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담(鶩潭)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원래 따오기 목(牧+鳥)자와 못 담(潭)자이다.그런데 한자찾아보기에는 따오기 목이 나오지 않고 집오리 목(鶩)자만 나온다.부득이하여 그 자로 대신한다.충북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목담이다.고창오씨가 200호 산다고 하신다.그래서 우리나라에서 고창오씨의 집단 거주지역이며 그 본부격이다.그리고 그 마을에는 오별장(吳別將, 정3품)이 살았는데 그 가문에서 인재가 많이 족출하였다.오별장(天摠)가에 주고 받은 서신이 쌓였는데 그 간찰 묶음이 나왔다. 고창오씨는 시조가 한림학사 오학린이고 그의 9세손인 입향조 오천(吳泉, 호는 청계)인데 행사정건공장군(行司正建功將軍)과 증 공조참의이다.오천은 세종 16년(1434년)에 이 곳에 정착한 지 20여 대에 걸쳐 이어 살고 있다. 1978년 취락구조 개선 사업으로 적하리 분지벌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이 금암리에 집단이주하여 창앞마을을 이루기도 하였다고 한다.20편이 실린 간찰 묶음에는 주로 오별장댁으로 보낸 글이 대부분이다.간찰의 연도가 중종, 명종조에서 그 이후인 것 같다.오영협(吳永峽)은 영자 돌림이라서 시조로부터 12세손이다.그러니 중종, 명종조로 판단된다. 그리고 수원의 옛이름인 화영(華營)에서 보낸 글이 많다. 수원유수가 자리한 화영에서 직위가 올라서 판서가 된 정판서(鄭判書)의 글이 있다.글씨가 힘있고 장엄하며 매우 굵은 체이다. 목담마을을 새말이라고 한다. 오별장에게 보낸 간찰의 발신자가 吳永峽, 密承, 粘承, 成承, 宜承, 侯承, 正承, 鍾峴, 筆洞, 蘭洞, 利川人+卒, 華營, 鄭判書 등이다. 오별장을 글 속에서는 오상로(吳尙老)라고 부른다.이 간찰첩은 조선 중후기의 간찰의 소통구조를 이해하는 첩경이고 물목이 적혀있어서 회갑이나 잔치에 기증한 내역을 알 수 있고 간찰사,서간문사, 서예사, 풍속사의 자료로 쓰인다.수요처는 경기도박물관과 수원화성박물관, 청주박물관, 충주박물관, 옥천문화원, 옥천군청,고창오씨유물전시관 등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한편 목담서원이 있는 동네로서 목담서원에는 옥천전씨 세 분을 제향하고 있는데 전팽녕, 전유, 전식(全湜, 호 沙西) 등이다.
첫댓글 옥천은 정지용 시인의 고향이자 육영수 여사의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