라는 근거가 될 것입니다. 스볼론지파가 차지했던 땅이 이스라엘지도상으로 볼 때 갈릴리지역이라는 사실은 구약성경 여호수아서의 땅 배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갈릴리지역에서 복음의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곳에서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이뤄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가운데 이뤄졌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 14절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예수님께서 갈릴리지역 가버나움으로 가신 이유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이뤄지는 과정에 말씀과 부합된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라는 번역의 헬라어 원어는 “히나 플레로테 토 흐레덴”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에 ‘이루려 하다’라는 말씀의 헬라어는 ‘플레로테’라는 단어입니다. 수동태가 쓰여졌습니다. 영어 번역을 보면 “might be fulfilled”라고 쓰여 있습니다. 한글로 직역하면 ‘이루어지도록 되어졌다’는 뜻입니다. 신약 마태복음 기자인 예수님의 제자 마태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역을 시작하게 된 것이 600년 전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이뤄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행하신 모든 일은 예언하신대로 행하신 순종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구약에 예언되어진 그대로 이 땅에서 행하셨습니다. 그 계획속에 가버나움이 있었고 그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시작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이 땅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메시아가 처음 사역하신 곳, 사역의 시작이 되신 곳 그 곳이 바로 가버나움이라면 그 땅은 얼마나 은혜의 땅입니까? 그 곳은 얼마나 축복받은 곳이겠습니까? 이런 가버나움의 축복은 저와 여러분이 받은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시는 곳,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은 놀라운 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계신 그 곳이 축복의 땅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그 곳이 은혜의 땅입니다. 나사렛 예수님 고향 동네에서는 그 축복을 수용하지 못하고 거부하면서 복을 차버렸습니다. 하지만,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사역할 수 있는 환경으로 예수님을 받아드렸고 예수님께서는 그 곳에서 축복된 귀한 기적을 행하시고 은혜의 말씀을 선포하며 예수님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도 예수님을 모셔서 복된 삶, 복된 땅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하게 된 가버나움 두 번째로, 가버나움은 원래 어두움과 비극의 땅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5,16절입니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구약성경에 보면 갈릴리호수주변 지역을 차지한 이스라엘의 지파는 스볼론과 납달리였습니다. 이 갈릴리지역에 대해 이스라엘백성들은 이방의 갈릴리라는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갈릴리지역은 사마리아와 비슷한 느낌으로 조금 소외되는 느낌이 있고 사람들에게 무시받는 지역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구약성경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이후 앗수르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방인들이 많이 거주하게 된 지역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은 유대인 혈통과 종교적 정통성을 지키기 쉽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시대부터 지금까지 무시받던 이방의 갈릴리 지방에서 빛이 되시는 메시아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지방은 이방의 갈릴리로 불렸습니다. 가버나움을 비롯한 갈릴리지역은 북쪽 이방민족으로부터 침략을 자주 받았고 오래전부터 이방인들이 들어와 살고 있었던 지역입니다. 그래서 갈릴리지역은 이방의 갈릴리로 불렀고 그 곳에서는 절대 메시아가 날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무시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4장 16절에서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라고 표현합니다. 이 구절에서 가버나움을 포함한 갈릴리 해변지역을 표현한 단어를 한 번 살펴 보십시오. “흑암” “사망” “그늘” 여러분, 이런 단어를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이 땅의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땅, 어느 한 곳이라도 ‘흑암’이 아닌 곳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인간이 살아가는 그 곳중 어디 ‘사망의 땅’이 아니며 그늘이 아닌 땅이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 가버나움을 비롯한 갈릴리 지방은 이스라엘 백성들중에서도 특히 그런 땅으로 여겨졌던 곳입니다. 이 땅은 소망이 사라진 절망의 땅입니다. 그 땅은 그냥 괜히 가고 싶지 않은 땅입니다. 그 땅은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는 땅이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인 윤동주는 일제 치하의 억압에 질려 어둠 속에 놓인 자신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라고 말입니다. 일본이라는 강제 점령국의 억압속에 나라의 상황이 칠흑같은 어둠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실적 모습과 내면적 분위기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론에서 ‘가버나움’이라는 영화에서 레바논 베이루트의 도시모습속에 숨겨진 빈민가의 모습에서 가버나움을 표현했다고 했는데 마치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이라는 도시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가버나움의 내면 모습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 무역항중 하나, 내륙의 큰 호수에서 내지교통의 중심지, 이스라엘의 최고 상업도시중 하나로 가장 큰 도시중 하나였지만 그 곳은 ‘타락한 땅’, 그 곳은 ‘어둠의 땅’, 그 곳은 ‘사망이 지배하는 땅’이었습니다.
이런 영적 타락을 표현한 것이 마태복음 11장 23,24절이었습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소돔에 비유하며 소돔이 오히려 나았다고 표현하실 때에는 가버나움의 영적인 타락과 사회적인 부도덕, 처참한 백성들의 삶은 오히려 소돔보다 심하면 심했지, 소돔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이라는 영화에서 왜 이스라엘의 ‘가버나움’이 공간적 배경이 아니라 레바논 베이루트의 뒷골목 빈민촌의 처참한 환경이 공간적 배경이 되었는 지를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해서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영화제목 ‘가버나움’이 보여주는 성경적 의미, ‘가버나움’의 어두움, ‘가버나움’의 그늘, ‘가버나움’의 사망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경제적으로 잘 살고 아무리 교통이 잘 되어 있고 아무리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곳, 가장 번잡하고 가장 문명이 발달한 곳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면 그 곳은 ‘사망의 땅’입니다. 인간의 의지를 통해 개발하고 인간의 문명으로 호화찬란한 생활을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곳은 ‘멸망의 땅’입니다. 아무리 인간적 편의가 제공되고 생활이 편한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살아간다면 그 곳은 ‘어둠의 땅’, ‘그늘이 있는 땅’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어떤 기준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좋은 곳인지 나쁜 곳인지 판단하십니까? 내가 잘 먹고 잘 살고 내가 편안하게 살면 그 곳이 좋은 곳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중 가장 편하고 이스라엘중 가장 개발되어 있고 이스라엘중 가장 교통요충지였던 그 곳이 ‘사망’, ‘죽음’, ‘어둠’, ‘그늘의 땅’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참 아름다운 땅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하게 된 가버나움 세 번째로 깨닫게 되는 것, 회개를 통해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첫 번째로 선포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시며 공생애 첫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직접 쓰지 않기 때문에 하늘나라, 천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뜻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관심과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어주시는 참 구원의 목표는 바로 하나님 나라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지배하는 곳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시면 그 곳이 하늘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 주권자가 우리 주 예수님이시면 우리 가정이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직장이 우리 주 예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있으면 그 곳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이 나라와 이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속에 우리 주님이 주인이신 것이 이뤄질 때 이 나라, 이 사회도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공생애가운데 가장 먼저 선포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4장 17절을 다시 같이 읽겠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복음’,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이 말씀을 저와 여러분이 주의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가는 곳마다 천국을 말씀하셨습니다. 천국 즉, 영어로 “kingdom of Heaven”은 유대인들에게 깊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되는 이 말씀이 유대인들에게는 하늘나라, 천국이라는 표현이 더 와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생애기간동안 이스라엘에서만 사역하였던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하셨습니다. 한글 번역으로는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엥기켄”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한글로 직역하면 ‘가까이 왔다’는 의미보다는 ‘이미 이루어졌다’. ‘이미 임하였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현재 완료시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다는 사실을 사역중에도 분명히 여러 번 선포하시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17장 20,21절을 보시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찬송가 438장에 보시면 이런 가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우리는 죽어서 가는 곳, 천국만이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직은 그 천국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고 가까이 할 수 없다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미 우리가운데 천국이 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이 임재하시는 그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를 경험하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가 이 땅에서도 그 나라에서 살아가는 은혜를 체험하도록 하시기 위해 우리 주 예수님께서 오셨고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선포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관심은 여전히 지옥에 살며, 여전히 어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여전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도는 영혼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은혜, 하나님 나라의 기쁨,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십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회개하는 일입니다. 회개는 이전의 내 생각, 이전 나의 삶, 나의 잘못된 가치관과 나의 잘못된 행동을 뉘우치며 삶의 방향을 180도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살아가며 세상에서 가져다주는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우리들이 이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며 천국소망을 가지고 은혜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파묻혀 죄의 종노릇하며 세상의 습관을 따라 온갖 악한 생각과 악한 말과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을 다 회개하며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만 바라보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생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 여전히 세상속에서 살아가지만 이제는 우리의 가치관을 바꿔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말과 행동을 바꿔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천국백성이 되어지고 우리에게 임한 하늘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를 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가버나움을 변화시키시고 가버나움의 영광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보여주신 하나님의 위대한 뜻가운데 우리의 삶이 천국백성의 삶으로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회개의 삶을 살아갈 때 가버나움의 축복이 임하고 저주는 사라지게 되는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한 회개의 경험, 회개를 통한 천국 백성의 역사, 회개이후에 이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기쁨이 넘치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보여주는 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가버나움은 비록 아픔의 땅이지만 본래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속에서 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버나움을 보며 ‘그늘진 죽음의 땅’이라고 표현하며 회피했지만 그 땅에 우리 주님이 임하셨을 때 그 땅은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위대한 땅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거점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가버나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에게, 또 우리나라 우리 대한민국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많은 선교사들을 보내주셨습니다. 흑암에 살아가는 백성, 어둠과 좌절로 죽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은 빛이고 생명이었습니다. 복음의 빛이 우리나라를 살렸고 이렇게 잘 사는 나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우리 개인적으로도 사망에 매이고 그늘에 앉아 있던 저와 여러분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주셨고 그 복음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 우리 예수님께서 찾아온 가버나움이 바로 축복의 땅, 구원의 땅, 생명의 땅, 빛이 있는 땅이 된 것처럼 우리에게 우리 주님이 임하실 때 우리는 복을 받고 구원을 얻고 생명을 소유하고 빛가운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 여전히 어둠속에 살아가며 사망의 그늘에 앉아서 절망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가셔야 합니다. 이들에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이들이 우리처럼 하늘나라의 평안을 누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은혜를 누리고 힘든 환경속에서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기쁨이 충만한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가버나움에 찾아오신 예수님, 우리의 삶가운데 찾아오신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변의 어둠, 절망, 사망, 그늘에 매여 하루하루 무거운 삶의 짐을 지고 살아가는 분들을 생각하며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도록,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저와 여러분도 진정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매일매일 회개의 삶속에 예수님과 동행하시는 은혜의 인생이 되도록 기도하며 천국의 기쁨이 늘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