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풋볼뉴스(Football News) 원문보기 글쓴이: 블루문
4일 천하로 끝난 블라터의 5선 ⓒgettyimages/멀티비츠
|
불과 4일 전 5선에 성공했던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이 스스로 물러났다. 블라터 회장은 현지 시간으로 6월2일(한국 시간 오늘 새벽 1시45분) 스위스 취리히에 위치한 FIFA 본부에서 긴급 회견을 갖고 FIFA 회장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달 29일 FIFA 총회에서 다섯 번째 FIFA 회장직 연임에 성공한 지 꼭 4일만의 사퇴다. 4일 천하다.
급작스러운 결정이다. 블라터 회장은 입지전적 인물로 FIFA 내 입지가 철옹성으로 불린 인물이다. 블라터 회장은 스위스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스위스 아이스하키연맹 등 스포츠 단체에서 일하다 1975년 FIFA와 인연을 맺었다. 40년 간 FIFA와 함께한 블라터 회장이었다. 대단한 성공 스토리의 주인공이다. FIFA 내 비주류로 시작해 전 회장인 주앙 아벨란제의 신임을 얻어 사무총장 등 수직 상승한 뒤 일약 FIFA 수장에 오른 블라터 회장이었다. 블라터 회장은 FIFA에서 생활한 40년 가운데 절반 가까이를 회장으로 보냈다. 블라터 회장이 올해까지 FIFA 회장직을 유지한 것은 무려 17년이다. 블라터가 처음 FIFA 회장직에 오른 건 1998년 6월이다. 아벨란제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블라터는 당시 유럽축구연맹 회장이던 레나르트 요한손을 경선에서 꺾고 회장직에 올랐다. 그 이후로 5선에 성공했으니 이번 사임 발표가 아니었으면 2019년까지 21년 간 회장직이 보장됐을 블라터였다.
철옹성 같았던 블라터 회장이 돌연 사임 의사를 밝힌 직접적인 배경은 FIFA 비리 혐의로 블라터 회장 턱밑까지 차고 올라온 수사 당국의 압력이다. 블라터 회장은 매우 커다란 심적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수사 당국이 하나도 아니고, 더군다나 미국의 FBI(미 연방 수사국)까지 나설 정도로 수사 의지가 강력했고 또 구체적이었다. 최근 진행 중인 FIFA 비리 수사에 나선 곳은 3곳이다. 스위스 수사 당국과 미국 검찰 그리고 FBI다. FBI는 국제 범죄와 비리의 경우 세계 관계 기관과 공조해 수사할 수 있다는 원칙 아래 FIFA 비리 혐의와 관련한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 중이다. 미국이 수사를 주도하는 것을 두고 월드컵 유치에 실패한 ‘대가’ 아니냐는 시각이 존재하지만 구체적 비리 혐의가 하나 둘 밝혀지면서 사면초가에 놓인 FIFA와 블라터 회장이다.
블라터 회장의 4일 천하
FBI 등 비리 혐의 3가지
수사 당국이 쫓고 있는 FIFA 비리 혐의는 크게 3가지다. FIFA 내부의 부당 거래, 스폰서와의 불법 유착, 월드컵 유치 관련 비리다. 현재 알려진 구체적 혐의는 2010년 월드컵의 남아공 개최와 관련해 부정한 돈거래가 있었다는 것과 2018년 러시아,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유치 관련한 불법 로비 혐의다. 이 중 남아공월드컵 개최 관련 비리 혐의는 구체적이다. 수사 당국에서 조사 중인 혐의는 FIFA가 2010년 월드컵 개최지로 남아공을 밀어달라며 북중미연맹 전 회장인 잭 워너에게 1000만 달러(110억 원)를 송금했다는 혐의다. 이미 미 수사 당국은 FIFA 고위 간부와 연루자 10여 명을 구속 기소했다. 수사 당국의 다음 타깃은 FIFA 사무총장인 제롬 발케다. FIFA 실무와 자금 흐름을 총괄하는 제롬 발케 사무총장의 승인, 허락 없이 이처럼 큰돈이 움직일 수 있느냐는 상식적 추론에 따른 추적과 조사다.
제롬 발케 사무총장의 혐의가 만약 인정된다면 바로 윗선인 블라터 회장이 관련 혐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사무총장이 회장 모르게 불법 송금한 것이라면 월권행위를 저지른 것이 되고, 회장이 사무총장 하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면 직무유기를 하게 된 것이다. 어떤 경우든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고립의 형국이다. FIFA는 지난해 사망한 훌리오 그론도니 당시 FIFA 재정위원장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지만 사법 당국과 여론의 설득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오른팔(제롬 발케)과 FIFA 조직 깊숙이 수상 당국의 손길이 개입되면서 거센 심적, 물리적 압박을 받은 블라터 회장은 사임이라는 마지막 패를 던질 수밖에 없었다. 블라터 회장이 사임했다고 문제가 다 마무리되는 것도 아니다. 미국과 스위스의 수사 당국은 “이번 사임 발표와 수사는 무관하게 진행될 것이며 조만간 결정적 물증과 증언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며 추가적인 고강도 수사를 예고했다.
블라터 회장의 고립은 외부 압력 때문만은 아니다. 유럽축구연맹을 중심으로 한 내부 세력의 반발도 블라터 회장의 입지를 약화시킨 요인이다. 내부의 반발은 실질적인 개혁의 요구라기보다는 이권과 주도권 싸움의 측면이 강하다. FIFA 내의 유럽과 비유럽의 갈등은 오래된 일이다. 근대 축구의 발원지로 자부하는 유럽은 축구와 관련한 헤게모니는 언제나 자신들 것이어야 했다. 100년이 넘는 FIFA 역사에서 8명이 거쳐 간 회장 중 단 1명만이 비유럽 출신이었던 것과 연결된 일이다. 브라질 출신의 주앙 아벨란제는 1974년 역사상 처음으로 비유럽 출신으로 FIFA 회장이 됐다. 아벨란제 회장 때부터 시작된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비유럽 대륙 지원 정책은 유럽 축구계의 반발을 불렀다. 유럽 축구계는 “왜 유럽에서 번 돈으로 다른 대륙과 나라를 지원해야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계속 했다.
유럽과 비유럽의 대립
호흡기 남의 손에 맡긴 셈
FIFA 역대 회장 ⓒ풋볼리즘
|
아벨란제의 비유럽 지원 정책을 큰 틀에서 유지한 인물이 블라터 회장이었다. 블라터 회장이 사상 최초로 아프리카에서 월드컵을 개최하는 등 대륙별 순회 월드컵 개최(물론 도중에 무산됐지만) 정책을 펼친 배경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륙별 순회 개최 등이 블라터 회장 자신의 지지와 정치적 이득을 채우는 것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주장에 정책의 순수성과 추진 동력을 잃기도 했다. 자체 수입으로 FIFA가 나누어주는 배당금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던 유럽 축구계는 점차 블라터의 정책과 정치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고 이번 FIFA 선거 때 그 갈등이 절정을 이뤘다. 유럽 축구계가 지난 FIFA 선거 때 비유럽 출신의 알리 빈 알 후세인 요르단 왕자를 지지한 것은 반 블라터 전선의 지극히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이것이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참고로 FIFA는 지난 한 해 2조5000억 원을 벌어들였는데 UEFA(유럽축구연맹)도 이에 못지않은 2조3000억 원을 벌었다. 돈에서 자유로웠기에 권력과 맞설 수 있었던 유럽이었다.
수사 결과가 마무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안타까운 건 FIFA 개혁의 문제를 축구 내부의 힘이 아닌 외부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다. 이는 내부의 개혁 작업이 지리멸렬하거나 전략과 추진력, 리더십 등이 부재할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조직위기 신호 중 하나다. 자기의 운명을 좌우할 호흡기를 남에게 맡겨버린, FIFA의 분명한 위기인 것이다. 블라터는 사임 회견에서 “전체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내가 떠나더라도 FIFA의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밝혔지만 아쉽게도 순서가 뒤바뀐 말이다. 선거 전에 백의종군하면서 개혁을 요구했어야 했다. 블라터 회장은 FIFA의 개혁을 위해서는 자신의 것부터 먼저 내려놓고 조직과 다른 사람들의 개혁을 요구했어야 했다.
개혁과 혁신은 필연적으로 익숙한 것과의 결별 등 고통을 수반한다. 때문에 그 고통을 조직과 다른 사람들에게만 강요하면 그 개혁과 혁신은 대개 실패한다. 자신부터 내려놓아야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것을 덜어내는 개혁과 혁신에 함께하거나 최소한 침묵할 수밖에 없다. 개혁 추진의 진정성이다. 블라터 회장은 개혁의 진정성을 선거 전에 보여주었어야 했다. 지난 선거 전에 과거에 약속했던 것처럼 더 이상 연임을 하지 않겠다던 약속을 지키고 불출마 선언을 한 뒤 FIFA의 강력한 개혁을 요구했어야 했다. 블라터 회장은 때를 놓치고 말았다. 수사 당국의 압력이 거세지자 밀려 떠나는 모양새로는 개혁의 요구도, 그 성공도 거두기 힘들다. 자신의 것을 지키려다 모든 걸 잃는 오류의 함정이다.
FIFA의 위험한 기회
사람 체계 철학의 개혁
FIFA의 운명은? ⓒgettyimages/멀티비츠
블라터의 사임으로 FIFA는 2015년 12월~2016년 3월 중 총회를 갖고 차기 회장을 뽑기로 했다. 차기 후보로는 이미 출마를 선언한 알리 빈 알 후세인 왕자를 비롯해 도메니코 스칼라 FIFA 회계 감사 및 법무 부문 위원장, 미셸 플라티니 UEFA 회장, 미카엘 반 프라흐 네덜란드 축구협회장, 루이스 피구 등이 자천타천으로 차기 FIFA 회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FIFA는 똑같은 오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사람 한 명 바꾸는 것으로 이번 문제가 덮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차기 회장이 누가 될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당면한 FIFA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직 전반의 개혁과 혁신의 내용과 방향을 중심으로 이를 풀어나가는 과정으로서의 다음 선거를 치르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다.
FIFA 시스템의 전면적인 개혁안의 마련인데, 시스템을 이루는 3요소인 사람 체계 철학 이 모든 것에 대한 총체적 점검이 이번 기회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차기 FIFA 선거 전에 제 구성원들이 모여 합의 가능한 선에서 큰 틀의 개혁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 개혁 방안을 중심으로 회장 선거를 치르고 차기 회장에서 전면적 힘을 실어주는 게, FIFA 역사상 최초로 현직 회장이 비리 혐의로 물러난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의심 받고 있는 비리와 부정, 불통의 시스템을 바꾸지 못한다면 차기 회장으로 누가 되더라도 강력한 지지를 받거나 리더십을 유지하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는 때문에 사람이 아닌 조직을 바꾸는 선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FIFA 개혁안 중 꼭 포함됐으면 하는 것이 일정 기간 이상의 연임 금지안이다. 임기 중 사망하거나 비리 등의 혐의로 물러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장기 집권을 고집했던 FIFA의 회장 역사다. 기자 출신으로 FIFA를 만든 프랑스의 로베르 게랭을 빼놓고는 모두 다 해당하는 이야기다. 대니엘 벌리 울폴, 로돌프 실드레이어스, 어서 드루리 역대 회장은 임기 중 사망해 FIFA 회장직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들을 빼놓고는 모든 회장들이 최소 13년, 최대 33년 동안 회장직을 이어가면서 장기 집권했다. 죽음과 비리 아니고서는 FIFA 회장직이 바뀌기 어렵다는 주위의 소리는 괜하지 않다. 특정 이해 단체로, 과거처럼 FIFA의 조직이 크지 않았고 정비가 덜 된 상황에서는 장기 집권이 불가피했다고 하더라도 현재와 같이 누가 회장직을 맡더라도 막대한 수입과 안정적 운영이 보장되는 조직 안에서는 다섯 번의 연임과 같은 장기 집권은 실리와 명분 모든 면에서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 굳어진 권력과 이에 맞서 싸우려는 갈등이 따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내부적으로도 부정부패 등에 노출되기 쉬운데 이는 고인 권력의 습성이기도 하다.
고인 권력의 독주 그리고 혁신과 개혁, 역설적이게도 회장이 물러난 오늘 1904년 출범한 FIFA의 절체절명의 위험한 기회도 이제 막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