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 우레웨라 1,100m 위에서 본 호수는 ‘하늘 궁전’
와이카레모아나호수 트레킹은 46km 구간을 3박 4일 혹은 4박 5일 동안 걷는 코스로 짜여 있다. 호수의 반을 산길 따라 물길 따라 걷게 된다. 오네포토만이나 호푸루아히네 선착장(Hopuruahine Landing) 둘 중 한곳에서 출발하면 된다.(대다수 등산객은 오네포토만에서 시작하고, DOC도 그렇게 권한다.) 초보 등산가인 나는 이번에도 예외 없이 충실하게 DOC 안내에 따랐다. 4박 5일을 택했다.
두 시간 넘게 발걸음을 위쪽으로 향해
첫날 일정은 오네포토만 대피소에서 파네키리 산장(Panekiri Hut)까지 걸어야 하는 9km, 4~6시간 구간이다. DOC가 다른 곳보다 두 시간이나 여백을 둔 이유는 등산객 역량에 따라 난이도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도 여섯 시간이면 되겠구나’, 하는 안도를 했다. 그 ‘안도’는 나중에 나를 실망하게 했지만 그래도 뒤돌아보면 어려운 고비를 잘 넘어섰다는 자부심을 갖게도 해 주었다.
처음에는 평범한 오르막길로 시작됐다. 공동묘지가 있던 작은 마을도 보였고 저 멀리로는 와이카레모아나호수도 눈에 들어왔다. 반 시간 정도나 걸었을까. 갑자기 길이 급경사로 변했다. 한눈에 봐도 끝없는 오르막길인 게 분명했다.
두 시간을 넘게 발걸음을 위쪽으로 향해야 했다. 5분 걷고 쉬다가 3분 걷다 쉬는 쪽으로 마음을 잡았다. 그래도 오르막길은 끝이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힘을 다해 테 우레웨라 숲을 헤쳐 나갔다. 그사이 어떤 고갯길에서 나는 주저앉았다. 갑자기 종아리에 쥐(경련)가 난 것이다. 배낭을 풀 사이도 없었다.
갑자기 다리에 쥐가 나…한국 학생 도움으로 회복
철퍼덕 누워 다리를 하늘로 뻗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참나무 장작처럼 딱딱하기만 한 종아리는 삼각형 꼴을 한 채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때마침 반대편 길에서 한 무리의 학생들이 내려오는 게 보였다. 나는 그들의 길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몸을 옆으로 틀었다.
인솔 교사와 학생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도와줄 게 없냐는 것이었다. 나는 “다리에 쥐가 났다. 조금만 있으면 괜찮아질 것이다.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일행 끝에서 걸어 내려오던 한 학생이 내게 다정스럽게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 사람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내가 그 곤란한 상황에서 왜 아니라고 했겠는가. 그 학생은 유창한 한국말(한국 학생이다. 뉴질랜드에 오래 산 한국 학생은 한국말이 어눌할 수도 있어 하는 말이다)로 내게 말을 건 뒤 처방을 해주었다. 축구 선수들이 다리에 경련이 날 때 팀 의사나 물리치료사가 해주는 식이었다. 다리를 하늘로 높이 들고 얼굴 쪽으로 힘차게 밀어주는 방법이다. 그걸 몇 분 정도 하니까 신기하게도 경련이 사라졌다.
아쉽게도 길 가던 나그네에게 선행을 베푼 그 신사 학생의 이름은 잘 모른다. 그저 타우랑가(Tauranga) 인근에 있는 베들레헴 칼리지(Bethlehem College)에 다니는 학생으로만 알고 있다.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설립된 이 학교는 학생들, 특히 한국 학생들에게 교육을 잘했다. 산속에서 ‘사마리아 사람’(신약 성경에 나오는 비유)을 만나거든 절대 외면하지 말라는 말을 제대로 지킨 것이다.
트랙 길, 다른 올레길에 견줘 더 자연(?) 그대로 유지
참, 산에서 걷다가 쥐가 날 경우를 미리 대비하는 방법 두 가지를 알려준다.
하나는 평소 마그네슘 알약을 하루에 두세 알 먹어 두면 좋다. 축구 선수 같은 운동선수들이 많이들 그렇게 한다. 또 하나는 발뒤꿈치를 들어 올리는 운동을 하루 50번 정도 하는 것이다. 기체초 같은 계통에서는 널리 알려진 요법이다.
참고로 나는 그 뒤 뉴질랜드의 위대한 올레길을 여러 곳 다니면서도 다리에 쥐가 나서 고생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두 요법을 적절히 잘 써왔기 때문이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다리에 쥐가 난 김에 좀 더 쉬었다. 억지로 간식 시간으로 만들었다. 앞서 넌지시 언급한 것처럼 와이카레모아나호수 트랙 길은 다른 올레길에 비해 더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정비나 관리가 부실하다는 뜻이다. 나무 계단길이 꼭 있어야 하는 길도 그대로 두는 식이다. 초보 등산객의 불평은 이 정도로 줄인다.
쥐와의 싸움을 끝내고 다시 오름 행을 이어갔다. 다리에 힘이 시나브로 빠져갈 무렵 갑자기 시야가 환하게 열리는 것을 느꼈다. 와이카레모아나호수 트랙 첫날 일정의 절정인 파네키레 절벽(Panekire Bluff)에 다 온 것이다.
파네키레 절벽, ‘댄싱 온 더 클리프’ 공연장으로 제격
이 절벽의 위 공간은 작은 공연을 펼쳐도 될 정도로 넓은 모래 바윗돌(sandstone, 사암)로 되어 있다. 족히 어른 열댓 명은 신나게 춤을 춰도 될 것 같았다.
‘댄싱 온 더 클리프.’(Dancing on the Cliff. 절벽 위에서 멋진 춤을.)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은가. 하지만 발 한번 잘 못 디디면 10분쯤은 아래로 날아가 호숫물과 키스를 해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와이카레모아나호수 올레길을 설명할 때 대표적으로 사용되는 사진이 바로 이곳에서 찍은 것들이다. 하루 고생, 아니 4박 5일 긴 구간을 이곳 하나만 본 것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만큼 환상적인 풍광을 품고 있다.
1,100m 상공에서 본 호수는 하늘 궁전 같았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딱 이 공간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천국이 이런 곳이어야 한다는 억지도 부리고 싶었다.
나 홀로 천국 삼매경에 빠져 취해 있는데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 무리의 칼리지 학생들이 지친 숨을 몰아쉬며 절벽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테 우레웨라의 보석인 와이카레모아나호수를 가슴 속에 영원히 걸어 두고 싶어서 그랬을 거다.
학생들은 그곳에서 반 시간가량 보냈다. 이 세상 최고의 소풍 장소임이 분명해 보였다. 젊은 선남선녀(仙男仙女)들이 하늘 궁전을 아래로 두고 먹고 즐기는 천국 잔치는 한없이 흥겨웠다. 나는 제우스 신이라도 된 듯 지팡이(등산용 막대기)를 들고 아래를 응시했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이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 오늘, 지금 죽어도 한이 없겠다.’
와이카레모아나, ‘물이 졸졸 흐르는(물결치는) 바다’라는 뜻
와이카레모아나(Waikaremoana), 이 긴 마오리 말은 ‘물이 졸졸 흐르는(물결치는) 바다’(sea of rippling waters)라는 뜻이다. 호수의 면적은 54km2. 뉴질랜드에서 가장 넓은 타우포호수(Lake Taupo, 616km2)의 십분의 일 정도다. 얼핏 보면 작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해발 600m 위에 이렇게 장엄함 호수가 펼쳐져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이 호수에 얽힌 마오리 신화를 잠깐 살펴보고 가자.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호랑이가 담배를 피던 시절이었을 거다. 아버지(Mahu)가 딸(Haumapuhia)에게 샘(spring)에 가서 물을 길어오라고 했다. 하지만 딸은 아버지 말을 거역하고 딴짓을 했다. 그러자 화가 난 아버지는 딸을 악마로 만들었다. 복수에 칼을 갈던 딸은 어느 날 주위에 있던 높은 산을 밀어 호수로 만들어 버렸다.
이 설화는 여러 해석이 있지만 내가 90% 비슷하게 엮어낸 것이다. 독자 여러분의 혜량을 바란다.
좀 더 현실적인(과학적인) 얘기를 하면 이렇다. 와이카레모아나호수는 2,200년 전에 일어난 지진으로 생겼다. 갑자기 땅이 꺼졌는지 아니면 물이 솟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지리학자들이 하는 얘기라 신빙성은 충분해 보인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21세기판 도깨비 출몰도
파네키레 절벽을 넘어서면 본격적으로 테 우레웨라 숲의 위용이 드러난다. 첫날 목적지인 파네키레 산장까지 흔히들 ‘도깨비 숲(goblin forest)’이라고 부르는 마법에 갇힌 길을 걷게 된다. 축구 선수 손흥민 허벅지 보다 굵은 나무뿌리가 갑자기 나타나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하며 길을 막기도 하고, 올 블랙스 럭비 선수 팔뚝 보다 튼실한 나뭇가지들이 이방인들의 머리 위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나도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며 놀리기도 한다.
몽환의 상태로 꾸역꾸역 발걸음을 앞으로 옮긴 지 두 시간이나 됐을까. 마지막 깔딱고개를 넘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순간 때마침 산장이 보였다. ‘삐꺽 삐꺽’. 나무 계단 소리가 마치 도깨비들의 야릇한 노랫소리처럼 들렸다.
그 길을 한참 올라 마침내 산장에 도착했다. 날씨만 흐리지 않았다면 다른 각도에서 하늘 궁전을 볼 수 있었겠지만 한두 시간 만에 테 우레웨라 숲속은 완전히 다르게 변해 있었다. 발뒤꿈치를 들어 호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커튼이라도 쳤는지 비와 구름에 가려 궁전은 잘 보이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산장으로 들어갔다.
산장 안은 젊음의 열기로 가득했다. 또 다른 무리의 칼리지 학생들이 침상과 주방을 차지하고 하루 산행의 노독을 푸는 중이었다. 산장은 테 우레웨라의 세월만큼이나 노후해 보였다. 그것이 이곳 특유의 멋과 맛이라면 하루 잠깐 쉬었다 가는 등산객으로서는 덧붙일 불평이 있을 리 없다. 산장의 화로는 도깨비 볼살처럼 빨갛게 익어가고, 십 대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재담은 끊일 줄을 몰랐다.
<다음 주 월요일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