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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내전, 혹은 '로마 혁명' 과정에서 군대의 향방은 정치 지도자들의 거취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변수였다. 우리나라에서 로마사
입문서로 많은 사랑을 받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는 내전기 군대의 특정 정치인 지지를 암살당한 카이사르에 대한
의리라는 면에 중점을 두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허승일 선생의 「로마 군대와 원로원의 정치」, 『증보 로마 공화정 연구』
(1995) 에서는 이 점, 의견을 달리하였다. 개인적으로 허승일 선생의 견해가 더욱 타당하다고 생각하므로 이를 따라 여기에서 내전
도중 가장 극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였던 '마케도니아 군단' 의 이반 사건을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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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4년 11월 24일에 발생한 마르스 군단(제 3군단)의 이반은 로마 내전 과정에서 대단히 중대한 사건이었다. 원래 이 군단은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 마케도니아에 대기시켜둔 6개 군단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이 해 3월 15일에 암살
을 당한 후, 6개 군단 가운데 4개, 즉 제 2군단, 제 3군단, 제 4군단, 제 35군단은 집정관 안토니우스의 명령에 따라 이탈리아로 귀
환하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막강한 전투력을 지닌 이 정규 군단들을 인수하여 경쟁자들을 척결하고, 또 갈리아 키살피나에서 버
티고 있는 데키무스 브루투스(카이사르 암살자 중 한 명)를 쳐부술 계획이었을 것이다.
유언장에서 상속인으로 지명된 인물이자 안토니우스의 경쟁 상대였던 옥타비아누스에게 가담하는 반전이 일어났다. 뒤이어 11월
28일에는 제 4군단도 마르스 군단을 따라 이탈하여 옥타비아누스에게로 넘어갔다. 이 연이은 사태로 인해 안토니우스는 큰 타격을
입고, 반대로 옥타비아누스는 갑자기 강력한 2개의 정규 군단을 휘하에 넣게 되어 공화국의 정계에서 폭풍의 핵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마르스 군단과 제 4군단은 현직 집정관인 안토니우스를 배반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달려갔던 것일까? 오랫동안
그 원인에 대해서 크게 2가지 상이한 주장이 존재해 왔다.
첫번째는 일종의 정치적인 동기를 중시하는 것인데, 다소간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로 8개월이 지나는 동안, 그 심복이었던 안토니우스는 현직 집정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암살 주모자들을 처벌하지도, 고발하지
도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과 타협하여 자기 입지를 지키려는 듯한 모습마저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안토니우스의 태도는 병사
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불의의 암살을 당한 상관, 카이사르의 복수를 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집단으로
항명하여 카이사르의 상속인인 옥타비아누스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요약하자면, 카이사르에
대한 의리가 군단 병사들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두번째 설명은 이에 반해 훨씬 간명하다. 바로 "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보다 훨씬 큰
보상을 약속했다. 브룬디시움 항에서 귀환한 병사들과 만난 안토니우스는 1인당 100 데나리의 보상을 주겠다고 말하며(DioCass,
45.13) 지지를 모으려 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옥타비아누스는 이미 캄파니아에서 퇴역병들을 모집할 때 그 다섯배나 되는 500 데
나리를 제시한 바 있었다. 또한 당시 브룬디시움에는 옥타비아누스의 부하들이 들어와서 그를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는 팜플렛을
대량 살포했는데, 여기에는 자기가 권력을 잡을 경우 병사들에게 줄 보상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 쓰여 있었다고 한다.
(Nicolaus,31) 즉, 병사들이 안토니우스에게 실망한 점은 그의 '쩨쩨함' 이었고, 이에 따라 결국 더 많은 돈을 주기로 한 쪽으로 붙
었다는 것이다. 당시 서민 가정의 1년 총 수입이 2-400데나리 정도였다고 생각되므로 500데나리는 충격적일 정도의 거액은 아니지
만 한번에 만지기 어려운 정도의 돈이었음은 분명하다.
고대 이래 역사가들은 이 두가지 설명 방식 중 하나를 채택하거나, 아니면 절충안을 취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상식적(혹은 '속물
적으로')으로 생각할 때 군단병들이 느낀 카이사르에 대한 의리가 "돈" 보다 정말 중요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카이사르에 대한 의리를 강조하는 설명에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병사들은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의 복수를 하지 않아서 실망했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옥타비아누스도 양아버지의 복수는 하
지 않고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공격하기는 커녕 안토니우스를 적대했다. 다시 말하자면 그 때는 옥타비
아누스 역시 병사들의 실망을 살만한 행동만 주로 하고 있었고, 실제로 이 때문에 11월 중순경에 그의 휘하에 있던 병사들이 한번
이탈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르스 군단과 제 4군단이 이런 옥타비아누스에게 합류해 왔을
뿐만 아니라, 앞서 11월 중순에 이탈했던 병사들까지도 되돌아왔던 것이다. 이 일은 우리가 당시 병사들이 정말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될 것 같다.
안토니우스가 군단을 인수하기 위해 로마를 비우고 브룬디시움으로 떠나자, 옥타비아누스는 "수레 가득 돈을 싣고" 캄파니아로 가
서 많은 보상을 약속하며 그곳에 살던 제 7군단과 제 8군단의 퇴역병들을 재소집하여 그들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 11월 10일에 수
도를 접수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의 반대파 정객인 호민관 카누티우스의 영접을 받으며 시민들 앞에 나타나 자신은 '국가의 충
복' 이며, 시민들을 괴롭히는 안토니우스와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아피아노스의 기록을 보면, 재소집된 병사들은 이 말을 듣고 놀랐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복수
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온 것이지, 과거 자신들과 같이 카이사르의 휘하에서 싸웠던 안토니우스를 치려고 온 것은 아니었기 때
문이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를 따라온 병력 가운데 상당수가 "집에 돌아가서, 무장을 갖추고 다시 돌아오겠다" 는 핑계를 대고 이
탈해 버렸다. 옥타비아누스는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새로 선물을 주고 더 많은 보상을 약속하고서야 겨우 원래 3천명 정도였던 병
사들 가운데 1천명 정도만 붙들어 놓을 수 있었다. 결국 이와같이 병사들의 호응도 받지 못하고 원로원의 협조도 이끌어내지 못한
옥타비아누스는 이내 아레티움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병사들이 '카이사르에 대한 의리' 를 갖고 있었고,
그것이 그들의 거취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런데 곧, 떠난 사람들은 (집에 가면 기다리고 있을)힘든 농사일을 떠올리고, 군대에서 얻게 되는 수입과 또 옥타비아누스가 제시
한 조건, 그가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준 일과 선물로 준 것, 또 앞으로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보상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변덕스런 대중들이 그러하듯 그들은 후회하고 옥타비아누스에게 다시 돌아왔다. 앞서 했던 말을 구실로 삼아, 무장을 갖춘 뒤에
말이다. -Appian. 내전기 3.42
보다시피, 매우 소신있게 행동한 것 같았던 퇴역병들도 결국 물질적 보상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마치 정말 집에 가서 무장을
갖추고 다시 돌아왔다는 듯이(뻔뻔스럽게) 옥타비아누스의 진영으로 복귀했던 것이다. 카이사르에게 은혜를 입어 토지를 지급받
아 제대한 병사들까지도 이러했는데, 아직 그런 특전을 받지 못한 현역병들의 생각은 어떠했겠는가? 물론 자신들의 경애하는 사령
관이 불의의 암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흥분하여 복수심을 품었을지도 모르지만, 8개월이나 지난 이 때쯤 와서는
일단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자신들은 자신들대로 앞날을 생각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추측해도 절대 무리라고는 할 수 없
다.
고 있었다. 이는 분명히 갈리아 키살피나에 버티고 있던 데키무스 브루투스를 공격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즉, 이 때 정황으
로만 보면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의 주범 중 한 명을 처단하기 위해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다. 만약 군단병들이
정말 카이사르에 대한 의리를 가장 중시하고 있었다면 그러한 상황에서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원수 갚는 일은 거의 전혀 하지 않
고 있던 옥타비아누스에게 가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보상금 문제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누구보다 안토니우스의 행동에서도 드러난다. 옥타비아누스가 많은 돈을 주고 캄파니아 퇴역
병들을 매수했다는 사실을 알자 안토니우스는 병사들 앞에 나아가서,
"지난번에 제가 여러분에게 나누어주겠다고 말한 100 데나리는 이 안토니우스가 가진 재산에 비하면 보잘것 없는 금액입니다. 따
라서 당연히 상여금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만난 것이 너무 반가워서 드리는 작은 선물일 뿐입니다."
라는 등의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얼마를 더 주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았다. 11월 24일에 마르스 군단이, 11월 28일에 제 4군
단이 이반하고 나서야 안토니우스는 남은 제 2군단과 제 35군단 병사들에게 500 데나리씩을 제공했고, 이 두 군단은 그를 배반하
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아 제 2군단과 제 35군단 병사들에게 있어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상속인이라는 사실은 별 메리트가
없는 것이었다. 단지 누가 500데나리의 좋은 수입을 나누어주느냐가 중요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12월이 되자 옥타비아누스는
한술 더 떴다. 그는 병사들에게 추가로 또 500 데나리의 보상을 주었고, 자신이 (안토니우스에 대해)승리를 거두면 놀랍게도 1인당
5000데나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Appian. 3.48) 이런 상황에서 군대는 더이상 공화국의 정규군도 아니고, 카이사르의 옛 부하들
도 아니고, 옥타비아누스가 돈으로 거느린 용병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일단 최악의 고비를 넘겼다. 그에게는 이제 5개 군단이 있었다. 이것으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를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리고 말았고, 이제는 자신이 궁지에 몰릴 차례였다.
한편 국내에서 로마사 입문서로 많은 사랑을 받는 시오노 나나미의『로마인 이야기』에서는 이 시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
하고 있다.
안토니우스는 군단 상륙항인 브린디시로 달려갔다. 이 군대를 빨리 자기 휘하에 넣어버리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옥타비아누스의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이사르가 남긴 돈을 계속 착복하고 있던 안토니우스가 그 돈을 아낌없이 내던져 병사들에게 호화판
잔치를 베풀었음에도, 거의 절반에 이르는 병사들이 안토니우스 휘하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카이사르가 후계자로 지명한 사람
의 휘하에 들어가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안토니우스한테는 키케로의 탄핵 연설보다 더 큰 타격이었다. (...중략...) 율리우스 카
이사르의 이름을 이어받는 것이 1억 세스테르티우스의 유산을 물려받는 것보다 더 효력이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자신의 이름을 남
긴 카이사르도 대단하지만, 18세밖에 안된 나이에 카이사르의 참뜻을 이해한 옥타비아누스도 대단하다. 세계 역사상 손꼽히는 후
계자 선정의 걸작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5권 p428
여기서 시오노 선생의 글을 인용하는 것은 로마인 이야기의 내용이 굳이 틀린게 분명하다거나, 혹은 '로마인 이야기라서' 틀렸다
고 주장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국내에서 많이 읽혔고, 또 그만큼 독자들의 인식에도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생각되는데다 병사들
이 카이사르에 대한 의리 때문에 옥타비아누스에게 갔다는 입장을 매우 강경하게 피력하고 있기 때문에 그 사례로 든 것이다.
위 인용문을 보면 마치 안토니우스는 돈으로 병사들의 충성을 사려 하고 옥타비아누스는 특별히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 같다. 그
러나 아피아노스나 카시우스 디오 등의 기록은 이를 부인한다. 옥타비아누스 측은 매우 적극적으로 군단 병사들을 매수하려고 했
으며, 실질적으로 안토니우스보다 더 많은 보상을 제시했다. 이 점을 묵살하고 카이사르에 대한 의리만 강조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된다. 카이사르의 이름을 물려받는 것은 분명히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군단병의 환심을 사는데 과연 1억 HS보
다 카이사르의 이름이 더 효과가 좋았을지는 의심스럽다. 시오노 선생은 옥타비아누스의 캄파니아 퇴역병 매수나, 그들을 동원한
1차 로마 진군과 뒤이은 퇴각 등의 사건들을 모두 누락시켰기 때문에 로마인 이야기만 읽어서는 저간의 긴박했던 사정을 거의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역시 사람들을 움직이려면 돈이 필요하군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일년치 수입을 한번에 받는게 꽤 메리트가 있고 또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에 따른 추가보상도 기대해서 군에 돌아가지 않았는가 싶네요. 로마 군단병이면 복무 기간이 꽤 길던 걸로 기억하는데(예전에 카이사르의 10군단인가 그 책 보니 10년은 족히 복무 했던 걸로) 그럼 제대하고 농사 짓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수입이 보장되고 자신에게 익숙한 전쟁에 종사한게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익숙하니까요... 농사일은 익숙하지 않고, 전쟁에는 익숙했던 사람들이니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자영농들이 철저히 몰락을 한지라.... 살아서 돌아오니 거지...인게 컸지요(.....)
제커슨/ 재소집병들에게 500데나리가 그렇게 충격적일만큼 많은 돈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번에 만지기 힘든 돈이라는 점도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에게 그 이외의 보상도 제공하겠다고 했고, 그러한 물질적 보상은 그들이 옥타비아누스 휘하에 있는 한 계속되리라고 예상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제커슨/ 또한 위에서는 쓰지 않았습니다만 재소집병들이 어느 정도는 다시 군대로 돌아가고 싶어했다고 평가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리 돈을 준다고 해도 더는 싸우기 싫다고 거부하면 소용이 없으니까요. 7, 8군단은 카이사르와 함께 갈리아를 정복했고 내전 과정에서도 싸웠습니다. 카이사르와 함께한 긴 모험을 끝마치고 땅을 받아 제대했을 때는, 이제 평화로운 농촌에서 가족과 함께 유유자적한 삶을 시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일상과 농사일에 익숙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적을 이기고 약탈하는 순간의 기억을 쉽게 잊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무장공비/ 7, 8군단의 재소집병들은 제대하면서 캄파니아에 토지를 받았던 사람들이기에 몰락한 농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공화정 말기의 자영농 몰락의 규모에 대해서, 저는 잘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돈이 무섭긴 무섭군요........
머니머니해도 머니가 중요하네여 ㅡㅡ;
역시 어느 때나 돈이 최고죠. 후기에서도 그렇지만 돈을 안 줄 때는 난리부르스였다가 돈을 주니깐 갑자기 없는 충성심이 마구 샘솟는 당연한 현상..;;
나중에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월급을 체불하니까 흥분한 병사들이 폭동을 일으킬 뻔 했는데, 황급히 이집트를 정복해서 약탈한 금을 나눠주겠다고 해서 겨우 불을 끈 적도 있었죠.
의리나 정만으로 거친 남자들 조직을 좌지우지할 순 없겠죠. 로마인 이야기를 읽으며 저 부분에 의문이 있었는데 역시 저런 내막이 있었군요.
뭐, 사람들은 조폭이 의리로 뭉친 집단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조폭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어디까지나 '돈'입니다...
영화 친구 장면이 떠오르네용 천만원짤 수표보여주면서 " 이게 의리인기라..." ㅎㅎ
안토니우스가 잘못했네요. 자기를 황제로 만들어 줄수 있는 사람들한테 돈을 아끼면 안되죠. 제가 봐도 찌질해 보입니다.
돈, 돈, 그리고 더 많은 돈.
이건 뭐 show me the money를 한 10번은 쳐야 하는 상황이었으니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