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아직 멀기만한 정의
오늘 밤도 쏟아지는 졸음과 싸우며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어느샌가 수면제가 되어버린 책은 언제나 나에게 끝내주는 잠을 선사해 주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들었던 생각은 ‘역시 철학은 나랑 안 맞아…’라는 씁쓸한 말 뿐이었다. 철학을 좋아해 보고자 했지만 철학은 나를 좋아하지 않는가 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책을 포기하지 않고 반드시 읽어내 보겠다는 오기로 버텼다. 그 이유가 단지 숙제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의 일상에서 나도 모르는 새에 일어나는 무수한 도덕적인 가치판단들을 이해 해보고 싶었고 공동체를 구성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의 정의와 타인의 정의의 뿌리를 알아보고 싶었다. 더 나아가 책을 모두 읽은 후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어려운 질문의 답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랐다.
책에서는 정의를 생각할 때 우리는 대부분 3가지의 방법으로 접근한다고 이야기한다. 복지(공리주의)와 자유(자유지상주의), 그리고 미덕이다.
공리주의는 복지 즉, 행복의 극대화를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한다. ‘최대 다수, 최대 행복’ 고통과 쾌락 중 계산 결과, 공동체에서 고통의 총량보다 쾌락의 총량이 더 높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몇가지 사례들에선 매력적일 수 있지만 다수가 항상 옳을 수 없고 모든 것을 고통과 쾌락으로 나누어버릴 순 없기에 완벽히 정의로 생각할 수 없다.
자유지상주의는 자유에 관한 존중을 이야기 한다. 인간의 기본권인 자유를 옹호하고 존중하자는 주장이다. 자유시장과 최소국가를 주장하고 복지와 같은 것을 거부한다. 이또한 어쩌면 매력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과 연대를 형성하고 세상에 온전한 자유는 있을 수 없기에 자유지상주의 또한 완벽히 정의로 생각할 수 없다.
미덕은 아리스토텔레스로 시작되었는데 미덕을 권장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는 사회를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자칫하여 편협하고 강제적인 정책을 만들어낼 수 있기에 완벽한 정의라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세가지 접근법을 모두 배운 후, 나는 어떤 접근법으로 정의를 판단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책에서 배운 갖가지의 철학들을 모두 섞어서 써먹고 있었다. 트롤리 전차 딜레마에서는 공리주의를, 하지만 또 다른 상황에서는 자유지상주의를, 장기거래와 식인에서는 미덕을, 이럴 땐 칸트를, 저럴 땐 존 롤스를, 어떨 땐 마이클 샌델을… 책에 등장하는 철학들과 철학자들을 배울 수록 나는 더더욱 갈대처럼 흔들렸다.
읽으면 읽을 수록 더 정의가 더욱 멀어진다. 정의를 밝힌 것에 자신의 한 인생을 할애한 철학자들 또한 온전히 입맛에 맞는 철학을 찾아내지 못했다. 한 없이 작은 나는 더 무기력해진다. 정립된 정의에 사람이 맞춰야 하는 건지 사람의 입맛에 맞게 정의를 정립해야하는 건지 모호하다. 세상에 모두가 만장일치로 동의하는 정의는 없다. 각자 기호에 맞는 편향된 도덕을 꺼내놓으며 이러쿵 저러쿵, ‘너는 아니고 내가 맞아!’라고 외치니 정의는 더 멀어진다.
식인이 금지되어야 하고 장기거래가 금지되어야 하며 안락사, 동성애 등이 금지되어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해낼 수가 없다. 책에 등장하는 도덕적이지 못한 듯한 사례들에 왜 도덕이지 못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저 ’그냥 느낌이 그래…‘라는 모호한 말을 꺼내 놓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때면 나의 도덕선과 가치관들이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이런 순간을 겪을 때면 항상 떠오르는 분이 있다. 하나님, 그의 나라를 이땅에서 실현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담은 성경, 절대적인 진리, 마음이 잠깐은 평온해진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냅다 꺼내놓을 수 없다. 그렇다고 성경의 율법과 명령들을 정의로 정립해 이성적으로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 또한 기독교를 개독교로 만드는 일일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3가지 접근법을 마무리하며 미덕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의관을 내놓는다. 좋은 삶을 고민함에 있어서 수많은 이견을 받아들이고 토론하며 공동선을 고민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의 주장이다. 불평등의 간극을 좀혀나가며 서로 공동선을 토론하는 것이 사회를 좀 더 정의로울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의견 또한 매력적이다. 우리 모두가 동일한 정의에 다다를 수 없다면 서로 존중하는 방법은 귀를 열고 토론하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마이클 센댈에게 묻고 싶다. 이것이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특히나 한국인들은 토론을 할 때면 감정에 휩싸이곤 한다. 나의 의견이 무시되었다고 생각될 때면 열등감이 발동해 감정이 앞선다. 자신이 남을 설득하지 못하고 경쟁력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면 쉽게 패배적인 감정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특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사회에 살고 있기도 하다. 토론을 하기 힘든 사회이다.
나는 모든 인간에게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이상을 권력화시키는 특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자신만의 사고들을 다른 이들의 것과 비교할 때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권력자로 높이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만이다. 그러니 귀를 열고 토론을 하려면 먼저 겸손부터 배워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겸손에서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진정한 겸손은 무엇일까? 인간은 진정한 겸손을 이룰 수 있나?
아직 정의는 멀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