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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1 <유홍준과 함께하는 예썰의 전당 2부> [43회]
역사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동네 ‘서촌만보(西村漫步)’
✺ <예썰의 전당> 마흔세 번째 주제는 역사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동네 ‘서촌’이다.
최근 핫플레이스(Hot place)로 주목받는 서촌은 옛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동네다. 따라서 서촌의 좁은 골목에는 숨겨진 역사와 문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있다. ‘한가롭게 슬슬 걷는 걸음’이란 뜻의 ‘만보(漫步)’. 서촌의 좁은 골목을 따라 한가롭게 거닐며, 이곳에 숨겨진 흥미로운 예술 이야기들과 만나보자.
✺ KBS1 <유홍준과 함께하는 예썰의 전당 2부> [43회] 역사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동네 ‘서촌만보(西村漫步)’ 편. 다시보기
✺ 3D 애니메이션으로 만나는 디지털 인왕제색도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국보)’, 조선 시대(1751년), 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 켈렉션
비 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직접 인왕산을 보고 그렸는데, 비 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상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 느낌을 잘 표현하였다. 산 아래에는 나무와 숲, 그리고 자욱한 안개를 표현하고 위쪽으로 인왕산의 바위를 가득 배치하였다. 조선 시대 영조 27년(1751)때 그려진 이 그림은 진경 산수화로 우리나라의 산수를 너무나도 잘 표현하였다. 이 작품이 제작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산수화의 대부분이 중국의 것을 모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진경 산수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원래 화면 상단에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쓴 찬시가 있었으나 심씨의 후손이 제사용으로 쓰기 위해 절단해갔다고 한다.
산 아래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리고, 산 위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시선으로 그려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주고 있다. 비에 젖은 뒤편의 암벽은 거대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이를 위해 먹물을 가득 묻힌 큰 붓을 반복해서 아래로 내리긋는 대담한 필치를 사용하였다. 좀 더 가까이에 있는 능선과 나무들은 섬세한 붓질과 짧게 끊어 찍은 작은 점으로 실감 나게 표현하고 있다.
✺ 세계적인 걸작 디지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3D 애니메이션으로.../ 누리호 발사 성공
201family | 세계적인 걸작 디지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3D 애니메이션으로.../ 누리호 발사 성공 - Daum 카페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수성동동계곡(水聲洞溪谷)>
겸재 정선(謙齋 鄭敾)의 진경산수화, 장동팔경(壯洞八景) 수성동 계곡(水聲洞溪谷) 배경지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조선, 정선(鄭敾), 세로 33.1cm, 가로 29.5cm, 본관 6505, 국립중앙박물관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은 인왕산 남쪽 기슭에서 백악 계곡에 이르는 장동 지역, 현 효자동과 청운동 일대의 가장 뛰어난 여덟 군데의 승경을 그린 것이다. 그 대상은 필운대, 대은암, 청풍계, 청송당, 자하동, 독락정, 취미대, 수성동을 일컫는다. 성현의『용재총화』에는 서울의 5대 뛰어난 경치 중에 인왕산이 두번째, 인왕동과 백운동이 네번째 뛰어난 승경이라고 하였다.
옛 서울의 경치를 시정어린 필치로 묘사한 이 장동팔경은 현재 인왕산 군사도로와 시민아파트가 들어섬에 따라 그 자취를 거의 찾을 수 없다.
대은암은 삼청동 칠보사 부근에 해당하는 곳이며, 백운동은 인왕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동네이다. 그 남쪽으로 청풍계가 있는데 일제시대 때 청풍계와 백운동을 합쳐 오늘날 청운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그림에는 간기가 없으나 같은 화첩내 『창의문』에 의해 제작연대가 정선의 70세 이후임이 확인된다.
『백운동』에서는 나귀를 타고 가는 인물이 전경에 보이며, 둥글고 원만하게 나타낸 산세며, 수묵에 담채색을 가하여 정선 특유의 개성이 돋보인다. 노년기의 완숙미를 드러내는 수작秀作이다. 편필의 능란한 소나무 묘법이나 기슭의 습윤한 선묘와 듬성듬성 찍은 묵점 등에서 70대 만년의 무르익은 필치를 보여주고 있다.
현대인들은 시끄럽고, 아첨이 많고, 욕심이 많고, 과장하고, 바쁘다. 그런 현대인들에게는 힐링이 필요하다. 그 힐링을 할 수 있게 도와줄 만한 것이 한국회화라고 생각한다. 한국 회화에는 조용하다, 담담하다, 편안하다, 대범하다, 객기가 없다, 과장이 없다, 거드름이 없다, 아첨이 없다, 욕심이 없다, 자연스럽다 등 바라보기 위한 아름다움이 담겨있다. 한국회화는 현대인들의 속성과 정반대되기에 더욱 필요한 것이다. 그 중 조선시대에 남아있는 회화의 아름다움을 현재에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인왕산의 수성동 계곡이다.
수성동은 조선시대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한경지략(漢京識略)> 등에 ‘명승지’로 소개되는 장소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맑아 수성동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정선의 산수화에 등장하는 당시의 모습과 비교하여 현재는 주택가가 형성되어 변모했지만 계곡에 걸쳐놓은 돌다리는 그대로 남아있다.
바쁜 도시 속의 일상에서 벗어나 인왕산을 방문해 수성동 계곡을 바라보면 우리들 또한 겸재 정선이 느꼈던 한국 산수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고, 겸재 정선이 그린 <장동팔경첩-수성동>을 보면서 그 차이점을 비교해본다면 색다른 재미도 느낄 수 있다.
✺ 수성동에서 비를 맞으며 폭포를 보고 水聲洞雨中觀瀑(수성동우중관폭)
심설(沁雪)의 운을 빌린다 次沁雪韻(차심설운)
골짜기에 들어서자 몇 걸음 안 가 入谷不數武(입곡불수무)
발밑에서 우렛소리 우렁차다 吼雷殷屐下(후뢰은극하)
젖다 못한 산안개 몸을 감싸니 濕翠似裹身(습취사리신)
낮에 가도 밤인가 의심되누나 晝行復疑夜(주행부의야)
고운 이끼 자리를 깔고 淨苔當舖席(정태당포석)
둥근 솔은 기와 덮은 듯 圓松敵覆瓦(원송적복와)
낙숫물 소리 예전엔 새 소릴러니 簷溜昔啁啾(첨류석조추)
오늘은 대아송 같다 如今聽大雅(여금청대아)
산마음 정숙하면 山心正肅然(산심정숙연)
새들도 소리 죽이나 鳥雀無喧者(조작무훤자)
원컨대 이 소리를 가지고 가서 願將此聲歸(원장차성귀)
저 야속한 무리를 깨우쳤으면 砭彼俗而野(폄피속이야)
저녁 구름 갑자기 먹이 퍼지니 夕雲忽潑墨(석운홀발흑)
그대더러 시의 뜻을 그리란 걸세 敎君詩意寫(교군시의사)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수성동 우중에 폭포를 구경하다
水聲洞雨中觀瀑 此心雪韻(수성동우중관폭 차심설운)'
✵ 예썰 하나, 겸재 정선의 그림을 따라 변치 않는 절경 ‘인왕산’으로 떠나다
겸재 정선은 인왕산 곳곳의 수많은 풍경을 화폭에 담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꼽히는 곳은 ‘수성동 계곡’이다. 시원한 물소리와 우거진 숲으로 둘러싸인 수성동 계곡은 조선 최고의 여름 휴양지였다는데. 하지만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가 들어서며 수성동 계곡은 이전의 경관을 잃게 됐다. 그렇게 잊힐뻔한 수성동 계곡은 노후한 아파트가 철거되면서 복원의 기회를 얻게 됐고, 복원 작업은 수성동 계곡의 풍경을 담은 정선의 작품 <수성동도>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역사 속으로 사라질뻔한 조선 최고의 명승지, 수성동 계곡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을까?
추사 김정희가 송석원 시사의 부탁을 받아 1817년에 썼다는 글씨로 현재 종로구립미술관 뒤편 어디쯤 매몰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송석원시회도 옥계청유첩 중(松石園詩社夜宴圖 玉溪淸遊帖 中)’, 김홍도, 1791년 이후, 종이에 담채, 31.8x25cm, 개인 소장’
(화제) 단원 김홍도(金弘道)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
庚炎之夜雲月
朦朧 筆端造化
驚人昏夢
眉山翁
달빛 밝은 밤,
구름 속의 달 몽롱한 가운데 빼어나고
붓 끝의 조화 속에
해오라기와 사람들이 꿈 속에 잠겨 있다.
미산옹.
송석원시사 멤버 9명이 벌인 시회도의 하나로 달밤의 모임을 더없이 그윽하게 잡아냈다. 필치로 보아 이 모임으로 부터 5~6년쯤 뒤인 단원 50대 중반 그림인 듯 하다.
‘‘송석원시회도 옥계청유첩 중(松石園詩社夜宴圖 玉溪淸遊帖 中)’, 이인문, 1791년, 종이에 담채, 개인 소장
(화제) 고송유수관 이인문(李寅文) 송석원시회도(松石園詩會圖)
古松流水館道人李寅文 文郁 寫於檀園所
謙玄(겸재謙齋와 현재玄齋)以後 不見山水善畫者矣
今覽此帖 即松水館 亦是名不
虛傳望八眉翁
"고송유수관도인 이인문 문욱(이인문의 자)이 단원의 집에서 그렸다.
겸재와 현재 이후에 산수화를 잘 그리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이 첩을 보니 송수관 역시 그 이름이 헛되어 전해진 것이 아니구나.
80세를 바라보는 미산 늙은이 씀.
'창랑 홍세태(滄浪 洪世泰)의 초상화', 일본 타카츠키 칸논노사토(高月?音の里) 역사민속자료관 소장. 1883년 아시카곤사이(安積艮齋)의 모사본.
* 「염곡칠가(鹽谷七歌)」
有客有客字道長(유객유객자도장) 나그네여, 나그네여. 그대의 자(字)가 도장이라지.
自謂平生志慨忼(자위평생지개강) 자기 말로는 평생 강개한 뜻을 지녔다지만
讀書萬卷何所用(독서만권하소용) 일만 권 책 읽은 게 무슨 소용 있나.
遲暮雄圖落草莽(지모웅도락초망) 늙고 나자 그 웅대한 포부도 풀 더미 속에 떨어졌네.
誰敎騏驥伏鹽車(수교기기복염거) 누가 천리마에게 소금 수레를 끌게 했던가?
太行山高不可上(태항산고불가상) 태항산이 높아서 올라갈 수 없구나.
嗚呼一歌兮歌欲發(오호일가혜가욕발) 아아! 첫 번째 노래를 부르려 하니
白日浮雲忽陰結(백일부운홀음결) 뜬구름이 밝은 해를 가리는구나.
-홍세태(洪世泰). 69세 되던 해에 자서전적인 그 첫 번째 시(詩)
✵ 창랑 홍세태(滄浪 洪世泰, 1653-1725)가 지은 「염곡칠가(鹽谷七歌)」에는 당시 백성들의 비천한 삶을 가슴 아파하는 내용도 보인다. 그는 재물을 모으는 데 관심이 없었고, 평생을 가난 속에서 시를 지으면서 살았다. 자식은 8남 2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기 때문에 불행한 일생을 보냈다. 그러나 홍세태는 『해동유주(海東遺珠)』라는 시집을 펴내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 서얼 출신들에 의해 이루어진 문학.) 발달에 구심점 역할을 했다. 살다 보면 영욕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기가 쉽지 않은데 그런 점에서 홍세태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 있다.
"술과 여색으로 사귄 친구는 한 달을 못가고
권세와 이익으로 사귄 친구는 한 해를 못 가지만
오로지 문학으로 사귀는 것만으로 영원 하더라"
장혼(張混), 1786년, ‘송석원 시사 발문’
송석원시사 멤버 9명이 한낮에 벌인 시회도 그림으로 인왕산 자락에 비껴 보이는 북악의 모습에서 실경을 더욱 감지하게 된다. 이인문의 그림은 항시 이처럼 넓게 펼쳐지는 시원스런 구도를 취하고 있다.
1791년 6월 15일, 서울 인왕산 아래 천수경千壽慶의 집인 송석원松石園에서는 유두절流頭節을 맞아 송석원시사 동인들의 아회가 열렸다. 송석원시사는 익히 알려진 대로 중인 출신의 내로라 하는 문인들이 모인 문학동인이었다. 송석원에서 주로 모여 송석원 시사라 불렀으며, 송석원은 옥인동 계곡에 있었기 때문에 옥계시사玉溪詩社라고도 했다.
1791년 유두절의 모임에는 장혼張混, 차좌일車佐一, 조수삼趙秀三, 박윤묵朴允默 등 핵심 멤버들이모여 밤늦도록 시회를 가졌는데, 이때 단원과 동갑내기 화원인 이인문은 낮에 인왕산 계곡바위에 모인 장면을 그렸고, 단원은 한밤중 집 마당에 둘러앉은 장면을 그렸다.
이 두 그림은 그림 자체도 명화이지만 당시 최고 가는 화가의 그림을 같은 주제로 해서 한자리에 만나게 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특히 두 화가는 화풍이 대조적인 것으로유명하다.
이인문은 구도를 잡을 때 항시 시야를 넓게 펼치는 반면, 단원은 대상을 압축하여 부상시키는 특징이 있다. 이인문은 화면 전체를 그림으로 꽉 채우지만 단원은 주변을 대담하게 생략한, 그래서 똑같은 풍경을 그려도 이인문의 산수가 평수에서 훨씬 넓어 보인다. 두 그림에서도 두 대가의 그런 특징이 역력하다. 나는 두 화가의 작품을 볼 때면 항시 나도 모르게 이인문의 그림은 점점 멀리 떨어져서 보게 되고, 단원의 그림은 점점 다가가서 보게 되는 것을 느낀다. 이 두 그림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날 송석원시사 멤버들이 쓴 시는 김의현金義鉉이 모으고, 거기에 장혼의 서문과 천수경의발문을 받아 첩으로 만들면서 이 두 그림을 앞에 붙였다. 그것이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이다.그리고 6년 뒤인 1797년에 마성린이 후기를 쓴 것이 첨부되어 있는데, 어느 글을 봐도 이모임이 있던 그 현장에 단원과 이인문이 초대되었다는 글은 없다. 게다가 이인문의 그림 상단에는 “단원의 집에서 그리다寫於檀園所”라고 씌어 있어 나중에 김의현의 부탁으로 두 화가가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단원의 나이 47세에서 53세사이로 추정된다. 정황으로 보면 유두절 모임 당시에서 멀지 않은 시점이라 생각되지만, 화풍으로 보면 50대에 가깝다.
✵ 예썰 둘, 조선의 르네상스가 펼쳐졌던 ‘송석원 터’ 친일파에게 넘어갔었다?
인왕산을 내려와 둘러볼 다음 코스는 옥인동 47번지다. 이 일대 도로변에는 ‘송석원 터’라고 적힌 표지석이 하나 놓여있는데, ‘송석원’은 조선 후기 찬란한 르네상스가 펼쳐졌던 곳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서촌에는 중간 계층의 신분인 중인들이 모여 살았는데, 이들은 송석원에 모여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짓는 ‘시사’를 만들었다. 이 시사의 규모는 나날이 커져 문화의 양과 질을 성장시켰고 마침내 조선의 문예부흥기를 이끌었다. 조선문화를 꽃피운 송석원 시사의 현장은 불세출의 화가 김홍도와 동갑 라이벌 이인문이 그림으로 남겼다는데. 과연 조선 최고의 두 화가가 그린 송석원 시사는 어떤 모습일까?
구본웅(具本雄, 1906-1953), ‘친구의 초상’ 1935년, 캔버스애 유채, 62×50cm, 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具本雄, 1906-1953)은 한국 야수파 화가의 독보적인 존재인 20세기 초 한국 서양화가로 주요 작품은 <친구의 초상>. 호는 서산이며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미술연구회에 입회해 서양화를 배웠고 그림 외에도 비평을 통해 일제시대 한국미술의 원점과 한계를 비판했다. 1934년 목일회 활동을 하면서 이중섭, 김환기 등과 함께 서구적 전위미술을 구사하다 목일회가 활동을 마감한 후 국내 화단이 친일성향으로 기울게 되면서 미술활동을 그만 뒀다. 소설가 이상을 그린 <친구의 초상>이 유명하다.
이승만이 그린 ‘이상과 구본웅’. 까치집 머리, 털북숭이 수염의 이상과 작은 키에 질질 끌리는 외투를 입은 구본웅
의 기묘한 조화가 곡마단 행차에 비유됐다. / 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의 ‘인형이 있는 정물’(1937). 이상이 운영하던 다방에 걸려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 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 ‘비파와 체리’, 1927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 ‘꽃’, 종이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 ‘푸른 머리의 여인’,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삼성미술관 리움/ 구본웅, ‘여인’ 1940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구본웅, ‘여인’, 1930년,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 예썰 셋, 일제강점기 새로운 예술을 연 서촌 토박이, 이상과 구본웅을 만나다
서촌 만보의 마지막 코스는 바로 <날개>의 작가, 이상의 집터다. 서촌 토박이 이상의 곁엔 함께 골목을 누비던 단짝이 있었는데. 이는 바로 한국 야수파의 거장, 구본웅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 서촌에서 새로운 문화를 이끌던 예술가들이었다. 미술관도 음악당도 없던 시절, 당시 예술가들은 ‘다방’에서 토론하며 그들만의 작품 세계를 펼쳤는데, 이상 역시 종로에 ‘제비 다방’을 열었다. 이상과 구본웅 그리고 동료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제비 다방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그곳에서는 어떤 예술이 펼쳐졌을까.
✵ 이상(李箱, 1910~ 1937)의 ‘날개’는 일제 강점기 지식인의 자기 소모적인 삶을 통해 현대인의 무의미한 삶과 자아 분열을 그려 낸 최초의 심리 소설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나’와 ‘아내’의 관계가 보통의 남녀 관계와는 달리 역전(逆轉)된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내에게 기생하고 있는 ‘나’의 유폐된 삶이 아내의 방과 ‘나’의 방이라는 공간적 분할과 차이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또한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빈둥대다가 거리를 쏘다니고 티 룸에 앉아 차를 마시는 ‘나’의 모습은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지식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나’가 ‘아내’가 준 돈을 버리고 일종의 탈출의 성격을 지닌 외출을 하면서 자아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날개’가 돋기를 염원하는 것은 무의미한 삶의 도정에서 생의 의미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거울/ 이상(李箱, 1910~ 1937)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서울 종로 제비 다방, 이상의 자료가 정리 되어 있다.
박태원이 조선일보 1939년 2월 22일자에 쓰고 그린 ‘자작자화(自作自畵) 유모어 콩트 제비’, 파산한 이상의 다방 경영 상태를 보여주는 삽화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42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 유홍준 교수, 역사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동네 ‘서촌만보’ 편, (2023년 03월 11일 22:30 방송)/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문화유산 정보,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멋진 사진들과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