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로 숨은 지도자들 8-3
한편 1793년 겨울,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모인 사람은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었다. 먼저 윤유일이 입을 열었다. 「조상 제사 문제로 인해 받은 우리 교회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 습니다. 많은 교우들이 죽거나 배교를 했습니다. 그중에 가장 가슴 아픈 것은 권일신 선생을 잃음으로써 교회의 기둥이 잘라져 나간 것입니 다. 그렇다고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다시 북경에 가서 이번에 야 말로 신부를 영입해 우리 교회를 재건하자는 것입니다.」 하면서 북경 파견 밀사에 대해 말을 꺼냈다. 지황이 답변했다. 「나는 선친이 의사였기 때문에 의료에 관한 일이라면 조금 알고 있습니다. 먼 길을 가기 위해선 여러 가지 준비가 있어야겠지만 그중에 서도 약간의 의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더구나 겨울철에는 몸을 온전히 버텨나가기 위해선 의술이 뒷받침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며 자신을 보내줄 것을 간청했다. 최인길도 함께 갈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최인길은 중국어가 능숙했다. 그러나 비용 문제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윤유일과 지황이 북경 밀사로 선정되었다. 달레는 이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최창현 요한과 그 동지들이 첫째로 마음을 쓴 것은 신부 한 분을 얻는데 힘쓰는 것이었다. 박해에서 오는 어려움이 거의 사라졌고 신자들이 사제들을 모시고자 하는 소원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간절하였다. 그러므로 벌써 두 번이나 북경을 내왕한 윤유일이 파견대의 우두 머리가 되고 지황 삽바가 다른 몇몇 사람과 함께 그와 동행하기로 결정 되었다. 그들이 부재중에 서울에 신부를 모셔 들일 집을 장만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 일을 맡은 것은 역관 최인길 마티아였다.
그러하여 이 용감한 대표들은 사신일행을 따라 1793년 말경에 길을 떠낫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달레의 기록을 다시 한 번 자세히 살펴 보기로 한다. 신부를 영입하기 위해 4차로 윤유일과, 지황, 포요한이 1793년 말경동지사 일행을 따라 북경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상 이때 윤유일은 북경에 가지 않았다. 달레의 기록을 보면 이때 지황과 함께 윤유일도 북경까지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베아 주교는 사천 교구장 까라드라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때 북경에 온 사람은 지황과 포요한이라고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박해가 지난 후 가장 열심히 한 신자들은 북경에 사람을 보내고 또 편지를 전하기로 의견을 일치시켰으며 편지 내용에 있어서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박해)을 이야기할 것과 선교사들을 요청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삽바와 포요한을 뽑아 보냈으며‥‥』
구베아 주교의 이 편지에서 보면 그때 북경에 온 사람은 지황과 포요한이다. 그때 만일 윤유일이 갔다면 구베아 주교는 편지에서 그가 왔었다고 기록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의 기록으로 본다면 이때 윤유일은 북경까지 가지 않고 의주에 머무르고, 그 대신 지황이 윤유일의 편지를 갖고서 북경에 간 것이다. 그것은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의 진술로써 잘 알 수가 있다.
「지황 외에 반드시 조선 사람으로 함께 모의한 자가 있을 것이니 그 하나하나 성명을 지적하여 진술하고 네가 조선에 나오기 전에 먼저 편지로 왕복하였을 것이다. 그런 연후에 계획이 이루어졌을 것이니 이것 역시 상세히 고하라.」
이에 대해 주문모는 이미 윤유일과 지황, 최인길 등이 죽어서 이름을 대더라도 별 탈이 없을 것 같아 진술했다.
『들으니 지황 이전에 윤씨 성을 가진 사람이 북경에 들어올 때에는 권씨 성을 가진 사람의 편지를 갖고 들어왔으며 지황이 들어올 때에는권씨 성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죽어서 겨우 윤씨의 편지만 가지고 들어 왔다고 합니다. 그 일을 함께 모의한 사람은 제가 상세히는 모르나 윤 씨와 최씨인 듯합니다. 이 두 사람은 을묘년(1795)에 이미 지황과 함께 포청에서 장살당해 죽었습니다.』
권씨는 권일신이며, 윤씨는 윤유일이다. 주문모 신부의 이와 같은 진술로 보아 윤유일은 그때 북경에 가지 않고 그 대신 조선 교회를 대표하여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그것을 지황을 시켜 북경에 보냈다. 윤유일은 이미 북경의 주교에게 단독으로 의견을 개진한 편지를 썼다. 그것은 그가 조선 교회의 지도자가 됐음을 입증한 것이다. 북경의 주교 구베아는 윤유일이 보낸 편지를 지황을 통해 받아 보고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윤바오로가 이제는 조선 교회의 지도자가 됐군. 잘된 일이야. 앞으로 수그러짐이 없이 발전될 것임이 분명해.」 구베아 주교는 그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항상 뒷전에서 지켜보며 겸손해 하던 윤유일은 누구보다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큰 그릇이었던 것이다. 윤유일은 편지에서 신부를 빨리 영입 해야겠다는 것과 조선으로 안전하게 올 수 있는 통로의 물색을 하고 있다는 것 등을 썼다.
그의 한문 실력은 탁윌했다. 그러나 한 번도 자신의 한문 실력을 내보이지 않았다는 건 모든 공을 남의 것으로 돌리려는 겸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를 뛰어 넘을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북경에 관한한 자신보다 더 그쪽 사정과 구베아 주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지도자들이 없었다. 윤유일은 직접 구베아 주교를 만나지 않았다. 그는 의주에 3개월간 머물면서 신부를 모시고 나을 통로를 탐색했던 것이다. 기록에는 신해박해로 인해 국경의 감시가 더욱 삼엄해져 가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것은 결코 아니다. 국경의 감시가 아무리 삼엄하더라도 윤유일의 신앙심만큼은 못했을 것이고 갈 수만 있었다면 능히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주문모 신부가 책문에 도착했을 때 책문으로부터 압록강을 건너 조선 국경을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넘을 것인가 하여 국경 통과의 통로를 탐색하기 위한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자주 북경에 연락 하기 위해 의주의 상인을 포섭하기 위한 것이었다. 윤유일은 이미 두 차례나 북경에 다녀오고 한 차례 책문까지 갔다 왔다. 그는 조선의 교회 지도자들 누구보다 이곳 지리에 익숙해져 있었다. 또 의주의 상인들과도 친숙하고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의주의 상인들은 북경을 제 집 안방 드나들 듯 자주 드나들었다. 연락을 위해서는 그들과 사귀어 두는 것이 편했다. 따라서 신부를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윤유일 자신이 가장 적격자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책문을 통과하여 의주 관문을 지나 서울까지 안전하게 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의주에서 윤유일이 친하게 지낸 사람은 옥천희 요한이었다.
그는 평안도 선천 출신으로 그의 입교 시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을 지켰고 교회 일에 늘 앞장서서 일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심부름으로 여러 번 중국에 왕래하면서 맡은 바 사명을 충실히 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황사영이 뿐 백서(帛書)를 갖고 중국을 내왕한 경험이 있었고 또한 가장 믿을 수 있는 옥천희가 황심과 같이 가기로 약속이 됐으나 불행히도 그가 8월경에 잡히고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 옥천희는 국경지방에 대해선 그 지리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윤유일은 옥천회와 자주 만났다. 옥천희는 그곳에서 임시 주막집을 차리고 있었다. 그가 주막집을 차리게 된 것은 단순히 술청을 열어 돈을 벌어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북경으로 가는 밀사들과, 북경 쪽에서 오는 사신들과 교제를 넓혀 정보를 빨리 알고, 또 국제시장이 열리는 책문의 경기를 파악하는 목적이 있다. 그의 주막을 거쳐 간 사람은 이승훈과 여러 사신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일찍부터 서학과 연관을 맺을 수 있었다. 옥천희는 자신의 주막을 출입하는 장사꾼들에게 천주의 도리를 일러주고, 필요한 사람에게는 밀사들로부터 구입한 천주학을 주기도 했 다. 윤유일은 옥천희의 주막집을 자주 출입하였다. 마땅히 기거할 데도 없었고, 옥천희 역시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의기가 통했던 것이다. 「요한 형제, 우리가 이 고생을 하는 것은 한 분뿐인 천주를 위한 것입니다. 이 한 몸 바쳐 천주의 빛을 온 조선에 밝히는 것이 나의 소원 입니다.」 윤유일은 낯설고 추운 의주에서 몇 개월 있는 동안 행색이 말이 아니었다. 옷은 찢어져 너덜거리고 얼굴은 추위에 터져 피가 맺혔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항상 정기로 빛이 나 있었다. 「윤바오로를 볼 때마다 나는 내 신앙심이 약해지려는 것을 책하곤 합니다. 윤바오로가 하는 일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옥친희는 윤유일을 존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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