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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에서... 둘리틀 폭격대원들,오른쪽 두번째 둘리틀 중령(알렉 볼드윈),네번째 레이프(벤 애플랙),
왼쪽에서 두번째 대니(조쉬 하트넷)
[ 영화, 진주만 ]
영화 <진주만>은 마이클 베이 감독 작품으로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공격 80년이 가까이 지난 오늘, 그 날의 의미를 새롭게 하는 교훈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전쟁물 등 초대형 상황의 드라마가 평화시대에는 큰 감동을 바랄 수 없어 러브 스토리를 전편에 깔고 영화는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작기간 1년, 제작비 1억3.500만 달러(1천755억원), 디즈니사기 사운을 걸었을 지는 잘은 모르지만, 당시(2001년)에는 사상 미증유의 초거액이었습니다. 영화 개봉에 즈음하여 하와이 현지 시사회장은 `진주만의 날'을 실감케 했습니다. 당시 대전에 참가했던 역전의 용사들, 생존 주민들의 위안 잔치 자리가 되었지요.
시사회보다는 그들의 날을 방불하게 했다고 합니다.흥행 성적만 보면 제작비 1억 4000만 불에 전세계 총수익은 4억 5000만 불로 제작사의 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을지라도 일단 흥행에는 성공한 영화입니다. 참고로 마이클 베이의 전작인 <아마게돈>은 제작비 1억 5000만불 총수익 5억 4500만불을 기록했습니다. 이후 베이감독의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전대미문의 흥행대박을 터뜨립니다.
컴퓨터 그래픽이 다소 과도하게 사용했다는 지적이 따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2001년의 이 영화는 블록버스터 중에서는 거의 첫 CG 공중전 영화라는 시도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두둔해 줄 여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CG라고 생각하기 쉬운 장면들 중 상당수는 실제 비행장면이었습니다.
최고의 파일럿을 섭외해서 기령 60년이 넘은 제로 전투기(일본기)나 최대한 가깝게 재현한 미군기(영화<도라 도라 도라>에서 사용했던 T-6 텍산 훈련기 개조품이 여기서도 쓰였습니다) 등을 카메라 코앞에서 날려대면서 찍었습니다. 심지어 촬영 중 사고로 추락한 기체도 있었습니다. 파일럿은 무사히 탈출했다고 합니다.
둘리틀 특공대의 묘사도 상당히 훌륭한 편입니다. 비상착륙(중국 본토) 이후의 묘사를 제외하고는 거의 사실에 부합합니다. B-25는 당시 육군항공대에서 운용하던 폭격기로 항모 호넷 갑판에서 띄운다는 것은 말 그대로 도박이었습니다. 이후 도쿄 상공을 폭격하고 대공화망을 뚫으며 탈출하는 묘사도 훌륭했습니다.
여주인공과 동료 간호사, 군의관들이 대량 전사상자를 처리하는 처참한 장면의 연출도 대단히 훌륭했습니다. 시야의 주변부가 흐려지는 현상은, 극도로 바쁘거나 하는 등 가벼운 패닉 상태에 빠져 본 사람들은 누구나 공감이 갈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도 등장하지만, 살 수 있는 부상자를 먼저 치료하고 가망 없는 부상자는 포기하는 트리아지(triage, 환자분류)의 잔혹함도 잘 묘사되고 있습니다.
전쟁이나 재난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장면을 연상시키는 여주인공이 지혈대가 떨어지자 신고 있던 스타킹을 벗어 지혈대 대신 사용하던 것도 당시 실제 있었던 일을 잘 고증한 장면이었다고 합니다.음악도 매우 좋았습니다. 당연하겠지만 영화의 음악감독이 한스 짐머(글래디에이터, 덩케르크 음악 담당)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이스 힐이 부른 <There You'll Be>은 나름대로 북미와 유럽에서 상위권에 랭크된 노래였고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에 지명되기도 했으며 메인 테마곡인 <Tennessee>는 아직도 TV 등지에서 자주 쓰이는 마성의 배경음악 중 하나입니다. 실제로도 진주만 공습 당시 날아올라 반격에 나선 육군의 P-40 워호크, P-36 호크 조종사들이 몇 명 있었습니다.
영화에서처럼 제로 전투기를 상대로 멋지게 싸운 건 아니고 상대적으로 느린 폭격기 몇 대 잡고 도망다니기 바빴다고 합니다. 워낙 쪽수 차이가 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래도 이들 대부분은 용케 살아 남았다고 합니다. 또한 전함 웨스트버지니아의 조리병인 도리 밀러(바로 직전에 권투로 백인 수병을 때려눕혔던 흑인 수병) 역시 실제로 대공기관총을 잡고 사격, 일본 해군기 2대를 격추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이 공으로 밀러는 해군 십자장을 받았습니다.어쨌든 일본 개봉은 했다고 합니다. 흥행은 참패했지만...당연하겠지만 이 영화를 본 일본인들은 엄청 불쾌해 하는 반응을 보였다는 후문입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미 해군 장병들에게 기총사격이나 하고, 병원을 폭격하는 등...
근데 사실 실제로도 진주만 공습당시 일본군 조종사들은 영화처럼 잔인했다고도 합니다. 실제로 민간인들한테도 사격을 가해 일흔명 넘게 학살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영화는 일본 관객을 위해 나름대로 상당히 신경을 썼습니다. 대놓고 미군이 옳다고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있다라는 내용도 살짝 내용을 넣어줬습니다. 그리고 야구하는 애들을 발견한 일본 해군 뇌격기의 후방석 기총사수가 다급하게 피하라고 손짓하는 장면도 넣어줬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상영할 때는 대사를 아예 갈아버렸다는 이야기까지도 있습니다. 이 영화도 무삭제판(감독판)이 따로 나왔습니다. 극장개봉판도 전투 장면이 대단히 살벌한데, 무삭제판은 훨씬 리얼합니다. 무삭제판에서는 어뢰 피격의 충격으로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의 함장이 죽어가는 장면에서는 함장의 창자가 쏟아지고, 폭격의 충격파와 파편에 휩쓸린 이의 얼굴과 사지가 갈갈이 분해되며, 제로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맞은 사진사의 머리도 반쯤 떨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패닉에 빠진 간호사가 의료상자를 엎지른 장면에서는 바닥에 쏟아진 의료용품 사이사이로 절단된 팔, 다리, 손가락이 굴러다니는 장면이 제일 압권입니다. 그리고 고참 육군 정비부사관 얼이 하늘을 향해 M1톰슨을 갈기면서 "덤벼라, 이 눈 째진 노란색 원숭이 x발 것들아"이라며 씹는 대사도 짤렸습니다.
이건 인종차별 문제가 될까 싶어 삭제한 듯 싶습니다.미 해군의 손길이 닿은 영화인 까닭에 퇴역 군함들이 다수 동원되었습니다. 다만 당시의 함선들은 거의 모두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 애리조나 등 대부분의 당시 전함들은 CG로 재현되었습니다. 퇴역 군함들도 배경으로 잠깐 잠깐 등장합니다.
[ 줄거리 ]
어릴 때부터 비행기를 좋아했던 두 불알친구 레이프 맥컬리(벤 애플렉), 대니 월커(조쉬 하트넷)가 성장하여 미 육군에 함께 입대합니다. 신검과정에서 약간의 결격 사유가 있었지만 레이프는 사정사정하여 미 해군 간호사 에블린을 꼬시면서 신검을 무사히 통과 결국 P-40 전투기 조종사로 입대도 하고 에블린과 사귀게 됩니다.
임관 후 하와이 주둔 육군 항공대의 비행단으로 배치 받아 중위로 진급해 평화롭게 훈련을 받던 두 친구는 심심하니까 자주 영창을 갈 행동을 하면서 지냅니다. 레이프는 평화로운 나날이 지겨웠는지 유럽의 전황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 히틀러의 만행을 막겠답시고 영국 공군으로 지원해 나가면서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에블린을 부탁한다고 대니에게 말합니다.
영국에 도착하여 레이프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하도 조종사가 부족하고 상황도 좋지 못해서 총알 구멍이 뻥뻥 뚫리고 전 조종사의 피도 닦지 못한 스핏파이어를 제공받습니다. 전 조종사는 착륙하고 얼마 안 돼 사망하였다고 언급됩니다.
어느 날 평소대로 영국해협에서 항공전을 수행하던 중 레이프의 스핏파이어가 격추되어 바다에 추락합니다. 그는 고장나서 안 열리는 캐노피를 권총으로 쏘아 부수고 탈출하려고 시도하지만... 유해를 찾지 못한 영국 공군은 에블린에게 레이프가 전사했다는 통보를 하게 됩니다.
레이프의 전사 통보를 받게 된 대니는 레이프의 부대로 에블린을 찾아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하다 어느 새 둘의 공통된 친구를 향한 감정이 서로를 향한 연애 감정으로 바뀌면서 대니는 에블린과 사귀게 됩니다.그러던 어는 날. 레이프가 기적적으로 생환하여 하와이로 돌아오고, 대니와 에블린이 사귄다는 걸 알게 됩니다.
사태의 전말은 이랬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레이프는 채널 해협에 떠 있다가 프랑스 어선에 발견되어 구조되었던 것이죠. 물론 당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 치하에 있었으니 편지고 뭐고 보낼 길이 없었던 것이고 그 사이 저 멀리 하와이에서는 레이프가 죽었다는 통보 하나만 믿고 죽은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레이프가 죽은 줄 알고 대니와 이런 저런 일을 했다고 성토하는 에블린의 말에 레이프는 배신감에 충격을 받고 바에서 술을 퍼마시며 드러눕게 됩니다. 이후 대니가 어떻게든 이 꼬인 상황을 해결해 보기 위해 찾아오지만, 이윽고 그 둘은 술집에서 난투극을 벌입니다.
사실 이 상황도 웃기는 게, 처음에는 분위기가 좋다가 술을 먹은 이후 갑자기 난폭해진 것이죠. 아마 참았던 분노가 술김에 터지면서 그렇게 됐을 겁니다. 하여튼 그렇게 서로 치고 박고 하다가 술집 주인의 신고로 출동한 헌병대가 출동하자 같은 차에 얻어 타고 줄행랑을 칩니다. 둘은 다시 또 티격태격하다가 숙취에 그만 차에서 잠이 들고 맙니다.
한편 미국은 일본의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침략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나, 정치적으로 중립이라 직접 나서지 못하고 기름을 수입할 수단을 없애는 것으로 진격을 저지하려 합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미국이 기름을 얻을 수단을 차단하려고 시도하자 진주만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미국 정보기관들 또한 이를 파악하긴 했지만 정확한 물증이 부족해 물증 확보에 열을 올립니다.
일본 해군은 하와이에 첩보원을 보내 함선의 배치도를 얻어내고 공격을 준비합니다. 미 해군은 적들이 수심이 얕은 진주만에 어뢰 공격을 못할 것이라고 안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어뢰에 나무 거치대를 부착하여 얕은 수심을 가진 곳도 공격할 수 있게 했고 계획한 작전을 실행하게 됩니다. 미국 정보기관이 일본군을 추적한 결과 있어야 할 일본 함선들이 사라진 것을 파악하지만 어디로 사라진지 오리무중이라 전전긍긍합니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위하여 다수의 함재기를 띄어 보냅니다. 하와이의 미국인들은 이 상황을 전혀 모른 채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가 정박한 함정들이 삼나무로 만든 수직 • 수평 꼬리날개 달린 항공어뢰를 얻어 맞으면서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이 박살나게 됩니다.
시끄러운 비행기 소리에 오늘은 일요일인데 뭔 작전이라도 하는거냐며 투덜거리다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 보니 하늘 위로 일본 해군 함재기가 날아다니는 걸 목격한 우리의 주인공 두 중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기지로 급히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도중에 제로 전투기의 기총소사를 받지만 천신만고 끝에 아직 공격을 받지 않은 비행장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난리통의 비행장으로 달려가 비행기를 잡아타고 일본기 몇 대를 격추시키는 쾌거를 올립니다.
그러나 단 두 명의 활약만으로 상황을 뒤집기에는 당연히 역부족이었고 수많은 육해군 장병들이 진주만에서 전사했습니다. 에블린이 근무하던 해군 병원에도 환자들이 속출하지만 일본 해군은 병원에도 폭격을 가하고 맙니다. 시체들이 즐비한 가운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에블린은 절망에 빠지고, 미 본토는 충격을 받고 워싱턴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2차대전 참전을 결정합니다.
이후 둘은 서로에 대한 감정은 접어두고 분노에 불탄 채로 제임스 둘리틀(알렉 볼드윈) 중령의 특공대에 지원하여 본토(미국)로 이동합니다. 이 때 에블린이 레이프를 만나 대니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작 에블린은 당사자인 대니에게는 이를 알리지 않았습니다.
특공대는 도쿄 기습을 위해 항공모함의 길이인 464피트에 맞춰 폭격기가 이륙할 수 있도록 피말리는 훈련을 합니다. 이윽고 특공대 폭격기대는 작전을 실행하려 일본가까이 가지만 일본의 연안감시선에게 너무 이르게 포착되자 급하게 공습을 개시합니다. 당초 640km 거리에서 띄우려 했지만 일본 해군이 너무 일찍 확인한 나머지 1,000km 거리에서 띄워야 했던 겁니다.
임무는 성공하였지만, 연료가 부족한 상태로 두 주인공의 비행기는 중국에 불시착하게 됩니다. 이후 그곳을 점거 중이었던 일본 육군에 의해 붙잡힌 일행은 포로로 끌려가게 될 처지에 놓였으나, 기회를 봐서 저항하여 일본군과 총격전을 벌이고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대니가 레이프를 향해 발사된 총알 및 다른 팀원들에게 발사된 여러 총알을 대신 맞고 죽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대니가 죽어가면서 에블린을 부탁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들은 레이프는 웃기지 말라며 에블린이 대니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걸 말해줍니다. 그것을 들은 대니는 놀라지만, 이미 살기는 힘들다는 걸 알기에 레이프의 손을 잡고 자길 대신해서 좋은 아빠가 되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 둘리틀 폭격대 진출도
결국 레이프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를 받아들이게 되고 대니는 숨을 거두고 맙니다.이후 레이프를 비롯한 일행들은 장개석군에게 발견되어 돌아오게 되고, 에블린은 비행장에서 그들이 돌아오길 기다렸다가 레이프가 비행기에서 내리자 환호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에 하나의 관이 내리자 대니가 죽은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립니다.
레이프가 다가가 말없이 등을 토닥여주고, 화면이 바뀌어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에블린은 대니의 아들을 낳습니다. 그들은 애의 이름을 대니라 짓고 오순도순 살면서 스토리가 끝을 맺습니다.
[ 진주만 기습 ]
1941년 여름부터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최악을 행하여 줄달음 치고 있었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1853년 미 제독 페리의 내항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일본은 국가 현대화에 여러 가지로 미국의 도움을 받았었습니다. 러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뒤에 두 국가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상대방을 가상적으로 설정하고 혹시 있지도 모를 전쟁에 대비한 준비들을 했지만 여전히 두 국가 사이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31년 만주 사변이 일어나 일본의 괴뢰 만주국이 생기고 1937년 중일 전쟁이 터지자 미국 영국 등의 서방국들은 일본의 침략 정책이 자신들이 동남 아시아에 소유하고 있는 말레이지아, 필리핀,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이 위협 받을 수 있다고 보고 중국을 응원했습니다. 일본과 미영의 갈등이 깊어갔지만 일본 정부를 압도하고 있던 도조 히데키의 확전파는 오히려 확전을 주도하며 상황을 악화시켜 나갔습니다.
장개석을 압박하던 일본은 독일과 동맹조약을 맺고 더욱 자신을 얻어 독일이 프랑스를 깨버리자 당시 프랑스 식민지 베트남의 남쪽 사이공 일대에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이에 미국, 영국, 네덜란드 등은 자기들의 세력권이라고 믿던 동남아시아의 중심부로 일본 군대가 들어왔던 격인지라 이를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네덜란드는 1941년 7월 일본에 석유와 고무, 고철 판매를 중단 선언을 합니다. 특히 석유 수출 금지는 일본에게 전쟁 수행은 커녕 함대의 유지조차 할 수 없었고 산업마저 타격을 받는 치명적인 제재였습니다.
일본은 바로 루즈벨트 대통령과 친교가 있던 구루스 사부로 해군 제독을 수반으로 한 협상 대표단을 미국으로 보내 협상을 시도했으나 상대가 서로 양보를 하지 않아 진척이 없었습니다. 미국의 금수 조처로 일본 내에 대미개전의 여론이 비등했으며 호전적인 정책은 수상 도조 히데키와 육군 등의 군벌들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해군이 주도한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미일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파국으로 치달았습니다.
* 일본 해군의 진주만 공격 작전 구상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었던 일본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할 수 없이 개전에 동의하고 개전과 동시 미국에 일격을 가할 작전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수학했었기 때문에 미국의 거대한 공업 생산력을 잘 알고 있었죠. 당시 일본의 생산력은 미국의 단 10분의 1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야마모토는 미국과의 전쟁을 장기로 끌어가 봐야 승산이 없으니 적 주력을 기습 일격에 섬멸해버리고 전쟁을 진행하다가 러일전쟁 때 대마도 해역에서 일본 함대가 러시아 함대를 전멸시키듯 미국 함대와 결전을 벌여 승리한 후에 유리한 입장에서 협상으로 전쟁을 마무리한다는 구상이었습니다.
그가 기습의 목표로서 노린 것은 오하우 섬의 진주만에 있던 미국 태평양 함대였습니다. 태평양 함대는 일본과의 관계가 험악해지자 미국 본토 서해안 샌디에고에 있다가 이곳으로 전진 배치된 함대로서, 동해안을 근거지로 하는 대서양 함대와 같이 미국의 2대 주력함대(다른 함대는 대서양 함대)중 하나였습니다.
* 하와이 제도, 오하우 섬 진주만이 보입니다
* 일본기들의 공습 방향
야마모토는 이 구상을 신임하던 부하이며 제11항공함대 참모장인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에게 알려주고 하와이 기습 작전을 수립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이 때가 진주만 기습 거의 일년 전인 1941년 1월이었습니다. 오니시는 야마모토가 내려준 과제를 다시 그의 능력 있는 부하 제1항공전대 겐다 미노루 중좌에게 주면서 그에게 진주만 기습 작전안을 짜보도록 지시합니다.
겐다는 야마모토가 신임하던 연합함대 참모 부장 구로지마 가메토 대좌와 함께 연구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먼저 영국의 일본 대사관 무관과 이태리 주재 무관을 통해 1940년 이탈리아 타란토 항내의 이탈리아 해군 함대를 기습했었던 영국 항모부대의 공격 작전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습니다.
이 사례는 일본 기동 함대가 하와이를 공격하는 작전 수립에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와이 기습 작전을 수립하면서 계속 하와이가 관계 된 정보를 수집하였고 필요한 출동 장비들을 정비 획득 또는 개발했습니다.
* 신형 어뢰와 폭탄의 개발
진주만 기습을 위해서 해결한 기술적 문제도 두 가지가 나타났습니다. 그 한 문제는 해면에 어뢰를 투하 직후 수면 아래 깊숙이 잠기는 문제의 해결이었습니다. 투하 된 어뢰는 낙하의 충격으로 일단 5-60미터의 깊이로 잠수했다가 다시 어느 정도 떠올라 적함으로 돌격해 가는 과정을 거칩니다. 진주만의 수심은 단지 12미터에 지나지 않아 기존 어뢰를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존 어뢰를 투하하면 어뢰는 얕은 진주만의 해저에 그냥 박힐 판이었습니다.
그래서 작전 입안자인 겐다 중좌는 어뢰 사용을 포기하고 모두 폭탄만을 사용해서 진주만의 함대를 공격하는 방법까지도 검토해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폭격의 명중률이 예상 밖으로 안 좋아 어뢰를 사용하는 쪽으로 다시 작전을 구상했습니다. 해군 기술진은 어뢰에 자이로 장치를 달아 투하 된 자세를 안정시켜서 어뢰가 해면에서 뒹구는 현상을 제거하고 투하 시 물속 깊이 잠기는 것을 방지하였습니다.
흔히 알려지듯 단지 어뢰 꼬리에 베니아 합판으로 만든 대형 날개만 다는 정도로는 진주만의 얕은 바다에서 어뢰가 깊이 가라앉는 현상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날개 뿐 아니라, 자이로 장치도 필요하였던 것이죠.
두 번째는 전함의 두꺼운 장갑을 뚫고 함체 깊숙이 관통하여 폭발하는 대형 폭탄의 개발이었습니다. 미군의 전함을 일격에 파괴하기 위해서는 대형의 폭탄이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신형폭탄의 개발에 시간적 제한을 가진 해군 연구진은 대형 전함의 400mm 주포탄을 항공용으로 개량하여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폭탄의 무게는 800kg이나 되어 기체가 큰 97식 함공기가 적재하기로 하였습니다.
* 항공모함 주력의 진주만 기습부대 편성
항공모함(이하 항모라 약칭 합니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공모(空母)라 약칭합니다) 6척을 동원한 부대 편성은 기본적으로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기동함대를 이끌 지휘관은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내정되었습니다. 공격 항공대를 총지휘할 지휘관은 어뢰 공격의 명수 후치다 미쓰오 중좌가 임명되었습니다.
조종사들은 비행시간이 800 시간이 넘고 중국 전선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베테랑들만을 엄선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이렇게 항모들을 주력함대로서 구성한 함대의 출동은 없었습니다. 당시 해전이란 대형 함들이 함포로서 하는 것이라는 개념이 지배적이었고 항공기로서 적 함대를 공격 하는 개념이 아직 대부분의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할 때였습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최종 편성한 하와이 공격 기동부대의 편성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제1항공함대(통상 기동부대로 불림)
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중장
제1항공전대사령관 나구모 주이치 직솔. 항모 아카기, 가가.
제2항공전대사령관 야마구치 다몬소장. 항모 히류, 소류.
제5항공전대사령관 하라 주이치소장. 항모 쇼가쿠, 즈이가쿠.
그리고 항모 부대를 엄호하며 하와이까지 동행 출동했던 두 척의 전함과 두 척의 순양함을 위시한 구축함, 유조선들로 편성 된 호위 함대가 있었습니다.
제3전대사령관 미카와 군이치 중장. 전함 히에이, 기리시마).
6척의 항공모함이 동원할 수 있는 함재기의 최대 가능 숫자는 399기였습니다. 더 세분해서 들여다보면 제로 전투기가 120기, 99식 함상 폭격기가 135기, 97식 함상 공격기가 144기였습니다.
* 제로전투기
* 99 함폭기
* 97 함상 공격기
한편 이런 과정을 통해 작전이 확정되는 동안 항모 조종사들은 하와이와 지형이 비슷한 규슈 가고시마현 가고시마 만을 중심으로 일대 12곳에서 이동하면서 집중 훈련을 하였습니다.
* 일 기동함대의 출동
가고시마현에서 훈련을 마친 함대는 같은 규슈의 오이다겐에서 이동 집결하여 최종 연습을 하고 11월 18일 사할린의 단칸만으로 이동하였습니다. 1941년11월1일, 도조 내각은 대미 개전을 결정하고 그 개전 일을 12월 8일(일본시간)로 결정하였습니다.
* 영화에서...
일본 천황 히로히토는 11월 5일 내각이 결정한 대미 개전을 재가하였습니다. 그는 이를 재가 했지만 최후의 순간까지 미국에 파견한 구루스 대사의 외교적 노력을 다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전운(戰雲)은 빠르게 접근해왔습니다. 미국에서도 일본과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믿는 국민들의 숫자가 52%가 넘었습니다. 미 육군과 해군은 태평양 지역 지휘관들에게 경계를 강화하도록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미 정보당국은 일본이 하와이를 습격할 가능성은 낮고 필리핀을 강습하리라고 상부에 보고하였습니다. 그런 만큼 일선 부대는 기습에 대비한 완벽한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1941년 11월 26일 일본의 나구모 주이치 중장이 지휘하는 6척의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일본령 사할린 군도 단칸만을 떠나서 추위가 몰려오는 북태평양을 건너 하와이 공격을 위해서 출동했습니다.
북태평양 항로는 원래 오고 가는 선박이 드문 항로라서 일본 해군의 기동부대가 발각되지 않고 접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출동 전 조종사와 항공대원 승조원들에게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생할 것이며 전쟁은 기동부대의 하와이 공격으로 시작된다는 사실이 발표되었습니다.
* 니이다가야마(新高山)노보레!(신고산에 올라라!)
12월 2일 대본영은 북태평양에서 하와이를 향하여 가고 있는 기동부대에게 암호 전문을 보냈습니다. “니이다가야마 노보레, 신고산에 올라라"라는 뜻입니다. 미국과의 협상을 결렬로 끝날 것이니 예정대로 12월 8일 진주만 공격을 시작하라는 암호 명령서였습니다.
일본 기동부대의 지휘관들 모두가 주요 목표로 삼은 것은 미 항공모함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공격전야 오하우 섬 일본 영사관에 외교관으로 위장시켜 침투 시켜놓은 일본 해군의 간첩 요시가와 소위는 진주만 내에 미국 항모는 한 척도 없다고 타전해왔습니다.
미 항모 사라토가는 미 서해안 샌디에고 해군항에, 호넷과 요크타운은 대서양에, 그리고 엔터프라이즈와 렉싱턴은 하와이 근해에서 훈련을 겸한 함재기 수송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진주만에 은밀히 다가가는 일본 해군 기동함대에게 낙심천만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두 번째의 주요 목표인 태평양 함대 전함들은 모두 진주만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그의 주특기를 포술에서 항공으로 바꿀 만큼 일본 해군 항공 육성에 공헌도 많았었고 세계사에서 해군 항공력의 시대를 연 주인공이지만 전함에 대한 미련을 아직 완전히 버리지 못했었습니다.
그는 항공모함대신 전함이라도 부수면 미 태평양 함대의 주력이 격멸되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가 만약 미래 태평양 해전에서 전함의 시원치 않은 활약상을 정확히 예견했더라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전함 격침에 올인하지 않고 항만 시설과 유류 저장소 그리고 아홉 척이나 계류 중인 잠수함들에 더 많은 타격력을 할애했을 것입니다.
진주만에 정박 중인 미 태평양 함대 전함들은 모두 8척으로서 캘리포니아, 메릴랜드, 테네시, 애리조나, 오클라호마, 웨스트버지니아. 펜실베니아, 네바다였었고 전함 다음의 가치를 가진 목표가 되는 중순양함은 헤레나와 호노룰루, 라리 등 세 척이었습니다.
6척의 항모 부대가 동원할 수 있었던 함재기는 위에서 얘기 한대로 총 399기였습니다. 이중에 360기가 두 번으로 계획 된 하와이 공격 제 1,2파를 구성할 것이고 48기가 항모 호위 임무가 주어질 예정이었습니다.
* 진주만 공격 작전계획
공격은 두 번에 걸쳐서 실행될 것이었습니다. 기습의 효과를 업어 함대공격을 할 첫 번째 제1파 공습이 주력 공격이고 두 번째 제2파 공습은 일차 공습에서 해치우지 못한 목표들을 분쇄하는 마무리 공격이었습니다. 1파의 97식 공격기들은 대부분 미국 전함 공격용 항공 어뢰를 적재하고 있었습니다.
어뢰로서 타격을 가하고 발생하는 연기가 함체를 가리면 99식 함폭기로 연기 사이를 뚫고 급강하 폭격을 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뢰들은 얕은 바다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었습니다.
* 미군의 피해
조종사들은 우선적으로 가장 군사적 가치가 높은 목표를 타격하도록 명령 받았습니다. 최우선 목표는 항모나 전함이었습니다. 항내에 이런 최대 가치의 전투함이 없다면 차상위로 중요한 순양함이나 구축함을 타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99식 폭격기는 지상 목표를 타격하도록 계획되었습니다.
전투기들은 미리 항공기지를 급습하여 지상에 주기된 전투기들이 이륙하기 전에 모두 기총소사해서 격멸 해버리기로 하였습니다. 미군의 요격 가능성 제거는 일파 공격대의 공격전에 해치워버림에 특히 최우선 가능성을 두었습니다.
함재기들의 대규모 공격 전 두 기의 수상 정찰기가 순양함에서 이륙하여 오아후 섬 상공에서 정찰을 수행하고 항내의 미 함대 파악과 위치들을 미리 보고하게 되었습니다. 4기의 더 많은 정찰기들이 일 기동함대와 미 하와이 사이의 상공을 초계하며 이상 유무를 보고하도록 명령을 받았습니다.
* 특수 잠항정들의 기습
진주만에 공습이 가해지기 전 잠수함에서 발진한 특수 잠수정의 공격이 먼저 있었습니다. 하와이 공격에 다섯 척의 특수 소형 잠항정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갑표적(甲標的)이라는 비밀 명칭으로 불리던 이 소형 잠항정은 일본 해군의 신종 무기였습니다.
* 좌초된 일본 소형 잠수함
두 명의 승조원이 운용하고 두 발의 어뢰를 발사할 수 있는 이 신무기는 잠수함으로 적지까지 운반되어 해중에서 은밀히 발진시키게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야마모토 사령관은 안전한 귀환 가능성이 낮다고 잠항정 출동 작전을 재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잠항정 부대 간부들의 세 번에 걸친 간청에 할 수 없이 재가한 것인데 결론적으로 말하면 야마모토가 판단한대로 모두 귀환에 실패하였습니다.
특수 잠항정을 하와이에 침투시키기 위해서 다섯 척의 잠수함이 이 작전에 출동했습니다. I-22, I-16, 1-18, 1-20, I-24들인데 이들은 모두 특수 잠항정을 탑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특수 공격대의 대장은 사사키 대좌였습니다. 하와이에 침투할 정대의 대장은 이와사 대위였습니다. 각 잠항정의 탑승원들은 장교 한 명과 부사관 한명이었습니다. 잠항정을 탑재한 잠수함들은 1941년 11월 25일 일본 구레 해군 기지를 떠났습니다.
이들이 탑재한 특수 잠항정들을 탑재한 다섯 척의 잠수함들은 1941년 12월 7일 오전 01:00, 진주만 부근 10해리 떨어진 해저에 도착해서 모두 잠항정들을 발진시켰습니다.
03:42분 잠망경을 해면에 노출하고 수중 침투를 하던 잠항정 한 척이 초계하고 있던 미국 소해정 콘돌에 발각되었습니다. 수상 선박 출현의 보고를 받은 구축함 와드는 경계를 강화하고 초계하다가 역시 잠망경을 올리고 진주만에 잠입하던 잠항정 한 척을 격침하였습니다.
다른 한 척이 포드 섬 북부로 침투하여 수상기 모함 커티스 함에게 어뢰 한 발을 발사했으나 실패하고 되려 미 구축함 모네한에게 격침당했습니다. 한 잠항정은 좌초하고 정장 사카마키 가즈오 소위는 헤엄쳐 탈출했다가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는 미군 최초의 포로로서 생활하다가 전후 귀국하여 도요타 자동차에 들어가서 브라질 도요다 자동차의 사장까지 되었습니다.
1999년 전문가들이 진주만 기습의 현장을 촬영한 한 사진을 판독한 결과 잠항정 한 척이 수중에서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에게 어뢰를 발사하는 장면을 포착하였습니다. 그 외에 잠항정의 어뢰 공격으로 오클라호마가 전복했다는 일부의 의견도 있으나 공식 확인 된 것은 아닙니다.
일본 해군은 한 잠항정이 진주만 내에서 대형 함에게 어뢰를 발사하여 피해를 주었다는 보고를 하고 실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항정은 한 척도 돌아오지 못했고 사카마키를 제외한 9명이 전사했습니다. 일본 해군은 이들을 진주만의 9 군신(軍神)으로 신격화했습니다.
* 쑥대밭이 된 비행장
* 일본의 늦은 선전 포고문 전달
진주만 공격은 일본이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하기도 전에 감행되어 세계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 군부 본래의 음모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야마모토는 본래 선전 포고 30분 후에 진주만을 공습하기로 결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선전포고 전에 감행되었는데, 저간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공격 전날 무려 5,000단어에 달하는 선전 포고문을 암호로 해서 워싱턴 주재 주미 대사관에 송신하고 이를 다음날 진주만 공격 30분전에 미 국무부에 전달하라는 훈령을 내렸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극비로서 일반 타이피스트 등에게 시키지 못하고 대사관의 이구치 원사관과 오쿠무라 일등 서기관 둘이서 밤을 세워 암호 해독과 서류 작성을 했지만 너무 시간이 걸려 예정 시간을 넘겨 버렸습니다.
선전 포고문은 공격이 시작되고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나 미국 동부시간 2시 20분 하와이 시간 오전 8시 50분, 노무라 요시지로 주미 일본대사와 구루스 사부로 특명 전권 대사에 의해서 이미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던 미국 헐 국무장관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결과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타국을 기습한 비겁한 국가라는 맹비난을 받았고 미국민을 극도로 격노시켜 반일사상과 대일본 복수 여론이 순식간에 퍼져 버렸습니다.
* 제1파 공격 - 도라! 도라! 도라!
1941년 12월 7일 오전 6시 진주만이 있는 오하우 섬 북방 230해리 해역에 도달한 일본 기동부대는 후치다 미쓰오 중좌가 지휘하는 공격대 183기를 발진시켰습니다.
제로 전투기 43기, 99식 함폭기 51기, 97식 함상 공격기 89기였습니다. 6기의 함재기가 기계적인 결함으로 출격하지 못하였습니다. 일본 1파 공중 공격대는 편대를 완성하고 오하우 섬으로 비행해갔습니다. 오하우 섬에서 방송하는 라디오 전파가 이들에게 진로의 참고가 되기도 했습니다.
첫 공격 1파는 오아후 섬에 접근하면서 상공에 비행중인 미국 민간 경항공기 포함 항공기 몇 기를 공격해서 격추시켰습니다. 격추당한 비행기중 한 대는 경고 무선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진주만 항구 입구 바다에 떠있던 함선 중에 몇 척이 상공에 이상한 항공기들이 접근하고 있는 것을 보고 육지에 알렸지만 이 정보를 확인한다고 꾸물대다가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 정보들로 적기 내습을 정확히 알았다 해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미군에게 이미 레이더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일본 조종사들은 단 한기의 요격기도 보이지 않은 사실에 의아하기도 하였습니다.
12월 7일 7시 49분. 제1파 공격대는 진주만 상공에 도달하였습니다. 99식 함상 폭격기를 조종하던 1파 공격대 지휘관 후치다 중좌는 각기에게 전군 돌격(도, 도, 도 신호의 연송(連送)의 명령을 했습니다. 전 공격대가 돌격 태세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치다는 후방석의 미즈키 일등 병조에게 명령했습니다.
“미즈키, 타전하라! 도라, 도라. 도라를! “
기함 아카기에 진주만 기습 성공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후치다는 전 항공대에 돌격을 명령하고 자기도 전함 메릴랜드에 급강하 폭격을 가했습니다.
첫 공격파의 선두에서 비행을 리드한 일본 해군 항공대 공격기는 속도가 제일 느린 3인 탑승의 97식 공격기였습니다. 공격의 선두에 선 97식 공격기들은 기습의 효과를 최대로 살려 최우선 목표인 전함들을 겨누었습니다. 반면 2인 탑승의 99식 급강하 공격기들은 오하우 섬에 있던 히캄 기지와 휠러 기지 등 여러 항공기지를 강타하여 요격기들을 격멸하고 제공권 확보의 임무를 가졌었습니다.
공격은 먼저 접근한 육상 목표에 먼저 가해졌습니다. 7시 55분 다카하시 소좌가 지휘하는 공격대가 저공으로 포드 섬을 엄습했습니다. 함대에 최초로 육박한 것은 어뢰를 탑재한 97식 육상 공격기였습니다.
어뢰로 먼저 공격하고 피격 당한 함에서 발생한 연기가 상공을 가리면 틈새를 노려 급강하 폭격으로 함을 공격한다는 공격전술이 이미 수립되어 있었습니다. 함대를 공격한 첫 탄은 18세의 모리 지조 병조장이 발사한 어뢰였습니다.
7시 58분 미 해군 항공대는 “진주만이 공격 받고 있다!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경보를 발했습니다. 8시 조금 지나 일본 가가 항모 공격대 97식 공격기가 투하한 800kg 폭탄이 전함 애리조나의 4번 포탑 측면에 명중하였습니다. 이어서 1번 포탑과 2번 포탑 사이의 우현에도 폭탄이 명중하였습니다. 애리조나는 전부(前部) 탄약고에 대폭발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침몰했습니다.
* 미군의 대공 방어
미군들은 아무런 방어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탄약고의 자물쇠는 잠겨 있었고 항공기들은 노천 계류장에서 날개 끝을 연이어 대고 밀집으로 모여 있었습니다. 하와이 일본인 교민 첩자의 침투 파괴를 염려했던 육군 항공대 사령관의 우둔한 감각의 결과였습니다. 진주만 상공에 붉은 일장기가 그려진 공격대가 쇄도한 다음에도 보고를 받은 간부가 조종사들이 독일인인지 확인하라고 얼빠진 소리를 했을 정도였습니다.
정보부서의 일부 인사를 제외하고 미군부의 누구도 감히 일본이 대담하게 진주만을 기습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태만은 일본기들이 진주만으로 접근하고 있던 먼 거리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접근 비행을 하던 1파의 공격대는 오아후 섬 약 180km 떨어진 위치에 이르렀을 때 오아후 섬 북단 오파나 포인트 끝 산꼭대기에 배치한 미 육군 SCR-270 레이더에 탐지되었습니다.
비록 설치는 되었다 해도 당시 이 운영요원들은 아직 훈련 중이었고 레이더 기지도 정식 운용이 되기 전이었습니다. 즉 시험 가동 중이었던 겁니다. 레이더를 운용하는 요원 상하(上下) 간부도 서투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산정에 설치된 레이더의 조작병 조지 엘리엇 주니어 일병과 조셉 록카드 일병은 레이더 스크린에 무수히 뜬 반점들을 보고 레이더 탐지 센터에 새로 부임한 케르밋 타일러 대위에게 이를 보고했습니다.
그는 화면의 비행체들이 미 본토에서 날아오고 있는 6기의 B-17 폭격기들이라고 짐작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일본 함재기들이 들어오는 코스는 미국에서 날아오는 폭격기들의 코스와 몇 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아주 유사해서 그런 실수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레이더 화면에 나타난 비행체들 무리가 화면을 가득 채운 엄청난 크기의 규모라는 사실에 대해서 두 사병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화면을 가득 채운 비행 편대들을 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수백 기의 항공기들이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 당시 레이다 기지
결과 두 사병은 레이더 화면을 항공기들이 온통 뒤 덮은 사실에 대해서 전혀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공습 내내 미 함대의 대공 사격이 가능한 5인치 포는 모두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단지 대공포의 1/4만이 대공사격을 했었고 육군의 31개 대공 포대 중 단 4개 포대만이 대공 사격을 했습니다.
그렇게 준비가 안 된 상황에서 기습을 당했지만 여러 영웅들이 탄생했습니다. 네바다 함에 남아있던 조 타우식 주니어 소위는 네바다를 몰고 바다로 나가려고 했지만 폭격에 다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네바다는 함의 선임하사에 의해서 일부러 만 내에 좌초 되었습니다. 함대 구축함 알윈은 일본기 내습 때 단지 네 명의 장교들만 승함하고 있었습니다. 모두 해상 근무 1년 미만의 신출내기들인 소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축함을 바다로 몰고 나가 36시간이나 운용을 하였습니다. 36시간 뒤에야 함장이 돌아와서 임무를 넘겨주었습니다. 전함 웨스트 버지니아의 함장 메르빈 베니온은 부하들을 잘 지휘해서 대공사격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 정박한 테네시에게 명중한 폭탄에서 튀어나온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습니다.
일본 기동 함대는 제1파 공격대를 발진 시킨 후 한 시간 15분만인 7시 15분 하와이에서 200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제2파 공중 공격대를 발진시켰습니다. 진주만 기습의 두 번째 공격파는 시마자키 시게카즈 소좌가 지휘하는 171기였습니다.
편성을 보면 36기의 제로 전투기, 54기의 97식 공격기, 54기의 99식 급강하 폭격기들이었습니다. 4기는 역시 기계 고장으로 출격 하지 못하였다. 하와이 오하우 섬에 진입한 2파 공격대장 시마사키는 오전 8시 54분 제2파 공중 공격대에게 돌격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미군의 각 포대에서 쏘아 올리는 대공 포화는 그 강도가 무척 높았습니다. 1파가 누렸던 기습의 효과는 2파에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1파의 주요 목표가 항내의 전함들이라면 2파는 육지의 여러 항공기지의 항공기들이었습니다.
2파 171기의 공격기들은 카네오헤의 부근의 벨로우 육군 항공대 기지와 포드 섬의 히캄 비행장, 휠러 비행장, 그리고 좌초한 네바다 함을 공격하였습니다. 2파 공격대는 치열해진 대공 포화에 피해가 아주 컸습니다. 가장 피해가 컸던 항공대는 항모 가가에서 출격한 공격대로서 영식 함상 전투기(제로) 9기, 99식 함상 폭격기 26기중 영전 2기와 함폭 6기를 잃었습니다.
* 진주만 공격의 미군측 피해
공격개시 90분이 지난 뒤 공격은 끝이 났습니다. 2,386명의 미군이 전사했다. 48명에서 68명의 민간인들이 공중에서 폭발하지 않고 주택가에 떨어져 폭발한 대공 포탄에 희생되었습니다. 1,139명의 장병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18척의 각종 함선이 침몰하거나 좌초되었습니다. 이중에는 일본이 최우선의 목표로 하던 8척의 전함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전함 애리조나에서만 진주만 공격에서 입은 피해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망자인 1,177명이 발생하였습니다.
역시 앞에서 소개했지만 전함 네바다는 이미 어뢰와 폭탄에 맞아 화재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진주만 밖으로 탈출하고자 몸부림을 쳤습니다. 그러나 네바다의 움직임은 일본 공격기들의 주의를 끌어 많은 일본기들의 폭탄 세례를 당했습니다.
일본기들의 목표는 외항으로 나가는 네바다를 진주만 입구에서 좌초시켜 항을 봉쇄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99식 함상 폭격기가 투하한 249 kg의 폭탄은 화재를 유발하였습니다. 네바다는 결국 외해로 빠져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항로에서 벗어나 좌초하였습니다.
전함 캘리포니아는 두 발의 폭탄과 두 발의 어뢰를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더 노력했으면 이 전함을 구해냈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함이 해수의 배출을 위해서 동력을 높이던 중 배를 퇴함하라는 긴급 명령이 내려졌고 함은 포기되었습니다.
인접 애리조나와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유출한 불타는 기름들이 캘리포니아 쪽 수면으로 흘러와 캘리포니아의 상황이 더 나쁘게 보였을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런 명령이 나왔을 것입니다.
* 진주만 기념관, 아래 가라앉은 아리조나호가...
비무장 표적함 유타는 두 발의 어뢰 공격을 받았습니다. 웨스트 버지니아는 7발의 어뢰들에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7번째의 어뢰는 함의 항타를 날려버렸습니다. 오클라호마는 4발의 어뢰를 맞았는데 두 발은 측면 장갑 벨트 위에 명중하였습니다. 그 결과 물이 배의 상부로 흘러 들어와 배가 전복하였습니다. 메릴랜드는 애리조나와 같이 40센티 구경의 함포탄을 개조한 폭탄에 맞았지만 별다르게 큰 피해는 입지 않았습니다.
일본 공격대는 주목표를 전함에 두었으나 더 작은 함들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순양함 라리와 경순양함 헤레나는 어뢰에 명중당했고 헤레나의 거센 폭발력은 바로 옆에 정박한 기뢰 부설함을 전복 침몰하게 하였습니다. 선박 수리소의 드라이 독(dry dock)에 있었던 두 척의 구축함 카신과 다우니스는 폭탄이 유류 탱크에 명중되어 불타버렸습니다.
이 구축함들에서 누출한 기름에 불이 붙었습니다. 진화하기 위해서 퍼 넣은 해수 덕분에 수위가 올라가며 불길은 두 구축함 위아래 구석구석을 불태웠습니다. 구축함 카신은 선거(船渠)에서 미끄러지며 다우니스를 들이받아 더 큰 피해를 입게 하였습니다.
경순양함 랄리는 어뢰에 명중하여 측면 큰 구멍이 생겼습니다. 경순양함 호놀룰루도 대파되었으나 수리 후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였습니다. 대파 침몰된 애리조나 함의 옆에 계류 중이었던 공작선이 대파되었습니다. 수상기 모함 커티스도 크게 부서졌습니다. 구축함 쇼는 두 발의 폭탄이 전부(前部) 탄약고를 관통하여 함을 대파시켰습니다.
오하우 비행기지에 있던 미군 비행기중 188기가 격파되었고 159기가 손상을 입었습니다. 피해기들 중 155기가 지상에서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공습하는 일본기들을 요격하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출격 대기 상태에 있었던 미군 전투기는 한 대도 없었습니다.
* 영화에서...
하지만 하와이 8공군의 일부 조종사 중에 일본의 공격이 한참 진행 중에 출격을 시도한 용감한 사람은 14명이 있었습니다. 이들 용사들 중에 6명의 조종사가 적어도 한 기 이상씩의 일본기를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루이스 M. 샌더스 소위, 필립 라스무센 소위, 그리고 조지 S. 웰치 소위, 케네스 M. 테일러 소위, 헤리 W. 브라운 소위, 고든 스털링 소위 등이 그들이었습니다. 조지 S. 웰치 소위는 일본기 4기의 확인 격추했었고 동료인 케네스 M. 소위는 2기의 확인 격추와 2기의 추정 격추(전후 격추로 확인)의 공을 세웠습니다.
미군 조종사 중에 전사자도 발생했습니다. 고든 스털링 소위는 카네오헤 기지 부근 바다 상공에서 일본 전투기 조종사 후치다 대위에게 격추 당해서 그 유해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쟈니 데인스 소위는 카아와 상공에서 적기를 격추하고 귀환 도중 우군 측의 오인 사격에 격추 당했습니다.
항모 엔터프라이즈에서 이륙하여 하와이로 돌아오던 다섯 기의 함재기가 미군측의 오인 사격으로 격추되었습니다. 군사적 표적의 피해를 들자면 미군 막사에 가한 일본기들의 기총 소사로 죽은 소수의 미군들도 빼놓을 수는 없습니다.
* 일본측의 피해
미군이 입은 인명손실에 비하면 일본군은 아주 경미한 피해만 입었습니다. 55명의 일본군 조종사들과 9명의 잠항정 승무원들이 죽었고 한 명이 생포되었을 뿐입니다. 일본군의 출격 1파 2파 출격 항공기 중에 29기가 격추 당했습니다. 9기가 1파 공격 때 격추당했었고 20기가 2파 공격에서 격추 당했습니다. 74기가 대공포화에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지만 무사히 항모로 귀환했습니다.
* 제3차 공격대 요청과 나구모의 거부
2차 공격대가 출격할 때부터 기함 아카기 함교에서는 겐다 미노루 대좌와 일차 공격에서 돌아온 일차 공격대장 후치다 미쓰오 중좌는 하와이에 대한 3차 공습이 절대 필수적이라고 건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호위 전함 히에이와 기리시마를 끌고 출동했던 호위함대 사령관 미카와 중장이 3차 공격을 강력히 주장했었고 항모 히류와 소류를 지휘하는 야마구치 소장도 이에 동조하였습니다.
3차 공습으로서 파괴하고자 했던 것은 1,2차 공격 때 전함과 항공기 섬멸에 집중하느라 미처 손을 보지 않았던 진주만의 유류 저장소와 어뢰 저장소였습니다. 그리고 항만 시설과 각종 선박 수리 공작소, 수리 조선소의 드라이 독이었습니다.
1,2차에서는 계획대로 함선과 항공기들을 만족할 만큼 부수었으니 3차 공격으로 함대 운용 관련 시설도 깨끗이 청소해버려 진주만 기습을 완벽하게 성공한 작전으로 종결하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이 의견에 다른 5척의 항모 함장들도 이 추가 공격을 적극 찬성하며 3차 공격대를 출격시킬 준비가 다 되어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새가슴 나구모는 심사숙고 끝에 1,2파 공격으로 목표는 달성되었고 더 이상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철수에 들어갔습니다. 다음 날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와의 통신에서 야마모토는 일단은 나구모의 결정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는 나구모 기동부대가 유류저장소나 선박 수리 시설 등은 그대로 둔 것이 미군의 빠른 반격을 가능케 했다고 말하면서 그의 결정이 유감이었다는 것을 피력했습니다.
후세의 전사가들은 만약 이 3차 공격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더라면 일본의 공격대가 주목표인 전함들에게 입힌 손해보다 훨씬 더 심각한 타격을 태평양 함대의 향후 작전 활동에 가했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오하우 섬의 해군 시설들이 모두 파괴되었더라면 미군이 일본에게 행한 본격적인 반격 작전은 일 년 이상 연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 미국의 태평양 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랬다면 전쟁은 2년 이상 더 끌었을지도 모른다”.
* 미군에게 준 피해는 보기보다 크지 않았다
야마모토가 야심을 가지고 미국 해군에게 일격을 가한 진주만 공격은 오늘날 실패한 작전으로 평가됩니다. 먼저 군사적인 측면을 살펴보면 일본 해군은 최대의 목표로 삼았던 항공모함은 한 척도 격침하지 못했습니다. 전함의 시대는 가고 항모의 시대가 왔던 후의 전쟁 전개를 보면 이의 실수를 절감할 수가 있었습니다.
진주만 기습 후 전함 없이도 미국이 항공모함으로만 반년간 버티다가 산호해와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함대에게 큰 타격을 준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살아남은 항모들은 1942년 B25 폭격기를 싣고 와서 도쿄를 맹폭했는데 이 폭격의 결과로 야마모토는 미드웨이 공략을 결심하게 됩니다. 이후 미드웨이 해전에서 진주만을 기습했었던 항모 네 척이 격침되어 일본 해군의 몰락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이 모두 격침했다고 하던 미 전함부대가 얕은 진주만에 좌초 수준으로 가라앉아 있던 것이 공격 작전의 전과를 크게 감소시키고 말았습니다. 8척의 피해 전함 중 6척은 모두 인양되고 완전 수리를 하여 전투에 재투입되었습니다. 만약 미 전함 함대가 원양에서 진주만 규모의 공격을 받았다면 문자 그대로 영원한 함대 손실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일요일 휴일에 기습을 했던 것은 영리한 결정인지는 모르지만 휴일이라 많은 승조원들이 상륙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이들 경험 많은 승조원들의 생존으로 새 함대를 편성하는 것이 가능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미 함대에게 기대 이하의 피해 밖에 주지 못했습니다. 앞에서 설명했지만 항의 지원시설을 모두 온존시킨 것은 진주만 기습의 의미를 의심하게 합니다. 이들 시설이 온존했었기에 그 다음해의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의 승리가 가능했습니다. 산호해 해전에서 크게 파괴되어 돌아온 항모 요크 타운을 단 열흘 만에 수리해서 미드웨이 해전에 투입했던 것도 진주만의 수리 공창 시설이 온존되었기 때문입니다.
* 진주만을 기억하자!
야마모토는 태평양 함대의 심장부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한가지 원칙에 매달렸습니다. 미 해군 전략가 알프레드 마한이 주장한 주력 함대 결전 사상입니다. 적의 함대 주력을 격파해버리면 해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가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이 원칙에 매달린 그는 미 태평양 함대 주력함대를 격멸, 또는 감소시킴에 큰 무게를 두고 진주만을 기습했었습니다.
진주만 정도의 피해를 입고 미군이 당장 협상에 나오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있을 함대 결전에서 일본이 크게 유리한 입장에 있을 것을 기대 했었습니다. 1905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함대가 일본 함대에 섬멸되자 러시아가 할 수 없이 강화에 나섰던 승리의 추억을 맛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도 흘렀고 상대도 달랐습니다. 미국의 가공할 생산 능력은 이 함대 결전의 논리가 씨가 먹히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미국같이 거대한 국가는 주력 함대 따위야 섬멸되어도 마구 생산해내서 다시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개전시 단 6척이었던 미국의 항모는 생산에 박차를 가해 3년 뒤인 1945년 오키나와 작전 때 77척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로 커버린 군력을 동원하였습니다.
일본은 정치적 측면에서도 진주만에서 중대한 실수를 하였습니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을 당한 미국민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미국민들은 일본 타도의 기치에 똘똘 뭉쳤습니다. 수많은 일본 규탄 시위가 있었고 언론들을 이런 분노를 증폭시켜 자원 입대자가 폭증했습니다. 미군은 이 여론을 전쟁 수행의 자원으로 십분 활용하였습니다.
“Remember Pearl harbor!”(진주만을 기억하자!)라는 구호로서 국민들을 단결시켜 전시체제 공고화와 전시 경제 확대를 일사불란하게 추진했던 것입니다. 이로서 미국은 일본은 철저히 분쇄할 때까지 싸우는 외길로 달리게 되어 일본이 바라던 ‘일격 후 강화’는 어림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 둘리틀 폭격대 일본 공습 ]
둘리틀 공습(1942년 4월 18일)은 제임스 해롤드 둘리틀 중령이 지휘하는 B-25 미첼 경폭격기 편대가 항공모함 호넷을 출발하여 일본을 폭격한 사건입니다.
지미 둘리틀 중령의 지휘 하에 도쿄, 요코하마, 요코스카, 가와사키, 나고야, 고베, 욧카이치, 와카야마, 오사카 등 일본 각지를 B-25 미첼 폭격기 16대로 폭격하였습니다. 이 공습으로 사상자 363명, 가옥파괴 약 350동의 손해를 주었습니다.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불침의 하늘이라 호언장담하던 일본의 군부, 특히 일본 해군 상부에 준 충격은 엄청났고, 미국은 비록 일본에 큰 피해를 입히진 않았지만 이 사건은 진주만 공습으로 의기소침하던 미국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둘리틀 공습을 계기로 그해 6월 초에 미일양국의 운명을 뒤바꾼, 진주만 공격 후 두 번째로 대규모 전투인 역사적인 미드웨이 해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 배경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군은 태평양에서 일방적인 패퇴가 계속되었고, 급기야는 1942년 2월 24일에 일어난 일본 해군 잠수함의 미국 본토의 캘리포니아 주 산타 바바라 엘우드의 정유소에 대한 포격은 미국 전역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에 따라 사기를 높이는 방책으로서 미군은 일본의 수도 도쿄를 폭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미국 육군은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 행동 반경 내에 일본을 포함하는 기지는 없었고, 소련의 영토는 일소 중립 조약 때문에 폭격을 위한 기지 사용은 실시할 수 없었습니다. 또,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함재기는 항속 거리가 짧고, 폭격을 위해서는 항공모함을 일본 근해에 접근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태평양 상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그야말로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미국 해군에서 "항속 거리가 긴 육군의 폭격기를 항공모함으로부터 발진시키면 어떻겠는가"라고 루스벨트 대통령에 진언했습니다. 미군은 급히 B-25 폭격기를 항공모함의 짧은 비행 갑판으로부터 발진할 수 있도록 경량화를 도모했습니다.
* 항모 호넷
육군 폭격기의 항공모함으로부터의 발진은 실전에서는 처음이며, 이 작전은 극비 사항으로 여겨졌습니다. 또, 폭격 이후 항공모함에 착함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열도를 횡단해 당시 일본군과 전쟁 중이던 중국 동부로 장개석군의 유도 신호 아래에서 착륙할 예정이었습니다. B-25를 탑재하는 항공 모함은 호넷 호였고, 엔터프라이즈 호가 호위를 맡아 뒤따르게 계획되었습니다.
* 경과
1942년 4월 1일, 16기의 B-25 미첼을 탑재한 항공모함 호넷 호 및 호위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은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했습니다. 도중에 엔터프라이즈와 순양함 2척, 구축함 4척이 합류해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공격 예정 전날인 4월 17일, 미해군 함선 레이더에 비친 국적 불명의 2척의 어선을 초계기로 확인 중에 일본군의 감시정이란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 중국에서 살아남은 대원들
이들 중 1척은 경순양함 내슈빌 호의 포격으로 격침되었고 승무원 14명 전원은 함정과 운명을 같이했습니다. 발진 예정 해역 앞의 예상외의 원거리에서 일본군에게 발견되어, 폭격대는 예정보다 빨리 항공모함 호넷 호에서 발진했습니다. 덧붙여 내슈빌은 또 1척의 감시정을 격침했습니다.
둘리틀 중령이 인솔하는 B-25 폭격기 16기는 도쿄, 가와사키, 요코스카, 나고야, 욧카이치 , 고베를 폭격했습니다. 일본 측에는 50명의 사망자, 가옥 262호의 피해가 나왔습니다.
폭격기는 일본 열도를 횡단해, 그 중 12기는 중국 본토에 착륙, 3기는 중국 영해에 추락, 나머지 1기는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착륙했습니다. 소련에 착륙한 폭격기의 승무원은 억류되었다가 얄타밀약 성립 후 석방되었습니다. 승무원은 전사가 1명, 행방불명이 2명, 포로가 8명이고, 나머지는 미국으로 귀환했습니다.
일본 대본영은 이 피해를 "적기 9기를 격추했으며, 손해는 적다"고 포장해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폭격 당일의 날씨는 맑았으며, 추락한 항공기 중 민간인에게는 단 1기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본영의 발표에 대해 "웃기지 마라. 황군은 아무것도 격추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한편, 일본군에 체포된 폭격기 승무원은 도시의 무차별 폭격을 실시한 혐의에 대해 포로가 아닌 전쟁범죄자로서 다루어져 조종사 2명과 사격수 1명이 처형되었으며, 5명은 징역을 살았습니다.
* 일본군 포로가 된 승무원
<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
태평양 전쟁 당시 연합함대 사령관이었습니다. 진주만 공습의 입안자로, 미국에 유학을 갔다 왔고, 워싱턴 주재 일본 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 미국의 잠재력을 알고 있었던 지미파였고 해군 내 협상파에 속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미국과의 전쟁을 결사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전쟁이 확실시 되자, 진주만 기습을 성공시키며 승승장구 하지만, 약 반 년 후 미드웨이 해전에서 정규 항모 4척을 날려 먹는 치명적인 패배를 겪습니다. 이후로도 일본 해군의 실질적인 최고 지휘관으로서 과달카날 전투 및 그에 연계된 해상전과 공중전을 지휘합니다.
이후 이어진 부겐빌 공중전이 한참 진행되던 중인 1943년 4월 18일, 비행기에 탑승하여 쇼틀랜드, 라바울 등 남방 전선을 시찰하던 중,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한 미군의 캑터스 항공대 토머스 랜피어 대위의 P-38 라이트닝에 의해 부겐빌 섬 상공에서 격추되어 전사하였습니다.
* 제 2차 세계대전까지
그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해군 소위로 종군하며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지휘 아래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발트 함대와 교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오른손 왼손 손가락 2개를 잃었는데, 알려진 바와는 달리 전상이 아니라 그냥 사고였습니다.
1914년 고급 과정인 해군대학을 졸업했습니다. 1919년에 미 대사관 무관으로 파견되었을 때, 하버드 대학에서 연수하고 이 때 유창한 영어를 익히게 되었습니다. 1921년부터 1923년에 걸쳐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관계로 미국을 자주 방문하였습니다.
이 때 그가 직접 보고 느낀 미국의 잠재력에 훗날 태평양 전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게 됩니다. 압도적인 생산능력, 풍부한 물적/인적자원, 기술력과 교육 수준 등등 미국의 모든 것은 일본에 비해 말 그대로 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부터 이미 모든 인프라와 철강 생산량 등 경제적 수준에서 열강들이 수두룩 모여 있던 유럽을 압도하였으며 대학의 수와 수준 또한 이미 유럽의 그것을 능가하여 식자율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귀중품이었던 설탕이 미국에선 무진장 있었다는 것도 그에게는 쇼크였다고 합니다. 하여튼 미국의 엄청난 잠재력을 그는 간파하고 있었던 겁니다.1935년 해군성 항공본부장에 취임해 일찍부터 거함거포주의의 한계를 간파하고 해군항공대와 항모전단 편성에 심혈을 기울여 선진적인 항모전술을 만들어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항공기의 진가를 알아봤다기보다는 일본이 미국과의 생산력 경쟁에서 이기려면 선박보다는 항공기 쪽이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특히 전함은 미국과의 경쟁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일본 최대의 거함 야마토의 건조에 대해서 '야마토를 만들 돈이면 제로전투기 1,000기는 뽑아낼 수 있다'며 반대한 것도 이것의 일환이었습니다.
* 격추되기 3일전, 라바울
다만 구상한 항공모함 운용은 최후의 함대결전을 대비한 작전의 일환이었고, 그것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항공모함을 잘 운용하여 적의 주력 함대를 약화시킨 다음, 일본 근해로 다가오는 적의 함대를 러일전쟁의 쓰시마 해전과 같은 함대결전으로 제압하여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다는 것이 그의 원래 구상이었습니다.
'전함이란 건 함대 기함으로 사용할 것과 그 예비로 사용할 것으로 총 2척만 있으면 충분하다'라는 발언이나, 야마토의 건조현장에서 작업자들에게 '이제 전함은 필요 없어질 테니 자네들은 조만간 실업자가 되겠구만'같은 맥빠진 소리를 하여 수많은 관계자들에게 원성을 산 에피소드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거함 야마토가 완성되고 난 뒤에 '이 배가 있으니 반드시 이길 수 있다'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보면 야마토 자체를 싫어했던 건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그러나 현실감각이라는 게 아예 없었던 다른 장성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미국과의 전쟁이 승산없는 전쟁임을 예감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미국과의 평화협정을 유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기 때문에 정국을 장악했던 일본 육군 강경파와 대립했는데 오죽하면 1939년에 연합함대 사령장관에 오른 것도 강경파의 암살위협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당시 연합함대 사령부는 육상이 아닌 전함 나가토 함상에 있었기 때문에 암살자가 접근하기 어렵다는 얘기죠. 그가 당시 총리였던 고노에 후미마로에게 언급한 '"우리는 처음 6개월에서 1년 정도는 맹렬하게 돌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텍사스의 유전과 디트로이트의 공장들이 (우리에게) 단호하고 결정적인 반격을 시도해 올 것이다."는 언급은 실제로 거의 들어맞았습니다. 주변에서는 요나이 미츠마사, 이노우에 시게요시와 함께 해군 좌파 삼인방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 진주만 공격, 그리고 짧은 영광
그러나 같이 개전을 반대하던 요나이가 일본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확전파 도조가 취임하면서 미국과 전쟁을 불사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그러자 그는 태도를 180도 바꾸어 "미국과 전쟁을 한다면 미 태평양 함대의 본거지인 진주만을 공습해 기선을 제압해야 승리의 가능성이 있음"을 역설하며 철저한 준비와 훈련에 매달렸습니다.
관동군처럼 본국의 의사에 반해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러일전쟁 이후의 대미전략으로서 남방작전을 상정해온 일본 해군의 계획을 뿌리부터 뒤집는 진주만 공격을 강하게 주장하고 자신의 자리까지 걸며 끝내 관철시킵니다.
1941년 12월 7일 개시된 진주만 공습을 철저한 준비로 대성공을 거두어 본래 목적인 미 함대 전력들을 상당수 격침시키거나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시 유류저장고 등의 기간시설을 제거하지 못함으로서 후일 미 해군의 재기의 단초를 만들어주고 말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진주만 공습 성공소식을 듣고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라는 말을 했다는데 이것은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한 장면입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진주만 공습으로 주력 전함 및 중순양함이 왕창 털린 미 해군은 이때의 전훈을 집중적으로 받아들여 현대적인 항모를 전력의 핵심으로 삼는 함대를 찍어내기 시작합니다.
미국은 전함을 포기하고 항모찍기로 전환한 게 아니라, 진주만에서 가라앉은 전함 대부분을 인양해 업그레이드해서 재투입하고 계획된 전함을 찍어내는 건 계속 하면서 항모를 따로 찍어냈습니다.진주만 공습 이후에 야마모토가 요미우리 신문의 기자와 한 인터뷰는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요미우리 기자: 진주만 공습이 성공했는데, 이제부터 어떤 방식으로 미국과 싸우실 겁니까?
야마모토 이소로쿠: 미국과의 휴전조약을 준비할 겁니다.
말만 들어보면 곧바로 전쟁을 중단할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와이를 점령하고 이곳을 기점으로 파나마 운하를 틀어막으면 공업기반이 동부에 집중돼있는 미국으로서는 손을 들 수 밖에 없을테니 이때 선심 쓰는 척 조약을 맺으면 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이후, 둘리틀 특공대의 공습으로 충격에 빠진 대본영의 분위기를 바꾸고, 미군의 잔여 항공모함들을 모조리 격침하기 위해 미드웨이 공략을 계획합니다. 그러나 이미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모조리 해독해 작전의도를 다 파악한 상태였고, 여기에다 방만한 작전 계획으로 인해 제대간 협동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거기다 항모기동부대의 지휘를 맡았던 나구모 주이치의 헛발질이 겹치면서 작전에 동원된 정규항모 4척을 잃는 대참사를 당했습니다. 너무 믿기지 않는 지독한 패배라, 사기에 영향을 줄까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반에는 기밀사항이었다고 합니다. 일본 외무대신 시게미츠 마모루까지도 전후에야 이걸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이후, 그의 노력은 아무 소용없이 전황은 악화일로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 야마모토의 전사(戰死): 미국측 작전명 '복수'
1943년 4월 18일. 야마모토는 부겐빌 섬으로 전선시찰에 나섰습니다. 문제는,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극비였지만) 미군은 일본군의 암호를 거의 실시간으로 완벽에 가깝게 해독하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미 해군은 시찰 며칠 전에 야마모토의 비행일정이 입수되자마자, 이 초대박 월척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Operation Vengeance(복수 작전)"로 명명하고 즉시 추진하였습니다.
* 야마모토 격추도
진주만 공습의 주인공이었던 야마모토는 일본에서의 범국민적인 위상과 인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고, 그만큼 미국에 있어서는 원수 중의 원수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한편 야마모토를 제거하면 미군이 일본군의 암호를 해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향후 암호해독을 통한 정보입수 루트가 차단되는 극심한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점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단순한 군사작전일 수 없었던 이 작전은 미 해군 장관 프랭크 녹스는 물론,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결재까지 받아야만 했습니다. 루스벨트의 선택은, 어떠한 비용을 치르더라도 야마모토를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 야마모토가 탄 항공기
일본군도 바보는 아니어서, 미군 전투기들의 작전반경 밖으로 야마모토의 비행경로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 육군의 최신 전투기였던 P-38 라이트닝이 특수 보조연료탱크까지 가득 채울 경우, 야마모토의 목적지인 부겐빌 섬 부인 비행장 상공이 (당시 미군의 최전선 비행장이었던) 헨더슨 비행장(과달카날)으로부터 비행반경에 아슬아슬하게 들어간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미군은 즉시 최정예 조종사들(캑터스 항공대)와 보유한 모든 P-38들 중 최상의 기체들을 엄선하여 며칠 간 극도의 보안 속에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라바울에서 출발한 야마모토 일행의 수행단이 수송기 2대와 호위 전투기 제로전투기 6대의 편대라는 사실까지 미군은 알아냅니다.
그래서 18기의 P-38를 출격시켜 이 중 14기가 호위 제로센 6기를 상대하는 사이, 나머지 4기의 P-38이 2기가 한 조를 이루어 수송기 1기씩을 최대한 신속히 해치운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이 작전의 핵심은 P-38의 체공시간이었습니다.
* 야마모토 항공기를 격추한 미군 라이트닝 기
부겐빌 상공은 미군기에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먼 지점이었는데, 거기다 육상과 해상으로부터의 탐색을 기만하기 위해 갈 지(之) 자로 꺾어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2시간 넘게 아슬아슬하게 초저공 비행을 해야 했던 탓에, 현장 상공에서 P-38이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은 5분 남짓이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야마모토 수행단이 조금만 일찍 혹은 늦게 도착하면 그대로 작전은 실패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야마모토의 철저한 시간 관념을 알고 있던 미군은 비행스케줄에 맞춰 수행단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대로 작전을 강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야마모토는 자신의 그 철저한 성격 탓에 목숨을 잃었습니다.4월 18일 오전 7시 20분, 헨더슨 비행장에서 16기의 P-38이 이륙하였습니다.
오전 9시 34분, 2시간의 초저공 비행 끝에 부인 비행장 인근에서 1만 피트 상공으로 급상승한 16기의 P-38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경로로 이동 중인 수행단 일행을 1분 만에 발견했습니다.
오전 9시 35분, 조용하던 하늘에서 순식간에 난전이 벌어졌습니다. 2기의 수송기는 허겁지겁 서로 반대 방향으로 급강하하며 어떻게든 피하려 했지만, 수송기로서는 2기씩 작정하고 달려드는 최신형 고속전투기 P-38를 따돌리는 것은 당연히 무리였습니다.
먼저, 야마모토가 탑승 중이었던 항공기가 토마스 랜피어의 집중사격으로 순식간에 오른쪽 엔진과 날개가 박살나며 밀림에 추락하였습니다(탑승인원 11명 전원 사망). 곧이어 나머지 1기의 항공기도 다른 P-38 2기의 공격을 받고 해상에 불시착한 직후 가라앉았다. 수송기 2기를 모두 격추한 사실을 확인한 모든 P-38 조종사들은 그 즉시 고속으로 상승하며 퇴각하였습니다.
바로 코 앞의 부인 비행장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고 대경실색한 일본 전투기들이 벌떼같이 비상 출격하였지만, 고속상승이 주특기인 P-38을 따라 잡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이 모든 과정에 1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미군기들의 기동은 신속했습니다.이 전투에서 미군의 손실은 1기가 격추된 것이 전부였습니다.
조종사들이 귀환한 헨더슨 비행장은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2기의 수송기를 모두 격추시켰으므로 그 중 어느 것에 야마모토가 타고 있었는지 여부는 미군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작전은 완벽히 성공하였습니다. 미군은 이 작전의 성공이 '대전투의 승리'와 맞먹는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했으며, 실제로 야마모토의 죽음은 일본군과 국민들에게 엄청난 사기 저하를 가져왔음이 종전 후 확인되었습니다.전후, 미군이 일본군의 서류를 조사하자 야마모토의 죽음에 대한 상세한 진상이 드러났습니다. 야마모토는 2기의 수송기 중 먼저 격추된 (정글에 추락/폭발한) 수송기에 탑승해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그 즉시 추락지점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워낙 빽빽한 정글이었던 탓에, 24시간이 지난 후에야 야마모토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부서진 폭격기 옆에 튕겨 나와 군도를 꼭 쥔 채 숨져 있던 그의 시신에서 2개의 관통상(가슴, 얼굴)이 발견되었습니다. 격추되기도 전에 기관포탄을 얻어 맞았다는 얘기입니다.바다에 떨어진 나머지 1대에는 참모장인 우가키 마토메 일행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우가키는 중상을 입었지만 즉각 출동한 보트에 구조되어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 나구모 주이치 제독 >
진주만 공습을 지휘한 나구모 제독은 진주만 공격 이후 연이은 남방작전에 항모부대를 지휘한 공을 세웠지만, 야마모토와 달리 일본 군부 내에서의 영향력은 전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6개월여 뒤 미드웨이 해전의 패배라는 최악의 결과를 거두면서 나구모는 항모부대 지휘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후 다시 복귀하여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했지만 산타크루즈 해전에서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 끝에 결국 항모 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이후 수상함대 사령관직을 이어가다가 사이판 전투에서 자살합니다.
나구모와 야마모토는 서로가 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야마모토는 협상파의 일원이었고 나구모는 개전파의 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간의 역량의 차이는 현격하였습니다.
항모기동부대 지휘관의 자리는 어디까지나 연공서열 때문에 앉게 된 것이어서 나구모 스스로도 이 자리를 불편해 했고, 그를 그 자리에 임명한 야마모토 역시 이런 상황을 그리 내켜하지 않았지만 연공서열이 지배하는 당시 일본 해군 내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진주만 공습을 전후로 더욱 심해졌습니다. 진주만 공습을 강하게 반대했던 주역 중 한 명이 바로 나구모였으며, 이후 진주만에서 3차 공격을 포기하고 돌아온 나구모에 대한 야마모토의 시선은 더욱 차가워져 버렸습니다.
야마모토는 나구모를 바로 해임해버리고 싶었지만 승리한 장수를 그런 식으로 대했다가는 커다란 후폭풍이 닥칠게 뻔했고, 이후 남방작전의 공이 더해지자 나구모를 끌어내릴 명분은 아예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여튼 나구모에 대한 야마모토의 시선 때문에 연합함대 내에서 나구모의 발언권은 사실상 없는 셈이었으며, 남방작전 이후의 전략적 행보에 대해 육군에서 주장하는 수세적인 전략을 지지했다가 연합함대 내에서 완전히 무시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나구모가 항공전 분야에 무지했던 게 역으로 야마모토의 명령에 달리 반박하지 못하고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으로 이어지자 야마모토도 이 상황이 그리 나쁘지는 않다는 선에서 만족해 하던 터였겠지요.
< 후치타 미쓰오 중좌 >
진주만 공격을 공중에서 실질적으로 총지휘한 후치다 미쓰오 중좌는 모두 전후까지 살아남았습니다. 후치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중상을 입었고 이후 종전 때까지 지상근무를 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 군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허위 보도를 하는 한편 이런 차원에서 귀환한 부상병들에게 연금생활을 강요했으며 이에 후치타는 전쟁에 회의를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패전 후 진주한 미군 조종사에 의해 기독교를 접하고, 선교사로 변신해서 간증하러 70년대 한국도 방문하여 일본의 식민 지배를 사죄하는 연설을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회고록을 펴내면서 태평양 해전사 연구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진주만 공격 총대장의 회심>이라는 회고록을 내어 진주만 공습의 준비와 전투 과정을 잘 증언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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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블라리고님~!!! 고맙소이다~!!! 한두번이 안이 었지요. "진주만"영화 감상하기를~!!!
다시 감상하며 옛시절 추억들 간직합니다.
조종사 출신이라 역시 관심이 많네요. 가까운 시일 내에 <미드웨이 해전>을 그려 볼텐데
그때도 기대를...태평양 전쟁 이야기는 앞으로 서너편이 이어질 예정입니다.
94년11월 가족과 함께 하와이 진주만 관광가서 아리조나 호 구경한적이 잇읍니다
실감나는 진주만 공습 스토리 및 해전 이면사 잘 읽엇읍니다
변대감! 은근히 세계사의 명장소를 많이 찾아다니네요. 지난번에는 로마제국의 정치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놈을 다녀오더니...아리조나호에는 1천명 이상의 아까운 인생들이 수장되어 있고...X바리
놈들은 착한 일을 하고 남긴 흔적을 찾을 수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