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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19일 부활 제3주일
제1독서 : 사도 2,14.22ㄴ-33
제2독서 : 1베드 1,17-21
복 음 : 루카 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오늘의 묵상
김 도형 스테파노 신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보고 들은 목격자요 증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그 사건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또한 예수님께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를 고백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루카 24,21)으로 바라보며,
그분께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졌고,
실망과 좌절에 사로잡힌 그들의 발걸음은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 놓입니다.
바로 그 길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죽음’이라는 과거의 사건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어
‘부활’이라는 현재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신 ‘파스카’에 계시는데,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그 길을 건너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기록들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함께 걸으시며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서서히 열리자,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
그 초대에 응답하신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시는 순간,
두 제자는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하여 지금도 우리 곁에 현존하시며,
파스카의 눈을 열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현재 나를 짓누르는 바쁜 일과 걱정,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 또한 ‘눈이 가리어’ 지금 내 곁에 계시는 예수님,
부활하시어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향한 이 초대가, 이 시간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
조 명연 마태오 신부
“기도 열심히 하시고요, 미사에도 빠지지 마세요.
그래야 주님과 함께 지금을 잘 살 수 있습니다.”
“저도 잘 알아요. 그런데 지금은 여유가 없어요.”
지금 삶이 너무 힘들어서 오랜만에 성당 나오셨다는 분과의 대화입니다.
사실 이렇게 답하시면 답이 없습니다.
지금 병에 걸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병의 이름은 무엇일까요?
이 병에 걸리신 분이 참 많습니다. 바로 ‘그런데 병’입니다.
계속 ‘그런데’를 외치게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병입니다.
이 ‘그런데 병’은 삶 안에서도 이렇게 이어집니다.
“이 책 읽어 보세요. 정말 좋아요.”, “그런데 책 읽을 시간이 없어요.”
“사람을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낯을 많이 가려요.”
“운동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너무 바빠요.”
“많이 웃어야 해요.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요.”, “그런데 웃을 일이 없잖아요.”
‘그런데 병’은 변화를 거부합니다.
따라서 ‘그런데’ 대신 ‘어떻게’를 많이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가며 자기의 변화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그런데 병’을 앓고 있는 제자들을 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엠마오로
예순 스타디온(11km)가 넘는 씁쓸한 도피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이 가려져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잘못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할 정치적 메시아로 기대했지만,
십자가 죽음으로 그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여자가 전한 부활의 소식을 듣습니다. 하지만 계속 절망 속에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데 돌아가셨잖아요.”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통해 당신의 십자가 수난이 실패가 아니라
영광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느님의 필연적인 계획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으로, 차갑게 식었던 제자들의 마음은 다시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병’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미사 때, 말씀의 전례로 뜨거워지지 않습니까?
날이 저물어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 되시어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나누어” 주십니다.
최후의 만찬과 동일한 이 행위 안에서
마침내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봅니다.
이제 ‘그런데 병’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날이 저물어 어둡고 위험한 밤길임에도 즉시 일어나 돌아간 것입니다.
절망 안에서 엠마오로 도망갔던 제자들이 마음을 바꿔 이제 기쁨의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제1독서를 보면,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해주셨던 ‘성경 풀이’를
베드로 사도가 예루살렘 군중들에게 그대로 재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주관자이시기에 결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 없었던 것”(사도 2,24 참조)이라고 완벽하게 논증합니다.
제2독서는 엠마오의 제자들이 가졌던 현세적 해방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진정한 영적 해방의 대가가 무엇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즉 “예수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를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1베드 1,19 참조).
우리도 주님께 자기 삶의 고통을 없애주고
현세적인 축복만을 내려달라는 ‘빗나간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자기에게 맞지 않는다면서 ‘그런데’만을 외치면서
함께 걷고 계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계속 ‘어떻게’를 말하고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의 눈이 열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엠마오의 제자들이 빵을 떼어 나눠주실 때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봤던 것처럼,
미사를 통해 말씀을 듣고 마음이 타오르며 영성체로 눈이 열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런데 병’에 걸려서 엠마오로 도망가서는 안 됩니다.
이제 절망과 두려움 속에 있는 나의 이웃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셨다.”(루카 24,15 참조)라며
자기 삶으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증언해야 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제1독서는 오순절 날에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한 설교의 일부입니다.
이 설교에서 베드로는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고”(사도 2,24),
예수님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사도 2,28)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신 분”(사도 2,28)이십니다.
오늘 화답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나이다.”(시 16,11 참조)
제2독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약 30년이 지난 후,
베드로가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주셨습니다.”(1베드 1,21)
복음은 예수님 부활의 모습을 드러내주시는데,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엠마오로 가고 있는 두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희망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 이전의 자신들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5-16)
혹 우리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눈이 가리어'라는 말은 우리가 아무리 알아보려고 해도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보게 해주시지 않으면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요한 20,25)
그렇습니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
자신이 알고 있던 것을 믿었던 일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앎과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곧 ‘그분이 죽었다’는 앎에서 벗어나고,
그분께 걸었던 믿음이 무너져버린 일에서 벗어나고,
다시 알아듣고 새로이 믿어야 할 때입니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이렇게 말합니다.
"21세기의 문맹자는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잊고, 다시 배우지(learn, unlearn, and relearn) 못하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이미 ‘배운 것’, 이미 ‘아는 것’을 비워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말씀’을 통해 깨우쳐주십니다.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루카 24,27)
그들은 '마음이 타오르게'(루카 24,32) 되었으나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보지는 못한 채 말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루카 24,29).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식탁에 앉으셔서, 빵을 들어 떼어 나누어주시며'(루카 24,30 참조) 사랑으로 응답하십니다.
그 깊은 사랑이 그들의 어둠을 비추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루카 24,31).
이는 마치 ‘말씀의 전례’로 마음이 타오르고,
‘성찬의 전례’로 말씀이신 분을 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실 때에'(루카 24,35) 그분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떼어내다’는 단어는 ‘분리하다’, ‘파괴하다’, ‘으스러뜨리다’라는 의미의 동사라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으스러뜨리고 부수심으로 당신의 진면목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니 신비, 곧 부활의 신비를 보는 눈은
이 ‘떼어냄’, ‘부수어짐’, ‘으스러뜨림’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부활도 우리의 생명을 으스러뜨리고 부술 때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곧 우리가 부서지고 으스러뜨려질 때,
우리는 그분 안에 숨겨져 있는 우리의 생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나 ~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1-3)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꼭 붙드시고, 참으로 감동적으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깊고 깊은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스스로 그분의 손을 빠져나가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이 길에서 당신 ‘말씀’으로 마음이 타오르고,
마음의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과 부활생명을 보는 눈이 열려,
어려움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뿜어 나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엠마오의 제자들과 부활 신앙
조 욱현 토마 신부
1. 엠마오로 가는 길: 믿음의 여정
루카 복음서의 엠마오 사건은 인간의 믿음의 여정을 상징한다.
제자들은 “모든 일이 일어난 그날”(13절), 절망 속에서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며 희망을 걸었지만,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모든 기대가 무너졌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절)
이 고백은 십자가 앞에서 무너진 인간의 이해를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묵상한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걷고 있었으나,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그들 가운데에 계셨으나, 그들의 눈은 가려져 있었다.
그들의 마음이 열리기 전까지는 눈도 열릴 수 없었다.”(Sermo 235, 2)
부활의 신비는 눈으로 보는 사건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열려야만 인식되는 신앙의 신비다.
따라서 부활 신앙은 단순히 ‘죽음 이후의 생명’에 대한 교리적 수용이 아니라,
절망 속에서도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믿음의 체험이다.
2. 말씀의 전례: 타오르는 마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말씀을 설명해 주셨다.”(27절)
이 장면은 성경의 완전한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Christocentric hermeneutics)을 보여 준다.
성 예로니모가 말했듯이,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Comment. in Isaiam. Prol.)
성경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부활하신 주님 자신이 그 안에 현존하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덧붙인다.
“성경은 단순한 글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말씀으로 대화하시는 성전이다.
성경을 펼칠 때마다 그리스도의 입술이 열린다.”(Homiliae in Matthaeum, 2,6)
제자들은 이 말씀의 전례 안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한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32절)
그들의 마음을 불태운 것은 논리나 증거가 아니라,
성경 안에 현존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반복된다.
매 미사에서 봉독되는 성경 말씀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말씀(Verbum vivum)으로서 우리를 부활의 신앙 안으로 이끈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친다.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구약은 그분을 예고하고, 신약은 그분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풀어 주실 때,
성경의 모든 구절은 새 생명을 얻는다.”(134항)
3. 빵의 전례: 성체 안의 현존
엠마오의 제자들은 나그네로 보이던 이를 그들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30절)
이 장면은 명백히 성체성사(Eucharistia)를 암시한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은 말씀으로 그리스도를 들었고, 성체로 그리스도를 보았다.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고,
빵을 떼심으로써 그들의 눈을 여셨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10,121)
이때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았다.”(31절)
그러나 곧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31절)
이는 성체 안에서 현존의 방식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더 이상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성체 안에서 참으로 현존하신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중심적 신앙 고백이다.
교리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실질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신다.”(1374항)
그러므로 엠마오의 제자들은 말씀과 성체의 두 식탁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 두 식탁은 오늘날 성찬례의 전례 구조, 즉,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의 원형이 되었다.
4. 되돌아감: 파견된 증인
그들은 즉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33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이는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 만남은 선교적 열정으로 이어진다.
그들이 떠났던 예루살렘은 더 이상 공포의 장소가 아니라, 복음 선포의 시작점이 된다.
성 그레고리오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들은 주님을 빵을 떼며 알아본 후, 곧장 일어나 돌아갔다.
사랑은 게으르지 않다. 사랑은 즉시 움직이고, 사랑은 파견한다.”(Homiliae in Evangelia, 23,3)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머물러 있는 신앙이 아니라, 나아가는 신앙을 낳는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선교 사명의 기초이며, 부활의 증거이다.
5. 우리의 엠마오: 오늘의 부활 체험
오늘 우리도 엠마오의 제자들과 같은 여정을 걷고 있다.
때로는 절망과 혼돈 속에서 부활의 빛을 알아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걸으시며, 말씀과 성체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다.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회칙,” 성체성사로 사는 교회: Ecclesia de Eucharistia”에서 이렇게 말했다.
“교회는 엠마오의 제자들과 함께 매일 성찬례의 식탁에 앉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의 현존 안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6항)
그러므로 부활의 신앙은 단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살아 있는 만남’이다.
6. 결론: 말씀과 성체, 그리고 증언의 삶
엠마오의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말씀 안에서 마음이 타오르고, 성체 안에서 눈이 열리며,
선교의 길 위에서 부활의 증인이 된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체를 모실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라고 하신 약속은 새롭게 실현된다.
그분이 지금도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믿는 이가 바로 부활의 사람이다.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공감(empathy)과 연민(sympathy)’이라는 말에 관해 강의를 들었습니다.
둘 다 긍정적인 의미가 많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공감은 폭력과 전쟁의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군중도 공감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했던 대사제와 율법 학자도 공감했습니다.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던 사람들도 공감했습니다.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공감을 통해서 정권을 잡았고,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과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공감했기에 선전포고도 없이 이란을 공격했습니다.
무고한 사람이 죽어야 했고, 유가의 급등으로 세계 경제에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공감의 특징은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는 공감하지만,
멀리 있는 나라에서 고통 받고 아파하는 사람에 관해서는 공감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뉴스로 듣지만,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 납치되어
미국의 법정에 서는 것을 크게 공감하지 않습니다.
이란에서 폭격으로 무고한 여학생이 170명이나 죽었지만 역시 크게 공감하지 않습니다.
저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이 사랑과 자비라는 옷을 입으면 연민(sympathy)이 됩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신 것은 연민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굶주린 사람을 바라보았던 예수님의 연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주시고, 중풍 병자는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연민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연민’의 마음을 알려주십니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연민’의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도 아버지의 ‘연민’을 이야기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도 ‘연민’의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잘 안다고 하는 레위는
‘연민’의 마음이 없어서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사제는 ‘연민’의 마음이 없어서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도 잘 모르고, 제사를 드리는 방법도 몰랐지만
‘연민’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다녀와서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율법 학자가 말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예전에 미국의 ‘타임'지는“ 20세기의 끝에서
가장 위대한 연설 4개”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입니다.
“역사상 위험이 최고조에 이른 시간에 자유 수호의 역할을 부여받은 세대는 몇 되지 않는다.
나는 그 책임을 피하지 않고 환영한다.
나의 동료인 미국인들이여, 조국이 자신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자신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라.”
두 번째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취임 연설입니다.
“우리가 오로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이다.”
세 번째는 처칠 영국 총리의 연설입니다.
“나치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프랑스 땅에서건 대양에서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네 번째는 마틴 킹 주니어 목사의 연설입니다.
“내게는 예전 노예의 아들과 노예 소유자의 아들이
형제처럼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꿈이 있다.”
공감을 넘어서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은 연민의 마음이 느껴지는 연설입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면 시류에 편승해서 공감한 적은 많습니다.
하지만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어 ’연민‘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여러 번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연민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슬픔과 좌절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낯선 한 사람이 함께 걸어옵니다.
그분은 성경을 풀어 주시고 하느님의 계획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누는 순간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절망 속에 있던 제자들의 마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희망이 다시 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힘입니다.
지금 들과 산에는 꽃이 피고 있습니다.
나무에는 새순이 돋고 있습니다.
자연은 봄이 왔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신앙의 봄은 자연이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시류에 따라 공감하는 삶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은 연민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안에서 부활이 시작됩니다.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의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 외면하지 않을 때,
누군가의 눈물을 보고 손을 내밀 때,
누군가의 상처를 보고 함께 걸어 줄 때,
그때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류에 따라 공감하는 사람으로 머무르지 말고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은 연민의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삶의 길에서도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그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다른 이야기들과 비교하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이야기’에서 특이한 점이 한 가지 보이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당신의 부활 소식을 사도들에게 알리라고 지시하셨고(요한 20,17),
사도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에는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루카 24,47-48)
그런데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는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으셨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해 주셨을 뿐입니다.
두 제자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라고 증언한 일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셨기 때문에 한 일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을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선 두 제자는,
메시아의 수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하는 신앙인들을
상징하는(또는, 대표하는) 인물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일은,
모든 신앙인에게 ‘부활 신앙의 은총’을 주기 위해서 나타나신 일입니다.
2)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메시아의 수난을 설명해 주신 것은,
사실상 부활을 설명해 주신 것이고,
‘십자가 수난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면 먼저 예수님의 죽음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인류 구원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제자에게 바로 그것을 설명해 주셨고,
그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의 설명 덕분에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았고,
‘큰 실망’에서 벗어났습니다.
“깨달은 다음에는?” 진리를 깨닫고 믿었다면,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기쁨을 얻었다면,
그 다음에 할 일은 ‘증언’입니다.
두 제자가 명시적으로 지시받은 것이 없는데도
자신들의 깨달음과 믿음과 기쁨을 증언한 것은,
복음 선포는 원래 그렇게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무슨 지시를 따로 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셨으니까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기쁘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
그것이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 선포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해 주는 일이면서
동시에 복음 선포 자체가 ‘기쁜 일’입니다.
3)
그러면 사도들에게는 왜 복음 선포를 ‘지시’하셨을까?
아마도 그것은 사도들의 ‘공적 직무’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막달레나가 한 일도 사도들의 공적 직무에 연결된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의 사도’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4)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초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을 초대한 것이 아니라,
누구인지 모르는 낯선 나그네를 초대했습니다.
그 일에서 다음 말씀들이 연상됩니다.
“(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5.40)
“형제애를 계속 실천하십시오.
손님(나그네) 접대를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손님(나그네) 접대를 하다가 어떤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하느님을, 또는 주님을)
접대하기도 하였습니다.”(히브 13,1-2)
‘사랑 실천’은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위한 지름길입니다.
5)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겪게 되고,
크게 실망할 때도 있는데,
만일에 그런 때에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포기하면
그것으로 끝나버리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고 노력하면,
누구든지 그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은,
아마도 분명히 포기하지 않고 둘이 함께 기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 라는
예수님의 약속을(마태 18,20)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말씀을 들려 주셨고,
받아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빵을 떼어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전 안에도 계시지만, 시장 한 가운데에도 현존하십니다!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엠마오 소풍 길에 만난 형형색색의 꽃들, 어찌 그리 눈부시고 화사하던 지요.
나이 탓인지, 여리 여리하고 청초한 것들을 보면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끔찍하게 먹어버린 제 나이를 생각하며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꽃길을 걸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길고 혹독한 겨울을 잘 견뎌낸 우리에게
또 다시 찬란한 눈요기를 선물로 주시는구나.
이런저런 매일의 고통을 잘 이겨낸 우리에게
위로의 선물로 화사한 봄날을 보너스로 주시는구나.
엠마오 길에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꽤 긴 여정을 그분과 함께 걸었지만,
시종일관 그분을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실 때야
마침내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안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 있으니,
바로 우리들의 눈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새로운 시선, 새로운 시각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간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우리 인생은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고통이 기쁨으로, 슬픔이 은총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초라하고 누추한 우리네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뵌 제자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존재 방식은
이제 종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입니다.
엠마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으시고, 식사를 같이 하셨지만,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짠하고 눈앞에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기도 계시지만 지구 반대편에도 계십니다.
성전 안에도 계시지만, 시끄러운 시장 한 가운데도 현존하십니다.
저 멀리 위에도 계시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도 자리하십니다.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함께 길을 걸으시고,
대화를 통해 이것저것 자상히 가르쳐 주시고, 빵을 떼어주시고,
그러나 또 다시 사라지시고...
참으로 묘하신 하느님, 신비의 절정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 한 가지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우리 앞에 확연히 나타나십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 우리가 거행하고 참여하는 성체 성사 안에서
꾸준히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가 좀 더 잘 준비되어야겠습니다.
좀 더 경건하고 깨어있는 태도로 임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다가오시고,
영성체를 통해 우리 눈이 열려 주님을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매일 내게 다가오신다는 것,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내 인생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매 순간 내 옆에서 함께 걸어가신다고 생각하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듯합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느 다른 하늘에 존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때로 부족하고 비참한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티격태격하는 우리들의 인간관계 안에 현존하십니다.
이번 주말도 많은 피정객들이 저희 집을 찾아주셨습니다.
한 팀이 나가고 나니, 바로 또 한 팀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찾기 힘들었던 부활 예수님께서
저희를 찾아오신 형제자매들 안에 떡하니 현존해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발견하고, 선포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영원한 도반, 예수님
“우정의 여정, 성체성사적 삶”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 당신이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고,
당신 오른쪽에서 길이 평안 하리이다.”(시편16,11)
수도원 하늘길을 걸을 때 마다,
수없이 되뇌이는 고백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하늘님 그리울 때, 보고 싶을 때
하늘길
하늘 향해 쭉쭉뻗은 메타세콰이어
<하늘의 사신> 가로수들
사열 받으며
하늘보고 하늘 기운 숨쉬며
하늘 품위 되찾고 하늘의 왕자 되어
하늘님과 함께
가슴 펴고 힘차게
나는 듯 걷는다.
이 기쁨, 이 행복에 산다.”
주님의 충실한 사도, 레오14세 교황의 아프리카 4개국 순방 사목 순례 여정 중
어제는 알제리-카메룬에 이어 세 번째 방문국은 앙골라였습니다.
역시 풍요롭고 유익한 가르침이 선사되고 있습니다.
카메룬에서 마지막 강론 요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삶의 폭풍을 잠재우고 두려움 없이 나가도록 우리를 돕는다.”
앙골라를 향한 기내에서 인터뷰 시 한 대목입니다.
“나는 가톨릭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있다,
트럼프와 토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not to debate Trump).”
앙골라에 도착 직후 앙골라 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젊은이들의 비전이나, 노인들의 꿈을 억압하지 마십시오.”
어제와 그저께 양일간 자캐오의 집에서 단체피정 미사 중
영성체후 성가 177장을 요청해 3절까지 힘차게 간절한 마음으로 불렀습니다.
들을 때 마다 감동에 눈물 나게 하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가입니다.
아무리 들어도 싫증을 모르는 3절까지 가사 중
오늘 강론과 연관되어 3절만 인용합니다.
“그 만나 먹은 백성들은 죽었을지라도,
이 빵을 먹는 자들은 영원히 살리.
약속한 땅이여, 오 아름다운 대지여,
영원히 머무를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
이 빵을 먹는 자는 그 복지 얻으리,
아 영원한 생명의 빵은 내 주의 몸이라.”
참으로 모두가 한마음으로 열정적으로 부르는 모습도 감동적입니다.
성가 중 “그리스도의 몸!”에 각자 고유의 목소리로 “아멘!”
응답하고 성체를 모시는 모습도 참 아름다운 감동을 줍니다.
어제 읽은 다음 기사가 오늘 강론 주제에 결정적 영향을 줬습니다.
“AI, 신의 탄생, 인간의 종말; 초지능 완성되면, 모두 죽는다!
AI 질주 시대, 재점화 된 경고; 현재 정부와 기업, 국민을 막론하고
최대 화두중 하나는 인공지능이다.
여기에는 인공지능 전환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루는 가에 따라
국가와 사회, 개인의 미래상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존의 절박함이 깔려 있다.
인공지능 세계 3강을 목표로 질주하고 있는 한국 사회는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믿는 이들에게 답은 하나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영원한 도반,
예수님과 우정의 여정에 충실한 성체성사적 삶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며 답은 “AI”기계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과 우정이 깊어지면서 온전한 참나의 실현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이 상징하는바
우리 삶에서 주님과 우정의 여정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Behold, I am with you always, untill the end of the age.)
이보다 더 든든한 구원의 약속은 없습니다.
영원한 도반 예수님과 함께 평생
언제나 아버지의 집을 향한 우정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몇 가지 생활 수칙을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공부하십시오!
무엇보다 말씀 공부,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입니다.
그리고 기도 공부와 실행입니다. 평생 치열히 가열차게 공부해야 합니다.
“놀라”가 아니라 “공부하라” 연장되는 날들입니다.
AI 시대 참으로 절박한 공부입니다. 이 공부의 모범이 베드로 사도입니다.
베드로가 공부 대상인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오순절 설교에서 명쾌하게 밝혀줍니다.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의 예수님 공부가 참 깊습니다.
시편16,8-11절 까지 렉시오 디비나 하여
아버지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베드로의 공부 결과는 다음 말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여러분은 나그네살이를 하는 동안에는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여러분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진 물건이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름길 공부가 예수님 공부입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의 고백처럼 우리와 늘 함께 계시는
영원한 도반 주님께서 최고의 선생님이 되어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길이신 주님께서 “길에서 태어나 길을 가다 길에서 죽을” 우리들과
늘 함께 계시면서 끊임없이 깨우쳐 당신을 알게 하시고
날로 당신과의 우정을 깊게 하십니다.
둘째, 전례를 특히 미사전례를 사랑하십시오.
주님과 영적 우정의 여정은 성체성사적 삶과 함께 갑니다.
성체성사가 우리 삶의 꼴을 만들고 더욱 성체성사적 삶을 살게 합니다.
우리의 전 삶은 성체성사로 수렴되고 성체성사 은총은 전 삶으로 확산됩니다.
수렴-확산의 리듬과 더불어 성체성사적 삶은 깊어지고 주님과 우정도 깊어집니다.
오늘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 구조도
전반부는 말씀전례, 후반부는 성찬전례, 그대로 미사전례를 반영합니다.
특히 다음 부분은 성찬례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눠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사라지셨다.’
얼마나 놀라운 체험인지요!
주님은 늘 겸손히 숨어 현존하시며 함께 하시다가
성체를 모실 때 눈이 열려 당신을 알아보게 하십니다.
바로 이 미사전례의 은총으로
우리 모두 광야 인생 순례 여정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셋째, 환대에 충실하십시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겸손한 사랑, 환대의 사랑 덕분이었습니다.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들, 정말 주님의 제자답습니다.
말 그대로 환대의 모범입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그리고 이어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는 성찬례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을 환대하고
주님은 당신의 성찬전례에 참석한 우리를 환대하시니,
바로 우리의 주님 환대와 주님의 우리 환대가,
즉 환대와 환대의 만남이 참으로 은혜로운 미사전례입니다.
찾아오는, 만나는 모든 사람이 주님의 현존입니다.
주님을 맞아들이듯 환대의 사랑으로 맞아들일 때 놀라운 축복입니다.
참으로 살아 있는 성체,
살아 있는 주님의 현존의 사람을 환대하여 맞아들일 때
비로소 성체성사의 완성입니다.
우리 삶은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우정의 여정이자 성체성사적 삶입니다.
참으로 삶의 여정에 절실한 삶의 수행 셋이
<공부>요 <미사전례>와 <환대>에 충실함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영원한 도반이신 당신과
우정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미국의 시인 엘리어트는 그의 대표작 <황무지> 시에서
엠마오 도상의 주님을 다음처럼 노래합니다.
“항상 우리와 나란히 걷는 제 3의 인물은 누구일까 ?
세어 보면 오직 그대와 나뿐인데,
그러나,
저 하얀 길을 내다보면
언제나 우리와 나란히 걸어가는 또한 사람이 있다.
갈색 망토를 휘감고,
머리를 싸 맨 채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미끄러지듯 걸어가는 그것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항상,
우리 곁을 걸어가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의 영원한 도반,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모시는 주님이십니다.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주 예수님을 알아보았네. 알렐루야.”(루카24,35). 아멘.
나는 부활의 동반자?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여러분은 인생의 동반자가 있습니까?
결혼하신 분이라면 배우자가 동반자이겠지요.
그리고 영원한 친구들이 동반자이겠습니다.
이참에 나는 인생의 동반자가 있는지 생각해봤는데
너무 많아서 그런지 아니면 제가 인생을 잘못 살아서 그런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다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의 동반자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부활의 동반자는 있습니까?
제 생각에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는 부활의 동반자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을 때까지 부부나 친구로서 인생의 동반자이긴 하지만
오늘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주님께서 부활의 동반자이신 것처럼 동반자일까요?
죽을 때까지 인생의 동반자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부활의 동반자가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동반자란 이 세상 사는 동안에도 부활을 살게 해야 하고,
죽고 난 뒤에도 부활을 살도록 동반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주변의 많은 사람을 살리려고,
또는 기죽은 사람의 기를 살려주려고 지금껏 살아왔지만
그저 사랑의 본능으로 그랬을 뿐
부활의 동반자이어야 한다는 의식은 부족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부활의 동반자를 생각게 된 것입니다.
이 복음을 그렇게 여러 번 읽고
이 복음을 가지고 Emmaus Leadership(엠마오 지도력)을 많이 강의했으면서도
내가 부활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처음 생각게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더 늦지 않고 지금이라도 깨달았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야겠지요?
그리고 지금이라도 주님의 부활 동반법을 제대로 배우고 실천해야겠지요.
주님의 부활 동반법은 제 생각에 이렇습니다.
첫째는 절망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또 주님의 길을 포기한 사람에게 주님처럼 다가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백 마리 양의 비유에서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와 같은 것입니다.
무관심하지 않음은 물론 분노 때문에 사랑을 거두지 않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처럼 다가갈 뿐 아니라 계속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가 마다할지라도 또 그의 반응에 내가 실망할지라도 포기치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동반하면서 주님처럼 동감을 잘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그가 동반을 마다하거나 반응이 신통치 않은 것은 그의 탓도 있겠지만
내가 그의 얘기를 들어주고 동감해주기보단 조급하게 설득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동반과 동감만 잘할 뿐 아니라 감동도 줘야 합니다.
주님처럼 잘 들어주고 동감해줌으로써 신뢰도 쌓고
들을 마음을 갖게 해준 다음에는 하느님 말씀으로 감동을 줘야 합니다.
내 말을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듣고 깨달으라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 인간적으로 생각했음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말씀으로 감동을 준 다음에는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의 몸과 피를 같이 모시는 성찬례까지 같이 해야
우리는 부활의 동반을 완성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되어
기가 질려 포기할 수도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절대로 조급하지 말아야 합니다.
호흡으로 치면 긴 호흡을 하고,
여행길로 치면 먼 길을 가려는 마음으로 가야겠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