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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803
6월26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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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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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HIiLvZ85C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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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겸손과 자비의 교각>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 예수님 시대 당시 그는 로마군단 조직의 하급 장교였습니다. 백인대장이란 계급은 현재 우리 한국 군대편제에 따르면 소대장이나 혹은 중대장 정도에 해당됩니다. 그가 통솔하는 병사는 100명이었기에 백인대장으로 불렸습니다.
백인대장은 여러 모로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도움을 한 가지 청했는데, 그것이 자기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부리고 있는
종의 병을 치유해달라는 청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자상한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넉넉한 인품의 소유자였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당시 종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백인대장의 진급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백인대장 가정의 가사를 돌보기 위해 그저 얼마간 몸값을 치르고 산 노예였습니다.
당시 많은 주인들은 종이 병에 걸려 죽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죽으면 더 건강하고 ‘품질 좋은’ 노예를 사오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런데 백인대장은 철저하게도 달랐습니다. 그는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지녔습니다. 아랫사람에 대한 배려가 특별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종의 치유를 청하는데 있어서 그 마음 자세가 지극히 겸손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믿음도 아주 탁월했습니다. 백인대장의 말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잘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다 예수님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너무나 흐뭇했던 예수님이었기에, 그가 청하는 바를 기쁜 마음으로 들어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백인대장의 확고한 믿음과 겸손한 자세를 극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강이 하나 흐르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도달하게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우리를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다리가 하나 필요합니다. 다리를 놓기 전에 먼저 튼튼한 교각 두 개가 필요하지요.
우리 쪽 강변에는 ‘겸손’이란 교각을 세워야 합니다. 가난하고 부족한 우리는 겸손이란 교각을 통해야만 부유하고 완전하신 하느님께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 쪽 강변에는 ‘자비’의 교각이 세워져 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백인대장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자비로우신 하느님께로 건너가야 할 것입니다.
겸손과 자비란 두 개의 교각 위로 사랑과 믿음이란 다리가 놓이면 죄인이고 부족한 우리 인간이지만 그 크신 하느님께로 건너갈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히 다리를 건너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과 약속의 땅인 건너편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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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8SfXrOZj0K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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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르다.’라는 생각을 버리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오늘 복음에서 믿음이 강한 백인 대장이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병을 고쳐 달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백인 대장의 믿음은 예수님까지 감동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종을 치유해 주겠으니 함께 가자고 할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런 믿음은 이스라엘에서도 본 적이 없다고 하시며 그를 칭찬해 주십니다. 도대체 백인 대장은 어떻게 그러한 믿음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의 대답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는 지위와 힘이 있으니 하인들에게 무언가를 시켜 원하는 일을 이루어지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병을 고치는 힘이 있으신 분은 엄청난 지위가 있으신 분이 확실하니 자신은 그분을 집에 모실 자격이 없고 그런 힘이 있으신 분은 또한 누군가를 시켜 그 일을 하실 수 있으니 굳이 직접 집에 오지 않으셔도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는 이 세상 것으로 하늘의 법칙을 깨달아 믿음을 증가시킨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증가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이 세상의 법칙을 통해 하늘의 법칙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2018년 1월 20일 새벽 일본 시가현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의사가 되라는 엄마의 성화에 9년간 재수하던 딸이 엄마를 잔인하게 살해하여 시체까지 훼손하고 유기한 것입니다. 그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습니다.
“괴물을 처단했다. 이걸로 한시름 놓았다.”
노조미는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의사가 돼라.’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성적이 모자란 그는 9년이나 재수해야 했습니다. 엄마는 지인들에게 딸이 이미 의대에 진학했다고 거짓말까지 하고 다녔습니다. 딸의 부담은 더 커져만 갔습니다. 엄마는 휴대전화까지 빼앗고 딸의 방에 CCTV까지 설치해 딸이 공부하는 것을 감시했고 심지어 샤워도 엄마와 함께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의사와 비슷한 모습인 ‘조산사’가 되겠다고 간호학과에 입학했는데 조산사가 아닌 간호사가 되겠다는 딸을 향해 “불행의 구렁텅이. 배신자!”라는 말을 쏟아냈습니다. 엄마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학벌 콤플렉스가 있었습니다. 노조미는 처음에 징역 15년 형을 받았다가 사실을 참작해 10년 형을 받았습니다. 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한 일을 후회합니다. 하지만 포로 같았던 당시보다 지금 구치소 생활이 더 편합니다.” [출처: ‘의대 강요에 9년 재수한 딸’, 유튜브 채널, ‘엠빅뉴스’]
왜 믿음 이야기를 하다 이런 잔인한 사례를 드는 것일까요? 이런 사례들이 세계 곳곳에서 ‘똑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고3 우등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도 ‘똑같이’ 아들에게 공부를 강요했고, 그 어머니도 열등감에 시달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영국에서도 있었습니다. 아들이 여러 일류대에 합격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여자를 사귀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더 나아지기만을 바랐습니다. 그러며 장애 되는 것은 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아들에게 제거당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시킨 대로 걸림돌이 된 어머니를 제거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례가 세계 곳곳에서 ‘똑같이’ 일어나고 왜 계속 같은 일들이 반복되는 것일까요? ‘나는 달라!’ 라는 이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법칙에서 자신은 예외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법칙조차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 법칙을 깨닫게 되면 그 법칙을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먼저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을 인격적으로 대하시는 자세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부모가 빼앗고 있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대우와 존경을 받지 못할 때 무엇이 오겠습니까? 뿌린 대로 거둘 뿐입니다. 이것은 법칙입니다. 하지만 자신은 다르다는 생각이 이 법칙도 보지 못하게 만들고 그런 법칙을 만드신 하느님도 믿지 못하게 하여 결국 안 좋은 굴레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안 좋게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와 반대되는 사례도 많습니다. 위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유태인들만 보아도 그렇게 자녀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자녀에게도 부모에게도 모두 유익하다는 것이 법칙으로 증명이 됩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일찌감치 주님께 봉헌하고 자신들은 노후 준비를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노인 빈곤율이 세계 최하위입니다. 계속 자식을 통해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려 하다가 돈도 다 쓰고 결국엔 자식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 있습니다. 어디에나 법칙이 있습니다. 그 변함없는 법칙이 존재함을 볼 수 있다면 그 법칙을 말씀하시는 주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인 대장이 그렇게 믿음을 성장시켰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백인 대장처럼 ‘나는 달라.’, 혹은 ‘나는 특별해.’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서로 판단을 하면서 그들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포도밭의 한 그루 무화과나무의 비유처럼 하느님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이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다른 이들과 자신들은 구별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똑같습니다. 우린 특별하지 않습니다. 이웃이 나도 모르게 판단이 된다면 그 판단하는 잘못이 무엇인지 찾고 그것이 내 안에도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웃의 단점으로 나의 단점을 고치려 할 때 비로소 사람은 다 똑같고 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에 존재하는 법칙들이 보이게 되고 그 법칙을 예수님께서 다 알려주셨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그분을 믿게 됩니다. 우선 내가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하느님 외에 인간은 누구도 특별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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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8,5-17 : 백인대장의 종, 베드로 장모의 치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백인대장의 종과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주신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을 데려오지 않았다. 이것을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내고 환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낸(루카 5,19 참조) 일보다 더 큰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종이 일어나고도 남는다고 확신했기에 종을 데려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7절) 예수님은 종을 치유해 주시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하신다.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백인대장의 훌륭한 믿음을 알게 되었다.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8절)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켰고 한 인간에 대한 백인대장의 관심과 사랑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 요구를 기꺼이 들어주시도록 하였다.
백인대장은 자신을 자격 없는 사람으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뿐 아니라 마음에도 모실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자임을 보여 준다. 그가 그의 집에 들어오신 분을 마음으로도 이미 맞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런 큰 믿음과 겸손을 보여주는 말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집에 가시겠다는 것은 단순히 그의 집이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 들어가시겠다는 뜻이다.
백인대장은 상관이 있고 부하들이 있어서 마음대로 움직인다고 하면서 하느님께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분이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예수께서는 백인대장의 모습에 감탄하신다. 종에 대한 백인대장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 특히 병자들과 죄인들에 대해 가지신 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이 가지고 계신 사랑을 가지고 자기 종을 위하여 이방인인 예수님을 찾아온 그에게 그의 믿음을 보실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백인대장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와 하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것이라고 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날 것이라고 하신다. 바로 백인대장을 칭찬하시는 말씀이다. 그리고는 백인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13절)
또한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해주시고 다른 많은 병자들도 치유해주셨다. 많은 일 속에서 피곤하셨겠지만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으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 한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쉴 틈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그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여야 하며, 그분께 은총을 받았으면 그것은 바로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로 이어져야 한다.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15절)라고 하고 있다. 사랑과 봉사의 가르침을 따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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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웃음’에 관한 표현이 오늘 독서에서 네 차례 등장합니다. 모두 사라의 웃음과 관련됩니다. 물론 이 웃음은 나중에 ‘그가 웃다.’라는 뜻의 이름인 ‘이사악’의 탄생을 위한 복선입니다. 그러나 사라의 마음으로 사라의 웃음을 읽어 본다면 기뻐서 짓는 웃음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사라가 젊은 여인이었다면, 그의 웃음은 아기를 잉태하게 된다는 기쁨의 웃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라가 나이가 많고, 가임기가 지났음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도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사라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의 웃음이 아닌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됩니다.
아울러 사라의 웃음은 하느님을 향한 부족한 믿음을 보여 줍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의 나이가 여든아홉 살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흔아홉 살이었습니다. 그의 상식과 판단에 따르면, 임신과 출산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출생 예고를 들었을 때, 사라는 신앙의 응답이 아닌 현실적 판단에 따른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라가 웃었다는 사실만 우리에게 알려 줄 뿐, 그가 하느님의 말씀을 믿었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믿기가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고 있거나 생각한 대로 또 예측 가능한 대로 흘러간다면, 믿음이란 참으로 쉬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눈에는 불가능한 것이 당신께는 가능하다고, 당신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으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언제나 감사와 찬미를 드리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쓴웃음을 짓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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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후배 신부님이 강의 중에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받는 것이 더 좋은가요? 주는 것이 더 좋은가요?”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받는 것이 더 좋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는 것이 더 좋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후배 신부님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받는 것이 더 좋다고 하신 분들은 솔직하시네요. 주는 것이 더 좋다고 하신 분들은 체험이 있나봅니다.” 후배 신부님도 받는 것이 더 좋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생일 선물을 받을 때, 부모님께 용돈을 받을 때 좋았다고 합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사랑을 받으면서 잘 지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니 너희에게 누르고 흔들어 넘치게 부어 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것만큼 되돌려 받을 것이다.(루가 6, 38)”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사도 20, 35)” 받는 즐거움이 감성적이라면 주는 즐거움은 영성적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는 것이 행복하다고 하셨는데 돌아보니 줌으로써 행복했던 체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등학교 때 꽃동네로 봉사활동을 갔었답니다. 음식을 나르기도 했고, 청소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뇌성마비 어르신과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턱과 눈으로만 의사표현이 가능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듯이, 어르신에게 모든 것을 물어보면서 대화하였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탁자 옆에 있는 가방을 바라보았고, 가방을 가져다 드렸다고 합니다. 어르신은 가방을 열어보기를 원하셨고, 가방 안에 있는 공책을 열어보기를 원하셨습니다. 공책에는 그동안 어르신에게 다녀간 분들의 주소가 적혀있었다고 합니다. 주소를 적어드리기를 원하셨고, 주소를 적어드렸다고 합니다. 편지를 한 통 써주기를 원하셨고, 매번 물어보면서 어르신을 위해서 편지를 써드렸다고 합니다. 매번 물어보고, 원하는 것을 해 드렸는데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고 합니다. 한 달 후에 집으로 편지가 왔는데 어르신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어르신을 위해서 봉사오신 분이 같은 방식으로 편지를 써드렸다고 합니다.
저도 신학생 때 한 가지 체험이 있었습니다. 늦은 밤입니다. 술에 취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인지라 잘못하면 큰 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잠시 고민했습니다. 늦었고, 다음 날 새벽미사도 가야하는데 그냥 지나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안 보았으면 모르지만 보았으니 도와주자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택시를 잡고 술에 취한 사람을 집에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 집에는 애타게 아빠와 남편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저는 사정을 설명하였고, 감사하다는 가족의 인사를 받으며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습니다. 3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합니다. 전신주, 전화박스, 양복점이 기억납니다. 옷에 묻었던 흙도 생각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아니었지만 순수하고 착했던 신학생이었던 기억입니다. 생각하니 주는 것의 기쁨을 아는 분들이 주변에 많았습니다. 산행 중에 힘든 친구의 가방을 들어주었던 분, 어질러진 짐을 늘 정리하던 분이 있었습니다. 성당에는 주는 것의 기쁨을 아는 많은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처음 보는 손님을 정성껏 모셨습니다. 발을 씻을 수 있도록 해 드렸고, 먹을 것을 드렸고, 편히 쉴 수 있도록 해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정성껏 모신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아흔아홉 살, 아내 사라는 여든아홉 살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굶주린 이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이렇게 선행을 베푼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집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종을 고쳐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을 아끼는 백인대장의 마음을 칭찬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습니다.” 받는 것이 더 좋으신가요? 주는 것이 더 좋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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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고통은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습니다. 인생을 고해라고들 합니다. 그 가운데 병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의 의미를 가장 위협하는 것입니다. 병은 육체적 고통과 더불어 사람들과 관계의 단절까지 맛보게 하는 시련을 주기 때문입니다.
“낮에도 밤에도 눈물을 시내처럼” 흘리는 이들에게 “그분께 네 손을 들어 올려라.”는 탄원의 시를 전하는 애가의 말씀처럼 고통은 ‘왜 저에게?’라는 탄원을 하느님께 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치유의 은총도 주십니다. 관심과 사랑을 통해 치유를 시작해 주십니다.
중풍으로 드러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종의 마음을 읽어 낸 이는 바로 그의 주인인 백인대장이었습니다.
자신의 종을 인격체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연민과 사랑을 가진 백인대장은, 예수님은 병을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치유를 청합니다.
더욱이 그는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고 겸손한 믿음을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치유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 것처럼, 우리도 믿음을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치유의 기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체 안에 계신 지극히 거룩하신 주님을 우리의 죄스러운 마음에 모시기에 앞서서 백인대장의 기도를 바침으로써, 복음 환호송에서 “우리의 병고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 짊어지셨네.” 하고 노래한 자비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영성체하기 전에 나는 이런 겸손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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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강지원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우리는 복음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참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확고하고 신실한 믿음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파르나움에 들어 가셨을 때에 만나게 된 한 이방인 백인 대장 그가 바로 참 신앙인이였습니다.
우리가 매일 미사 때마다 성체를 영하기 직전에 바치는 기도인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고백하는 이 기도의 원형이 바로 이방인 백인 대장이였던 것입니다.
복음은 이방인 백인 대장의 입을 통해 온 세상에 신앙을 고백하게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
한없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자신이 하인이 곧 낫게 될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참으로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중풍에 걸려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는 자신의 하인에 대한 백인 대장의 따뜻한사랑의 마음과 그 하인을 낫게 할 분은 오직 주님 밖에 없다는 백인 대장의 확고한 믿음이 바로 병든 하인을 깨끗이 낫게 한 기적의 원동력이였습니다.
복음이 전하는 수 많은 종류의 예수님의 기적 이야기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공통되는 점을 몇가지 발견하게 됩니다. 특히 치유 기적 사화 부분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선 살펴보면, 병자들이 직접 자신의 발로 걸어서 예수께 치유 받으로 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즉 많은 경우 이웃의 사람들이 그 병자를 옆에서 부축한다든지, 들것에 들고 온다든지, 아니면 업고서 예수께 데리고 와서 낫게해 주십사 하고 청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백인 대장이 병든 하인을 대신하여 예수께 왔고 병든 자신의 하인을 낫게 해주시길 청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건 병자들의 고통을 더불어 함께 느끼고 조금이나마 병자를 돕고자 하는 이웃들의 측은지심, 즉 사랑의 고운 마음씨라는 것입니다. 어려운 처지의 이웃을 실질적으로 돕는 이러한 사랑의 행위야말로 바로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놀라운 힘이라는 것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하는 이웃들의 아름다운 사랑이 주님을 감동시킨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공통되면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바로 주님께 치유의 은총을 청하는 이들의 확고한 믿음입니다.
당신만이 진정 주님이시고 당신만이 진정 우리에게 새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구세주이심을 의심없이 믿는 그 확고한 믿음 그 자체가 바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치유의 은총을 주시고 나서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라고 말입니다.
단 한번도 "나의 신적 능력을 보이려고 너를 낫게 해주었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역시나 백인 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며
"가 보아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셨고 바로 그 시간에 하인의 병이 나았던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과 믿음은 놀랍고도 위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도 가능하게 하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합니다.
이웃에 대해 가지는 사랑의 마음과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은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사랑의 행위와 자신의 신앙에 대한 굳건한 믿음은 나를 바꾸고 사람을 바꾸고 나아가 온 세상을 바꿉니다.
참 신앙인은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위한 이기적인 복을 주님께 빌지 않습니다. 참 신앙인은 자신을 벗어나 이웃을 위해 주님께 도움을 청하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복음이 보여주는 병자들을 주님께 데리고 온 사람들처럼 실천적인 사랑의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참 신앙인은 사랑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고, 사랑만이 모든 사람을 하느님께로 이끌 수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참신앙인은 우리가 죄중에 있고 늘 주님께 죄를 짓지만 그래도 주님은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늘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참신앙인은 이러한 자신의 믿음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이렇듯 참신앙인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고, 주님의 사랑을 의심없이 믿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믿음에 대한 믿음, 이것이 참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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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백인대장의 아름다운 고백>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8절)
이 기도문은 온 세상의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 중 영성체 예식 직전에 사제가 축성된 성체를 높이 들고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하는 외침에 응답하는 기도문이다.
이 기도문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에서 유래된다. 마태오가 모아놓은 10가지 이적사화집성문(8-9장)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 기적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보도된다.
두 번째 기적은 백인대장의 하인을 원격(遠隔) 치유한 기적이고, 세 번째의 기적은 베드로 제자의 장모를 열병에서 치유한 기적이다.
물론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실려있는 집단 치유와 구마기적은 구체적인 기적사화의 범주에 들기보다는 예수님의 치유활동에 대한 서술적인 보도에 속한다고 하겠다.
우선 열병을 앓고 있었던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기적을 보자. 이는 마르코복음(1,29-31)과 루카복음(4,38-39)에도 똑같이 보도되는데 사건의 맥락을 살펴보면 차이점이 많이 발견된다.
우선 치유의 장소는 다 같은 갈릴래아 지방의 카파르나움이다. 그런데 마르코와 루카는 마태오복음과 달리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부분에 이 기적을 배치하고 있다.
마르코는 첫 제자들을 부르신 다음에 배치하여 이미 제자가 된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루카는 베드로가 제자의 소명을 받기 전의 시점으로 당겨 놓았다.
마태오는 이적사화 집성문을 따로 편집함에 있어서 예수께서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하기 위해 카파르나움에 오신 김에 베드로 장모의 치유도 함께 엮어 보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태오는 자신의 고유한 편집방법을 따라 기적들을 보도하고, 마르코는 베드로 장모의 치유를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에 가깝게 서술하고 있으며, 루카는 이 치유사건이 예수께서 첫 제자 4명을 얻는 동기(動機)로 소개하고 있다고 하겠다.
예수께서 백인대장의 종을 치유한 기적은 루카복음(7,1-10)과 요한복음(4,46-54)에도 똑같이 보도된다.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마태오와 요한은 백인대장이 직접 예수를 찾아와 자비를 청한다는 점이다.
반면 루카는 백인대장이 먼저 유다인 원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간청하게 한다. 유대인 원로들은 백인대장이 회당까지 지어 줄만큼 유다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예수의 도움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소개한다.
이에 도와 줄 마음을 먹은 예수께서 길을 가시는 도중에 이번에는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시켜 예수님의 직접 왕림(枉臨)의 수고로움을 사양하고 그저 한 말씀만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루카가 늘 강조하는 기도의 다양함을 엿볼 수 있다. 즉, 기도란 하느님께 직접 드릴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 또는 성인이나 천사들을 통하여 전구(轉求)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울러 우리 또한 고통받고, 역경에 처해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인대장이라 함은 통상 로마제국의 군사편제에 따라 부하 100명을 거느리고 있는 상당히 중요한 임무와 역할을 행사하는 백부장을 뜻한다. 원문에는 서민출신이 아닌 "왕궁의 관리"로 표기되어 있다.
당대의 유명한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37?-100)는 "백부장이란 명령을 내리는 자로서, 지나치게 위험을 자처해서는 안되고, 행동에 있어서 침착하고, 믿음직한 인물이어야 하며, 성급하게 전투에 뛰어 들어서도 안 되고,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는 자신의 위치를 사수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그 자격을 서술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은 게다가 자기 종까지 아끼고 사랑하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이 백인대장을 로마군대의 고위 관리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헤로데 안티파스 군대의 이방인 백부장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이 기적사화를 행하신 예수님의 활동장소가 갈릴래아 지방의 카파르나움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방인으로서 백인대장의 자기 종에 대한 자비심과 예수께 대한 놀라운 믿음과 그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은 우리 모든 신앙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어떤 기적이나 신기한 일을 보고야 믿으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태도와는 절대적인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그렇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우리보다 다른 곳에서 더 아름답고 위대한 믿음을 보았어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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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통하여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신 다음, 이어서 열 개의 기적 이야기를 통하여 당신의 권위를 증거 하십니다. 이는 이집트에 내린 열 개의 재앙(탈출기 7,14-12,36)과 대비하여, 예수님을 마치 새로운 모세처럼 암시해줍니다.
오늘 <복음>은 앞 장면의 나병환자 치유에 이어, ㅈ백인대장의 하인을 고치신 이야기와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신 이야기, 그리고 악령 들린 이들과 병자들을 고치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늘은 백인대장의 한 마디의 말만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오늘 날 전 세계의 가톨릭 신자들이 영성체 때에 드리는 신앙고백입니다.
“주님, 제 안에 당신을 모시기 합당치 못하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낫겠나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접하게 될 때 취하게 되는 두 가지 태도를 보게 됩니다.
<첫 번째 태도>는 “주님, 저는 주님을 저의 집에 모실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주님 저에게서 떠나주십시오.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비참한 실존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님을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곧 자신이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라는 것이요, 백인대장의 신분이지만 하인의 병을 어찌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이요, 종일뿐이지 결코 주인이 아니란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종인 자신이 감히 주님이신 예수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의 병행구문에서는 ‘주님 앞에 나서기에도 합당치 못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신성을 대하게 되면, 누구나 자신의 처지를 알게 되고 전율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의 태도>는 “주님, 한 말씀만 하시면 제 하인이 낫겠습니다.”라는 의탁과 신앙고백입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거룩한 빵이심을 깨달았을 때, “주님, 당신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셨는데, 제가 당신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라고 믿고 의탁하는 것과 같습니다.
곧 그분이 주님이심에 대한 깨달음과 그분의 권능에 대한 의탁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고, ‘이렇게 하라’ 하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라’ 하면 저렇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낮이건 밤이건 구름만 걷혀 올라가면 길을 떠났고, 구름이 이틀이고 한 달이고 한 해이고 머물러 있으면 떠나지 않았던 것’(민수 9,21-22)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바로 이 두 가지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할 수 있습니다. 곧 거룩하신 분 앞에서 나 자신의 비참을 깨닫는 것이요, 거룩하신 바로 그 분이 나의 주님이심을 깨닫고 의탁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고 싶을 때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가라’ 할 때 가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가라’ 하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처럼, 눈앞에 “약속의 땅”을 두고 차지하기에 불가능해 보일지라도 ‘곧바로 가라’ 하면 곧바로 가고, 가능해 보일지라도 ‘돌아서 가라’ 하면 돌아서 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백인대장처럼,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하고, 믿음의 간청을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권능뿐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믿어야 할 일입니다. 특별히 사랑을 성취시키시는 ‘말씀의 권능’을 믿어야 할 일입니다.
성모님처럼,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고서 믿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믿는 일입니다. 우리를 ‘먼저’ 믿으시는 그분의 믿음에 의탁하여, 우리도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믿음으로 듣고, 청하기 전에 ‘먼저’ 믿고 청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 저희 안에 당신 “말씀”을 이루시는 당신 사랑을 믿사오니, “그저 한 말씀만 하소서”(마태 8,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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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마태 8,8)
주님!
당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게 하소서!
당신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게 하소서!
당신을 머리 위에 두고 살게 하소서.
당신은 머리 위에 계시되 속박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유를 주십니다.
당신께 온전히 속한 자로, 자유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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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마태8,13)
<우리가 구원받는 길!>
나병환자를 고치신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병든 종과 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고쳐주시고, 당신께 데리고 온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들의 병고를 떠맡았고,
모든 이들의 질병을 짊어지셨습니다.(이사53,4)
백인대장이 예수님께 다가와 중풍으로 드러누워 있는 자신의 종이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십니다.
그러자 백인대장은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8,8)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8,10)고 이르시면서, 백인대장에게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마태8,13)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길!
그것은 바로 '믿음'이고,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드러내야 할 '믿음의 구체적인 모습'은 '나의 최선과 함께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것!'
완전하신 하느님 앞에서 나의 존재는 나약하고, 때문에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살 수도, 구원 받을 수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계시된 구원받는 길'입니다.
복음 안에서 보면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한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교만했던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십자가 사랑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결코 교만할 수도 없고,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완전한 사랑의 표지인 십자가를 바라보고, 최선과 함께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늘 오늘 부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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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쓸모>
마태오 8,5-17 (백인대장의 병든 종을 고치시다, 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고치시다, 많은 병자를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에 한 백인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 하시자, 백인대장이 대답하였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 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셨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는 것을 보셨다. 예수님께서 당신 손을 그 부인의 손에 대시니 열이 가셨다. 그래서 부인은 일어나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마귀 들린 이들을 예수님께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시고, 앓는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쓸모>
마음이든
말이든
손이든
다만
아픔을 낫게 하는데
쓰는 겁니다
가까운 사람이든
낯선 사람이든
친한 사람이든
보기 싫은 사람이든
아픔을 낫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아프게 할라치면
차라리
마음을 비우는 겁니다
차라리
입을 닫는 겁니다
차라리
손을 오므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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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바닷가재, 대아, 새우, 게…. 이런 동물을 우리는 ‘갑각류’라고 부릅니다. 이 갑각류의 특징은 외골격, 즉 딱딱한 껍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갑각류 동물은 언제 성장할까요? 바로 딱딱한 껍질에서 탈피할 때라고 합니다. 딱딱한 껍질을 가지고 있어야 다른 동물들의 공격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껍질을 벗어던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공격받기 쉬운 가장 위험한 순간에 놓여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약하다고 할 수 있는 이 위험한 순간을 받아들여야 갑각류는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갑각류 동물만 그럴까요?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인 것을 깨닫습니다. 인간 역시 고통과 시련으로 약해졌을 때 성장합니다. 물론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기가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고통과 시련은 우리에게 필수 사항이었습니다.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 높은 성적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운동 연습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운동 경기에서 1등 한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기도와 묵상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 안에서 커다란 행복을 얻는다는 것 역시 말도 안 됩니다. 그리고 고통과 시련을 통한 성장이 있음을 기억하면서 다시 한번 힘을 내고, 더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힘을 내고 노력하다 보면 고통과 시련이 오히려 고맙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 더 이상 고통과 시련을 무서워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된 백인대장도 사랑하는 종이 아픔으로 힘들어할 때였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 드러누워 있을 때였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도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이렇게 모두가 어렵고 힘든 고통과 시련의 순간이었습니다.
복음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8,9)라고 전해 줍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 함께 하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님을 알았던 백인대장의 믿음을 우리는 보고 배워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라는 그의 말은 미사 때마다 영성체 전에 우리가 고백하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고통과 시련을 힘으로 이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함께 하면서 이겨냅니다. 한 말씀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믿음,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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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인생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물리학자인 스티븐 호킹. 그는 21살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고, 이때 2년밖에 못 산다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병과 투쟁해서 병마를 이겨냈고 이론 물리학의 중요한 업적들을 담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시간의 역사’(1,000만 부 이상 판매)를 출판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2년이 아닌 50년 넘게 더 살 수 있었던 것은 물리학에 대한 남다른 열정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박사님에게는 물리학이 인생이죠?”라고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그러자 호킹 박사는 코를 찡그립니다. 루게릭병으로 의사 표현이 어려웠던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렇게 코를 찡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컴퓨터로 이렇게 썼습니다.
“사랑이 인생이에요.”
사랑을 간직했기에 오랫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을 간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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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이 구원의 문을 열게 한다>
오래도록 위암으로 고통을 받고 계신 형제님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맑고 밝은 웃음을 가지고 미사참례를 하고 구역모임에도 빠지지 않으시려 애를 쓰셨습니다. 근황을 여쭈며 어떤 생각을 하시느냐? 고 했더니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유를 누릴 때가 곧 오겠구나!”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꿈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좋은 꿈도 있고, 그렇지 않은 꿈도 있는데 요즘은 아주 나를 옴싹달싹 못하게 하는 꿈에 시달리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좋은 꿈이란 것을 가톨릭 성가29번 ‘주 예수 따르기로” 1절에 비유해 주셨습니다. “주 예수 따르기로 나 약속했으니 내 친구되신 주여, 늘 함께하소서. 주 함께 계시오면 나 든든 하옵고 주 나를 이끄시면 바른길 가리다.”
그리고 좋지 않은 꿈은 2절 “이 세상 온갖 유혹 내 맘을 흔들고 내 모든 원수들이 늘 괴롭히오니 주 나를 돌아보사 내 방패 되시고 내 옆에 계시옴을 깨닫게 하소서.”에 빗대시며 3절은 주님께 맡기고 또 주님의 고유권한이시라고…. “저 영광 빛나는 곳 주 내게 보이니 그 아름다운 곳을 사모합니다. 주 예수 섬기기로 나 약속했으니 끝까지 따라가게 용기를 주소서.”
‘성가로 하는 기도는 2배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냥 입으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담아 간절히 기도하시는 모습에 감사했습니다. 내용 하나하나가 나의 미래를 비춰주고 유혹을 극복하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성가를 부를 때 가슴으로, 온 마음으로 불러야 하겠습니다.
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씀드립니다.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나빠도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을 주님의 눈으로 보고, 더 큰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물 수 있도록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꿈에 휘둘릴 것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귀합니다. 꿈을 통해 메시지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은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백인 대장이 예수님께 자기 하인이 중풍으로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다고 말씀 드리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마’하셨습니다. 이에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하시며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이방인 군인이 보여주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힌 유다인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모시지 않는 이들이 많고 이들은
훗날 반드시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빛을 거부하는 데서 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세례를 먼저 받고 나중에 받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래된 신자, 새 신자를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얼마나 의탁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세례를 받은 지 오래 되었다고 저절로 믿음이 생기는 것도, 더 많은 은총을 체험하는 것도 아닙니다. 새로 영세를 받은 신자가 훨씬 더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시기 질투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세상을 충만케 하시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까롤로 까레또) 매 순간 하느님을 향한 시선을 놓치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실제로 사는 믿음이 구원의 문을 열게 합니다.
확고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바를 넘치게 받고 또 다른 것도 더 받을 것이지만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감히 청하지도 못하고 그럼으로써 얻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믿음에 믿음을 더하여 믿는 대로 이루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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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훌륭한 삶>
-겸손한 믿음, 말씀의 희망, 환대의 사랑-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시편8,5-6)
아침 성무일도시 마음에 와닿은 주옥같은 시편입니다. 존엄한 품위의 인간입니다. 참으로 살고 싶습니까? 참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참 좋은 욕망이요 욕심입니다. 이런 청정욕淸淨慾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옛 사막을 찾은 구도자들의 한결같은 소망은 참으로 진짜 살고 싶은 욕망뿐이었습니다. 한 번뿐이 없는 유일회적 삶, 참으로 보람있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욕망뿐이었습니다. 평범하지만 오랜만에 수도원을 찾은 분들이 반가워하며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서 지켜주시고 버팀목이 되어 주신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건강히 계셔 주셔서 참 좋습니다.”
참 좋은 삶은 한결같은 삶입니다. 내일도 어제도 아닌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입니다. 어제 나눈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며칠전 우아하든 하얀 태산목꽃이 누렇게 시들었습니다. 눈부시게 빛나던 빨간 장미꽃들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두 경우의 사진을 전송하며 나눈 글입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깨달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사랑하게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를 살게 합니다. 그분만을 믿고 바라보며 사랑하게 합니다.”
다 변해도 그분만을 향한 믿음, 희망, 사랑은 한곁같아야 합니다. 이런 한결같은 믿음, 희망, 사랑을 지닌 신망애信望愛의 사람이 참 좋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구체적으로 겸손한 믿음, 말씀의 희망, 환대의 사랑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이, 제1독서 창세기의 아브라함에게서 이런 이상적 인간상을 봅니다.
첫째, 겸손한 믿음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바 겸손한 믿음입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중풍병에 걸린 사랑하는 종이 없었다면 백인대장은 주님을 찾지 않았고 만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종의 중풍병이 주님을 만나게 했으니 이 또한 은총의 섭리입니다. 백인대장은 제대로 주님을 찾았습니다. 백인대장의 간절함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주님과의 이심전심의 대화가 펼쳐집니다.
“주님, 제 종이 중풍으로 집에 드러누워 있는 데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마.”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백인대장의 간절한 사랑, 겸손한 믿음이 잘 드러납니다. 특히 뒷부분 백인대장의 고백은 우리가 미사중 영성체전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이 은혜로운 미사시간 백인대장처럼 겸손히 믿음을 고백하고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참 아름답고 겸손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런 고백이 우리를 겸손한 믿음의 참 훌륭한 사람으로 변모시켜줍니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에 감동, 감탄하신 주님의 응답 말씀도 참 은혜롭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 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잡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들은 바깥 어둠 속으로 쫓겨나,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허투루 들을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현재성을 지닌 말씀입니다. 주님을 감동, 감격, 감탄케 하는 우리의 겸손한 믿음입니다. 이해는 의식을 변화시키지만 감동은 무의식까지 치유하고 변화시킵니다.
감동을 통한 내적 치유와 변화입니다. 주님만 아니라 이런 주님의 반응에 백인대장도 분명 감동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앞에는 일체의 기득권이 무용지물이 됨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보시는 바 겸손한 믿음 하나뿐이요, 이 믿음으로 우리는 천상 잔칫상에 참여합니다.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다 합니다. 탓할 것은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믿음입니다. 청할 것은 부족한 믿음을 더해 달라는 것 하나뿐입니다. 마치 미사가 끝나고 파견받을 때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겸손한 믿음에 대한 응답이 주님 치유의 은총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믿음이 내적치유에 최고의 명약임을 깨닫습니다.
둘째, 말씀의 희망입니다.
겸손한 믿음과 하나로 연결된 말씀에 대한 희망입니다. 새벽부터 일어나서 주님의 말씀에 희망을 걸고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 사랑은 말씀 사랑으로 표출되기 마련입니다. 말씀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말씀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말씀은 생명이요 빛이요 영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감동케 하고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말씀의 은총, 말씀의 치유입니다. 제행무상의 세상에서 허무의 늪에 빠지지 않고 영원한 현재를,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는 길은 말씀에 희망을 걸고 사는 일뿐입니다. 말씀과의 일치가 깊을수록 생생한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허무도, 무지도, 탐욕도 아닌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에 희망을 두고 의미충만한 삶을 살 때 건강한 영육입니다.
“가거라.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바로 그 시간에 종이 나았으니 말씀의 위력이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반드시 간절하고 겸손한 믿음이 전제됨을 봅니다. 결코 일방적인 주님만의 치유는 없습니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란 말도 이를 입증합니다. 겸손한 믿음 더하기 말씀의 은총이 만나 치유의 기적입니다.
겸손한 믿음에 이어 말씀의 희망이 참 좋은 영육의 명약이요 우리를 굳센 정신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줍니다.
셋째, 환대의 사랑입니다.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이 우리를 감동케 하지만, 역시 창세기 아브라함의 환대의 사랑, 겸손한 사랑이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환대의 영원한 롤모델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지극정성至極精誠의 사랑으로 손님들을 환대합니다. 세 손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상징한다 합니다. 사람을 통해 그대로 주님을 환대하는 우리들입니다. 환대의 사랑에 이은 주님의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의 환대에 감격한 주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십니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환대의 사랑, 환대의 축복입니다. 믿는 이들의 빛나는 덕이 환대의 덕입니다. 우리 분도회 정주서원과 직결된 환대의 영성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말씀하신대로 환대의 원조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봄-여름-가을 끊임없이 활짝 피어나는 꽃들 역시 주님의 환대를 상징합니다. ‘환대는 꽃처럼!’ 제 모토이기도 합니다. 환대의 사랑에 충실할수록 주님을 닮습니다. 환대의 집인 수도원이요 환대의 사람들인 수도자들입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맞이할 것이다.”
이미 수도규칙에 명문화되어 있습니다. 환대의 위로, 환대의 치유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시중 한연이 생각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 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누가 참으로 훌륭한 사람입니까?
누가 보람있고 행복한 참으로 사는 사람입니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위엄있고 품위있는 삶을 살 수 있고 이런 청정욕은 얼마든 좋습니다. 바로 겸손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말씀에 희망을 걸고 사는 사람입니다. 환대의 사랑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겸손한 사람, 말씀의 사람, 환대의 사람이 되어 살아갈 때 날로 주님을 닮아 진정 훌륭한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빛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좋으니이다 지존하신 님이여, 주님을 기려 높임이, 그 이름 노래함이 좋으니이다.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시편 92,2-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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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여러 만남이 이어지는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두 개의 결정적 만남에 주목합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으려 말하였다."(창세 18,2-3)
"한 백인 대장이 다가와 도움을 청하였다."(마태 8,5)
천사들을 환대하는 아브라함과, 고통받는 종의 치유를 청하기 위해 예수님께 다가온 백인대장의 모습이 겹칩니다. 둘 다 매우 겸손하고 진실된 태도의 영접으로 보입니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창세 18,3)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고대 중동 사막 지역에서 나그네를 귀하게 대접하는 일은 축복을 부르는 관습입니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길을 지나는 이들을 나무 아래로 모셔 물과 음식과 쉼을 제공하지요. 그는 나그네들이 하느님의 천사인 줄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믿음으로써의 행동이라기보다 선하고 관대한 인류애적 견지에서 그들을 섬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백인대장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굳은 믿음을 가지고 다가와 청합니다. 심지어 직접 종에게 가 주시겠다는 예수님을 자기의 비천함을 들어 만류하지요. 정복국의 군사 장교가 식민지 백성의 예언자(로 보이는 청년)에게 이토록 예우를 갖추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는 그저 좋은 소양이나 성정을 넘어서 "믿음"에 근거하는 겸손과 확신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창세 18,5)
"가거라. 네가 믿은 대로 될 것이다."(마태 8,13)
천사들은 아브라함의 섬김을 받아들입니다. 영적 존재인 그들에게 딱히 필요하지 않은 서비스일지도 모르지만 아브라함의 지향과 의지, 말이 실현되도록 자신들을 그의 손에 맡기지요.
예수님은 백인대장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의 겸손한 신앙고백이 그대로 이루어져 열매를 맺도록 해 주시는 겁니다. 그가 간절히 바라고 굳게 믿은 그대로 종은 치유될 것입니다.
제1독서의 뒷 부분에서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태어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과, 이에 대해 의혹을 품는 사라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생물학적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는 믿음의 조상이 되기까지의 여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온 이스라엘이 공경하고 자부심을 갖는 선조지만, 그 믿음이 형성되기까지의 생생한 민낯은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고, 성경은 이를 감추지 않고 기록한 것이지요.
복음 대목의 후반부는 소문을 듣고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든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이 이어집니다. 병들고 약하고 고통을 겪는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손길로 구마와 치유를 받아 온전함을 회복하는 역동적인 장면이지요.
물론 오늘 간절히 주님을 찾는 그들의 믿음은 언젠가 십자가형의 외침으로 변하고 말 나약하고 기복적인 믿음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은 오늘 제1독서 속의 아브라함 부부처럼 그들 역시 아직 과정 중에 있음을 아시기에, 기꺼이 그들을 맞아 각자의 필요를 채워주신 것이지요. 아주 적극적으로 혼신을 다해 그들의 질병과 병고를 떠맡으십니다.(복음 환호송 참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의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
예수님의 기쁨에 찬 감탄이 들리는 듯합니다. 이 감탄은 백인대장을 넘어 우리를 향하고 있지요. 존재 전체로 주님을 맞아들여, 말씀으로 고백하고, 실천으로 섬기는 믿음은 그저 인간적으로 잘 형성된 인성의 차원을 넘어섭니다. 아직 과정 중이라 여전히 흔들리고 동요하는 섬약한 믿음일지라도 주님은 우리의 말인 신앙고백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 주님께서 우리 곁을 그저 지나쳐 가시지 않도록 신앙의 눈을 크게 뜨고 주님을 맞이하는 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청한 바가 들어 허락되고, 우리의 겸손한 환대와 믿음에 그분이 감탄하시기를 빕니다. 반드시 우리가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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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TAVNO7IdhI&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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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 10)
믿음은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믿는 것의
뜨거운
실천이다.
진실로
주님을 믿는
우리들 삶이
참된 믿음의
삶이다.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믿음과 실천
이 모두는 사랑을
한뿌리로
두고 있다.
믿음으로
소통하고
사랑으로
삶은 치유된다.
진실한 믿음은
서로를 살린다.
믿음이 열리는
순간이 아픔을
치유하는 치유의
순간이다.
백인대장은
믿었다.
믿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가장 아픈
곳에서 믿음은
다시 밝아온다.
믿음으로
삶을 다시
건져 올리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삶과
믿음은
분리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믿음을 만나고
싶어 하신다.
삶을 다시
살리는
믿음이다.
믿음으로
이 순간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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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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