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인 것과 문학 – 정태용 (1963)
유종호 씨와 한국적인 것, … 유씨의 글을 요약하면, 한국적인 것은 전통적인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불란서는 전통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것이 곧 불란서적인 것이지만, 한국은 신문학을 외국에서 도입하여 전통이 없는 나라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것이 곧 한국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일반(여기에서는 주로 최재서씨의 의견이 인용되어 있다) 사람들이 말하는 한국적이란 것은 「운명의 영탄, 애수의 가락」(이태준, 정지용), 그리고 농촌을 배경으로 한 아니미즘이나 샤마니즘의 세계상을 간직한 비근대인, 토속적 제습속(김유정, 김동리) 등인데, 이것은 『우리 문학의 방향을 암시하는 지도이념이 될 수가 없다.』 따라서 문학에 있어서 한국적이란 것은 다른 것에서 보다도 『발상법이나 표현양식에서 구해야 하겠고, 세계 안에서 「유니크한 개성」을 가진 발상법같은 것이 생길 때까지는 당분간 한국적인 것을 얘기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한국적인 것을 찾다간 「국수주의적인 허상」이나 만들게 된다 –로 간추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유씨의 말을 들을 때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그가 우리에게는 전통이 없고 불란서에는 전통이 있다고 했을 때 그 전통이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즉 그는 불란서의 전통은 근대 이후 현대에 이르는 사이에서 찾았음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그것은 근대와 봉건사회와의 사이에서 찾으려 했다는 점이다. 만일 불란서에서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근대와 봉건사회와의 사이에서 전통을 찾으려 했다면 거기에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전통이 없었을 것이 아닌가? 불란서의 고전주의도 그리스나 로마의 과거에서 온 것이지 불란서의 것은 아니다. 또 낭만주의도, 자연주의도, 상징주의도 불란서의 과거(봉건사회)와는 그다지 전통적인 연결이 없다. 그렇다고 몰리에르, 라시느, 빅토를 위고, 에밀 졸라, 플로베를, 발자크, 보들레르, 램보, 말라르메 등을 불란서적인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불란서적인 것이 전통적인 것이라는 명제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둘째로, 불란서의 전통이 인간탐구나 대화정신에 있다면 그것이 곧 불란서적인 것인데(불란서에서는 전통적인 것이 곧 불란서적인 것이니까) 한국에서는 왜 한국적인 것을 인간탐구나 대화정신 같은 데서 찾아서는 안되고 유독 표현양식이아 발상법에서만 찾아야 되는가이다. 이것은 물론 일본 川端의 작품 《설국(雪國)》(그것도 외국인이 그렇게 지적해 준 것)에서 유추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다면 각국이 민족적인 것을 찾는 데 있어서도 동양과 서양에 있어서는 그 테두리를 달리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민족적인 것은 결국 전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불란서에서는 그 전통인 인간탐구나 대화정신의 불란서적인 것을 찾아야 하고 일본에서는 그 전통인 발상법이나 표현양식에서 그 민족적인 것을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물론 유씨는 한국에서만은 전통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이에 반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만은 세계의 예외이며 학문의 예외란 말인가? 그리고 일본도 신문학 즉 근대문학은 전통적인 것이기보다는 서구에서 도입한 것이므로 한국과 사정이 다를 것이 없는데 어찌하여 한국만이 예외인가? 또는 전통적인 것이 곧 민족적인 불란서나 기타의 나라에서는 민족적인 것이 인간탐구나 대화정신에 있고, 일본이나 한국과 같이 근대문학을 서구에서 도입한 나라들은 민족적인 것이 발상법이나 표현양식에만 있다는 말인가?
셋째로, 일반 사람들이 말하는 한국적이란 것이 『우리 문학의 방향을 암시하는 지도이념이 될 수가 없어서』 유씨가 거부한다면, 발상법이나 표현양식에 있어서의 지도이념이란 과연 무엇인가? 발상법도 지도이념에 합격 못하면 한국적인 것에서 제외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니크한 개성」의 발상법이나 표현양식이 아직도 우리에게 없다면, 그것은 언제 있을 것인가? 또 고시조나 고대소설이 실상 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만의 유니크한 개성적인 발상법이나 표현양식이 아니고 또 어디에 그런 유래가 있는 것인가? 「한토고사(漢土故事)나 한문의 전거투성이」 때문이라면 〈정읍사〉나 〈처용가〉 등은 유니크하지 않는가?
넷째로, 한국적인 것을 발상법이나 표현양식에서 찾아야 한다면, 그 한국적인 것의 토론은 당연히 유니크한 발상법이나 표현양식의 발견이 되어 세계문학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개성으로서 백철씨가 주장하는 해외수출이나 노벨상 획득도 가능할 일인데 유씨는 왜 그것을 당분간 얘기하지 말자고 하는가? 실상 유씨에게는 한국적인 것이 발상법이나 표현양식에 있는 이상 어찌하여 한국적인 것의 토론이 국수주의적인 허상을 조작함이 되는 것일까? 오히려 그것을 토론하면 할수록 국수적인 허상을 적극적으로 깨뜨리고 유니크한 개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데 왜 이것을 회피하는 것일까? 아직은 유니크한 발상법이나 표현양식이 없으니 유씨가 그것을 창안해 낼 때까지 몇 십년 백년 또는 천년이 걸리더라도 기다리라는 말인가?
다섯째로, 전통적인 것이 민족적(한국적)인 것이 아니라면 반만년 역사 속에서도 아직 우리나라에는 한국적인 것이 없는 것일까? 그러면 한국적인 것은 한국에 있지 않고 세계 어느 곳에 가서 찾아야 하며 한국은 이날까지 한국적인 것을 만들지 않고 ‘어떤 적(的)’인 것을 만들어 왔단 말인가?
여섯째로, 「물레방아」 「밀밭길」 「갈보」 「질화로」 「나그네」 등이 한국적인 것이나 그것이 고대소설이나 고시조에 있지 않고 「극히 최근」에야 문학에 등장했기 때문에 전통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 되지 않는다면, 세월이 흘러서 백년이나 천년이 지나면, 이것도 전통적인 것이 되어서 유씨의 진리는 사상누각처럼 부서져 버려야 한단 말인가?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을 지난 과거의 것은 모조리 전통이 된다면, 일제말기 소위 국민문학(國民文學)이라고 하여 일부인이 일어(日語)로 쓴 시 소설 평론들도 기백년 기천년 후에 우리의 전통으로 군림하게 된단 말인가?
일곱째로, 고대소설이나 고시가 우리의 전통이 된다면 그것은 「한토고사나 한문의 전거투성이」로서 되는 것이고 다른 면에서는 되지 않는 단 말인가? 그래서 남구만이나 황진이 시조는 전통이 못된 단 말인가? 또 남구만, 황진이의 시조는 전통이 되나 토착어의 세계는 우리의 지도이념이 되지 않아 한국적인 것이 못된다면, 한국적인 것이나 지도이념은 외래어문화라야만 되고 어찌하여 토착어는 안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문화어나 토착어가 이 시대의 지도이념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또 황진이, 남구만의 시조가 가지는 세계가 정신을 찬미하며 부지런하고 행복한 농촌을 이룩하려는 오늘 우리들에게 왜 지도이념이 되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하여 아니미즘이나 샤마니즘도 이를 토착어로 쓰지 않고 외래어나 문화어로 쓰면 지도이념이 되며 우리들의 소설도 그래야만 오늘날 지도이념에 합격되고 비로소 한국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상 일곱가지 질문에 대하여 유씨는 한국에 한국적인 것이 없다는 무지에서가 아니라, 한국에만 한국적인 것이 있다는 진리로서 분명히 해명해주기를 바란다.
황진이
동짓날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버혀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임 오시는 날 밤이여든 굽이굽이 펴리라
남구만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 놈은 상기 아니 일었느니
재 너머 사래 긴 밭은 언제 갈려 하느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