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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금화천유문답(金華闡幽問答)
問先天之學心也(문선천지학심야) 後天之學迒也(후천지학항야) 欲免輪廻(욕면윤회)須從無形作工夫(수형무형작공부)
答曰(답왈) 無形作工夫(무형작공부) 究竟何以做(구경하이주) 將謂靜中可得(장위정중가득) 動則失(동즉실) 不知動之所以失(부지동지소이실) 由靜之無所得(유정지무소득) 失靜無得(실정무득) 動有失(동유실) 皆未達道也(개미달도야) 汝所云形而上(여소운형이상) 止言其當然(지언기당연) 未識其所以然(미식기소이연) 刻下惟於有迹探無迹(각하유어유적탐무적) 有迹而無迹(유적이무적) 迷者千里(미자천리) 悟者一朝(오자일조)
1. 번역 : 물음) 원래부터 있는 가르침(先天之學)은 마음이고 세상이 이루어지며 생겨난 가르침(後天之學)은 발자국인데 윤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형태 없는 것을 좇아서 배우고 익혀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답) 형태 없는 것을 배우고 익힌다는데 궁극적으로 어떻게 익혀야 하는가? 무릇 고요한 가운데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움직임을 잃어버릴 것이다. 움직임을 잃어버리는 원인을 알지 못하다면 고요함에 있더라도 얻는 바가 없다. 고요함을 잃어버리면 얻는 바가 없고 움직이면 잃어버린다면 어떻게 하더라도 도(道)에 이를 수 없다. 그대가 형태 위에 있는 것을 말하였는데 그것은 말이 끊어진 말이요, 당연히 그러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그리되는 원인을 알지 못하면 그때에는 자취가 있는 것에 머물러 생각하면서 자취가 없는 것만을 찾고 있는 셈이다. 자취가 있건, 자취가 없건 헤매면 천리를 헤맬 것이고 깨달으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것이다.
2. 참뜻 : 물음) 세상에는 수많은 가르침이 있다고 하지만 고통이나 쾌락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한다면 원래부터 있는 으뜸가는 신과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 주력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답) 원래부터 있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으뜸가는 신과 하나가 되면 진리와 진실을 절로 알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하였으니 으뜸가는 신의 마음과 으뜸가는 신에 집착하여 그것들을 다루는 가르침(先天之學)을 얻어 힘써 익히려 할 수 있다. 그 역시 넋에 집착하는 것이니 의식은 얼로 되돌아가지 않고 결국 그대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으뜸가는 신을 접촉하여 하나가 될 수 없다. 세상과 그대의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나? 세상과 그대의 삶 속에 으뜸가는 신과 으뜸가는 신의 뜻이 없다고 생각하나? 세상과 그대의 삶이 무의미하다면 애초에 그러한 것들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세상과 그대의 삶 속에 으뜸가는 신과 으뜸가는 신의 뜻이 없다면 으뜸가는 신은 세상을 이루어지게 하는 존재가 아닐 것이다. 세상의 현상과 그대의 삶 속에 간직된 으뜸가는 신의 뜻(後天之學)을 찾아 충실히 살아가거라. 그것은 으뜸가는 신이 그대에게 부여한 사명이니 그 사명을 수행하지 못하면 어떠한 수행을 하더라도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으뜸가는 신을 접촉할 수 없다. 하여간 말한대로 살다보면 어느 순간 넋의 작용이 그치고 얼의 작용이 일어나며 의식이 얼로 바뀌며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으뜸가는 신을 접촉할 수 있을 것이고 으뜸가는 신과 같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問如何是有逆無逆(문시여하시유항탐무항)
答曰(답왈) 空嗟男子學嬋娟(공차남자학선유) 妙裏尋芳總一偏(묘리심방총일편) 不識正中中又正(불식정중중우정) 無端起處是眞玄(무단기처시진현)
1. 번역 : 물음) 어떻게 하면 발자국이 있으면서 발자국이 없는 것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답) 헛되고 부질없구나. 사내가 예쁘고 고운 것을 익히려 하고 묘한 것 속에서 향기로운 것만을 찾으니 모두 한 쪽으로만 치우치게 될 뿐이니 바른 가운데와 가운데 있는 떠한 바름을 알지 못한다. 시초 없이 비롯된 곳(無端起處) 그곳이 진실한 곳이요 신묘한 곳이다.
2. 참뜻 : 물음) 세상이 생긴 뒤 생긴 가르침은 수많은 분야에 수없이 존재하고 사람들의 인생은 제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그러한 수많은 가르침들 중에서도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으뜸가는 신과 접촉하기에 용이한 가르침이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으뜸가는 신이 특별히 원하는 인생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가르침과 인생을 알고 싶습니다.
답) 그대의 눈이 동태눈깔인지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귀까지 사오정이니 참으로 안타깝도다! 여자아이들은 곱고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고 신비한 것에 홀린다. 그렇게 설명했건만 그대의 수준은 아직도 여자아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다시 한 번 설명해줄 테니 이번에는 확실히 이해하거라.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들은 으뜸가는 신의 뜻에 의해 생겨난 것이니 으뜸가는 신의 뜻이 간직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물며 어떠한 일에서나 어느 누구의 인생에서나 으뜸가는 신의 뜻이 간직되어 있지 않겠나? 그대가 익혀야 할 가르침과 그대의 인생 속에서 으뜸가는 신의 뜻과 으뜸가는 신을 찾는 것이 그대가 이르고자 하는 길의 지름길이자 성과를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해보았자 아무런 의미가 없고 성과를 낼 수 없다.
問如何心得靜(문여하심득정)
答曰(답왈) 事事物物窮之難(사사물물궁지난) 時時刻刻存之易(시시각각존지이) 存者存其心(존자존기심) 心存方有主(심존방유주) 有主方能治事(유주방능치사) 夫一操一舍之間(부일조일사지간) 天人之分(천인지분) 賢愚之判(현우지판) 未可輕視也(미가경시야) 但存心易於斷續(단존심이어단속) 行之久自無間(행지구자무간) 無間則續(무간즉속) 續則光明(속즉광명) 光明則氣充(광명즉기충) 氣充則昏散不除而除矣(기충즉혼산부제이제의) 噫嘻(희희) 天下事惟此事大(천하사유차사대) 餘皆末焉耳(여개말언이) 百忙中守存(백망중수존)
萬事中一理(만사중일리) 不體此二語(불체차이어) 終難入於聖域(종난입어성역)
1. 번역 : 물음) 어찌하면 마음에서 고요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답) 일 하나하나, 물건 하나하나에 매달려 궁리하면 어렵다. 매시간 틈틈이 보존하면 쉽다. 보존하는 것은 그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다. 마음이 보존되면 이제 주인이 있게 되고 주인이 있으면 능히 일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무릇 한 번 다스려 보느냐, 포기하느냐 사이에서 하늘과 사람이 나누어지고 현명한 이가 되느냐, 어리석은 이가 되느냐가 결정되니 가볍게 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만 마음을 보존하는 일은 단절되기도 쉽고 이어지기도 쉬운데 그것을 오래하게 되면 절로 틈이 없게 되고 틈이 없게 되면 이어진다. 이어지면 빛이 밝아지고 빛이 밝아지면 기(氣)가 충만해지고 기가 충만해지면 멍해지거나 오만 생각나는 일을 없애려 하지 않아도 없어진다. 아아! 웃기는구나. 하늘 아래 일들 중 오직 이 일이 가장 중대한 일이고 나머지 것들은 보잘 것 없는 일이구나. 아무리 바쁜 중에도 보존함을 지키면 모든 일 가운데 하나의 이치가 통하게 된다. 이 두 말을 체득하지 못한다면 끝내 신성한 영역에 들어가기 어렵다.
2. 참뜻 : 물음) 어찌하면 넋의 작용을 그쳐 얼의 작용을 일으켜 으뜸가는 신의 뜻을 알 수 있고 나아가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날 수 있겠습니까?
답) 어떤 현상에 집착하여 답을 얻고자 억지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성과를 낼 수 없다. 절로 떠오르는 그대의 생각을 보존하는 일이 중요하다. 절로 떠오르는 그대의 생각은 그대의 마음이 변해서 된 것이니 그러한 생각들을 모아 살피면 그대의 마음을 알 수 있다. 마음을 알게 되면 마음의 주인이 되니 집착에 얼룩진 인간의 마음에 휘둘리지 않게 되고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마음을 살펴 알고서 한 번 다스려 보면 으뜸가는 신의 자녀로 거듭나 으끔가는 신의 뜻에 따라 사는 현명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그러하지 못하면 평생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어리석은 삶을 살면서 온갖 해악을 끼치며 살다가 죽는 것이니 가볍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 절로 떠오르는 일은 계속 이어질 수도 있으나 단절될 수도 있는데 이는 그대가 그러한 일을 이어나갈 정도의 자격을 갖추지 못한 탓이다. 그 말은 달리 말하면 그대에게 부여된 참된 뜻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니 참된 뜻을 충분히 수행하다 보면 다시 절로 떠오르는 일이 어느 순간 쉽게 이어질 것이다. 하여간 이처럼 절로 떠오르는 생각을 보전하는 일을 오래도록 하게 되면 무리 없이 생각이 이어지며 생각이 이어지다 보면 얼의 작용이 점점 강해지고 얼의 작용이 점점 강해지면 얼이 모여 커지고 얼이 모여 커지면 멍해지거나 오만 생각에 빠져 집착으로 얼룩진 인간의 마음에 매달리는 일을 하지 않게 된다.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으뜸가는 신의 뜻을 알고자 오만 짓을 다하는 이들이 예나 지금이나 숱하지만 오직 마음을 살피며 보존하다 보면 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니 아아! 웃기고 허망하구나. 마음을 살피며 보존하면 절로 이루어지니 나머지 수행법들은 이 일에 비하면 발꼽에 끼인 때만도 못한 일이다. 그대는 마음에 나타나는 으뜸가는 신의 뜻을 그대의 집착으로 생겨난 생각과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보존하는 일을 장기간 하다 보면 마침내 그대의 마음을 관통하는 으뜸가는 신의 뜻을 찾게 될 것이고 그 뜻에 따라 세상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마침내 찾은 으뜸가는 신의 뜻을 통해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게 될 것이다.
問回光返照(문회광반조)
答曰(답왈) 不照何以見(부조하이견) 非筏莫渡(비벌막도) 渡卽是渡(도즉시도) 筏終是筏(벌종시벌) 知渡非渡(지도비도) 回光不以目而以心(회광불이목이이심) 心卽是目(심즉시목) 久久神凝(구구신응) 方見心目朗(방견심목랑) 不證者難言此(부증자난언차) 反啓著之弊(반계저지폐) 不證由於精虛(부증유어정허) 且觀心覺竅以生其精(차관심각궁이생기정) 精稍凝即露(정초응즉로) 卽見玄關竅妙(즉견현광궁묘) 參悟工夫(참오공부) 方有著落(방유저락) 不然是渺茫之言(불연시묘망지언) 至於眼觀臍下是外工(지어안관제하시외공) 內工心目生(내공심목생) 纔是眞丹田(재시진단전) 左轉右轉(좌전우전) 其理本同(기리본동) 丹經云(단경운) 自然之所爲兮(자연지소위혜) 非有邪僞道(비유사위도) 又有眼目光者(우유안목광자) 鼠光也(서광야) 非龍虎之光(비룡호지광) 心光不屬內外(심광불속내외) 若色目望見(약색목망견) 卽爲魔矣(즉위마의) 汝等汚染之久(여등오염지구) 一時難淸(일시난청) 其實生死大事(기실생사대사) 一回光收復精神凝照自心(일회광수복정신응조자심) 卽是佛燈(즉시불등) 佛燈者(불등자)常令燭照也(상명촉조야)
1. 번역 : 물음) 돌리며 비추는 일(回光)과 되돌아가 비추는 일(返照)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 비추지 않으면 어찌 볼 수 있겠는가? 뗏목이 없으면 건널 수 없지만 건너는 것은 곧 무릇 건너는 것이고 뗏목은 무릇 뗏목일 따름이다. 건너는 방법을 아는 것이 건너는 것은 아니다. 돌리며 비추는 일은 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인데 마음이 곧 무릇 눈이다. 오래도록 하다보면 신(神)이 엉겨서 이제 마음의 눈이 밝아지는데 겪지 못한 이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열어서 드러내는 일에 반발하는 폐단은 속알맹이가 텅 비는 일을 겪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 속알맹이를 생겨나게 함으로써 마음을 살피고 구멍을 알게 된다. 속 알맹이가 점점 엉기면 곧 정체를 드러내게 되고 그리 되면 곧 신비한 관문과 구멍의 묘함을 보게 되어 참여하여 겪으며 깨닫게 되고 익히게 되어 장차 성과를 드러내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무릇 아득하고 허망한 말이 된다. 눈동자로 배꼽 아래에 집중하는 일은 무릇 밖을 익히는 일이고 안으로 익히는 일은 마음의 눈이 생겨나 무릇 조금이라도 단전(丹田)이 생겨나게 한다. 왼쪽으로 선회하는 일이나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일에 간직된 기본 이치는 근본적으로 같다. 단(丹)을 다루는 경전에서는 절로 이루어지는 바를 말하지 사악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다루지 않는다. 또한 분별에 서린 빛은 쥐새끼의 빛이지 용과 호랑이의 빛이 아니다. 마음의 빛은 안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고 밖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다. 만일 형태를 보는 눈에 의지해 본다면 곧 마귀가 된다. 그대들이 오래도록 더러움에 물들어 있다면 단번에 깨끗해지기 어렵지만 실상 삶과 죽음이 달린 큰 일이다. 한 번 돌리며 비추게 되면 속알맹이를 회복하고 신이 엉겨 스스로의 마음을 비추게 되는데 이것이 곧 부처의 등인 것이다. 부처의 등이라는 것은 등불로 하여금 항상 비추게 하는 것이다.
2. 참뜻: 1) 물음) 回光(회광)을 번역하면 ‘빛을 돌려라.’로 번역할 수도 있고 ‘돌리며 비추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되돌아가 비추라.(返照)’는 말도 있습니다. 회광(回光)과 반조(返照)는 따로 있는 말들이긴 하지만 합쳐서 회광반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들인데 말들에 간직된 참뜻은 무엇입니까?
답) 빛이 없으면 볼 수 없고 뗏목이 없으면 강을 건널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뗏목과 건너는 것이 같은 것은 아니다. 건너기 위해 뗏목을 사용하니 건너는 것은 목적이고 뗏목은 수단으로 볼 수 있겠지. 돌리며 비추는 일은 억지로 보려하는 일도 아니고 억지로 들으려 하는 일도 아니다. 마음에서 절로 일어나는 일을 보고 들으니 마치 마음이 눈과 같다. 그대는 육체의 눈과 마음의 눈을 구별할 수 있겠나? 구별할 수 있어야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니 알긴 알아야 할 것이다. 고작 가능성이 생긴다고 말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강을 건너는 방법을 알았다고 하여 강을 건너는 것이 아니듯 마음의 눈을 알았다고 하여 마음의 눈이 생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마음의 눈을 체험하여야 비로소 마음의 눈이 생긴 것이라는 말이다. 항상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키라고 했다. 즉 이 말에는 ‘넋을 얼로 돌려라.’라는 뜻이 간직되어 있고 ‘얼의 작용을 일으키라.’라는 뜻이 간직되어 있다. 앞의 뜻은 ‘돌려라(回)’에 해당되고 뒷 뜻은 ‘비추라(光)’에 해당된다. 회광(回光)을 ‘빛을 돌려라.’로 번역하거나 풀이하는 이들은 두 가지 뜻을 제대로 얻지 못하여 글자에 간직된 표면상의 뜻에 의지하여 번역하거나 풀이한 것에 불과하기에 그러한 말에 의지하여 익히면 두 가지 뜻 중 한 가지 뜻도 얻기 어렵다. 틀렸다는 말이다. 으뜸가는 신이 인간의 마음에 함께 있다고 하지만 으뜸가는 신을 드러내기 어렵다. 하지만 으뜸가는 신이 드러나야 비로소 마음의 참된 비밀을 알고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리해야 직접 겪으며 깨닫고 익히게 되어 제대로 된 성과를 낼 수 있게 된다. 집착으로 얼룩진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을 관찰하기 시작하여 어느 정도 인간의 마음을 일정 부분 이해하였다면 어느 정도 깨달음을 얻은 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외공(外工)을 닦는 일이지 내공을 닦는 일(內工)은 아니다. 마음의 눈을 참되게 겪어 으뜸가는 신의 눈과 조금이라도 같아져야 비로소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드러난다.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키는 일(回光)은 얼의 작용을 일으켜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으뜸가는 신과 하나가 되게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같지만 다른 길 또한 있다. 으뜸가는 신을 강림시켜 으뜸가는 신으로 하여금 얼의 작용을 일으켜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게 하는 길(返照)이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동일한데 방법 상으로는 차이가 있다. 그러면 반조보다 회광을 중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별한 이유는 없고 반조는 지나치게 어렵고 회광은 어렵긴 해도 노력하면 누구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다루는 경전에서는 넋의 작용을 일으켜 만들어낸 사이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멀리하고 절로 생겨나는 생각과 마음을 중시하라고 말한다. 분별 역시 얼의 작용이긴 하나 으뜸가는 신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뛰어난 분별력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쥐새끼 수준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고 용이나 범과 같은 수준의 얼의 작용은 능히 으뜸가는 신의 뜻과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대가 넋에 기대 분별에만 집착하고 집착으로 인해 생긴 마음에 지배당하게 되면 그대는 곧 마귀가 된다. 그대들이 오래도록 넋의 작용만 일으켜 살아왔다면 단번에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기 어렵지만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는 문제는 삶과 죽음이 달린 큰 문제이다. 한 번 제대로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키면 아득하게 멀어진 으뜸가는 신이 다시 돌아오고 얼이 밝아지고 커져 절로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게 된다.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도록 밝아지고 커진 얼, 이것이 다름 아닌 부처의 등인 것이다. 부처의 등은 등불로 하여금 꺼지지 않고 항상 비추게 하는데 그대의 얼이 밝고 커져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날 정도가 되면 그대는 항상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머물며 으뜸가는 신과 하나가 되어 으뜸가는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면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 구별이 힘들면 다음 글을 참조하면 된다. (참조: 진리에 이르는 길, 정재훈, 지식과감성, 2020년, 41p : 1 ~ 12)
問從性學立手否(문종성학립수부)
答曰(답왈) 性學非命學不了(성학비명학불료) 先從性探引命之作(선종성탐인명지작) 命通方得徹性(명통방득철성) 性非命不徹(성비명불철) 命非性不了(명비성불료) 故易窮理盡性(고역궁리진성) 以至於命(이지어명) 不得窮到底(부득궁도저) 焉知神物隱於此(언지신물은어차) 可以生人(가이생인) 可以殺人(가이살인) 生殺只在這個(셍살지재저개) 並非另有玄關(병비령유현관)
1. 번역 : 물음) 성품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배움은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까?
답) 성품을 배우는 일에 매달린다고 하여 사명(命)을 배우는 일을 마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성품을 찾아 사명을 이끌어내는 일은 사명를 알게 하고 장차 성품을 완전히 익힐 수 있게 한다. 성품은 사명을 알지 못하면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이고 사명은 성품을 알지 못하면 완전히 알 수 없다. 고로 역<易>에서는 이치를 연구해 성품을 다하여 사명에 이른다고 말하였다. 바닥까지 이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서 신령한 것이 이것에 숨어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살고 죽는 일이 다만 이것에 있으니 신비한 관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2.참뜻 : 물음) 어떠한 사물이건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 사물의 용도를 알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 대한 이해는 사람의 속성, 즉 성품을 아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답) 사람의 성품을 잘 이해하다 보면 사람의 사명을 알게 되고 사명을 완수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성품을 통해 사명을 알고 실천하고자 하는 노력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다. 세상에 나온 이유는 누구나 사명을 다하기 위함이지 성품을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품을 이해한답시고 성품에만 매달려 사명을 조금도 이행하지 못하면 세상에 나온 의미가 없지 않겠나? 기본적으로 성품을 찾아 사명을 아는 일은 성품을 완전히 알 수 있게 한다. 성품은 사명을 알고 수행함으로써 완전히 알 수 있고 사명은 성품을 완전히 알지 못하면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다. 알려면 확실히 알아야 하는데 사물에 간직된 으뜸가는 신의 뜻을 알 정도로 철저히 알아야 한다. 으뜸가는 신이 숨어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사실을 그대는 아는가?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 다만 으뜸가는 신에 달려 있으니 진정한 신비는 으뜸가는 신이지 신비한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問致心一處(문치심일처)
答曰(답왈) 致心一處固然(치심일처고연) 然心無定處(연심무정처) 又須活潑善探(우수활발선탐) 不在形色(부재형색) 形色俱是後天(형색구시후천) 知者心之用(지자심지용) 空寂者心之體(공적자심지체) 若著在後天(약착재후천) 則是後天氣質用事(즉시후천기질용사) 理之不盡(리지부진)
1. 번역 : 물음) ‘마음을 한곳에 이르게 한다.(致心一處)’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답) 마음을 한곳에 이르게 하는 일은 원래부터 그러한 곳에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은 정해진 장소가 없고 또한 모름지기 살아서 활발히 움직이며 잘 찾아내고 모습이나 색깔이 있지 아니하다. 형태나 색깔은 모두 무릇 하늘이 생긴 후의 것이다. 인식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이고 비고 고요한 것은 마음의 실체이다. 만일 하늘이 생긴 후의 것에 집착하고 있으면 이는 곧 무릇 하늘이 생긴 후에 있는 기질(後天氣質)이 일을 다스리고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끝내 이루지 못한다.
2. 참뜻 : 물음) ‘마음을 한곳에 둔다(致心一處)’는 말이 있고 이는 마음을 닦는 일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을 한곳에 두는 것이며 한곳은 도대체 어디입니까?
답) 한곳에 이르게 해야 한다고 하니 한곳이 어디인지 알아야겠지. 하늘일까? 바다일까? 하늘이면 그대보다 새가 쉽게 갈 것이고 바다이면 물고기가 그대보다 더 낫지 않겠나? 설사 그대가 비행기나 잠수함을 이용해 하늘이나 바다로 가더라도 그것은 그대의 육체가 간 것이지 마음이 간 것은 아니지 않겠나? 결국 어떤 마음이 그것과는 다른 마음으로 가는 것이 ‘마음을 한곳에 둔다(致心一處)’라는 말에 간직된 참뜻이다. 여기서 마음(心)은 인간의 집착으로 얼룩진 마음이고 한곳은 앞에서 수없이 말했듯 으뜸가는 신의 마음(一處)을 가리킨다. 어느 세상이건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있는 것이며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변해서 된 것이긴 하지만 여기서의 으뜸가는 신의 마음은 세상이 생기기 전에도 있고 세상이 생긴 후에도 있으며 세상이 사라져도 있을 마음을 가리킨다. 인간의 마음이 그러한 마음에 도달할 수 있다니 놀라운 사실 아닌가? 실상 인간이 마음을 통해 무언가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에 의한 것이다. 집착으로 얼룩진 인간의 마음의 이면에 모든 것을 다 간직하고 있기에 빈 것처럼 보이고 인간의 욕망으로 인한 소리가 없기에 고요한 것처럼 보이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있다. 이면에 일어나는 작용이 으뜸가는 신의 작용임에도 불구하고 일체와 진리와 진실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대가 세상이 생겨난 후 생긴 넋(後天氣質)에 집착하여 그것의 사용에 의지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넋에 의지하여 평생 살아가고 세상을 이해한다면 그대의 마음은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도달할 수 없고 그대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날 수 없다.
問神入氣中(문신입기중)
答曰(답왈) 如何入神(여하입신) 不入氣中(불입기중) 無不在耳(무불재이) 所爲神入氣中者(소위신인기중자) 後天之神耳(후천지신이) 非先天之神(비선천지신) 路途入門工夫(로도입문공부) 氣中則心中要(기중즉심중요) 仔細認卽玄關之啓處也(자세인즉현관지계처야) 若著力則鑿非玄關之啓處(약저력즉착비현관지계처) 周身之氣也(주신지기야) 大有危險(대유위험) 不可不知(부지부지) 玄關乃天地之正中(현관내천지지정중) 竅中亦不可指處(규중역불가지처) 若有指處(약유지처) 則是造化五行中焉(즉시조화오행중언) 是出造化事(시출조화사) 玄學不落造化(현학불락조화) 郤有造化(극유조화) 非身體力行證者(비신체력행증자) 不能語語金鍼(불능어어금침) 句句入殻(구구입각) 默會而已(묵회이이) 不在多言(부재다언)
1. 번역 : 물음) 신(神)이 기 속(氣)에 들어가는 일은 무엇입니까?
답) 어찌 신(神)이 들어갈 수 있겠는가? 기(氣)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있지 않은 곳이 없을 따름이다. 이른바 신이 기 속에 들어가는 것은 하늘이 생긴 후의 신의 일일 따름이지 하늘보다 먼저 있는 신의 일은 아니다. 배우고 익히는 일에 들어서서 길을 가기 위하여서는 기 속이 곧 마음 속이니 중요한데 자세히 살펴보면 신묘한 관문을 여는 곳이다. 만일 억지로 드러내고자 하면 신묘한 관문을 여는 것이 아닌 곳을 파는 것이 된다. 몸을 도는 기라는 것은 지나치게 위험한 것이기도 하니 알지 아니하면 안 된다. 신묘한 관문이라는 것은 곧 하늘과 땅의 정가운데이니 구멍 안에서 또한 가리킬 수 있는 것이 불가한 곳이다. 만일 가리킬 곳이 있다면 이는 곧 세상을 이루어지게 하는 오행 속에 있는 것인데 이곳은 세상이 이루어지는 일에서 벗어나 있다. 신묘한 가르침은 세상이 이루어지는 일에 떨어지지 않는다. 틈에 세상이 이루어지는 일이 있다면 몸소 애써 힘쓰며 겪지 않은 사람이다. 말로써 금으로 만든 침(金鍼)과 같은 핵심을 말할 수 없고 이런 저런 말은 껍질에 들어가는 것일 따름이다. 고요한 채 깨달을 뿐이지 많은 말 속에 있는 것은 아니다.
* 의식으로 변하는 얼은 인간의 마음이 생기면서 생겨난 신으로 원래부터 존재하는 으뜸가는 신과 같은 존재이지만 구별된다. 세상이 생겨나지 아니하고 인간이 생겨나 인간의 마음이 생겨나지 않은 이상 얼이 생겨날 이유 같은 것은 없다.
2. 참뜻 : 물음) 으뜸가는 신이 인간의 마음에 나타난다는 말이 있는데 사실입니까? 사실이라면 어떻게 그러한 현상이 가능합니까?
답) ‘으뜸가는 신이 인간의 마음에 나타난다.’는 말은 엄밀히 말하면 틀린 말이다. 역사 속에서 수행하는 이들 중 으뜸가는 신을 접촉한 이들이 있을 것이다. 깨달음이 낮다 보면 없던 것이 나타난 것처럼 보이기에 ‘으뜸가는 신이 인간의 마음에 나타난다.’는 말이 떠도는 것이다. 물론 으뜸가는 신을 겪은 이라면 겪지 못한 인간보다는 깨달음의 수준이 높겠지만 수준이 높니 낮니 하는 문제는 상대적인 문제일 따름이다. 수준이 낮다고 말한 이유는 다름 아닌 으뜸가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거늘 갑자기 나타날 이유가 있겠는가? 조건을 갖추게 된 이가 늘 있는 으뜸가는 신을 마침내 찾아 접촉하게 된 것일 따름이지 별 거 있겠나? 예로부터 으뜸가는 신을 겪고서 제대로 된 깨달음을 얻은 이는 비록 얼룩진 마음이기는 하지만 마음을 잘 살펴보라고 말한다. 그러한 이유는 가려진 마음에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을 있게 한 으뜸가는 신이 있기 때문이지. 세상이 생기기 전에도 있고 세상이 생긴 후에도 있는 그러한 마음과 으뜸가는 신은 변화무쌍한 세상과는 구별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곳의 가르침은 세상이 어떤 식으로 변하든 변함이 없다. 그러하기에 누군가 그러한 곳의 가르침이라고 말했는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한다면 그자가 말하는 가르침은 세상이 생기기 전에도 있고 세상이 생긴 후에도 늘 있는 그러한 곳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대는 이와 같은 말을 믿을 수 있겠는가? 믿을 수도 있고 불신할 수도 있겠지. 물론 믿고서 참된 가르침을 따르면 조건을 갖출 수 있고 조건이 갖추어지면 으뜸가는 신을 접촉하여 변함없는 가르침을 전수받을 수도 있겠지만 불신하면 그러한 기회조차 얻지 못하겠지. 하지만 믿는다고 하더라도 겪지 못하면 확인이 되지 않으니 그대에게 큰 의미가 있겠는가? 껍데기만 얻은 꼴이 아니겠는가? 물론 아무 것도 얻지 못한 것보다야 낫겠지. 하여간 이런 저런 말 나불대지 말고 조용히 스스로 조건을 갖추며 직접 겪어보아라.
問一切細參工夫(문일체세참공부) 須要尋常而切己(수요심상이절기)
答曰(답왈) 有何工夫(유하공부) 不嚴而蜜不肅(불엄이밀불숙) 篤恭而持己(독공이지기) 顯晦合一(현매합일) 體用無殊(체용무수) 工夫何在(공부하재) 如何不在所謂大道以默以柔(여하부재소위대도이묵이유) 無時而不適(무시이부적) 無事而不泰然(무사이불태연)
1. 번역 : 물음) 일체 자세하게 몸소 겪으며 익히는 일에 중요한 것은 모름지기 변함 없는 마음(常)과 자기에게 필요한 일을 찾는 것인데 그러한 일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답) 익힘에 있어서 어찌 엄격하지 않고서 진지할 수 있겠는가? 두텁고 낮은 자세로 스스로 지탱하여야 하고 드러남과 어둠을 하나로 합치며 대상과 대상의 작용에 다름이 없게 하여야 하는 것이지 어떤 특별한 방법이 있겠는가? 이른바 큰 도(大道)라는 것은 말 없이 부드럽게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대도는 맞지 아니한 곳이 없고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2. 참뜻 : 물음) 자세하게 겪으며 익히는 일을 할 때에는 변함 없는 마음과 자기에게 필요한 수양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답) 우선 마음가짐이 중요하겠지. 기본적으로 진지한 자세와 존중심, 그리고 인내심이 필요한 법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무엇을 익히건 필수적인 것이라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으면 그대는 어떠한 것을 익히든 성과를 낼 수 없다. 존재하는 대상은 실체와 기능이 있고 실체가 일으키는 작용이 있는 법이다. 실체와 기능, 작용을 진실하게 모두 알겠다는 자세가 진지한 자세이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그대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대는 타인보다 귀하다고 생각하나? 천하다고 생각하나? 그대의 일은 타인의 일에 비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 필요 없다고 생각하나? 그대는 타인보다 귀하지도 않고 천하지도 않으며 그대의 일은 타인의 일에 비해 중요하지도 않고 필요 없지도 않다. 으뜸가는 신은 어느 곳에나 있고 모든 작용은 으뜸가는 신의 작용이 변해서 이루어진다. 그대 또한 으뜸가는 신과 함께 하거늘 어찌 그대가 타인보다 천하겠으며 그대의 일의 작용 또한 으뜸가는 신이 일으키는 작용이 변한 것인데 어찌 필요 없겠는가? 자기에게 맞는 수양법이라는 것은 그대 삶과 그대가 하는 일을 존중하며 충실히 해 나가고 그 속에서 으뜸가는 신의 뜻을 찾는 것일 따름이며 인내심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렇게 살아가며 익히는 마음가짐일 따름이다.
問調息(문조식)
答曰(답왈) 鼻息是外息(비식시외식) 色身上事(색신상사) 心息相依(심식상의) 方是眞息(방시진식) 出息不隨萬緣(출식수만연) 入息不隨蘊界(입식불수온계) 闔闢機關竅妙(합벽기관규묘) 非一時可窺(비일시가규) 亦須力積之久(역수력적지구) 一旦豁然貫徹(일단활연관철) 天地不外也(천지불외야) 人爲大(인위대) 三才並立(삼재병립) 萬化同根(만화동근) 不在身色求(부재신색구) 自有眞息在(자유진식재) 眞息無息(진식무식) 卻有息(각유식) 活潑潑地(활발발지) 至於觀息(지어관식) 聽息(청식) 亦身色上事(역신색상사) 借此攝心(차차섭심) 非眞命脉(비진명맥) 眞命脉還從眞中求之(진명맥환종진중구지)
1. 번역 : 물음) 숨을 고르는 일(調息)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답) 코로 숨 쉬는 일은 무릇 밖으로 숨 쉬는 일이니 육체의 일이다. 마음과 숨이 서로 의지해야 장차 참된 숨이 된다. 내뱉는 숨은 모든 인연을 따르지 않게 되고 들이쉬는 숨은 집착으로 인해 생겨난 마음(蘊界)을 따르지 않게 된다. 열고 닫는 장치와 같은 구멍은 신묘하여 단숨에 엿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름지기 장기간 노력이 쌓이면 하루 아침에 깨닫게 되어 도통하게 된다. 하늘과 땅이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커지니 하늘과 땅과 사람이 나란히 서고 모든 변화가 한 뿌리에서 나옴을 안다. 육체에 집착하여 구하지 아니하여도 절로 참된 숨이 있게 된다. 참된 숨에는 숨이 없지만 반대로 숨이 있어 참으로 힘차게 숨쉰다. 보면서 숨쉬는 일이나 들으며 숨쉬는 일은 또한 육체 상의 일일 따름이니 이러한 숨을 빌려 마음을 다스리려 하면 이러한 숨은 참된 사명에 이르는 줄기가 아니다. 참된 명에 이르는 줄기는 참다운 것을 따르는 가운데에서 구해야 하는 것이다.
2. 참뜻 : 물음) 도통하려면 숨을 고르는 일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러한 말이 대중화되어 여러 종교 인사들이나 종교를 믿지 않는 인사들도 홀로, 때로는 모여서 숨쉬는 일에 집중하는데 정말로 그렇게 하면 도통합니까?
답) 숨을 고르는 일은 마음에 나타나는 현상을 관찰하며 바르게 생각하는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찌 된 노릇인지 수천 년 전부터 숨쉬기 운동을 하면 도통한다고 생각하여 숨쉬기 운동에 열중하는 이들이 있더군. 아무리 아니라고 말하고 참된 방법을 알려주어도 고쳐지지 않으니 할 수 없는 노릇이지.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나 으뜸가는 신을 접촉하는 일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인데 코에 집중하여 숨을 쉰들, 육체를 관찰하며 숨을 쉰들, 혹은 소리를 들으며 숨을 쉰들 어찌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드러내며 으뜸가는 신과 접촉할 수 있겠는가? 도통하기 위해 참된 숨을 쉬라는 말은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키며 생각하고 생각을 모으며 마음을 드러내는 일일 따름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하루 아침에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드러나게 하고 으뜸가는 신과 접촉하여 으뜸가는 신과 같이 될 것이다.
問己土死(문기토사) 戊土生(무토생)
答曰(답왈) 己土亦不死(기토역불사) 己土死(기토사) 戊土亦不生(무토역불생) 戊生則是己活(무생즉시기활) 非此莫能透露(비차막능투로)
1. 번역 : 물음) ‘기(己)에 해동하는 땅은 죽이고 무(戊)에 해당하는 땅은 살리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 기(己)나 무(戊)는 십간에 나오는 말이다. 십간은 갑(甲), 을(乙), 병(丙), 정(丁), 무(戊), 기(己), 경(庚), 신(辛), 임(壬), 계(癸)를 말한다.
답) 기에 해당하는 땅(己土) 역시 죽지 아니한다. 기토(己土)가 죽으면 무에 해당하는 땅(戊土) 역시 살 수 없다. 무토가 살아나면 무릇 기토 역시 살아난다. 이와같이 아니하고 능히 진액에 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2. 참뜻 : 물음)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켜 생각하라고 말씀하시고 얼의 작용을 일으키다 보면 의식이 사라진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은 넋이나 의식을 죽이라는 말씀입니까?
답) 그대의 마음에는 넋도 있고 얼도 있지. 얼이 넋과 만나 그대의 의식이 되지. 그러고 보면 그대의 혼백(영혼)은 얼과 넋의 합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 넋과 만나기 전의 얼은 의식이 없겠는가? 의식도 없는 존재가 어찌 세상을 이루어지게 할 수 있겠는가? 예전에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키라고 말했는데 이는 넋을 죽이라는 말로도 들릴 수 있겠군. 그리 생각하면 넋은 육체에서 비롯되었으니 육체에서 비롯된 욕구나 사회적 욕망을 버리라는 말로도 이해될 수도 있겠지. 넋이 없으면 그대의 마음은 사라지니 얼 또한 그대의 마음에서 살 수 없고 의식으로 변하는 얼이 없으면 마음을 생성시키는 생각하는 존재가 사라지니 또한 그대의 마음은 사라지지. 그대의 마음이 사라지니 또한 넋 또한 사라지지. 즉 넋의 작용을 그치라는 말은 넋을 죽이라는 말이 아니다. 넋의 요구 역시 으뜸가는 신의 뜻에 합당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고 의식을 사라지게 하라는 말은 의식을 죽이라는 말이 아니라 으뜸가는 신의 의식을 살려 으뜸가는 신과 같은 의식으로 생각하라는 말이다.
問必己土煉到一絲不掛(문필기토련도일사불괘) 而後戊土發生否(이후무토발생부)
答曰(답왈) 雖然(수연) 己土稍煉足(기토초련족) 戊土則發生(무토즉발생) 必得戊土生(필득무토생) 方消得己土中陰滞(방소득기토중음체) 不然(불연) 只是陰靈(지시음령) 縱有所得(종유소득) 鬼仙而已(귀선이이) 吾道不如是(오도불여시) 通天徹地妙用周流(통천철지묘용주류) 爾等資質中下居多(이등자질중하거다) 一步一步(일보일보) 非可蠟等(비가랍등) 性天不見(성천불견) 猶如墨漆桶中亂摸行踪(유여묵칠통중란모행종) 焉可枯禪無據(언가고선무거) 便爲高超上著也(변위고초상저야)
1. 번역 : 물음) 필히 기에 해당하는 땅(己土)을 불려서 실한오라기 걸려 있지 아니한 경지에 도달한 이후에야 무에 해당하는 땅(戊土)이 생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답) 비록 그렇기는 하다마는 기에 해당하는 땅이 점점 불려지게 되면 무에 해당하는 땅이 곧 생겨나게 된다. 반드시 무에 해당하는 땅이 생기는 경지에 이르러야 장차 기에 해당하는 땅에 있는 그늘진 덩어리(陰滞)를 없앨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단지 이것은 그늘진 영에 불과하니 비록 얻는 바가 있다고 하더라도 귀신같은 신선(鬼仙)일 따름이다. 우리의 가르침은 이와 같지 않아서 하늘과 통하고 땅을 뚫고 들어가 신묘한 작용이 두루 흐른다. 그대들의 자질은 대체로 바닥 수준이니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지 단숨에 등급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본성인 하늘을 보지 못하면 오히려 검은 옻을 칠한 통 속에서 자취를 찾아 어렵게 흉내내는 것과 같으니 마른 고목과 같은 참선에 의지해 어찌 문득 높은 경지에 올라 초월한 세계를 드러낼 수 있겠는가?
2. 참뜻 : 물음) 넋의 작용을 완전히 그치고 얼의 작용을 능히 일으킬 수 있는 경지에 이르러야 으뜸가는 신과 접촉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답)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니긴 하지만 대체로 그러하다. 그런데 으뜸가는 신이 강림하지 않는 이상 넋의 작용을 완전히 그칠 수 없는 문제가 있긴 하다. 하여간 선천적으로 능히 얼의 작용을 쉽게 일으키는 이가 드물기는 하겠지만 없지 않고 비록 선천적으로 타고 나지는 않았지만 얼의 작용을 일으키는 일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면 그러한 자 역시 얼의 작용을 잘 일으키게 되겠지. 그러한 이들은 어느 순간 단숨에 으뜸가는 신과 접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선천적으로 타고 나더라도 넋과 넋의 작용을 일으키는 일을 좋아한다면 그러한 이는 결국 얼의 작용을 일으키기 어렵게 되지. 그대들은 어느 경우에 해당되는가? 대체로 사람들은 넋을 좋아하고 넋의 작용을 일으키는 일을 좋아하고 즐기니 그대들의 수준은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 바닥 수준일 것이다. 고로 그대들은 단계를 뛰어넘어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으뜸가는 신과 접촉하는 경지에 이를 수 없으니 급한 마음에 서두르지 말고 한 걸음 한 걸음 걷듯이 익히는 것이 좋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으뜸가는 신과 접촉하게 되며 넋의 작용을 완전히 그치게 되어 으뜸가는 신과 같이 되어 얼의 작용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가르쳐 준 대로 하지 않고 익히면 평생 허송세월을 보낼 것이고 우연히 얼의 작용을 일으켜 재주를 얻더라도 악령(鬼仙)이 되어 세상에 해로움만 끼칠 터이니 가르쳐 준 대로 차분히 익히도록 하여라.
胎息(태식) 卽神息也(즉신식야) 非息莫胎(비식막태) 非胎莫息(비태막식) 胎息工夫(태식공부) 則眞人之息(즉진인지식) 以踵深深矣(이종심심의) 入殼之言莫分內外(입각지언막분내외) 郤有內外(극유내외) 有內外者(유내외자) 三關之謂也(삼관지위야) 無內外者(무내외자) 動靜蛤一也(동정합일야) 渾成一片(혼성일편) 化之謂也(화지위야) 非化不足以語神(비화부족이어신) 亦非見道(역비견도) 縱有悟境(종유오경) 雲邊漏一光耳(우변루일광이)
1. 번역 : 태아와 같은 숨이라는 것은 곧 신의 호흡이다. 숨 쉬는 일이 없으면 태아가 없고 태아가 없으면 숨쉬는 일은 없다. 태아의 숨쉬는 법을 익히는 일은 곧 도통한 이의 숨쉬는 법을 익히는 일인데 발꿈치로 깊이 깊이 숨쉬는 일이다. 껍질 안에 들어간 일을 말하면 안과 밖의 구분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안과 밖이 있다. 안과 밖이 있다는 것은 세 개의 관문이 있다는 말이고 안과 밖이 없는 일은 움직임과 그침이 하나로 합쳐지며 뒤섞여 한 조각을 이루어 변화를 겪는 일을 가리킨다. 그러한 변화를 겪지 못하면 신과 으뜸가는 신과 같다고 말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또한 으뜸가는 신(道)을 보지 아니하면 비록 깨달음이 있더라도 그 깨달음은 구름 가장자리에서 새는 한 줄기 빛일 따름이다.
2. 참뜻 : 도교에서 말하는 태아의 숨(胎息)이라는 것은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켜 생각하는 것인데 이는 으뜸가는 신과 통하는 이의 생각이기에 으뜸가는 신의 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얼은 곧 인간의 마음에 나타난 으뜸가는 신이기에 그러하다.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으뜸가는 신과 같이 되면 안과 밖의 구별이 없어지기도 하고 그 속에서 안과 밖이 있게 되기도 한다. 안과 밖의 구별이 없어진다는 말은 으뜸가는 신과 같이 된 이의 생각은 곧 으뜸가는 신의 생각이고 으뜸가는 신의 생각은 으뜸가는 신과 같이 된 이의 생각으로 실현된다는 말이다. 안과 밖의 구별이 있다는 말은 뜻으로 이루어진 으뜸가는 신의 마음은 온갖 세상으로 나타나기에 삼관(三關)이 불가피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하여간 그대가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키다 보면 결국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으뜸가는 신의 뜻을 훤히 알게 되는 날이 있을테니 중단하지 말고 부지런히 수련하도록 하여라. 얼의 작용은 으뜸가는 신의 작용이니 얼의 작용을 일으키다 보면 으뜸가는 신의 강림을 겪지 않더라도 으뜸가는 신의 뜻을 일정 부분 알 수 있을 것이며 그대는 그러한 성과에 만족하며 교만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는 일은 하늘에 잔뜩 끼인 구름이 사라져 푸른 하늘에 태양이 이글거리며 훤해지는 현상에 비유할 수 있다.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지 않은 이상 그대의 깨달음은 그대 스스로 대단하게 여길지 모르겠으나 구름 사이로 삐져나온 한 줄기 빛에 불과할 따름이니 항상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중단없이 부지런히 수련하거라.
問消息是氣否(문소식시기부)
答曰(답왈) 是氣須善消息(시기수선소식) 卽陽升陰降也(즉양승음강야)
1. 번역 : 물음) 사라지는 숨이 무릇 기(氣) 아닙니까?
답) 옳다. 기는 모름지기 사라지는 숨이다. 양기는 오르고 음기는 떨어진다.
2. 참뜻 : 물음) 마음을 살펴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존재가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존재가 기(氣)입니까?
답) 맞다. 마음을 관찰하면 나타날 것이 무엇 있겠나? 언어로 나타나건 표상으로 나타나건 이런저런 생각뿐이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존재가 나타나지.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존재를 그대들은 다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말 그럴까? 얼의 작용으로 인한 생각은 얼이 생각하는 것이고 넋의 작용으로 인한 생각은 넋에 사로잡힌 의식이 하는 것이다. 얼로 돌아간 의식을 양기(陽氣)라고 부르고 넋에 사로잡힌 의식을 음기(陰氣)라고 부른다. 양기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니 으뜸가는 신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음기는 집착으로 얼룩진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으니 집착으로 얼룩진 인간의 마음으로 떨어진다.
問神氣不足(문신기부족)
答曰(답왈) 神氣不足(신기부족) 虧己久之(휴기구지) 故善補之(고선보지) 補足則烘上升(보족즉홍상승) 龍虎玄關一時頓現(용호현관일시돈현)
1. 번역 : 물음) 신의 기(神氣)는 어찌 충분하지 못합니까?
답) 신기가 충만하지 못하면 절로 줄어드니 잘 보충해야 한다. 보충하여 충분해지면 화톳불처럼 위로 오르고 용과 호랑이로 불리는 신묘한 관문이 갑자기 나타난다.
2. 참뜻 : 물음) 얼(神氣)이 충만하다면 굳이 애쓰지 않더라도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으뜸가는 신과 같이 될 것인데 어찌 얼이 부족하여 이런저런 수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답) 얼이 부족하면 수련한다고 되겠는가? 그대는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여 스스로 얼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며 좌절할 지도 모르지. 그래도 스스로 이와 같은 글을 찾아 읽고 있으니 그대는 으뜸가는 신과 얼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타인에 비해 얼이 큰 사람이겠지. 얼이라는 것은 사용하면 커지고 멀리하면 줄어드는 법이다. 꾸준히 얼의 작용을 일으키다 보면 얼은 커질 것이고 얼을 통해 으뜸가는 신과 하나가 되어 단숨에 으뜸가는 신과 같이 되는 일을 겪게 될 것이다.
問坎離交在內(문감리교재내) 由此而大藥産(유차이대약산) 一點元性微明(일점원성미명) 藏在坤腹(장재곤복) 光透廉幃(광투렴위) 純淸絶塵(순청절진) 息住氣寧(식주기령) 止存空明(지존공명) 是謂天地心(시위천지심) 主持萬化(주지만화)
答曰(답왈) 氣寧息住(기령식주) 機之復生(기지복생) 所以活潑(소이활발) 卽俗所謂活子時也(즉속소위활자시야)
1. 번역 : 물음) 감괘와 리괘가 안에서 합쳐지면 이로 인해 큰 약이 생겨 한점의 으뜸가는 본성이 곤괘에 해당하는 배에 감추어져 있다가 어렴풋이 비쳐나온다고 합니다. 빛이 휘장을 끊고 꿰뚫어 완전히 깨끗해져 티끌을 소멸시키면 숨이 살고 기(氣)가 편안해지며 그쳐서 텅 비고 밝음만이 있는 상태, 이를 하늘과 땅의 마음(天地心)이라고 합니다. 천지심은 온갖 변화를 주관한다고 합니다. 사실입니까?
답) 기가 편안해지면 숨이 머물면 기틀(機)이 회복되어 살게 되어 생동감이 넘치게 되는데 이러한 시간을 곧 살아나는 자시(活子時)라고 한다.
2. 참뜻 : 물음) 으뜸가는 신과 인간의 의식이 합쳐지고 인간의 마음이 으뜸가는 신의 마음과 합쳐지면 으뜸가는 신이 강림하여 인간의 의식에 감추어져 있던 얼이 점점 살아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얼이 살아나면 넋이 그치고 의식이 으뜸가는 신과 같아져 그러한 인간의 마음은 결국 으뜸가는 신의 마음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이의 마음은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니 그 속에 세상과 세상의 모든 조화가 있게 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맞습니까?
답) 그대는 말귀를 알아들으니 도통한 모양이군. 인간은 평생 넋에 사로잡혀 살아가기 쉽지. 짐승도 그러하니 그러한 인간은 평생 짐승으로 살아가는 것이지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그러한 인간은 ‘인간으로서는 죽어 있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줄여서 ‘죽어 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고로 얼이 살아나기 시작하여 으뜸가는 신이 강림하여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는 시간은 살아나는 시간이 된다.
問天地非日月不顯(문천지비일월불현) 日月退藏(일월퇴장) 則天地混沌(즉천지혼돈) 神與氣合(신여기합) 氣結神凝(기결신응) 卽坎離交是否(즉감리교시부)
答曰(답왈) 坎離交於不知不覺之地(감리교어부지불각지지) 而運息未嘗小息焉(이운식미상소식언) 天之道無時不轉移(천지도무시부전이) 妙在不期而合(묘재불기이합) 非有心爲之(비유심위지) 生死固在天(생사고재천) 天其有心乎(천기유심호)
1. 번역 : 하늘과 땅은 해와 달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고 해와 달이 사라지면 하늘과 땅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신(神)이 기(氣)와 합쳐지면 기에 신이 맺혀 엉기는 것, 이것이 곧 감괘와 리괘가 합쳐지는 것이 아닙니까?
답) 알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는 장소에서 감괘와 리괘가 합쳐지더라도 숨을 쉬는 일에 있어서 작은 숨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하늘의 이치는 변하고 바뀌지 않는 때가 없으나 묘함은 정해진 기간 없이 합쳐지는 일에 있지 그렇게 되고자 하는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니다. 삶과 죽음은 원래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인데 하늘의 마음에 그대와 같은 마음이 있겠나?
2. 참뜻 : 으뜸가는 신이 없으면 으뜸가는 신의 마음도 없을 것이고 의식으로 변한 얼이 없으면 인간의 마음은 없는 것이니 으뜸가는 신이 강림하여 으뜸가는 신과 같이 된 의식이 생겨나는 일은 곧 으뜸가는 신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합쳐지는 일과 동일하지 않습니까?
답) 얼의 작용을 일으켜 으뜸가는 신을 강림시킬 수 있는 이라면 으뜸가는 신과 통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한 이의 마음이 곧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은 마음의 파편이고 마음은 생각의 벽돌로 이루어진 집과 같다. 그대가 으뜸가는 신을 강림시켰다면 으뜸가는 신과 통하는 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으뜸가는 신과 같이 생각해본 경험이 없다면 그대의 마음은 여전히 집착으로 얼룩진 인간의 마음일 따름이고 여전히 넋두리만 쫑알댈 것이다. 고로 그대의 마음이 으뜸가는 신과 같은 마음이 되려면 장기간 얼의 작용을 일으켜 으뜸가는 신과 같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問回光返照(문회광반조) 乃生死海中之渡筏(내생사해중지도벌) 玉液煉形(옥액련형) 卽擧水制火之妙喩(즉거수제화지묘유) 至於人心之覺(지어인심지각) 其體一(기체일) 其用二(기용이) 有昏時之覺(유혼시지각) 有自然之覺(유자연지각) 昏時之覺如電光之一瞬(혼시지각여전광지일순) 若耳目之視聽焉(약이목지시청언) 自然之覺(자연지각) 如聲之自入耳(여성지자입이) 物之自接目(물지자접목) 無爲而無不爲(무위이무불위) 無在而無不在(무재이무부재) 神自昭然(신자소연) 易曰(역왈) 知幾其神乎(지기기신호) 莫知所從來(막여소종래) 常應常靜(상응상정) 是否卽所謂無位眞人最上一乘也(시부즉소위무위진인최상일승야)
答曰(답왈) 此喩是仍須心印(차유시잉수심인) 學道之士(학도지사) 正欲於葛蕂扯絆中(정욕어갈승차반중) 方見經綸妙手(방견경륜묘수) 不然(불연) 何爲奇材(하위기재) 庸俗而已(용속이이) 順境誰不會過(순경수불회과) 只到逆境略加(지도역경략가) 怨天尤人之心不免(원천우인지심불면) 殊不知平素有何功德(수부지평소유하공덕) 消受天地生養之報(소수천지생양지보) 還自思量否(환자사량부)
1. 번역 : 물음) 돌리며 비추다가 되돌아가 비추는 일은 곧 삶과 죽음을 가르는 바다를 건너는 뗏목이고 옥의 진액을 달구는 모양은 곧 물로써 불을 다스리는 일로 묘하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에는 근본은 하나로 같지만 방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고 절로 깨달아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의 깨달음은 번개가 눈 깜박하는 사이에 나타나는 깨달음과 같고 눈과 귀가 보고 듣는 것과 같습니다. 절로 이루어지는 깨달음은 소리가 절로 귀에 들어오고 사물이 절로 눈에 접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는 일이 없지만 하는 일이 없는 것이 아니고 존재함이 없지만 존재함이 없지 아니한데 신(神)이 절로 밝게 빛납니다. 역에서 말하길 ‘기미를 아는 그것은 신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어찌 그러한가?’ 알려하지 말고 변함 없이 응하고 변함 없이 고요하면 되니 이와 같은 일은 이른바 위 없는 도통한 이의 최고의 비결 아니겠습니까?
* 子曰(자왈) 知變化之道者(지변화지도자) 其知神之所爲乎(기지신지소위호)
번역 : 공자가 말하길 변화의 이치를 하는 이는 신의 행사를 아는 이라고 하였다. (참조 : <계사전>에서, 주역, 김경탁 역, 명문당, 2017년, p506)
답) 이 비유는 모름지기 마음으로 도장 찍듯 확인해야 한다. 도(道)를 배우려는 선비는 칡과 참깨가 찢겨 뒤섞여 있는 가운데에서도 장차 신묘한 수법으로 바르게 보고 다스리려 해야 한다. 그러하지 않으면 어찌 뛰어난 재목이라고 말할 수 있겠나? 그저 평범한 재목일 따름이다. 순탄한 경우에야 누구나 지낼 수 있지만 어려운 지경에 처하면 하늘을 원망하고 타인을 책망하는 마음을 피하지 못하니 평소에 어떤 것을 익히고 살았는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늘과 땅이 낳고 길러주는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는 돌이켜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하지 않겠나?
2. 참뜻 : 물음)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켜 생각하다가 으뜸가는 신에게 돌아가 으뜸가는 신과 같이 생각하는 일은 생명을 얻는 일에 비유 되고 얼을 단련하여 불리는 일은 물로써 불을 다스리는 일에 비유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깨달음에 이르는 방식은 하나이지만 나타나는 형태는 둘입니다. 알고자 하지만 알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는 경우가 있고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절로 아는 경우가 있습니다. 절로 아는 경우는 알려고 애 쓰지도 않는데 눈길이 가면 보이는 것에 간직된 참된 뜻이 절로 보이고 귀에 소리가 들리면 소리에 간직된 참된 뜻이 절로 들리니 얼이 제대로 커지며 단련된 경우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하는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켜 생각하다가 으뜸가는 신에게 돌아가 으뜸가는 신과 같이 생각하는 일(回光返照)은 으뜸가는 신과 통하고자 하는 위 없는 비결 아니겠습니까?
답) 물론 그러하긴 하다. 위 없는 비결이라고 하지만 다른 방법 같은 것은 없으니 유일한 비결이기도 하지. 알려고 해도 알지 못하다가 아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깨닫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고 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아니지. 의지와 무관하게 충분한 조건을 갖추지 못하다가 충분한 조건을 갖추면 갑작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일 따름이지. 절로 얻는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평소에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켜 생각하면 그러한 생각은 모두 깨달음이 되지. 깨닫고자 하지 않아도 절로 깨달으니 ‘하는 일 없이 한다.’라고 말 할 수 있겠군. 둘 모두 얼이 작용한 결과로 근본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하기에 깨달음에 이르는 근본은 같지만 경우는 두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여간 잘 모른다고 하여 포기하고 외면하는 일은 좋은 자세가 아니야. 순탄한 경우에야 누군들 못하랴! 조금만 역경에 처하면 사람들은 으뜸가는 신을 원망하고 타인을 책망하지. 평소에 넋두리로 가득찬 견해를 익히고 넋의 작용에 의한 생각을 즐기고 행동하니 그런 것 아니겠는가? 으뜸가는 신의 은혜를 얻어 세상으로부터 복을 얻으려면 우선 으뜸가는 신이나 타인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얼의 작용을 일으켜 으뜸가는 신과 통해야 하지 않겠나?
問習靜(문습정)
試問足下何時靜(시문족하하시정) 何地靜(하지정) 若欲此身安(약욕차신안) 是養小生術(시양소생술) 爲天地所忌(위천지소기) 所謂偸懶輩也(소위투라배야) 烏得謂之爲學道也(오득위지위학도야) 廣大高明(광대고명) 隨時隨處而無不通(수시수처이무불통) 其流行也(이무불통기류행야) 其化育也(기화육야) 道以生道(도이생도) 而變化出焉(이변화출언) 乃修道者(내수도자) 動浴離塵去俗(동욕리진거속) 殊不知和其光同其塵(수부지화기광동기진) 何謂也(하위야) 天以天(천이천) 地以地(지이지) 人以人(인이인) 未離平人(미리평인) 況道不遠人(황도불원인) 日用常行(일용상행) 無非道也(무비도야) 道在天地(도재천지) 而爲天地(이위천지) 道在人(도재인) 而爲人(이위인) 存神知和(존신지화) 道豈遠於人哉(도기원어인재)
1. 번역 : 물음) 고요함을 익히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답) 어떠한 시간에 익히고 어떠한 장소에서 익히면 그대는 만족하겠는가? 만일 이 육체가 편안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육체의 삶(小生)을 기르는 기술이니 하늘과 땅이 싫어하는 바이다. 그러한 이는 남의 것을 탐내고 게으른 양아치이니 어찌 그러한 이를 도(道)를 배우는 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넓고 크고 높고 밝은 것은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나 있으니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그것은 퍼져서 행하고 조화로써 기른다. 도(道)는 살아가면서 도(道)를 이루며 변화를 일으킨다. 도를 배우고자 하는 이가 도리어 티끌을 멀리하고 속세를 떠나고자 하여 유달리 그 빛에 응함을 알지 못하고 티끌과 함께 하는 길을 알지 못하니 어찌된 말인가? 하늘은 하늘로 있고 땅은 땅으로 있고 사람은 사람으로 있는 것이니 보통 사람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도(道)가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아니 하니 하루 하루 작용에서 항상 행하여 지는 것이 도가 아닌 것이 없다. 도가 하늘과 땅에 있으면 하늘과 땅이 되고 도가 사람에게 있으면 사람이 되니 인간의 마음에 실재하는 신(存神)은 조화를 아니 도가 어찌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겠는가?
2. 참뜻: 물음)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키는 특별한 비책은 없습니까?
답) 어떤 비책으로 익히면 그대는 만족하겠는가? 넋의 작용을 그치고자 산이나 광야에 가서 익히면 효과적일까? 아니면 어떤 일에도 신경쓸 필요가 없는 편안한 곳에서 익히면 효과적일까? 예로부터 으뜸가는 신과 통하고자 하는 이들 대부분은 으뜸가는 신과 통하기 위해서는 넋의 작용을 그쳐야 하는 정도는 직관적으로 알고서 속세를 멀리하고 사람의 일을 멀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이들 대부분은 평생 허송세월을 살다가 죽었지. 이는 어찌된 일인가? 으뜸가는 신이 공간에 머물면 공간이 생기고 물체에 머물면 물체가 생기고 사람에 머물면 사람이 생기니 어떤 사람이든 으뜸가는 신과 함께 하며 으뜸가는 신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게 된다. 헌데 사람과 사람의 일을 멀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여 속세를 떠나 사람과 사람의 일을 저버린다면 어찌 으뜸가는 신과 통할 수 있겠는가? 실상 사람이 섭리를 통해 세상의 조화를 알 수 있는 원인 역시 으뜸가는 신이 사람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있기 전 섭리를 통해 세상의 조화를 일으키는 이가 으뜸가는 신이기 때문이지.
問人有利鈍之分(문인유리둔지분) 敎有立言之異(교유립언지이) 如天資明健(여천자명건) 本體透露(본체투로) 明足以察其機(명족이찰기기) 健足以致其決(건족이치기결) 工夫自歸於陽簡(공부자귀어양간) 原不妨徑趨佛路(원불방경추불로) 一趨直立如來也(일추직입여래야)
如本體昏蔽(여본체혼폐) 則是致虛之功(즉시치어지공) 未至(미지) 致虛則集義也(치허즉집의야) 適合其宜之謂義(적합기의지위의) 適合其宜(적합기의) 卽是人心恰好處(즉시인심흡호처) 恰好卽中也(흡호즉중야)
答曰(답왈) 人心昏蔽(인심혼폐) 亦有鑒照(역유감조) 不過因知生知(불과인지생지) 省力費力之別(생력비력지별) 惟照方能致虛(유조방능치허) 到恰好處(도흡호처) 已無安排(이무안배)
1. 번역 : 물음) 사람은 영리함과 아둔함으로 구별할 수 있고 가르침에는 핵심이 되는 말씀에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만일 타고난 자질이 밝고 튼튼하다면 본바탕이 뚫고나와 드러납니다. 밝음이 충분하면 그 기틀을 살필 수 있고 튼튼함이 충분하면 그 틈에 이르게 하여 익히는 일이 절로 바른 가르침(陽簡)으로 되돌아가 곧장 부처의 길로 이르게 하는 지름길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한 번 쫓아가 곧장 여래의 경지에 들어갑니다. 만일 바탕이 어둡고 가려져 있다면 이는 빔(虛)에 이르는 수련이 경지에 이르지 못한 연유입니다. 빔에 이르자면 뜻을 모아야 합니다. 그것이 마땅함에 꼭 들어맞는다는 것은 옳음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마땅함에 꼭 들어맞는다는 것은 곧 사람의 마음은 알맞은 장소(恰好處)인데 알맞음은 중간(中)을 가리킵니다. 맞습니까?
답) 사람의 마음은 어둡고 가려져 있고 거울과 같은 비춤이 있다. 절로 얻은 깨달음인가 살아가면서 얻은 깨달음인가 하는 차이와 힘을 덜 쓰느냐 많이 쓰느냐의 차이가 있을 따름이다. 오직 비추기만 하면 장차 빔의 경지(虛)에 이를 것이다. 알맞은 장소(恰好處)에는 이미 편안함도 배척함도 없는 장소이다.
2. 참뜻 : 물음) 사람들은 저마다 자질이 다릅니다. 영리한 이가 있는가 하면 아둔한 이가 있습니다. 물론 영리한 이가 만일 인내심이 강하다면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으뜸가는 신과 같이 되는 일은 쉬울 것입니다. 그러니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는 일도 정해진 운명 아니겠습니까? 으뜸가는 신과 통하여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고자 하는 이는 으뜸가는 신의 뜻이 간직된 글이나 말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글이나 말은 수없이 많고 그 사람을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글이나 말은 찾기 어려우니 결국 그와 같은 글이나 말을 접하는 것도 운명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답) 누구나 집착으로 얼룩진 인간의 마음을 지니고 있고 으뜸가는 신과 통하고자 하는 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또한 모든 인간의 마음에는 으뜸가는 신과 으뜸가는 신의 마음이 가려져 있으니 으뜸가는 신과 통하는 데에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없다. 물론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영리함은 으뜸가는 신과 통하는 데에 유리하겠지만 그러한 자라고 하더라도 으뜸가는 신의 뜻에 어긋나면 으뜸가는 신과 통할 수 없다. 영리함은 으뜸가는 신과 통하는 여러 조건들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내심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에는 으뜸가는 신의 뜻을 간직한 글이나 말이 있을 수 있다. 또한 으뜸가는 신을 빙자한 글이나 말 또한 많겠지. 으뜸가는 신과 통하고자 하는 이가 사심 없이 바르게 수련하면 그러한 이는 결국 그에게 도움이 되는 으뜸가는 신의 뜻이 간직된 글이나 말을 스스로 알아보고 익힐 것이다. 고로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은 없다. 넋의 작용을 그치고 얼의 작용을 일으켜 생각하면 누구나 으뜸가는 신과 통하여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날 수 있다는 말이다.
人情冷煖(인정냉난) 世事變幻(세사변환) 頗難預料(파난예료) 均無一定(균무일정) 花開時人玩賞(화개시인완상) 花落時一推潦草(화락시일추료초) 要攝得去(요섭득거) 掃得淸(소득청) 方爲道器(방위도기) 吾之得與天地同其悠久者(오지득여천지동기유구자) 因體天地好生之心(인체천지호생지심) 爾等如果發願(이등여과발원) 隨力隨才(수력수재) 無損於己(무손어기) 有益於人(유익어인) 隨時隨事(수시수사) 勉力而行(면력이행) 只要的當無咎(지요적당무구) 轉禍爲福(전화위복) 卽是吉星(즉시길성) 卽是吾門抒化大弟子(즉시오문서화대제자) 他日冥冥受報(타일명명수보) 得握人間禍福柄(득악인간화복병) 不亞吾也(불아오야) 吾意亦非浪說(오의역비낭설) 須要善會(수요선회)
1. 번역 : 사람의 감정은 차가워지기도 하고 따뜻해지기도 하고 세상의 일은 변화무쌍하여 미리 헤아리는 일은 무척 어려워 죄다 하나도 정해져 있지 않다. 꽃이 필 때에는 사람은 즐기며 칭찬하지만 꽃이 질 때에는 오로지 거름풀로 여겨 뜯어 버리고 쓸어서 깨끗하게 하니 무릇 (여기에) 도의 그릇(道器)이 있다. 나의 깨달음이 하늘과 땅과 같아져 유구해지는 까닭은 살리는 일을 좋아하는 하늘과 땅의 마음을 체득하였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만일 그와 같은 바람을 일으켜서 능력과 재주에 따르면 자신에게 잃는 것이 없게 하고 타인을 이롭게 할 것이다. 때와 일에 따라 힘써 행하고 오직 진실과 사리에 맞추면 허물이 없고 재앙이 바뀌어 복이 된다. 이것이 곧 상서로운 별이고 이것이 곧 우리 문파가 주장하는 대제자이니 어떤 날 깊은 어둠에 빠지더라고 보답을 받게 된다. 사람들의 화복의 자루를 얻어 쥐니 나보다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뜻은 또한 허망한 말이 아니니 반드시 잘 이해해야 한다.
2. 참뜻 : 사람의 감정은 쉽게 변하여 생각과 행동은 종잡을 수 없고 세상의 일은 복잡하고 변화가 일어나 세상이나 인간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꽃이 필 때에는 찬탄하며 아름다움을 칭송하며 즐기지만 꽃이 질 때에는 한낮 쓰레기로 여겨 뜯어서 버린다. 무릇 그러한 현실 속에 깨달음의 길이 있는 법이다. 피었다 졌다 하는 꽃과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해서 무엇 하겠나? 결국 쓰레기가 될 따름이다. 나의 깨달음이 유구해지는 까닭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도 존재하며 변치않는 으뜸가는 신의 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대들 역시 그와 같이 되고자 한다면 매사에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재주껏 힘써 행하라. 그리하면 스스로에게 이롭고 타인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매사에 부지런하고 힘써 행하며 진실과 진리에 따르면 허물이 없고 재앙도 복으로 바뀌니 그러한 마음가짐이 그대의 삶의 스승이 되어 그대나 타인의 운명의 주인이 될 것이고 나보다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나의 뜻은 허망한 말이 아니니 반드시 잘 이해해야 한다.
今之學道者(금지학도자) 多犯喜靜(다범희정) 惡動之弊(오동지폐) 不知強離冤牽(부지강리원견) 依舊未了緣(의구미료연) 縱或絶人逃世(종혹절인도세) 深入山林(심입산림) 而山中虎豹豹狼魈魎魑魅(이산중호표표랑소량리매) 暴雷烈風(폭뢰열풍) 令人心驚神顫(령인심경신전) 况乎血肉之軀(황호혈육지구) 衣食供給(의식공급) 在在需人(재재수인) 寒暑侵霪稍失調護(한서침음초실조호) 遽成苦惱病痛(거성고뇌병통) 臨時不悟(임시불오) 走入旁蹊(주입방혜) 反悔學道(반회학도) 毫無益處(호무익처) 適足害人(적족해인)
又有一等(우유일등) 志慕山林(지모산림) 不顧時事之行藏宜否(불고시사지행장의부) 一味離塵(일미리진) 以爲別於流俗(이위별어류속) 不知廢時失業(부지폐시실업) 以致事體缺欠(이치사체결흠) 精神日見頹敗(정신일견퇴패) 道亦莫能解悟(도역막능해오) 不識自已失足(불식자이실족) 走入旁門(주입방문) 反言爲善不昌(반언위선불창) 道不可學(도불가학) 加之邪師僻友(가지사사벽우) 紊亂道宗(문란도종) 沽名釣譽(고명조예) 毫釐千里(호리천리) 爲吾道害(위오도해)
1. 번역 : 오늘날 도를 배우고자 하는 이들은 고요함을 좋아하고 움직임을 싫어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어 억지로 원통함과 거리낌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예전의 업에 의지하고 인연을 끝내지 못하고 있다. 혹여나 사람과의 만남을 끊고 세상살이에서 도망쳐 산 속에 깊이 들어가면 산 속에 있는 호랑이와 표범과 이리와 온갖 잡귀들과 악령들이 있고 사나운 우뢰와 세찬 바람이 있어 사람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신을 떨게 한다. 하물며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이 옷과 음식을 필요로 하기에 구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하니 추위와 더위가 파고들고 장마를 겪게 되니 점점 몸의 균형과 건강을 잃게 되어 갑자기 고통과 번뇌에 빠져 병들어 아프게 된다. 때에 이르러 깨닫지 못하고 곁의 좁은 길로 달려 들어가서 도(道)를 배우는 일에 반발하고 도를 배우는 일이 터럭만큼의 이익도 없다고 후회하니 사람을 해치기에 충분하다.
또한 한 무리가 있는데 그 무리는 산림을 사모하여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지 따지지 않고 그저 티끌을 떠나고자 하여 세속의 흐름과 다르고자 하는데 기회를 놓치고 일을 잃는 것임을 알지 못하여서 일이나 몸에 하자가 많게 되고 정신이 날로 쇠하여 무너져 도(道)는 또한 풀어 깨달을 수 없게 되고 스스로 이미 잘못된 행동을 알지 못하고 곁에 있는 문으로 달려 들어가 ‘선(善)은 번창할 수 없고 도(道)는 배울 수 없는 것이다.’라고 반대로 말한다. 더하여 사이한 스승과 사이한 동지를 만들어 도(道)를 따르는 문파를 어지럽히며 명예를 얻으려 한다. 털끝만한 차이가 천리의 차이로 결정나 우리의 가르침을 방해하게 된다.
2. 참뜻 : 오늘날 으뜸가는 신과 통하여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고자 하는 이들 대부분은 세상일에서 벗어나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세상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가리키니 무슨 소득이 있겠는가? 혹여나 극단적으로 생각하여 사람과 세상일에서 완전히 단절되고자 산속 깊이 홀로 들어가서 수련하면 무엇하겠는가? 온갖 산짐승들과 추위와 더위, 무시무시한 우뢰와 장대비에 시달리며 건강을 잃게 되고 공포와 불안 속에 얼이 약해져 온갖 잡귀들과 악령에 시달리다가 미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그러한 이는 결국 허송세월만 보내다가 으뜸가는 신과 통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터럭만큼의 이익도 없다고 말하며 으뜸가는 신과 통하고자 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니 세상에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이일 뿐만 아니라 타인을 해치기에 충분한 이이다.
또한 한 무리가 있는데 이들은 문명을 싫어하고 자연을 사랑하여 문명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짐승처럼 사는 것이 으뜸가는 신과 통하고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했지만 그러한 일은 건강에 해롭고 사람을 미치게 하는 길일 따름이며 얼은 점점 사라지게 된다. 결국 얼을 통해 으뜸가는 신과 통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그리하여 마찬가지로 ‘으뜸가는 신의 뜻 같은 것은 없고 으뜸가는 신의 뜻에 따른 삶은 있을 수 없으며 으뜸가는 신과 통하여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난다는 견해는 거짓이다.’라고 주장하며 으뜸가는 신과 통하고자 하는 문파를 어지럽히며 부나 명예를 얻으려 한다. 이처럼 털끔 만큼의 차이는 나중에 가서는 해와 달 사이의 거리가 되는 것이다.
噫二三子奮志向上(희이삼자분지향상) 參妙透玄(참묘투현) 若於人事中修之(약어인사중수지) 則更勝於山林(즉갱승러산림) 吾道流傳下去(오도유전하거) 總是人事中修持(총시인사중수지) 不許深山鬼窟(불허심산귀굴) 逃世絶人(도세절인) 作自了漢(작자료한)
1. 번역 : 아아! 두세 제자가 떨치고 일어나 뜻을 높은 곳에 두고서 묘함에 참여하여 신비를 꿰뚫고 나아가 세상살이 가운데 이를 익히니 산속에서 익히는 것보다 훨씬 훌륭하다. 우리의 가르침은 아래로 흘러 전해지겠지만 언제나 세상살이 가운데 익히고 지녀야 할 것이며 깊은 산 속 귀신이나 사는 굴에 들어가 세상에서 도망쳐 사람을 끊어 홀로 익히는 일을 허가하지 않는다.
2. 참뜻 : 그대가 세상일을 저버리지 않고서 세상 속에서 으뜸가는 신과 통하고자 한다면 참으로 장한 일이다. 바른 길이긴 하지만 어느 시대인건 바른 길을 가는 이는 두세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대가 그리 익히고 있다면 세상일을 팽개치고 익히는 이들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을 것이니 삿된 견해에 휘둘리지 말고 세상 속에서 참된 사명을 다하며 익히도록 하여라.
人之生也(인지생야) 拘氣於涵渾之中(구기어함혼지중) 而生質及其覺也(이생질급기각야) 而陰陽二分(이음양이분) 嗜欲紛華(기욕분화) 吉凶悔吝(길흉회린) 茫不自覺(망불자각) 迨陰陽大判(태음양대판) 元氣不可復(원기불가복) 繼之以亡而已矣(계지이망이이의)
1. 번역 : 사람이 생겨나는 일은 잠겨서 혼탁한 가운데 기(氣)를 품게 되어 바탕이 생겨나고 의식이 있게 됨에 이르고 음과 양(陰陽), 둘로 나누어진다. 탐하는 것과 욕심이 어지럽게 왕성하게 번성하는데 길함과 흉함, 후회와 인색이 아득할 정도로 자리잡아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 음과 양이 크게 갈라짐에 이르면 으뜸가는 기(元氣)는 돌아올 수 없고 그 상태를 이어가다가 사망에 이를 따름이다.
2. 참뜻 : 사람이 생겨나는 일은 여성의 자궁에서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일에서 시작하는데 어느 정도 육체가 만들어지면 넋이 생겨나고 생겨난 넋이 얼과 결합하여 의식이 생겨난다. 하지만 넋이 왕성하게 자라면 얼은 점점 약해지고 결국 얼과 넋이 완전히 갈라지는 일이 생기는데 그러면 결국 얼은 더이상 돌아올 수 없게 되고 의식이 사라지며 사망에 이르게 된다.
其氣乃天地之氣(기기내천지지기) 非爾我以私之(비이아이사지) 其中有理存焉(기중유리존언) 善者善之(선자선지) 惡者惡之(악자악지) 墮惡趣(타악취) 落異類(락이류) 其魄之歸(기백지귀) 其魂之散(기혼지산) 其感之薄(기감지박) 其遇之値(기우지치) 皆非一類觀也(개비일류관야) 而其大端(이기대단) 禾不生黍(화불생서) 鳳不乳烏(봉불유오) 各有不同(각유부동) 看人之趨向何如耳(간인지추향하여이)
1. 번역 : 그 기(氣)는 곧 하늘과 땅의 기로서 그대와 나의 사사로운 소유가 아니고 그 속에는 리(理)가 있다. 선한 사람은 그것을 선하게 사용하고 사악한 이는 그것을 악하게 사용한다. 사악한 견해에 사로잡히거나 이단의 무리에 떨어지거나 넋이 돌아가 혼이 흩어지거나 느낌이 얇거나 애증에 집착하거나 하는 일들을 한 시각으로 묶어 볼 수는 없지만 그리 되는 큰 실마리는 된다. 벼에서 기장이 생기지 않고 봉황새가 까마귀를 낳지 않는 것과 같이 각각에는 동일하지 않음이 있다. 사람이 달려나가는 방향을 보면 뻔하지 않겠는가?
2. 의식을 있게 하는 얼은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다. 어떤 이는 얼을 선하게 사용하여 세상과 타인을 이롭게 할 것이고 어떤 이는 얼을 악하게 사용하여 세상과 타인에게 해를 끼칠 것이다. 세상에는 그릇된 견해가 많다. 그릇된 견해는 그릇된 생각과 행위로 이어지니 참된 견해를 찾아 참된 뜻을 얻어 으뜸가는 신과 통하여 으뜸가는 신의 마음에 거듭나 세상과 타인에게 이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로써 <태을금화종지 번역 및 이해>를 끝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