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돌아와 나는 사업을 시작했다.
느닷없는 것은 아니고 그전부터 친구와 함께 구상을 했던 일이다. 러시아에서 벌어온 돈 절반을 투자해서 시작했는데 처음엔 아주 잘 나갔다.
잘 나가면 교만하게 된다던가? 내가 그랬다. 마치 중견기업 대표나 되는 듯이 뻐기고 다녔으니까. 회사에서 월급 받던 시절과는 비교가 안 되게 돈이 들어왔다.
아! 이맛에 다들 사업을 하는가 보다. 지금처럼만 돈을 번다면 몇 년 안에 내가 완전 부자가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친구의 제안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당연 자본금이 부족하니 막 구입한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나는 폭삭 망했다.
친구에게 뒤통수를 제대로 맞고 나가 떨어진 것이다. 믿었던 사람이 속이자고 들면 속수무책이라고나 할까.
구체적인 것은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고 지나간다.
글도 길어질 테고, 누워서 침 뱉기일 수도 있는데다 내 실패를 남탓으로만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딸에 관해 쓰는 것인데 내 실패담만 너무 부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일이라서 언젠가는 쓸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다.
한편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싶은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사람이 얼마나 어리숙하면 그런 사기를 당하고 뒤통수를 맞을까.
틀린 말 아니다. 나는 기꺼이 그런 비아냥을 감수한다. 이전에 듣기만 했던 헛똑똑이란 말을 실감하면서 스스로 나를 지목했으니까.
내 인생에서 좋은 것만을 쓰고 싶지는 않다. 이런 흑역사도 내 삶의 한 부분 아니겠는가.
죽이고 싶을 만큼 배신감에 치가 떨렸지만 일단 콩밥 먹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친구가 단물만 쏙 빼먹고 빠져나간 구멍을 간신히 막아서 콩밥은 면할 수 있었다. 대출 낀 집도 팔고 온 가족 보험과 심지어 딸 아이 교육보험까지 해약을 했다.
완전 알거지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은 것이다.
내가 망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얼마전까지 사장님, 사장님 하면서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싹 자취를 감췄다.
불똥이 튈 것 같거나 행여 돈이라도 꿔 달라고 할까 봐서였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세상 인심이 그랬다.
제일 먼저 장인 어른이 와서 아내와 딸 아이를 데려갔다. 하긴 머물 집이 사라져 여관에서 지내야 할 판이긴 했다.
나중에 들었는데 그때 행여 내가 번개탄을 피우고 동반 자살을 할지도 몰라서 그랬다고 한다.
잠깐이었지만 실제 죽고 싶은 생각을 하기는 했다.
딸과 아내를 처갓집에 맡기고 나는 고시원에서 생활을 했다. 겉보리 서 되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하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나는 그보다도 못한 처지가 된 것이다.
몇 군데 구직 사이트를 찾아 해외 취업을 원한다는 이력서를 냈다. 몇 개 나라에서 빠르게 연락이 왔다.
한 자리만 있으면 선택의 여지가 없으련만 여러 곳이 나오니까 그 와중에도 어디가 더 나을지 저울질을 했다. 쫄딱 망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님에도 말이다.
가장 처우가 낮은 영국에 취업을 할 수 있었다. 영국 회사도 처음엔 서로 밀당을 하다 내가 거절을 했던 곳이다.
그런데 인연이 될려고 그랬던지 내 요구를 수용할 테니 생각 있으면 계약을 하자는 연락이 다시 온 것이다.
이리저리 저울질하다 전부 나가리가 되어 낙동강 오리알이 될 처지였는데 영국에서 동아줄을 보낸 셈이다.
내가 운명이란 것이 있음을 완전히 믿게 된 계기다. 서둘러 회사에서 요구하는 서류를 보내고 떠날 채비를 했다.
영국 취업비자를 받는 기한이 얼마가 걸릴지 몰라서 일단 관광비자로 들어가 현지에서 취업비자 신청을 하기로 했다.
당시 나는 비행기표 구할 돈도 없었는데 지인들은 물론이고 형제들한테까지도 손 벌리기가 싫었다. 빚 지고는 못 사는 성격도 어찌 보면 병이다.
나는 일도 시작하지 않은 직장에 가불 형식으로 비행기 티켓을 부탁했다. 참 얼굴도 두껍지, 고맙게도 회사에서 용케 들어줬다.
나중에 일을 하면서 물었봤더니 내가 보낸 이메일을 읽고는 신뢰감이 생겼다고 한다.
영국으로 떠나기 이틀 전, 아내와 딸을 보러 처갓집 동네를 찾았다. 그때까지 나는 장인 장모를 볼 면목이 없어서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아내와는 자주 전화 통화를 했으나 딸의 얼굴은 한동안 보질 못했다. 궁리 끝에 아내의 오랜 절친한테 부탁을 해서 아내와 딸을 처갓집 근처 공원에서 만났다.
딸이 좋아하는 돈가스라도 사 주기 위해 식당에서 만나면 모양도 살고 좋으련만 나는 그럴 돈이 없었다.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당시 내가 그랬다. 나는 딸을 보자 덥석 품에 안았고 미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딸이 울면서 말했다.
"아빠 울지 마,"
"얼마전 테레비에서 봤는데, 사업이 망한 어떤 아저씨가 다리에서 뛰어내렸대. 그거 보구 아빠 생각이 나서 막 울었어."
지금 생각하면 유치원 다니는 일곱 살짜리 아이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다.
"걱정 마. 아빠 안 죽어,"
"이렇게 이쁜 우리 딸이 있는데 아빠가 죽으면 되겠어?"
딸에게 영국에 가야할 상황을 설명했다. 3개월 후에는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딸 아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빠와 함께 살 수 있다면 그거 못 기다리겠느냐며 되레 나를 위로했다.
딸 아이가 약속을 외치며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우리는 새끼 손가락을 걸고 엄지 도장을 찍었다.
딸 아이 손이 너무 작아서 엄지 손가락을 맞댈 수가 없었다. 내가 손을 오므리고 나서야 겨우 엄지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영국으로 떠나는 날 진눈깨비가 내렸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대기하고 있는데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날씨처럼 발걸음이 무겁기 짝이 없었지만 내 심장에 박혀 있는 딸에게 속엣말을 건네며 다짐했다. 너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 남겠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 공항 활주로 바닥에 진눈깨비가 싸라기처럼 쌓여 있던 2002년 12월이었다.
첫댓글 아 그런 쓰라린과거가 있다는걸 오늘에서야
이렇게 되돌려 글을쓰니 그후로는 좋은소식이 있을거라고 ㅎㅎ
제가 주로 밑바닥 생활을 했지만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져 본 흑역사였습니다.
딸에 관한 글을 쓰다 보니 이런 과거도 들추게 됩니다.
이제는 웃으면서 돌아볼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ㅎ
그래서 영국을 가시게 되었군요
살면서 성공도 해보고 실패도 해보고
배신도 당해보고
나중에 생각해 보면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경험입니다
따님과 아내와의 이별도 슬퍼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신 유현덕님
모든 걸 이겨내셨으니 이제 따님과 행복할 일만 남았습니다
가리나무님이 말씀이 맞습니다.
그때 아무것도 필요없이 오직 배신자를 찾아다니면서 시간을 허비했다면 지금의 제는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말씀처럼 실패도 배신을 당한것도 다 제 인생의 피와 살이 되었지요.
어금니 깨물며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각만 했던 것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2002년이면 현덕님 갓 40고개 넘었을 때군요.
충분히 재기할 수 있는 나이지요.
더구나 현덕님은 능력있고 성실하시니까요.
그렇게 영국으로 가셨군요.
해외 취업 아무나 하나요?
능력자이십니다.
현덕님의 치열한 삶의 기록이 참으로 진솔하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좋은 글을 시리즈로 읽게 해주셔서 거듭, 대단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네~ 달항아리님, 제가 딱 사십 고개 넘으면서 그 기념으로 폭삭 망했답니다.ㅎ
당시 접촉했던 외국 회사가, 일본, 싱가폴, 캐나다, 영국 이렇게 네곳이었는데 차례로 나가리가 되더니 제일 조건이 안 좋은 영국으로 결정되었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선택이 운명처럼 여겨진답니다. 마치 제 인생을 뒤에서 누군가 조정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러시아도 영국도 꿩 대신 닭으로 간 케이스면서 제게 행운을 안겨준 선택이기도 했답니다.
새옹지마란 사자성어가 이럴 때 쓰라고 나온 모양입니다. 달님이 항상 제 글을 좋게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ㅎ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걸 직접 보여주신 유현덕님이셨네요.
유치원 다니는 꼬맹이가 아빠 심정을 읽어내는 건 아빠 닮은 부분인 듯 보입니다. ^^*
수피님 안녕하세요.
그때 실패가 저를 겸손하게 만들었고 욕심 내려놓고 살게 한 계기가 되었답니다. 이후 저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지금까지 꾸준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딸 아이의 총명함을 볼 때면 저 아이가 누굴 닮아서 저러나 싶을 때가 있긴 합니다.ㅎ
수피님 편안한 저녁 되세요.
칭구야 ~~
인생사 살아가며, 고통스러운 일이 왜 ? 없겠니.
잘 극복했써~
이. 엉아는 더 했단다.
쇠주 사주면 썰~ 을 풀어줄께. ㅎ
우왓~ 울 친구 헌묵이 아닌감?
니가 왜 거기서 나와 ~~ ^^
친구님 넘 반갑네요. 더구나 나보다 더한 실패를 겪었다니 동질감도 생기네.
언제 쐬주 마시면서 그 사연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 지내다가 반갑게 볼 날을 기대하면서,,ㅎ
참으로 큰파도를 두번이나 맞은셈이네요
남자인생 세가지 실패가
초년성공 중년상처 노후가난이라 했는데
초년성공은 자만에 빠져
그 성공을 끝까지 지키기가 힘들기에 그렇다네요
그래도 지금 노후는 잘살고 계시니
담담히 그때를 말할수 있으니 잘 살아내신겁니다
정아님~~
두 번째 파도는 하마터면 질식할 뻔 했네요.
콧구멍이 두 개니까 숨을 쉬었지,,ㅎ
아둥바둥 살았어도 이 정도 살고 있는 것에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삽니다. 건강한 편이라서 아직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도 고마운 일이구요.
서울은 봄비 그치더니 꽃샘추위가 찾아와서 쌀쌀하네요. 꽃잎까지 싹 지게 만든 꽃싹추위라 해도 되겠습니다.ㅎ
정아님 고운 밤 되세요.
산다는게 참 그렇지요
그럼에도 이렇게 지나온 사연
담담히 풀어낼 수 있는 현덕님이
참 고마울 따름입니다
글 잘 읽고 있습니다 ^^~
요요님이 언급하신, 산다는 게 참 그렇다는 말이 여러 의미를 담고 있는 인생 답안지이기도 합니다.
그때는 오직 살아 남아야겠단 생각뿐이었는데 잘 지나왔기에 이렇게 반추해 볼 기회도 왔지 싶네요.
고맙게 읽어주신 요요님이 저도 감사합니다. 문학소녀 요요님, 평화로운 밤 되세요.ㅎ
2002년은 우리나라 최고의 활황기 였던것으로 기억해요
월드컵이 주는 효과가 컷기 때문에
저의 학원도 그때가 제일 복작대었었지요
그럼에도 떠나야 하는 아빠의 발길이 어땟을지 감이 오네요
아~ 모카님,,
제가 오늘 월드컵 이야기를 썼다가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지웠답니다.
당시 거리마다 온통 빨간 티셔츠 입은 사람들의 응원 함성으로 넘쳐났는데 저는 빚잔치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네요.
그래도 모카님은 호황기셨다니 다행입니다.
모카님의 건강한 날들을 빕니다.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절망하지않고,
꿋꿋하게 일어서서
영국으로
가서 일했군요.
대단하십니다.
신미주 선생님 안녕하세요.
그때는 살겠다는 생각뿐이어서 그리 힘든 줄 모르고 겁없이 달려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번 바닥에 떨어지니 더 내려갈 곳이 없어서이기도 했을 겁니다.
신미주님의 따뜻한 관심 감사합니다.
자식에게 향하는 마음은 세상 무엇보다 진심이지요
내 한 몸 어찌 되어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불구덩이도
뛰어 들지요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은 마음은 있지만
실행 못하지요 요즘 자식과 동반 자살하는 사람들
저는 의지가 약하다 생각해요 자식을 사랑한다면
죽을 각오로 살아야지죠 현덕님 그 깊은 절망에서
일어 설 수 있는 것도 딸에 대한 사랑이잖아요
부모는 강해야 합니다 . 오늘도 글 잘 읽었습니다
기다릴게요~
제게 용기를 주는 댓글을 주셨습니다. 운선님의 댓글이 따뜻한 가르침으로 다가옵니다.
인생 선배이시고 운선님은 저보다 더 험한 길을 걸어 오셨으니 이런 혜안도 생겼을 걸로 봅니다.
저도 당시 배신감과 절망감 때문에 잠깐 죽음이 스쳐지나가긴 했어도 딸 아이 때문에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는 강해야 한다는 말씀 깊이 새기며 살겠습니다. 평온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
아팠던
훅역사는
누구나 있지요 ~~ 😢
글로서
표현을 잘 하심
애틋했던
딸아이 사랑 💕
이젠
웃으며 살고 있겠죠 ~^^
와우~~ 볼매 선배님 오셨네요.
부끄러운 저의 흑역사를 좋게 봐주시니 감사하네요.
볼매님의 이리 귀한 댓글을 보니 제가 딸전 쓰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상 좋은 날들 되셨으며 합니다.
건강하시구요.
볼매니~~임 방가 방가~~^^
러시아로 영국으로 종횡무진입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라는 대우 김우중 회장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는 그저 중국만 오갔습니다.
대련, 하얼빈, 청도 등지에 회사 공장과 매장 등이 있었습니다.
저는 관리하느라 서생원 풀방구리 드나들듯 했습니다.
대신 페키지 여행을 워낙 많이 다녀 지구 절반은 쏘다녔습니다.
중동, 남미, 아프리카 등지만 못 가봤습니다.
이집트도 중동에 들아 간다면 거긴 가봤습니다.
곡즉전님, 저도 밥벌이를 위해 체류한 나라는 러시아와 영국 두 나라뿐입니다.
가고 싶은 곳은 많은데 마음뿐, 그저 희망사항에 그친 나라가 대부분입니다.
곡즉전님이 돌아본 나라가 많아서 이리 상식과 교양이 풍부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행만큼 다방면으로 눈을 뜨게 만드는 공부가 어디 있을까요.
관광으로든 사업 때문이든 여러 나라를 다닌 분은 어딘가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영국에 오래 살아선지 몰라도 유럽보다는 일본이나 중국이 더 친근하고 좋더군요.
암튼 세계 지도를 펼쳐놓은 것 같은 이런 댓글 소통이 참 좋네요.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에
현덕님의 써내려간
활자 하나 하나가 조금 늦께
맞이했던 우리 가정의
폭망과 비슷해서
다 쓰지 못했을 것까지 느껴집니다ㆍ
그래도
현덕님은 뱅기타고 글로벌시대를
사셨는데
저는 그 곳이 돼지우리안이었습니다ㆍ
손가락 걸기조차
작았던 딸의 손가락을 걸며
맹세했을 그 삶의 각오로
지금까지 살아오셨군요 ㆍ
(심금을 울리는 글 잘 읽었습니다
거꾸로 내려가 읽어보고
다시 자야겠어요)
아하~ 윤슬님한테도 그런 사연이 있었나 보군요. 제가 보기에는 윤슬님 표정에서 들꽃 같은 맑음을 읽곤 했는데 그런 그늘이 있었다니 살짝 놀랍습니다.
저야 그 방법밖에 없어서 외국을 떠돌았으나 윤슬님은 돈우리에서 캐낸 진주를 착실히 모아 보석 목걸이로 만들었으니 그 세월이 헛되지는 않았을 거네요.
하여, 묘한 동질감과 함께 폭망에서 일어선 윤슬님을 다시 보게 됩니다.
저는 열심히 살고도 실패한 사람을 응원했는데 앞으로도 그럴 생각입니다. 윤슬님의 후반전이 늘 반짝이기를 빕니다.
평온한 토요일 되시구요.
내가 많이 욕심냈던 파워 필력 소유자 유현덕 님 컴백했군여.
환영합니다.
상트 페테르 부르크
소련 해체 후 일주일
다녀온적이 있어 더더욱 감명있게 읽었습니다.
지금 생활은 안정되었나요.
행운을 빕니다.
ㅎ 낭주 방장님이시군요.
어쩌다 한동안 뜸하게 되었고 잊지를 못해 다시 오게 되었습니다. 몇몇 회원들의 설득도 있었고 또 카페에 정이 들었던지 보이지 않는 뭔가가 끌어당기는 것도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도시 상뜨 뻬쩨르부르그를 다녀오셨군요. 제가 머물 때는 직항편이 없어서 모스크바를 경유해야 했는데 나중에 직항편이 생겨서 그곳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지금 저는 잘 지냅니다. 방주 방장님의 카페 사랑을 응원하면서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빕니다.
저는 1988년도에 소련에서 가장 따뜻하다는 나호드카와 일본의 후쿠오카를
정기적 왕래하는 화물선의 통신국장으로 근무 한 적이 있습니다
1년 단위 계약이라 1년간 부모님과의 이별도 마음 아팠었는데
아내와 딸과의 이별은 오죽했으랴는 마음에 새삼 저밉니다.
아무튼, 결과가 좋아서 딸傳이 해피엔딩이길 조마조마한 맘으로 빕니다
우와~ 뱃등님 정말 멋진 분이시네요.
저도 한때는 배 타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었는데 뱃생활도 나름 고충과 낭만이 섞여있을 것으로 봅니다.
화물선이면 엄청 큰 배일 텐데 망망대해에서 맞이하는 일몰이나 일출의 장엄함을 상상해 봅니다.
지금 보니 뱃등님의 닉도 배를 연상하게 하네요.
딸전이 해피엔딩일지는 마지막에 알려 드리겠습니다. 부족한 글에 진심이 담긴 뱃등님의 댓글 감사합니다. 평화로운 주말 되시길요.
글 잘 읽고있습니다.
동업은 꼭 누군가
배신하더군요.
남편 친구중에 아주 젋은때
큰성공을 하고 좌절을
겪은 친구가 있어요.
그일로 벌거를 하더니
지금까지 혼자 생활하는데
얼마전 은퇴해 여주에
땅 300평 사서 자유롭게
살고있어요.
대학도 드론과를 들어가더니
지금은 농번기때 드론으로
농약뿌려주는 일을 하면서
인생을 즐기고 있어요.
내려놓고 작은것에
감사하면 인생도 편해
지는것 같습니다.^^
파란여우님 잘 지내시나요?
저도 뒤통수를 맞고서야 왜 사람들이 동업은 하지 말라고 했는지를 깨닫게되었습니다.
치떨리는 배신감 때문에 오랫동안 제 가슴에 남은 응어리를 내려놓는 것이 힘들었답니다.
파란여우님 남편 친구분도 좌절을 경험하셨나 봅니다. 그래도 전원생활을 하며 인생 후반전를 보내신다니 다행입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면 인생이 편해지는다는 말씀에 공감이 가네요. 그분도 파란여우님도 항상 평화로운 일상이길 빕니다.
정말 힘들었겠어요
돈잃고 사람잃고 무엇보다 마음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까 싶어요
이쁜따님이 아빠의 마음을 일으켜 세웠네요
글 잘읽었습니다
둥근해님 안녕하세요.
말씀처럼 돈도 잃고 친구도 잃고,,
그땐 상실감이 컸답니다. 어찌보면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영국으로 갈 기회가 생겼으니 지금은 미움 내려놓고 삽니다.
제 딸은 저를 살게 만드는 힘이면서 등불이기도 하지요. 둥근해님이 항상 제 글에 관심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어쩜 그렇게 많은 우여곡절이 ~~~
상상도 못했어요
현덕님이 겪은 고초에 제가 더 맘이 아프네요
대단하시고 총명하셔서 반듯하게 일어나셨을 다음편 기다립니다
앗! 바쁘신 리즈향님께서 다녀가셨군요.
동무 몇과 산에 갔다가 지금에서야 집에 와 답글 답니다. 언제나 카페를 위해 애쓰시는 리즈향님께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미안한 마음입니다.
내일은 종일 아내 일정 따라다니면서 봉사를 해야해서 바쁠 듯하네요.
꽃이 피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지기 시작하고 봄밤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리즈님, 주말 잘 보내시길요.
에고고~
죽쒀서 개준다고
친구 입에 홀라당 털어 넣어 주고
가족들과 또 헤어지는 비운의 사나이가
되었군요.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에
날씨까지 스산하니 ㅠ
재기에 성공해
다시 금의환향 하실지
7전 8기까지 가실지
괜히 불안불안 합니다.ㅋㅋ
꼬마숙녀의 의젓한 인사에
다시 힘내어 영국으로 떠나는 아빠
홧팅요^^
와우~
제라님의 댓글을 이제서야 봤습니다.
인생도 날씨처럼 비오다 해뜨다 바람불다 한 테니, 뒤통수 맞은 충격에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아내는 등대, 딸은 불빛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글 쓴 보람을 느끼게 하는 제라님의 댓글이었습니다.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우리 자주 웃으면서 살아요.ㅎ
고운 밤 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