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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으로서의 성숙성
(딤전5장1-4)
가시고기와 우렁이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다 아름답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가운데
사람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 속에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동물들이
인간들 보다도 더
큰 교훈을 주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주인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
주는데는 개를 들고 있습니다.
자기가 기르던 개를 잡아먹기
위해 산채로 매달아 불에
그을리다가 실패해서 도망한
그 개가 몇 년만에
주인을 찾아왔어요.
“개만도 못한 주인,
주인보다 나은 개”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정의 달을 맞아
부성애를 나타내는
가시고기와 모성애가
강한 우렁이가 떠오릅니다.
가시고기는 소설로
서 더욱 유명합니다.
가시고기는 산란기에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나면 수놈은
알이 부화될 때까지
신선한 공기를 제공하고
침입자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 때 생을
마감하는 작은 물고기입니다.
가족을 위해 수고하다 조용히
한 세상을 마감하는 아버지들의
함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드라마입니다.
또 우렁이는 제 몸에다 알을 낳으며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성장합니다.
한 점의 살도 남김없이 새끼들에게
먹이로 주고 빈 껍데기가 되어
조용히 물에 떠내려 갑니다.
가족을 보호하고 울타리가 되는
아버지의 희생과 살을
깎아먹이는 어머니의 희생은
어디에서 보상받게 될까요?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고 하지만 나이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서서히 짐이 되
는 존재로 전락하는 듯 합니다.
자녀들이 제 아무리 효도를
다한다 해도 부모의 사랑을
어찌 다 갚을 수 있을까요?
가정의 달에 가시고기와
우렁이를 생각하며
못다 한 효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교회는 해방 후부터
5월 2째 주일을
어머니 주일로 지키다가
1960년대부터는 5월 2째
주일을 어버이 주일로 지킵니다.
어버이 주일에는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슴에
새기며 감사하고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자녀들은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에 기리며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보다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를 순종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부모를 돌아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효도는 왜 하여야 합니까?
첫째, 나의 생명과 존재가 부모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안 계셨다면 오늘의 나의 생명과 존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를 자라게 하시고 나를 사람 되게 하신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인간세계에서는 물론 동물 세계에서도 어미는 자식을 태어나게 하고 자라게 하는데 자기의 생명까지 바칩니다. 거미 어미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 자기 몸을 자식들의 음식물로 제공한다고 합니다.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동서양의 사상가들은 효를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라고 가르쳤습니다. 공자는 효가 백행의 근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집안에서는 효를 나라에서는 충을 다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효와 충이 인간의 근본이고 나라의 기초라고 가르쳤습니다. 유교가 효를 너무 지나치게 형식화하고 의식화한 것이 잘못이긴 하지만 효를 중요한 덕행으로 가르친 것은 옳은 일입니다. 효는 인간의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둘째, 효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이 하나님에 대한 명령과 인간에 대한 명령으로 되어 있는데 인간에 대한 명령 가운데 으뜸이 되는 명령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주안에서 부모를 순종하라고 엡6:1에서 명령했습니다. 딤전5:4에서는 "만일 어떤 사람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셋째, 효도는 내가 잘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네가 잘 되고 장수하리라"(엡6:3). "그리하면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잠1:9). 부모를 공경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잘 되고 존귀함을 누립니다. 백화점 왕 와나메이커 역시 부모님의 교훈을 따른 사람이었습니다. 와나메이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사랑을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신 분이 어머니였고, 나에게 기도를 제일 먼저 가르쳐 주신 분도 어머니였으며, 내 영혼에 밝은 등불을 켜 주신 분도 어머니였고, 행복을 가르쳐 주신 분도 어머니였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은 잘되고 아름다운 이름과 존귀를 얻게 됩니다. 이삭이 효도하다가 축복을 받았고, 요셉이 효도하다가 축복을 받았고, 룻이 효도하다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효도해야 합니까?
첫째, 부모를 순종해야 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엡6:1). 부모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효도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제사 드리는 것보다 좋아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베다니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효도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둘째, 부모를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합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23:25).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입니다. 옛날에 도시 효자가 시골에 효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시골로 찾아 갔습니다. 시골 효자의 집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었습니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까 옷을 누추하게 입은 청년이 나무를 한 짐 짊어지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자 부엌에서 일하던 노모가 부리나케 뛰어나와 아들의 나무 짐을 받쳐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황급히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대야에 물을 떠 왔습니다. 노모는 아들을 마루에 앉히고는 열심히 아들의 발을 씻기면서 즐겁게 이야기를 아들과 주고 받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도시 효자는 시골 효자에게 이렇게 충고를 했습니다. "여보게, 어떻게 기력도 없으신 어머니께 발을 씻게 하는가? 효자라는 소문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러자 시골 효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효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기쁘게 해 드립니다." 이 말을 들은 도시 효자는 마음 속에 "내가 효행을 잘못 했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도시 효자는 이 때까지 자신의 생각대로만 부모를 공경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좋은 잠자리, 좋은 음식, 많은 용돈은 드렸지만 자기 부모님의 얼굴에는 시골 어머니와 같은 환한 웃음이 없었던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효도는 부모님을 기쁘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는 아름다운 미담들이 많이 있지만 몇가지만 말씀드린다면, 매주 토요일만 되면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분가한 자녀들이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집에 아이들까지 다 데리고 가서 하루를 함께 지내며 한 주간동안 있었던 삶을 다 말씀드리고 교훈을 받고 주일날 이른 아침 부모님 모시고 모든 식구들이 함께 교회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고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일날 1부예배에 나와야 친정어머니를 뵙고 함께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이른 시간에 잠자는 아이들을 깨워 함께 예배드리러 나오는 가정도 있습니다. 이 자녀들이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을 아무 거부반응 없이 기쁨으로 따라하는 그 모습도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또한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는 며느리가 직장생활하느라고 피곤하여 시어머니가 살림을 모두 맡아 하는데 퇴근할 무렵이면 좋아하는 반찬을 잘 준비하고 피곤한 몸을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이부자리를 깔아 따뜻하게 해놓고 집 밖에 나가 퇴근하고 돌아오는 며느리를 반갑게 맞이하여 주는 그 시어머니를 어찌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면서 시어머니를 천사처럼 여기는 분도 계십니다. 이 분이 이제 며느리를 맞았는데 자기도 며느리를 향해 그와 같이 하겠노라고 합니다. 얼마나 따뜻한 이야기들인지 모릅니다. 성숙한 부모님의 모습이요, 감동적인 미담이 우리 교회 안에 얼마나 많으지 모릅니다. 자녀로서의 성숙함이 배어있는 모습으로 부모님께 대하는 성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셋째, 부모님을 돌아보아 드리고 도와 드려야 합니다. "예수께서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2:51). 예수님은 목수이신 아버지를 도와 드렸습니다. 나를 낳으시고 길러 주신 부모님에게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하시는 일을 도와 드려야 합니다.
효를 행할 때 가정이 화목하게 됩니다. 교회가 아름다워집니다. 사회가 밝아지고 건강하게 됩니다. 나라가 튼튼해 집니다. 효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부모에게 효를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잘 되는 길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립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를 순종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모두 잘되고 장수하고 존귀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랜 경험을 통한 지식의 보유자로서 대가족 제도하에서의 확고한 지위를 누려온 노인들은 사회가 산업화, 도시화됨에 따라 증가하는 인구의 이동 성향으로 대가족제도가 파괴되고 부부중심의 핵가족제도로 발달함에 따라 매우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노년층은 친족과 직업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조직적으로 고립화되고 사회의 주요활동에서 제거되고, 교회와 가정에서 그 역할이 감소되고 있습니다. 이같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노인문제는 우리 나라에서도 1970년대 후반부터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하여 1980년 "세계 노인의 해"를 계기로 노인문제에 대한 관심이 크게 부각되었습니다. 수천 년간 유교 문화권에 속했던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에 많은 변모를 가져오게 했으며 또한 새로운 가치관의 채택은 노인 경로 개념의 퇴조를 불가피하게 하였습니다.
노년은 한 사람의 생애에 있어서 육체적 능력이나 정신적 능력이 감퇴되는 죽기 전 10년 내지 20년의 기간입니다. 고대 문화에 있어서 노인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경험과 지혜 때문에 가문과 공동체 내에서 존경을 받았습니다. 노년까지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 경건의 보상, 제명을 잘 지킨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로서 자주 인식되어집니다. 아브라함은 장수를 약속 받았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법들을 존경하는 자들에게 장수가 약속됩니다(출 20:12).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이 시련과 고난의 면제를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노인은 건강 문제들과 무능력을 초래합니다.
성서는 일반적으로 동양적 관습과 조화되게 노년을 존경하고 영예롭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존경은 하나님에 대한 경건의 표현으로서 종교적 삶에 본질적입니다. 백발은 허약함의 표징이 아니라 명예의 표시로 간주되어졌다. 노인을 공경하지 않음은 반드시 그 나라에 화를 초래할 것이라는 경고가 발해집니다. 경험은 귀중한 교사이며 노년은 그와 더불어 지혜와 분별력을 수반한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모세는 그의 고별연설에서 이스라엘은 아비와 어른들에게 상의할 것을 명령합니다. 르호보암은 그가 장로의 충고를 져버렸을 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영도적이고 책임적인 직분들은 보통 나이 많고 경험이 많은 사람들에게 맡겨졌습니다. 전체적으로 말해서 성서에서 장수는 선한 삶에 대한 보상이며 노인은 지혜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성서는 노인을 공경하라고 명령합니다.
우리 나라는 가족관계와 사회윤리의 뿌리를 전통적인 관습인 경로 효친 사상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급변하는 산업사회의 실상은 종래의 효도와 노인공경을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노화에 따른 역할의 상실 혹은 변화, 신체 및 정신 건강의 퇴화, 자유로운 환경 통제곤란 등은 자연히 노인으로 하여금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합니다. 이러한 도움의 추구는 자신의 권위와 가치 및 심리적 자아를 옛날과 마찬가지 수준으로 유지하려는 노력의 일환입니다. 이러한 노인 특유의 의존성 문제의 해결도 노인이 가정과 사회에서 고립되지 않고 보다 높은 정신건강 수준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이러한 노인의 의존성을 블렌크너(Blenkner, 1965)는 ① 경제적 의존성(연금, 보험, 용돈) ② 신체적 의존성(퇴화한 신체 기능에 대한 보완) ③ 정신능력의 의존성(기억, 판단 능력에 대한 도움) ④ 사회적 의존성(사회적 접촉의 추구, 고립의 회피) ⑤ 심리적 의존성(감정적 유대, 안락감)의 5가지로 구분합니다. 이때 앞의 4가지 의존성은 정부, 사회보호기관, 전문가 등에 의해 해결될 수 있으나 심리적 의존성과 감정적 안정의 문제는 그 의존대상이 가족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의 경우 사회보장제도의 미비로 인하여 이러한 5가지 의존성을 모두 그 가정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주의 깊게 통찰해야 합니다.
젊은 자녀 세대가 노부모 세대에게 베푸는 부양의 역할은 과거에 자녀들이 성장할 시기와 그 '부양의 역할'이 바뀐 것이긴 하지만 노인이 제2의 아동기를 맞는 것이 아니므로 '부모의 역할'이 결코 될 수 없으며 오로지 효도 내지 '자식으로서의 성숙성'에 기초를 둔 부양인 것입니다. 이러한 효도와 자식으로서의 성숙성은 노부모가 믿고 의지하려는 여러 의존성을 어느 정도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자녀의 세대 쪽의 역량을 뜻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맡기고 모든 것을 터놓고 상의 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가족구성원이거나 친구 또는 성직자 등이 됩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중요한 역할은 노년기에 나타나는 역할 상실, 능력감퇴, 사회적 감촉의 감소와 고립 등에 대한 완충지대의 역할을 담당함으로서 만족할만한 노년기의 생활유지를 도모하고 그리하여 노인 세대의 정신건강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는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노년기의 가족관계에서 조부모의 역할을 생각해 보면 가족 내에서 역할 변화도 일생의 커다란 분기점이 됩니다. 경제적 주도권은 대개 자녀세대에게 이양했고 자녀 양육이란 부모의 역할도 이미 상실했으며 오직 상징적인 집안 어른의 지위와 조부모로서의 역할에 만족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와 같은 직업과 가족에서의 역할로 인하여 노인들은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기 자신을 환경에 알맞도록 재조정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조부모 역할에
대하여 연구한 것이 있는데,
70가정의 미국
중류 가정을 조사하여
① 만족감
② 그 의미와 중요성
③ 그 역할의 5가지 양식
등을 고찰하였습니다.
첫째 조부모 역할에 대하여 오직 64%의 노인만이 만족감 혹은 편안한 감정을 가질 뿐 그 외는 여러 가지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즉 불편한 마음 긍정적인 보상의 결여, 조부모라는 역할의 자각에 대한 괴로움, 손자 양육에 대한 자녀들과의 갈등관계 등이 그것입니다.
둘째 조부모 역할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도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① 나 자신은 손자를 통하여 영속되며 ② 충분한 시간이 있으므로 손 자녀들과 감정적으로 만족한 접촉이 가능하고 ③ 지혜의 원천이 되어 역사 기술 등을 가르치고 ④ 이들을 통하여 스스로 못 다한 것을 대외적으로 성취할 수 있기도 합니다.
셋째 조부모 역할 수행에는 ① 손자 양육 방법 등은 자녀에게 맡기고 자신은 오직 주어진 조부모 역할만 수행하는 공식적 인형 ② 여가시간을 아이들과 놀아 주는 것을 낙으로 삼는 기쁨 추구형 ③ 부모를 대신하여 유아 교육을 담당하는 대리부모형 ④ 가족 내의 최고권위를 유지하고 젊은 세대의 복종을 요구하며 가정 내의 지혜의 원천임을 내세우려는 형 ⑤ 공식적인 가족 모임 이외는 별로 가족 관계에 관여하지 않는 원거리형이 그것입니다.
노인들에게 나타나는 경제적, 신체적, 사회적 의존 욕구뿐만 아니라 정서적 의존 욕구에 대하여 자녀들은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노화와 더불어 증가하는 의존성 가운데 특히 감정적, 정서적, 안정감의 유지 및 의존의 욕구가 뚜렷이 증가하는데 이를 해결할 근원이나 책임소재가 정부나 사회 복지 단체가 아니라 가족에 있다는 사실에 특히 유의함으로서 노-소 두 세대간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시킬 수 있습니다.
사회적 변화가 거의 없었던 전통사회에서의 노인도 그 사회의 전통을 이어주는 중요한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급변하는 오늘의 근대화와 산업사회에서의 노인들은 일터에서 은퇴하는 제도 때문에 밀려나야 되고 가정에서는 핵가족제도 때문에 밀려나야 되는 노인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기 역할 상실과 관계상실이 신체와 정서에 남아 소외와 고독 속에 노인의 존엄성과 경로사상 마저 상실하게 되는 가정 공동체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사회에서 노인은 인생 막바지 황혼을 걷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생 안식년으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년에 일을 할 수 없다 해도 심리적인 열등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구약성서나 유대인의 전통에서 노년기는 구원의 희망을 향해 가는 시기요 인간 성숙의 정점인 자기 실현을 위한 안식년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인간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고귀한 목적에 자신을 바치게 됩니다.
사람이 늙으면 세가지
서글픔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아픈 데가 많습니다.
늙으면 몸이 노쇠함으로 자연히 아픈 데가 많아집니다.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쑤시고 무릎도 아픕니다. 그러나 대부분 자식들의 눈치보느라 아파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어디가 아프신지 관심을 가지고 자주 물어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외로움을 잘 타십니다.
젊었을 때는 바빴지만 늙으면 한가해집니다. 젊어서는 하는 일이 많다 보니 만나는 사람도 많고 외로워할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현역에서 물러나 일손을 놓으셨기 때문에 한가해지고 만나는 사람도 적어집니다. 시간은 많은데 하는 일이 적어 외로운 시간이 많습니다. 시집간 딸 생각, 외국 나간 아들 생각으로 밤낮 자녀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건강한지 늘 궁금해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식들이 자주 찾아 뵙지는 못한다 해도 부모님께 자주 안부 전화를 드려야 합니다.
셋째로, 배고픔을 자주 느끼십니다.
모든 기능이 약해지다 보니 마음뿐이지 많이 잡수실 수가 없습니다. 입맛도 예전같지 않으십니다. 더구나 많이 잡수시면 탈이 납니다. 그래서 자주 시장기를 느끼십니다. 몸도 허하고 기름기도 없으니 중간 중간 시장하실 때마다 잡수시도록 눈깔 사탕이나 땅콩, 과자... 좋아하시는 간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늘 챙겨 드리시기 바랍니다.
효도는 복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며, 가정이 화목해지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아들 딸도 효자가 될 것입니다. 부모들이 할머니 할아버지께 어떻게 했는지 보고 배웠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 할 것입니다. 어느 분가해간 자녀들은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매번 십일조를 부모님께 보내오는 자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하듯이 부모님께도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그래도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합니다. 노인에 대한 사랑은 곧 자기의 미래에 대한 사랑 곧 자기 사랑입니다. 노인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노인 되었을 때를 생각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노인을 사랑하면 바로 그것은 장차 올 내 미래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동안 부모님께 불효한 것은 없는지 생각해보시고 이제부터는 참 효도를 하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귀한 뜻이
담긴 시 하나를 소개합니다.
오해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첫사랑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 몸은 절대 아프지 않는
어떤 특별한 몸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 꿈도
품은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한 가지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 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아무 불만도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전화를 길게 하는 것
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단 하루라도 쉬는 것
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웃는 걸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마냥 기뻐만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외에 아는 여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배가 빨리 불러 와 좋은 음식
앞에서 먼저 일어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 것
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 주머니에는 늘 돈이
얼마쯤은 들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운동도
취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깊고 험한
길을 걸어가도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객지로
떠나는 것을 좋아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와 같은 오해를 오랫동안
해왔던 여러분과 저입니다.
이제는 자녀로서의 성숙함으로
부모님과 노인들, 어른들을
공경하며 존중하는 성도들
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마태복음 15: 1-10
70평생을 시골에서 흙과 더불어 살아오신 한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그 어머니의 칠순이 다가오자 6남매가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10년 전 어머니의 회갑 때도 그냥 넘긴 것을 안타깝게 여긴 6남매는 불효를 만회할 겸 이번 어머니의 칠순에는 금강산 구경을 시켜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무슨 금강산 여행이냐? 간단히 식사나 하고 남은 건 내 용돈으로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식들은 맥이 빠지고 속이 상한 딸이 “어머니는 돈이 그렇게도 좋으세요? 지난 회갑 때도 잔치할 돈을 달라해서 그 돈으로 시멘트를 사서 시골 마당을 포장하시더니...이번에도 못하게 하세요. 왜 자식들에게 아쉬움만 남기려고 그러세요.”하고 전화를 끊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잠시 뒤에 다시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너희는 에미를 돈만 아는 늙은이로밖에 생각 못하냐? 멀쩡한 아들이 마흔이 넘도록 혼자인데 유람이 웬말이냐!”하며 무척 노여워하셨습니다. “동생만 자식이예요? 우리도 엄마 자식이잖아요.” “그렇긴 하다마는... 하지만 알아서 잘살고 있는 너희보다 홀로서기를 못하는 자식 하나가 이 에미에게는 더 마음 쓰이는 걸 어쩌겠냐. 그리고 내 회갑 때 마당 한 게 두고 두고 너희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그게 얼마나 나를 기쁘게 했는지 밤이면 혼자서 춤을 추듯 마당을 서성댄단다. 추수 때가 되면 옆집 마당을 종종 빌렸는데 하루는 술 한 잔 하신 그 집 어른이 ‘이곳이 당신네 마당이야. 그리 좋으면 당신네 마당도 포장해서 쓰면 될 것 아니야.’ 하는 말에 이 에미는 너무도 서러웠단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어머니가 회갑 잔치할 돈을 왜 달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난 자식들은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육남매는 이번 칠순에는 가족체육대회를 열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로 했다고 합니다.
아이가 어눌한 말로 표현하는 것을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해도 엄마는 알아 듣습니다. 하지만 열 명의 자식이 있어도 부모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는 자식은 많지 않습니다. 해서 옛말에 부모님은 열 자식을 보살피고 양육하지만 열 자식은 한 명의 부모님도 모시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최근에 어느 결혼정보회사에서 20~30대 미혼남녀를 상대로 결혼하면 부모님과 살겠느냐 하고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여자의 93.4%, 남자의 43.6%가 (시)부모와 같이 살지 않겠다고 응답했고 합니다. 이기적이고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길들여진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의 곁을 떠나야 자유로울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식을 낳아 맡길 때가 없으면, 아쉬운 일이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부모를 찾아와서 아이들을 맡아달라고 하소연합니다. 이것이 자식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식들을 향해 잠언 기자를 통해서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잠언 23:25)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님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고 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밴 하겐은 말하기를 “어머니는 하나님이 세상에 보낸 대사요 최초의 스승이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자의 매력은 짧지만 어머니의 감화는 긴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믿음의 제자들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첫 번째 계명입니다. 이 계명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 받기 원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고 일이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복을 받기를 원하면서 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부모를 공경하고 잘 봉양함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상대적이지 않습니다. 부모에 대한 공경은 절대적이요 무조건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데 경제적인 구실이나 사회적인 여건이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종교적인 이유도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당신의 제자들은 왜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느냐’고 책망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은 떡을 먹을 때에 손도 씻지 않고 먹는다고 비난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는 것에 더 집착했습니다. 법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처음 만들 때는 목적이 있고 법이 지향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의 의도는 사라지고 이상하게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위해서 만든 법이 사람을 옭아매는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잘 지키기 위해서 전통이나 장로들의 유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장로들의 유전에 더 집착하게 되고, 참된 경건을 율법주의로 대체시켰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고르반입니다. “내가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니 부모님께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는 부모를 소홀히 대해도 상관없다는 것이 장로의 유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장로의 유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약속있는 계명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어떤 것으로도 변명의 구실이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 사업을 위하는 일이라고 변명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교회 일을 한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에 소홀히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혹시나 헌금한다는 핑계로 부모님께 용돈의 액수가 줄어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기 때문에 부모님을 봉양할 시간이 없다고 변명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것은 효의 절대성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효의 상대성을 가지고 대합니다. 부모님이 내게 수고하셨으니까 내가 공경해야 하고, 부모님이 내게 해 준 것이 없는데 내가 무엇으로 공경한다는 말인가?하고 투덜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본문 5절과 6절에서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셨느니라. 그런데 너희는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고 하느냐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세상의 종교들을 보십시오. 자식들이 부모를 공경하지 않을 때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거나 양심의 가책을 받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종교들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 크고 절대적입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거나 훼방했다고 자식을 죽이라고 하는 법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부모를 공경하다’는 말은 순종하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경한다는 말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오는 순종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재산 때문에 공경하는 척 하는 자식들이 적잖게 있습니다. 그러나 공경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경은 자식으로서 어쩔 수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가 나를 낳아 주기만 했지 해준 것이 뭐가 있다고, 왜 내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느냐고 투덜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공경은 의무감에서 나온 순종이 아닙니다. 의무감에서 나온 순종은 불평이 따릅니다. 공경은 부모를 잘못 섬겼을 때 해를 받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구박하고 소홀히 하다가 죽고 나면 제사를 아주 정성껏 드립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살아계실 때는 힘이 없는 부모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고나서 귀신이 되어 힘이 강해지는데,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부모가 죽은 귀신이 되어 해를 입힌다고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제사드리는 것도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자신이 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말 속에는 사랑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효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효(孝)라는 단어가 어디서 유래된지 아십니까? 옛날 시골에는 주로 닷새만에 장이 서게 됩니다. 장이 서는 날이면 아들이 나무짐을 지게에 지고 장에 팔러 갑니다. 늦은 저녁이 되어가면 어머니는 아들이 이제나 저제나 올까 하고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동구 밖까지 나와 기다립니다. 아들은 시장에 가서 나무를 팔아 어머니께 드릴 반찬과 몇 가지 일용품을 사들고 오다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를 만납니다. 아들은 마중나온 어머니에게 “어머니, 다리 아프실 텐데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제가 업어들릴 테니까 이 지게 위에 타십시오.” 그렇게 해서 노인을 지게에 태우고 오는 아들의 모습을 따서 효(孝)자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공경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한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님의 권위를 높여드리고 우러르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공경이란 자식들의 마음에 존경과 존중히 여기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경은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동일한 권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가장 힘들고 어려운 관계가 고부관계라고 합니다. 고부간의 갈등은 어찌나 어려운지 요단강을 건너가야 해결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속이 있어 웃으시구만요. 유태인은 결혼하면 부모와 한 집에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어느 편이 나빠서가 아니라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잘 어울리지 못하는 속성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속담에 “고부가 한 집에 사는 것은 고양이 두 마리를 한 가방 속에 넣어 기르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은 이브이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에덴동산에 사는 이브에게 시어머니가 없었기 때문이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잘 공경하고 봉양함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고 다윗의 할머니가 되어 하나님의 구속사에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공경은 부모로부터 받은 긍휼적인 사랑에 감사하며 응답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미 사랑을 받은 데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이 깃들어 있어서 이에 대해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경에는 이기적인 계산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계산없이 항상 감사함으로 공경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부부가 지난 화요일 어버이날을 보내며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딸의 성화에 못이겨 백화점에 끌려가 좋은 옷 한 벌 얻어입고 한식집에 가서 냉면도 대접받았습니다. 그날따라 이들 부부처럼 자식들에 이끌려온 부모들이 많았습니다. 가게마다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자식들은 좋은 옷을 입히려고 하고 부모는 자식들이 부담될까봐 너무 비싸서 못입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식들은 왕갈비를 대접하겠다고 하고, 부모들은 설렁탕이나 한 그릇 먹으면 됐지... 합니다. 그렇게 해서 물냉면을 얻어 먹는데 그게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더랍니다. 어버이라고 냉면을 대접받으면서 이들 부부는 “생전에 우리 부모님이 냉면을 그렇게도 좋아하셨는데...” 그걸 사주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던 것입니다. 속 모르는 딸은 “왜 냉면을 드시다 말고 그러고 있어요. 냉면 맛이 없어서 그래요?...” 하지만 이들 부부는 부모라고 대접을 받으면서... “자식에게 한 그릇 더 먹이실려고 ‘늘 배부르시다고..., 오늘은 속이 더부룩하시다면서 자식들에게 음식을 덜어주시던 부모님의 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철이들고 부모의 마음을 알 때쯤에는 자식의 곁에서 이미 떠나가시고 없으시니 공경하고 싶어도 공경할 수 없는 불효자의 마음으로 울었다고 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할 때 형편따지지 말고, 이것 저것 재지말고 공경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러면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부모님의 존재를 늘 인정하는 것이 공경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이미 맞춰놓은 기성품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내려진 여호와이레의 복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의 합작품입니다. 이삭의 효도는 힘(능력)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절대순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려고 이삭을 번제로 드릴려고 했을 때, 이삭이 ‘아버지 정신나갔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하고 불순종했다면 그 가정에 여호와이레의 복은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믿음 안에 있는 아버지께 절대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과 수고를 인정하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빅터 후고는 말하기를 “한 훌륭한 어머니는 백 사람의 교사보다 낫다. 어떤 마귀라도 기도하는 어머니에게서 자녀를 빼앗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기도하시는 부모님이 꼭 필요하다고 그 실체를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경건한 어머니를 둔 자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가 여러분의 곁에 있을 때 그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버지가 그 곁에 있을 때 자녀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그 기도 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힘을 제공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모님의 선하심을 인정할 때 살아계신 부모님께 기쁜 마음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불효자식이 효자가 될 수 있는 길은 화장터에 가게 하는 것입니다. 불구덩이 속으로 부모님을 들여 보내는 이 땅에서의 마지막 작별을 지켜보는 순간을 보게 하고 잠시 후에 한 줌의 재가 되어 다가온 망자(亡者)를 맞이할 때 불효자가 다시 태어난다고 합니다.
진정한 공경은 나 자신이 부모의 자녀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늙어가는 부모,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는 부모님을 부끄러워 마십시다. 사람은 누구나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약한 생물 중에 가시고기와 우렁이가 있습니다. 가시고기는 산란기에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나면 수컷이 알이 부화될 때까지 신선한 공기를 제공하고, 침입자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가다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 때에 생(生)을 마감하는 작은 물고기입니다. 이 가시고기의 모습은 가족을 위해 수고하다 조용히 세상을 마감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렁이는 제 몸에다 알을 낳고 새끼들이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성장한다고 합니다. 한 점의 살도 남김없이 새끼들에게 먹이로 주고 빈 껍데기가 되어 조용히 물에 떠내려 가는 것이 우렁이의 삶입니다. 어쩌면 이 모습이 어머니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비록 아는 것이 많지 않은 부모 밑에서 자라났다고 할지라도 믿음의 사람은 의로운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가진 것이 없고, 지위는 높지 않지만 성도는 덕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식들이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은 후대를 믿음으로 잘 양육해서 가문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부모를 공경함으로 믿음의 자녀가, 믿음의 가정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그대의 가정이 구역이 되게 하고 그대의 식구가 교회가 되게 하며 그대의 안방이 성소가 되게 하고 그대의 무릎이 제단이 되게 하시오.”하고 권면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있는 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지키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있는 계명을 지킴으로 믿음의 가정이 평화를 누리고 생명과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예배에로 부름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예배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와 허물이 많은 저희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자녀된 저희들의 찬미를 받아 주옵소서. 이 땅에 사는 날 동안 육신의 부모님을 주 안에서 공경하며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생명을 누리고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지키게 하시고 은혜 속에 거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 예배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백의 기도
사랑이 많으신 주님!
저희에게 어버이 주일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부모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뒤돌아 볼수록 염치없고 부끄러운 자녀로 서 있는 저희를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어버이의 헌신적인 사랑 안에서 자라나고 성장해서 공경할 처지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헌신적인 사랑을 요구하고 있는 자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부모님의 사랑에 감사하기 보다 서운했던 감정을 더 많이 간직하고 더 많은 것을 받지 못했다고 투덜대며 부모님 곁에서 멀어지고 불복종했던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부모님을 배반한 저희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척 하며 분주했던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결코 사랑받을 만한 자녀들이 아니지만 사랑하시는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사함의 확신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과 평안이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자의 복
잠언 8장 32-36
어떤 엄마가 외출했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이제 초등학교 3학년인 딸 아이가 아주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책을 읽고 있는 딸 아이를 보니 기분이 매우 좋았습니다. “무슨 책인데 저렇게 열심히 보고 있나?” 궁금해서 옆에 가서 보았더니 『육아교육법』이란 책이었습니다. 엄마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왜 그런 책을 보고 있는 거냐?”하고 물었습니다. 딸 아이가 엄마를 쳐다보면서 “교육적인 측면에서 내가 교육을 잘 받고 있는지 그것을 살피고 있는 거예요.”하고 대답하더랍니다. 요즘 아이들이 이렇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이기적입니다. 뭔가 순서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사람으로서의 도리나 윤리성을 배우기 이전에 실리부터 배우고 자라나고 있습니다.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양육보다 실리적인 지식교육을 선호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는 기쁨을 알기 전에 받는 기쁨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이것을 누구 탓으로 돌리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가정이나 학교교육이 실리적인 인간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교육의 목표는 실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가치를 아는 지성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새 아이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돈을 많이 벌어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어합니다. 고액연봉을 받는 운동선수를 부러워합니다. 제2, 3의 박찬호를 꿈꾸며 메이저리거가 되겠다는 아이들, 제 2, 3의 박세리가 되겠다고 꿈꾸는 아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아이는 야구방망이를 들고 아무 데서나 휘둘러댑니다. 그러다 보니 사고치고 남의 유리창을 깨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하도 말썽을 부린 아들 때문에 속이 상한 엄마가 아들에게 “이 웬수야, 너 때문에 정말 못살겠다. 못살겠어. 너 때문에 엄마 이마에 주름살 늘어가는 것 좀 봐라.” 그러면 이 아이 얼굴 빛 하나 변하지 않고 “엄마는 얼마나 할머니 속을 썩였으면 할머니 얼굴에 주름살이 저렇게 많이 생겼어요?”하고 엄마에게 대꾸합니다.
요즘은 어수룩한 세상이 아닙니다. 엄마라고 해서, 어른이라고 해서 봐주는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세월로 축적되는 지식과 지혜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연륜으로 쌓이는 지혜보다 톡톡 튀는 기발함이 더 중시되는 시대입니다. 정보화 시대에 유행하는 단어가 전자유친(電子有親)이요 컴퓨터유친(有親)입니다.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에 마음을 빼앗긴 부모들은 자식들과 관계가 더욱 단절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부(모)자무친(父母子無親)’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보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자녀들을 양육해야 합니까? 오늘날 많은 부모들이 자녀 양육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합니다. 어떻게 가르쳐야 잘 가르치는지 해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은 가정의 달, 5월을 앞두고 매년 4월 마지막 일주일은 ‘TV 안보는 주간’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600만명 이상의 미국인들이 TV를 꺼놓고 가족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산책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부모와 자녀들의 친밀도는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자식들과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자녀들을 양육하고 있습니까? 시편 127편 3절에 보면,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다”고 말했습니다. 정말로 그렇다고 공감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요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컴퓨터 게임이나 인터넷에 자식을 빼앗긴 부모들은 자식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은 고사하고 부모의 속을 썩이는 웬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 가정들이 자녀들의 문제로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고 하나님이 주신 상급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세상 지식에 앞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양육해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고 지혜로운 영으로 채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지식은 돈과 같아서 많이 가질수록 더 많이 가지고 싶어합니다. 지식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효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모르는 지식은 이기적인 인간이 되어 사람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의 핵심은 머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다듬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슴을 다듬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믿음이 배움보다 낫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배운 것이 적어도 지혜롭게 삽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은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지식을 가진 사람을 크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믿음의 지식을 가졌을 때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잠언 기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32절을 보십시오.
“아들들아 이제 내게 들으라 내 도를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잘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살아있는 말씀은 운동력이 있어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살아있는 말씀은 단순한 지식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이 되게 합니다. 미련한 것 속에서 지혜를 보게 하고, 약한 것들 속에서 진정으로 강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5절에서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 말했습니다. 지식이 조금 부족해도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영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에 계획하고 판단하는 것이 뛰어나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로 발탁되게 된 비결은 애굽의 지식, 문화, 문명에 익숙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로운 영을 통해서 미래를 예측하고 미래의 대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믿음의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비록 자식들에게 남겨 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자식을 통하여, 자식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식은 말로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도록 믿음을 훈련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부모가 말씀을 지키고 경건을 훈련해야 합니다. 좋은 교육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자식들은 부모의 신앙적 자세를 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부모가 교회를 어떻게 섬기는지, 부모님의 경건성을 보고 자라는 것입니다.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19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자기 인생을 찾겠다고 하는 현대 여성들은 수산나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2년 터울로 자녀를 낳았다고 하면 38년 동안 아이를 낳고 기른 것입니다. 현대 여성들은 자식 하나, 둘 키우기도 버겁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수산나는 19명의 자식들을 모두 다 훌륭하게 키워냈습니다. 그 비결을 물었을 때, 수산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녀의 입이 열리면 제일 먼저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잔소리 같지만 계속해서 우리의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아이들의 마음에 지혜로운 영을 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라 갈 때 아이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게 되었습니다.”하고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녀들이 가까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 훈계를 받을 때에 인생의 목표가 바르게 정해지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아브라함 링컨 만큼 인생의 쓴맛을 경험하고 실패를 맛본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는 성공보다 실패의 연속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하원의원에 도전했다가 두 번이나 실패하고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좌절을 맛보았습니다. 부통령 지명전에 나섰다가 100표 차이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약혼녀를 잃은 아픔을 맛보기도 했고, 자식을 둘씩이나 먼저 떠나 보내야 했습니다. 아들이 벌여놓은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자 대신 빚을 갚기 위해서 17년간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미국의 대통령으로 정상에 우뚝섰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의 현재의 생활 전부와 내가 장차 바라는 생활의 전부는 천사와 같은 나의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자신을 낳아준 친어머니는 아니었지만 링컨은 그 어머니를 천사와 같은 어머니로, 그분에게서 배운 삶과 믿음이 자신을 정상에 올려 놓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자식들이 “나의 어머니는 천사와 같은 분이었다”고 고백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언제나 가까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잘 아시는 분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모님에게 복을 주신
그 복이 오늘 나에게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고백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사람은 지혜를 버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혜를 버리는 사람을 버리십니다. 오늘 본문 36절에 보면, “나를 잃는 자는 자기 영혼을 해하는 자라 무릇 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영혼을 지켜줍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는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로 대치해서 읽어도 뜻이 통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를 잃는 자는 자기 영혼을 해하는 자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미워하는 자는 사망을 사랑하느니라.” 어떻습니까? 뜻이 통하지 않습니까? 맥캐니는 말하기를 “인간의 교육은 지성을 창조할 수 없고 다만 이를 훈련시킬 따름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사람을 바꿀 힘이 없습니다. 범죄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인 교도소에 아무리 똑똑한 지식인을 배치해 두고 상담을 하고 교육을 해도 사람이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자기 영혼을 해하는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지혜를 버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지혜인 예수님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혜를 버린 사람은 자기의 영혼을 해치고, 지혜를 미워하는 자는 죽음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최근에 경기도 교육감 비리에 연루된 어느 초등학교 교장이 수원지검 성남지청에서 자신의 심경을 담담하게 털어놓았습니다. 구깃구깃한 양복을 입고 분필가루 마셔대며 코흘리게들에게 ‘바른 길만 가라’고 가르쳤습니다. 그후에 졸업한 제자들이 찾아와서 ‘스승의 은혜’를 불러주던 존경받는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단에 선지 17년이 지나도록 저는 교감 자리 하나 얻지 못하고 벽지 학교로 전출가야했습니다. 동료들과 후배들이 자신보다 먼저 승진하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아내 몰래 박봉을 쪼개 모은 돈으로 교장을 찾아가서 좋은 인사평점을 부탁했습니다. 교육감과 인사권자를 찾아가 촌지를 주고 줄대기를 시도했습니다. 그런 후에 7년만에 교감이 되고, 교감이 된 뒤 7년만에 교장이 되었습니다. 교장이 되고 난 지금은 인사청탁 연루자가 되어 검찰청을 드나들며 수모 아닌 수모를 겪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성전문 곁에서 지혜를 듣고 문설주 옆에서 지혜를 기다리는 자에게 두 가지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생명을 얻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여호와께 은총을 받게 됩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하며 기다렸을 때 그에게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얻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문 곁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영적인 혼란기를 겪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하나님의 훈계를 듣는 사람은 하나님의 지혜를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생명을 사랑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버려진 인생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듬어 창조적인 지성으로 만들어 냅니다. 지혜의 영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잠실구장에서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릴 때에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애덤 킹(한국명:오인호)군이 개막전 시구를 했는데,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킹군은 태어날 때부터 손가락이 모두 붙은데다 뼈가 굳으며 다리가 썩어들어가는 희귀질병을 앓고 있는 중증장애인이었습니다. 친부모가 키울 수 없어 버려진 이 아이는 1995년에 미국인에게 입양되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모레노밸리에 사는 찬스 로버트 킹씨와 도나 킹씨 부부는 킹군을 입양한 후에 세 차례에 걸쳐 손가락 분리수술과 허벅지 아래를 잘라내는 수술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티타늄으로 만든 금속 다리로 걸어다닙니다. 잠실 구장에서 시구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어느 국회의원은 매년 늘어나는 고아들을 해외에 입양하는 것은 국가적인 불명예다고 외치면서 국회에서 만든 것이 해외입양아 할당제였습니다. 그런데 애덤 킹군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닮은 인간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한국에서 고아들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고아수출국의 불명예만 법안을 만들었던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부끄럽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뉘우쳤다고 했습니다.
누가 이처럼 버려진 아이를 받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생명으로 만들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이 아이가 한국에 있었다면 장애아시설 수용소에서 누워서 뒤척거리다가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킹씨 부부는 버려진 장애 아이를 데려다가 사랑으로 돌보며 믿음으로 키워내서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세워놓았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영혼을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잠언 3장 18절에 보면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생명의 복은 날마다 말씀 곁에서 기다리는 자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주님의 곁에서 말씀을 듣고 기다렸을 때에 “네가 좋은 것을 선택했다. 마리아가 복되다”고 칭찬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날마다 말씀 곁에서 기다리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말씀 곁에 있을 때 생명의 말씀을 주시고 생명을 얻게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자녀들이 생명의 말씀을 가까이 하여 지혜를 얻고 생명을 얻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늘 기다리며 생명의 말씀이 선포될 때 하나님께 은총을 얻는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배에로 부름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지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 3, 4)
예배 기도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
온 땅이 푸르름이 더욱 짙어가는 오월을 맞이하여 믿음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절 기간에 내리시는 은총이 믿음의 가정을 세우고 사랑의 울타리를 만들게 하옵소서. 여기 믿음의 자녀들이 은혜로운 날에 주님의 전에 모였습니다. 순수하고 정직한 모습으로 주님을 영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백의 기도
주의 사랑으로 늘 안아 주시는 주님!
오월의 햇살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지만 어버이의 사랑은 항상 따스함을 느낍니다. 문명의 이기가 좋은 세상을 만들 것 같아 보였는데 타락의 도구가 되어 사람들의 인성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순수해야 할 어린이들의 인성이 망가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의 부모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알지 못해 방황하고 있습니다. 저희들 또한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려고 노력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저희 연약한 자들에게 주의 사랑으로 강권하셔서 무지와 교만한 마음을 벗어 버리게 하옵소서.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을 회복하게 하옵소서. 순수한 믿음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내 안에 남아 있는 죄와 허물을 생각하며 조용히 참회의 기도를 드립니다.
사함의 확신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가지 환난에서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욥 5:18-19)
부모님께 효도를
(엡6장1-4)
당신은 내가 만난 맨 처음의 사람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란 것을
몸으로 가르치신 분도 당신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5월의 웃음
주고도 떨어지지 않는 바다여.
우리는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너무 먼 곳에 계신 뒤에야
사랑은 이토록 강물 되어 흐르고
우리 또한 당신이 되어
이제야 그 사랑을 깨닫습니다.
고훈 목사가 쓴
[어머니]란 제목의 時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장 가브리엘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세 가지를 가지고 올라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천사장 가브리엘은 세상에 다니면서 곳곳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보았습니다.
활짝 핀 향기로운 꽃송이를 제일 먼저 뽑았고 둘째는 활짝 웃는 순진한 어린 아이의 웃음을 세 번째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활짝 핀 꽃송이. 순진한 어린아이의 웃음,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천사장 가브리엘이 이 세 가지를 구해서 하늘로 올라가는 동안 꽃은 시들어 버리고 말았고, 그렇게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녔던 어린 아이는 이미 늙어버린 남정네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 남은 어머니의 사랑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변함없는 어머니의 사랑만 가져다 바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톨스토이의 이야기입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이 없는
것은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우리 어머니들 가슴속에 하나님의
사랑 한 조각을 안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비슷하게 닮은 것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시인 윤동주의 "별을 헤는 밤“
이라는 시에 이런 싯구가 있습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참 아름다운 시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도 어머니 가슴 속에서, 별 하나에 사랑도 어머니의 그 사랑 속에서, 시작과 끝을 어머니의 사랑 속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머니의 품속에서 나서 다시 어머니의 품속으로 돌아갑니다.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바로 어머니의 품속이 우리 고향의 시발점이었으며 어머니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모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데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하는 효도가 너무도 많이 변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 비극을 가져온 원인입니다.
성경은 부모님의 명령에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부모를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거룩한 마음이 상실된 인간 속에는 결코 부모를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깃들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두 가지의 관계를 잘 유지해 나가야 하는데 하나는 수직적인 관계요, 또 다른 하나는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수직적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고 수평적인 관계는 인간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수평적인 인간 관계의 계명 중에 첫째 되는 계명이 바로 제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고 이것은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네가 잘 되고 장수하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약속 있는 첫 계명은 가정의 질서와 행복의 기초가 됩니다.
이 세상에 많은 제도와 기구와 조직체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조직체는 교회와 가정 밖에 없습니다. 교회보다도 가정을 먼저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교회와 더불어 하나님이 세우신 신성한 조직체입니다.
가정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사탄은 가정을 파괴시키려고 여러 가지로 시험할 때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형과 동생의 관계를 이간시켜 파괴하려고 하는 때가 많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가족의 관계 중에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자녀들이 어버이께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맨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식들이 부모를 업신여기는 중에 형제간에 우애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를 거역하면서 부부의 정상적인 관계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가정 행복의 기초는 부모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효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가정 질서의 기초는 어버이의 은공을 기억하는 효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 무시되는 날 그 가정의 질서와 항복도 무너지고 맙니다.
영어에 가장 엄숙한 말이 있는데 그것은 어머니(Mother), 가정(Home), 하늘(Heaven)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좋은 선물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부모와 가정입니다. 경쟁의 몸부림 속에서 피곤한 육신을 끌고 사람들은 가정을 찾아갑니다. 가정은 휴식처이고 안식처입니다. 또 용기를 주는 곳이고 안식처입니다. 인생의 배신과 패배와 쓰라림을 당했을 때 부모를 찾아갑니다. 부모님은 따뜻한 손길로 아픔을 쓰다듬으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기는 우리가 낳고 자란 요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의 산물이요, 희망의 산물이요, 정성의 산물입니다. 부모의 깊은 사랑 속에서 우리의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납니다. 부모는 그 어린 생명에게 전 희망을 겁니다. 훌륭하고 좋은 자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모는 그 어린 생명을 정성을 다해 키웁니다. 여기에는 철저한 자기 희생이 있습니다. 인간사회는 이해 타산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고받는 것이 인간관계의 기본법칙입니다. 이 원칙이 깨질 때 우정도 사제애도 부부애도 금이 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은 이해타산을 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태양과 같고 어머니의 사랑은 샘물과도 같습니다. 태양은 사방에서 빛과 열을 발산합니다. 샘터에서는 샘물이 철철 넘쳐흐릅니다. 우리는 사랑의 태양 아래서 사랑의 맑은 샘물을 마셔가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키웁니다.
어머니가 쏟아 주는 사랑은 순수한 것입니다. 받기 위해 준 것이 아니고 아깝다고 생각하는 후회가 추호도 없이 일방적으로 쏟아주는 진짜 사랑입니다. 샘내지도 않고 섭섭함도 없이 그저 기쁘기 때문에 주는 고귀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몸은 밥을 먹어 자랐지만 우리의 정신과 인격은 부모님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진실하고 티가 없으며 깊은데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너무나 숭고하기 때문에 그 자녀가 철이 들기 전에는 도저히 부모님의 높은 사랑과 은공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슬픈 것은 우리가 철이 들 그때에는 부모님이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효도를 별로 해보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행복은 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만남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한 인간의 미래를 그 어머니가 결정한다는 말은 어머니의 사랑이 인간의 행복과 얼마나 긴밀한 연관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눈동자보다 맑은 것이 없으며 아이들에게 둘러 쌓인 어머니보다 더 경애스러운 모습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랑의 우물은 마르지만 어머니의 사랑의 우물은 마르는 법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어머니는 부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 가난한 어머니는 하나도 없고, 보기 흉한 어머니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어머니는 아름답습니다. 그 넓은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마르지 않고 영원히 솟는 샘이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어머니도 영원히 솟는 샘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포기가 없습니다. 반딧불 만한 희망만 있어도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가치를 말하려고 합니다.
아버지란 아이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존재입니다.
아버지의 미소 속에는 아이를 위한 장래의 걱정이 있고,
아버지의 주머니 속에는 아이를 위한 희생적 준비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 속에는 아이에게 훌륭한 모범이 못되고 있다는 가책이 있고,
아버지의 심장 속에는 좀 더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결심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일터로 나가지만 그 머릿 속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울고 겉으로 위로하는 자입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사랑하고 겉으로 책망하는 자입니다.
아버지는 엄한 얼굴을 가졌으나 부드러운 심장을 가진 자입니다.
아버지는 최후까지 존재하는 아이의 고향이며,
배신하지 않는 아이의 친구입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두려움과 자비, 위엄과 사랑의 양면을 동시에 가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의 아름다움은 그 깊이에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나타내 보이는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깊은 곳으로부터 출발된 사랑입니다.
사랑의 깊이란 누구를 위하여 고통을 대신 당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그 자녀를 위하여 넉넉한 고통을 지불하며 양육하기에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돈이나 시간 등을 쓸 수 있지만 생명을 주기까지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깊이를 가진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합니다. 생각나는 대로 요구합니다. 그러나 연로한 부모님들은 자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혹시나 자식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이리 망설이고 저리 망설이고, 웬만하면 참습니다.
잠언23:25절에서는 "네 부모를 즐겁게 하여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는데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몇 가지 제안을 말하려고 합니다.
부모효도 10계
1. 부모님과 가능한 많은 대화를 나누십시오.
부모는 자식과 대화의 시간을 가장 즐거워하십니다. 가능한 한 형제들과 같이 모여 대화를 나누십시오.
2. 부모님께 일감을 드리십시오. 효란 부모님을 방구석에 가만히 모셔만 놓은 것이 아닙니다. 일은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3. 부모님도 취미를 가지시도록 도와 드리십시오.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즐길 수 있도록 하십시오.
4. 여행의 기회를 드리십시오. 노인은 새로운 분위기와 경험을 즐기십시오. 집 안에만 머물게 하지 마시고 때때로 멀리 떨어져 사는 친척집을 방문케 하십시오. 노인은 친척들을 연결시켜 주는 끈이 됩니다.
5.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연세가 드시면 기억력도 쇠약해지고, 마음도 소심해 지고, 잔소리도 좀 늘게 되고, 공연한 고집도 부릴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파악하십시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미리 알아 해드리십시오.
6. 가족끼리 외출할 때 노부모님도 종종 모시고 가도록 노력하십시오. 어린 자녀들만 데리고 나가는 아들과 며느리에 대해 섭섭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7. 집에 손님이 오면 부모님께 먼저 인사드리도록 한 후 대화를 나누십시오. 이런 예법을 어린 손자 손녀들에게 가르치십시오.
8. 사소한 병이라도 나시면 꼭 병원으로 가십시오. 연세가 드실수록 생명에 대한 애착, 건강에 대한 근심이 더 많아집니다.
9. 매월 일정한 용돈을 드리십시오. 부모님의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드리시면 더욱 좋아하실 것입니다.
10.부모님께 신상의 기회를 드리십시오. 천주의 안내자가 될 때 가장 큰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하신 말씀이 여러분의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버이의 즐거움
(잠23장19-25)
시인 피천득씨의 글 가운데 아름다운 글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노래입니다. "30대에 세상을 떠난 내 어머니는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내가 새 한 마리도 죽이지 아니하고 살아온 것은 내 엄마의 자애로운 마음이요, 햇빛 속에 웃는 나의 미소는 내 어머니한테서 배운 웃음입니다. 나의 간절한 희망이 있다면 내 어머니의 아들로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자녀들의 마음은 이렇게 어머니의 숨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풍요로운 사랑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 땅에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주며 살 수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에서 가장 고마우신 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나누어주신 분입니다. 때문에 내 아버지 내 어머니는 이 땅에서 우리의 공경을 받아 마땅하신 분들입니다. 세상 최고의 스승이 있다면 아마 하나님을 가르쳐 주신 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최고의 스승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귓전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음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어머니요 가장 위대한 스승 아니겠습니까? 내 어머니는 우리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분이시오, 우리 하나님은 내 어머니 같으신 분이십니다.
프랑스에는 역사상 69명의 왕이 집권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세 사람의 왕만이 백성들로부터 한없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공통점은 모두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친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난 왕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체험한 왕은 그 사랑 때문에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 왕의 마음에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심겨져 있었기에 백성들을 사랑하는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듯 우리 나라도 서구 문화를 반영해서 가족 관계는 급속하게 붕괴되고 부모님을 모시고 효도를 다하며 사는 모습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모 자식간의 인정과 사랑은 끊어지고 메마르고 가시밭 같은 관계로 변하고 있습니다. 문화는 세련되고 경제적으로는 나아졌지만 좋았던 가족 관계는 급속도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던 아름다움은 지난날의 이야기가 되고 있습니다.
가시고기와 우렁이
부성애를 나타내는 가시고기와 모성애가 강한 우렁이가 떠오릅니다.가시고기는 소설로서 더욱 유명합니다.가시고기는 산란기에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나면 숫놈은 알이 부화될 때까지 신선한 공기를 제공하고 침입자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가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 때 생을 마감하는 작은 물고기입니다.가족을 위해 수고하다 조용히 한 세상을 마감하는 아버지들의 함축된 모습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드라마입니다.또 우렁이는 제 몸에다 알을 낳으며 새끼들은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성장합니다.한 점의 살도 남김없이 새끼들에게 먹이로 주고 빈 껍데기가 되어 조용히 물에 떠내려갑니다.가족을 보호하고 울타리가 되는 아버지의 희생과 살을 깎아 먹이는 어머니의 희생은 어디에서 보상받게 될까요?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지만 나이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서서히 짐이 되는 존재로 전락하는 듯 합니다.자녀들이 제 아무리 효도를 다한다 해도 부모의 사랑을 어찌 다 갚을 수 있을까요? 어버이주일에 가시고기와 우렁이를 생각하며 못 다한 효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어버이 주일에는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슴에 새기며 감사하고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자녀들은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마음에
기리며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보다 선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다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몇 년 전에 삼성생명에서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업광고를 냈던 적이 있습니다.
스물 하나 - 당신은 고개를 두 개 넘어 얼굴도 본 적 없는 김씨 댁의 큰아들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스물 여섯 - 시집온 지 오 년만에 자식을 낳았습니다. 당신은 그제서야 시댁 어른들한테 며느리 대접을 받았습니다.
서른 둘 - 자식이 밤늦게 급체를 앓았습니다. 당신은 자식을 업고 읍내 병원까지 밤길 이십 리를 달렸습니다.
마흔 -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당신은 자식이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이면 자식의 외투를 입고 동구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자식에게 당신의 체온으로 덥혀진 외투를 입혀주었습니다.
쉰 둘 -
자식이 결혼할 여자라고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당신은 분칠한 얼굴이 싫었지만 자식이 좋다니까 당신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예순 - 환갑이라고 자식이 모처럼 돈을 보냈습니다. 당신은 그 돈으로 자식의 보약을 지었습니다.
예순 다섯 -
자식 내외가 바쁘다며 명절에 고향에 못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동네 사람들에게 아들이 바빠서 아침 일찍 올라갔다며 당신 평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오직 하나 자식 잘 되기만
을 바라며 살아온 한평생.
하지만 이제는 깊게
주름진 얼굴로 남으신 당신,
우리는 당신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한 아버지의 고백
몇 해 전에 신문에 기고되었던 내용인 한 아버지의 고백입니다. "스물 아홉 살에 그는 열 네 시간을 기다려서 자식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라고 말합니다. 그 부인이 산실에 들어가서 산고를 치르고 있을 때, 그는 문 밖에서 무려 열 네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초조하게 기다려서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른 일곱 살에 그 자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들어가서 우등상장을 타왔을 때 그 걸 액자를 만들어서 방에 걸어놓고 쳐다 볼 때마다 그렇게 행복해했다, 누렇게 바래질 때까지. 마흔 여덟 살에 자식이 대학을 입학한다고 입학시험을 치르게 될 때, 이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기는 했지만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이렇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초조할 수가 없었다. 생애에 있어서 가장 초조한 시간으로 기억된다하는 얘기입니다. 쉰 세 살에 자식이 첫 월급을 타서 아버지 내의를 하나 사왔을 때, 쓸데없는 데 돈을 썼다고 일단 나무랐지만 밤이 늦도록 내의를 입어보고 또 입어보고 만져보면서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예순 한 살에 딸이 시집을 가는 날이었습니다. 딸은 도둑놈 같은 사위 얼굴을 쳐다보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데, 나는 멀찍이 서서 나이 들었지만 처음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 마음입니다. 그저 부모는 자식이 잘 되기만을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은 귀한 것입니다.
부모님을 즐겁게 하라. 그리고 내 자신이 부모님의 길을 즐거워하라. 기쁘게 해드리라고 말합니다. 역시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일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라고. 존재의 가치를. 그의 지혜, 그의 경험, 그의 사랑 그리고 그 깊은 잔소리 속에 중요한 교훈이 있음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는 구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측은히 여기던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효가 아닙니다. 부모는 공경하는 것입니다. 존경이 없는 사랑은 결코 효도일 수가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지 마시고 높이 존경하고 그 지혜와 경험과 그 거룩한 본을 우리가 존중해야 됩니다.
또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효할 수 있는 길은 의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아야 됩니다. 부모님의 마음이라는 것은 깊은 도덕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높은 도덕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은 언제나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효의 지름길은 내가 의롭게 사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을 보상해 드려야 하니까요.
또 하나는 지혜로운 자가 되여야 한다고 성경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듣는 지혜를 가져야 됩니다. 청종하는 지혜입니다.
또 한가지 오늘 성경이 증거하시는 것은 "내 길을 즐거워하라." 고 말합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길은 부모님의 길, 그의 선택, 그의 철학, 그의 이상, 그의 살아온 생을 내가 기뻐해야 됩니다. 부모님은 마음속에 지금 무언가 잘못 살았다고 하는 그런 후회가 있습니다만 자식의 행위를 통하여, "아닙니다. 부모님은 잘 살았습니다. 성공적으로 살았습니다. 훌륭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님으로 하여금 살아온 생에 대하여 후회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걸 자랑하게 만들 수 있도록 부끄러운 일생을 자식이 보상해 주어야 됩니다. 이보다 더 큰 효도는 없습니다.
효 그 자체가 복입니다. 효가 있는 가정이 복됩니다. 효가 복의 근본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여러분, 자녀교육을 바로 하고 싶습니까? 효도하십시오. 그리고 내버려둬도 자녀들은 저절로 훌륭하게 자라게 될 것입니다.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내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즐겁게 합시다. 효는 문화의 유산이 아닙니다. 효는 이 나라의 단순한 도덕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적 진리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이 크나큰 원리와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사회에서 노인은 인생 막바지 황혼을 걷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인생 안식년으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년에 일을 할 수 없다 해도 심리적인 열등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구약성서나 유대인의 전통에서 노년기는 구원의 희망을 향해 가는 시기요 인간 성숙의 정점인 자기 실현을 위한 안식년에 접어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인간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고귀한 목적에 자신을 바치게 됩니다.
사람이 늙으면 세 가지
서글픔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로, 아픈 데가 많습니다.
늙으면 몸이 노쇠함으로
자연히 아픈 데가 많아집니다.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쑤시고 무릎도 아픕니다.
그러나 대부분 자식들의
눈치보느라 아파도 아픈
내색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어디가
아프신지 관심을 가지고
자주 물어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외로움을 잘 타십니다.
젊었을 때는 바빴지만 늙으면 한가해집니다. 젊어서는 하는 일이 많다 보니 만나는 사람도 많고 외로워할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현역에서 물러나 일손을 놓으셨기 때문에 한가해지고 만나는 사람도 적어집니다. 시간은 많은데 하는 일이 적어 외로운 시간이 많습니다. 시집간 딸 생각, 외국 나간 아들 생각으로 밤낮 자녀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려움은 없는지, 건강한지 늘 궁금해 하십니다. 그러므로 자식들이 자주 찾아 뵙지는 못한다 해도 부모님께 자주 안부 전화를 드려야 합니다.
셋째로, 배고픔을 자주 느끼십니다.
모든 기능이 약해지다 보니 마음뿐이지 많이 잡수실 수가 없습니다. 입맛도 예전 같지 않으십니다. 더구나 많이 잡수시면 탈이 납니다. 그래서 자주 시장기를 느끼십니다. 몸도 허하고 기름기도 없으니 중간 중간 시장하실 때마다 잡수시도록 눈깔사탕이나 땅콩, 과자... 좋아하시는 간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늘 챙겨 드리시기 바랍니다.
효도는 복의 근원이라고 했습니다.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며, 가정이 화목해지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아들 딸도 효자가 될 것입니다. 부모들이 할머니 할아버지께 어떻게 했는지 보고 배웠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 할 것입니다. 어느 분가해간 자녀들은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매번 십일조를 부모님께 보내오는 자녀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하듯이 부모님께도 십일조를 해야 합니다. 그래도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합니다. 노인에 대한 사랑은 곧 자기의 미래에 대한 사랑 곧 자기 사랑입니다. 노인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노인 되었을 때를 생각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효자가 효자를 낳습니다. 노인을 사랑하면 바로 그것은 장차 올 내 미래를 사랑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그 동안 부모님께 불효한 것은 없는지 생각해보시고 이제부터는 참 효도를 하기로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제일 먼저 만난 사람
여러분이 이 땅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님이지요. 부모님은 인간관계의 첫 출발점이십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부모님은 우리에게 가장 많이 웃음을 보여주신 분이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서 가장 많이 눈물을 흘려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아플 적에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 우리가 힘들고 괴로울 때에 가장 많이 걱정하고 염려해 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에 어떤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책임지고 그 필요함을 채워주신 분들이 바로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에게 한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들을 위해서 철저하게 희생하시는 분입니다. 부모님은 자녀들을 위해서 끝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의 뜻에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말씀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강력하게 명령하십니다.
사람은 철이 들고나서야
부모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간다
암전문의로 명성을 날리는 한 의사는 5월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불효자라는 죄책감에 마음이 짓눌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종종 재래시장을 찾곤 하는데 시장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나물을 팔고 계신 할머니를 볼 때마다 고통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런 할머니를 볼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참회의 눈물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나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가난을 벗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막노동을 하셨는데, 막노동을 하던 중에 철근에 깔린 어머니를 구하려고 하다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나물을 캐고 다듬어서 시장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나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요. 어머니는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용돈이라고 내게 기쁜 마음으로 주셨어요. 그런데 나는 그게 싫어서 뿌리치고 달아나곤 했어요. 나는 잘먹고 잘입지는 못했지만 악착같이 공부했지요. 그래서 부자 집 자식들보다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어요. 부자 집 자식들은 그런 나를 미워했어요...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어느 날 4교시 수업이 끝날 때에 친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복도를 보니 낯익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의 어머니가 절뚝거리면서 교실로 들어오시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시장에 내다 팔려고 다듬은 나물 한 봉지를 들고서 찾아오신 겁니다. 그러자 부자 집 아들이 어머니의 절뚝거리는 흉내를 내면서 나에게 ‘야, 너네 엄마 병신이었냐?’ 하며 비아냥거리는 거예요. 순간 교실에 있는 아이들은 ‘와~’ 하며 낄낄대며 웃더라구요. 나는 참을 수 없어서 부자 집 아들을 정신없이 두들겨 패줬지요. 그리고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데, 잘 차려입은 아주머니와 그 부자 집 아들이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며 호통을 치고 있는 거예요.
“아니, 애비 없는 자식은 이래도 되는 거야? 못 배우고 없는 티 내는 거야 뭐야. 자식 교육 좀 잘 시켜. 어디 감히 우리 집 귀한 자식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느냔 말이야. 으응?. 어머니라는 작자가 병신이니 자식 정신이 온전하겠어?”
부자 집 아주머니가 내뱉은 듣기 거북한 말을 듣고서도 어머니는 연신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느 것 하나 당당하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차라리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렸어요.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수업료를 꼬박꼬박 챙겨주셨지요.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나를 불러 조용히 말씀하셨어요. “ooo야, 네 어머니께 잘해드려야 한다. 그리고 어제 주신 나물 맛있게 먹었다고 전해주거라.”...
그후 17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처가(妻家)에서 병원도 개업해 주고 너무나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를 잊고 살았어요. 솔직히 잊고 싶었던 겁니다. 어머니에게는 매달 생활비를 보내드리기는 했지만 한 번도 찾아가 뵙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병원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오는데, 우리 집 앞에서 한 노인과 가정부 아주머니가 싸우고 있는 거예요. 야윈 얼굴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노인이었는데 다리를 절고 있었지요. 그 노인은 바로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 기뻐하면서 “애, oo아, 많이 좋아졌구나.” 하고 다가 오시더라구요. 가정부가 보고 있어서 그랬는지 순간 나는 차가운 말로 어머니를 떠나 보내야 했습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할머니. 저는 oo이가 아니라 최oo입니다.” 어머니는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뒤돌아 가셨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자, 가정부는 “별 노망든 할머니가 다 있다”며 푸념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 후에 나는 한 달 동안 악몽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나머지 나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갔지요. 어머니는 내가 생활비를 보내주었지만 여전히 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물을 팔면서 기침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만히 곁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았어요. 그때 나물을 사려는 한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할머니, 할머니는 자식이 없나요?”하고 물었어요. 어머니는 “아니여. 우리 아들은 서울 큰 병원 의사여. 자꾸 나보고 같이 살자고 하는디. 내가 싫다고 혔어.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자식 신세를 져. 요즘도 자꾸 올라오라는 거 뿌리치느라고 혼났구만. 우리 아들 같은 사람 세상에 둘도 없어. 우리 아들이 효자여, 효자.” 하며 자랑하시면서 나물을 듬뿍 주고 있었어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고도 달려갈 수 없었어요. 곧장 어머니가 살고 있는 다 쓰러져 가는 허름한 집에 들러 방 틈으로 돈 봉투만 넣어두고 돌아왔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1년이 지날 무렵이었어요.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내려 오라”는 부고였습니다. 부고를 받고 시장에 들렀는데, 정말로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어요. 집에는 선생님 혼자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잠시 후에 저를 불렀습니다. “oo아, 내 옆에 와서 잠깐 앉아라.” 선생님은 나에게 어머니가 쓰시던 낯익은 보따리를 주시면서 “풀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보따리를 풀어 보니 돈이 있었습니다. “이거, 돈 아닙니까?” “그래 돈이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 동안 네가 돌아오면, 혹시나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모아두신 돈이란다. 너 하나 믿고 무슨 미련인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너를 기다리셨다. 너에게 잘해주지 못해 항상 미안 해 하시더구나. 내가 가끔 네 어머니의 말동무가 되어 드렸는데, 나에게 네 어머니의 유언을 전하도록 부탁하셨단다. 그리고 네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도 함께 말이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네가 아주 어렸을 적이었다. 너를 키워주신 부모님이 퇴근길에 집에 오는데, 네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는 것을 보셨단다. 마침 너의 부모님은 자식이 없던 터라 너를 데리고 가서 키우기로 했단다. 배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었지만 너를 데리고 와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랐다고 하셨다. 어린 너를 혼자서 집에 둘 수 없어서 항상 공사판에 데리고 다녔는데, 네가 무너지는 철근 밑에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뛰어들었단다. 네 목숨이 위험하게 되자, 너의 아버지가 너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셨는데 그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게 되셨단다. 그러니 너는 아버지의 목숨과 어머니의 다리 덕에 살아났다는 거야. 다리를 다쳐 벌이가 시원치 않아 생활이 어려울 거라고 염려하던 주위 사람들이 네 어머니에게 “키워봤자 소용이 없으니 고아원에 보내라”고 했다는 구나.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너를 버리지 않고 당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키웠다는 거야. 네가 의과대학에 다닐 때에 네 어머니는 암이 걸리셨는데, 그것을 알고도 네 학비를 대기 위해서 병원에 가지 않으셨단다. 그리고 네가 암 전문의가 되어 명성을 날리자, 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너를 보려고 물어물어 서울에 올라가셨다가 집에 내려오셨단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나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허울좋은 인간의 가식에 머리를 들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어머니의 영정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잔잔한 미소로 이 불효자를 바라보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이 불효자를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부모님이 우리의 곁에 가까이 계신 것 같습니까? 아니면 자식들이 부모님 곁에 가까이 있습니까? 사람은 철이 들고나서야 비로소 부모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전문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철이 든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철든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은혜를 알 때 비로소 철이 든 것입니다. 사랑의 깊이를 깨달을 때 철이 든 것입니다. 철들기 전에는 뭐든지 떨떠름합니다. 깊은 맛이 없어요. 철없는 사람에게 사랑은 아래만 보입니다. 내리 사랑만 하는 사람은 아직도 철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철들고 나서야 비로소 위를 바라보는 것 같아요.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것입니다. 철든 신앙인 만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철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철들지 못한 사람은 청개구리처럼 비가 올 때마다 웁니다. 철들지 못한 사람은 어버이날이 다가올 때마다 불효자로서 우는 것입니다. 복은 받았지만 복을 누리며 살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복을 받고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귀한 뜻이
담긴 시 하나를 소개합니다.
오해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첫사랑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 몸은 절대 아프지 않는 어떤 특별한 몸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 꿈도 품은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한 가지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 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이 고와지고 몸매가 날씬해지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좋게 받아들이고 아무 불만도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전화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단 하루라도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웃는 걸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마냥 기뻐만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 외에 아는 여자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배가 빨리 불러 와 좋은 음식 앞에서 먼저 일어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 것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 주머니에는 늘 돈이 얼마쯤은 들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운동도 취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깊고 험한 길을 걸어가도 조금도 두려워하시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객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와 같은 오해를 오랫
동안 해왔던 우리들입니다.
이제는 자녀로서 진정 어
버이의 즐거움을 위해
후회 없는 효도를
다짐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자/
(전3:1-13)
목적을 따라 지으심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누구든지 그 사람이 적당한 때를 따라서 지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 1절 이하에서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날 때와 죽을 때, 심을 때와 뽑을 때, 죽일 때와 치료시킬 때, 헐 때와 세울 때, 울 때와 웃을 때, 슬퍼할 때와 춤출 때, 돌을 던져 버릴 때와 거둘 때, 안을 때와 멀리 할 때, 찾을 때와 잃을 때, 지킬 때와 버릴 때, 찢을 때와 꿰맬 때, 잠잠할 때와 말할 때,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전쟁할 때와 평화할 때"가 있다고 본문에서는 나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11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지으시되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지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장 적절하게 지으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누구든지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지으시고 데려가시고 섭리하신다는 것을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각자의 사명을 주시고 이 세상에 보내셨고 여기에는 빈부의 귀천이나 신분의 고하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합니다. 또한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사명을 깨달아 알고 그 사명에 충실한 것이 아름다우며 어떠한 분야이든지 자기만의 독특한 분야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도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자 다 자신의 위치에 알맞게 목적에 맞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은사가 아름다워 보여서 다른 사람의 흉내를 내게 되면 그 인생은 평생을 노력해도 2류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하여 성공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어떠한 분야이든지 자기만의 독특한 분야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는 것도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자 다 자신의 위치에 알맞게 목적에 맞게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누구든지 자신의 사명을 끝이 나고 나면 하나님께서 데려가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생각할 때에 그 사람의 사명이 끝이 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데려 가실 수 있는가를 말하여도 그것은 아무런 항변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목적에 따라서 살아가기에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가라고 하셨기에 이 세상에 왔고, 또 하나님께서 오라 하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아름다운 삶인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성공 여부는 바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았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어떠한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공적인 인생임을 믿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늘 점검하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심
또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1절에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본성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누구에게나 주셨다는 것입니다. 기왕에 우리가 이 생명으로 끝이 아님을 분명히 알진대 우리는 우리에게 영원성을 우리의 마음에 심어주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도록 하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사람이 누구든지 자신이 미래를 안다면 그는 자신의 미래를 위하여 투자하고 노력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을 바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운명이란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지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도 당장에 이 예배가 끝이 난 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선을 다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 13절에서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라고 전도자는 말합니다. 우리들 중에는 부자들을 무조건 매도하는 분도 있는데 이것도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한 부를 누릴 수 있도록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그가 그만한 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 부로 인하여 그의 인생을 파멸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부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라면 그 누구도 그에게 손가락질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인생으로서의 직무유기이며 하나님을 향하여 충성하지 않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말하기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 현재이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하는 일이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톨스토이는 인간은 누구든지 순간 순간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어떤 분이 미국에서 유학하는 시절에 어떤 분과 한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분의 성격이 조금 유별나서 적응하기가 참으로 힘든 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후배라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서 참고 1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새 학기가 되어서 다른 사람과 살겠다고 방을 바꾸어 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그 선배는 졸업을 해서 한국으로 귀국을 하고 이분은 남아서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학위를 받아서 한국에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구단체에 지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까무러치게 놀란 것은 면접관이 바로 자기가 그토록 싫어서 방을 바꾸어 달라고 했던 그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다 틀렸다고 생각하고 낙담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다시 지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연구단체에서 함께 일해 달라고 연락이 와서 출근을 해보니 면접을 보던 그분이 자신의 상사로 함께 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미국의 기숙사 이야기를 하면서 사과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별일이 아니라는 듯이 그냥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분의 마음에는 함께 있을 때에 조금만 참고 조금만 더 잘할 걸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과 함께 일을 하면서 두고두고 그 일이 마음에 걸려서 항상 조심하게 된다고 합니다. 참으로 사람은 이렇게 자신이 지금 만나는 사람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여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절약하고 최선을 다하고 주어진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하며 지금 만나는 그 사람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생은 어느 날 어느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실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우리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날마다 최선을 다할 때에 정말 우리는 엄청난 일을 하게 됩니다.
본문 12절에서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다"고 전도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하나님의 목적에 맞게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으심의 목적에 따라서 살아가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우리의 마음에 영원성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온전히 나아갑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만을 마음에 모시고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가 됩시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함량미달이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하나님의 기준에 온전히 맞는 자가 됩시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를 통하여 나타내는 자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어린이들이 있는 곳에 희망이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희망을 오늘에 가능케 한 것은 눈물겹게 기도와 희생과 사랑으로 섬겨 오신 어른들이 계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어버이주일입니다. 육신의 어버이들에게 감사를 표시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신앙의 어른들에게도 특별히 감사를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70평생을 시골에서 흙과 더불어 살아오신 한 어머니가 칠순이 다가오자 6남매가 모여 회의를 하였습니다. 10년 전 어머니의 회갑 때도 그냥 넘긴 것을 안타깝게 여긴 6남매는 불효를 만회할 겸 이번 어머니의 칠순에는 금강산 구경을 시켜드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무슨 금강산 여행이냐? 간단히 식사나 하고 남은 건 내 용돈으로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식들은 맥이 빠지고 속이 상한 딸이 “어머니는 돈이 그렇게도 좋으세요? 지난 회갑 때도 잔치할 돈을 달라해서 그 돈으로 시멘트를 사서 시골 마당을 포장하시더니, 이번에도 못하게 하세요. 왜 자식들에게 아쉬움만 남기려고 그러세요.”하고 전화를 끊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잠시 뒤에 다시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너희는 에미를 돈만 아는 늙은이로밖에 생각 못하냐? 멀쩡한 아들이 마흔이 넘도록 혼자인데 유람이 웬 말이냐!”하며 무척 노여워하셨습니다. “동생만 자식이예요? 우리도 엄마 자식이잖아요.” “그렇긴 하다마는, 하지만 알아서 잘살고 있는 너희보다 홀로서기를 못하는 자식 하나가 이 에미에게는 더 마음 쓰이는 걸 어쩌겠냐. 그리고 내 회갑 때 마당 한 게 두고두고 너희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그게 얼마나 나를 기쁘게 했는지 밤이면 혼자서 춤을 추듯 마당을 서성댄단다. 추수 때가 되면 옆집 마당을 종종 빌렸는데 하루는 술 한 잔 하신 그 집 어른이 ‘이곳이 당신네 마당이야. 그리 좋으면 당신네 마당도 포장해서 쓰면 될 것 아니야.’ 하는 말에 이 에미는 너무도 서러웠단다. 그런데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어머니가 회갑 잔치할 돈을 왜 달라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고 난 자식들은 어머니의 뜻을 따르기로 했고 육남매가 이번 칠순에는 가족체육대회를 열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기로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아이가 어눌한 말로 표현하는 것을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해도 엄마는 알아듣습니다. 하지만 열 명의 자식이 있어도 부모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는 자식은 많지 않습니다. 해서 옛말에 부모님은 열 자식을 보살피고 양육하지만 열 자식은 한 명의 부모님도 모시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머니
당신은 내가 만난 맨 처음의 사람입니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란 것을
몸으로 가르치신 분도 당신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5월의 웃음
주고도 떨어지지 않는 바다여.
우리는 너무 늦게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너무
먼 곳에 계신 뒤에야
사랑은 이토록
강물 되어 흐르고
우리 또한 당신이
되어 이제야
그 사랑을 깨닫습니다.
고훈 목사가 쓴 [어머니]란
제목의 時입니다.
칼릴 지브란
“어머니는 모든 것이다
슬픔속의 위안이며
불행속의 희망이고
나약함 속의 힘 그것이다.
어머니는 사랑과 자비
동정과 용서의 뿌리”
라고 말했습니다.
은혜를 알 때 비로소 철이 드는 것이다
여러분은 부모님이 여러분 곁에 가까이 계신 것 같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부모님 곁에 가까이 있습니까? 사람은 철이 들고 나서야 비로소 부모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습니다. 전문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철이 든다거나 나이가 들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철이 드는 것이 아니며 은혜를 알 때 비로소 철이 드는 것입니다. 사랑의 깊이를 깨달을 때 철이 드는 것입니다. 철들기 전에는 뭐든지 떨떠름합니다. 깊은 맛이 없어요. 철없는 사람에게 사랑은 아래만 보입니다. 내리 사랑만 하는 사람은 아직도 철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철들고 나서야 비로소 위를 바라보는 것이고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것입니다. 철든 신앙인만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철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철들지 못한 사람은 청개구리처럼 비가 올 때마다 웁니다. 철들지 못한 사람은 어버이날이 다가올 때마다 불효자로서 우는 것입니다. 복은 받았지만 복을 누리며 살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복을 받고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밴 하겐은 말하기를 “어머니는 하나님이 세상에 보낸 대사요 최초의 스승이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자의 매력은 짧지만 어머니의 감화는 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믿음의 제자들에게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첫 번째 계명입니다. 이 계명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다’는 말은 순종하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공경한다는 말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나오는 순종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재산 때문에 공경하는 척 하는 자식들이 적잖게 있지만 공경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경은 자식으로서 어쩔 수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공경은 의무감에서 나온 순종이 아닙니다. 의무감에서 나온 순종은 불평이 따릅니다. 공경은 부모를 잘못 섬겼을 때 해를 받을까 하는 두려움에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종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구박하고 소홀히 하다가 죽고 나면 제사를 아주 정성껏 드리는데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살아계실 때는 힘이 없는 부모가 도움이 되지 않고 죽고 나서 귀신이 되어서는 힘이 강해지는데,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부모가 죽은 귀신이 되어 해를 입힌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제사 드리는 것도 얼마나 이기적입니까? 자신이 해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부모님의 존재를 늘 인정하는 것이 공경입니다.
가정의 행복은 이미 맞춰놓은 기성품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내려진 여호와이레의 복은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의 합작품입니다. 이삭의 효도는 힘(능력)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절대순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려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을 때, 이삭이 ‘아버지 정신 나갔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하고 불순종했다면 그 가정에 여호와이레의 복은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믿음 안에 있는 아버지께 절대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의 희생적인 사랑과 수고를 인정하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빅터 후고는 말하기를 “한 훌륭한 어머니는 백 사람의 교사보다 낫다. 어떤 마귀라도 기도하는 어머니에게서 자녀를 빼앗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가정에 기도하시는 부모님이 꼭 필요하다고 그 실체를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경건한 어머니를 둔 자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가 여러분의 곁에 있을 때 그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버지가 그 곁에 있을 때 자녀는 결코 가난하지 않습니다. 그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갈 힘을 제공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아는 복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약한 생물 중에 가시고기와 우렁이가 있습니다. 가시고기는 산란기에 암컷이 알을 낳고 떠나면 수컷이 알이 부화될 때까지 신선한 공기를 제공하고, 침입자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 하다가 새끼들이 둥지를 떠날 때에 생(生)을 마감하는 작은 물고기입니다. 이 가시고기의 모습은 가족을 위해 수고하다 조용히 세상을 마감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렁이는 제 몸에다 알을 낳고 새끼들이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성장한다고 합니다. 한 점의 살도 남김없이 새끼들에게 먹이로 주고 빈껍데기가 되어 조용히 물에 떠내려가는 것이 우렁이의 삶입니다. 어쩌면 이 모습이 어머니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있는 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지키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 있는 계명을 지킴으로 믿음의 가정이 평화를 누리고 생명과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복을 누리기 원하십니까?/
신명기 5:16
암전문의로 명성을 날리는 한 의사는 5월 어버이날이 다가오면 불효자라는 죄책감에 마음이 짓눌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종종 재래시장을 찾곤하는데 시장 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서 나물을 팔고 계신 할머니를 볼 때마다 고통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런 할머니를 볼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돌아가신 어머니를 회상하며 참회의 눈물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어린 시절 나는 가난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가난을 벗고 말겠다고 다짐하며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막노동을 하셨는데, 막노동을 하던 중에 철근에 깔린 어머니를 구하려다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나물을 캐고 다듬어서 시장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나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습니다. 나는 그런 어머니가 맘에 들지 않았지요. 어머니는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용돈이라고 내게 기쁜 마음으로 주셨어요. 그런데 나는 그게 싫어서 뿌리치고 달아나곤 했어요. 나는 잘먹고 잘입지는 못했지만 악착같이 공부했지요. 그래서 부자집 자식들보다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어요. 부자집 자식들은 그런 나를 미워했어요...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어느 날 4교시 수업이 끝날 때에 친구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복도를 보니 낯익은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의 어머니가 절둑거리면서 교실로 들어오시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시장에 내다팔려고 다듬은 나물 한 봉지를 들고서 찾아오신 겁니다. 그러자 부자집 아들이 어머니의 절둑거리는 흉내를 내면서 나에게 ‘야, 너네 엄마 병신이었냐?’ 하며 비아냥거리는 거예요. 순간 교실에 있는 아이들은 ‘와~’ 하며 낄낄대며 웃더라구요. 나는 참을 수 없어서 부자집 아들을 정신없이 두들겨패줬지요. 그리고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데, 잘 차려입은 아주머니와 그 부자집 아들이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며 호통을 치고 있는 거예요.
“아니, 애비 없는 자식은 이래도 되는 거야? 못배우고 없는 티 내는 거야 뭐야. 자식 교육 좀 잘 시켜. 어디 감히 우리집 귀한 자식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느냔 말이야. 으응?. 어머니라는 작자가 병신이니 자식 정신이 온전하겠어?”
부자집 아주머니가 내뱉은 듣기 거북한 말을 듣고서도 어머니는 연신 죄송하다며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느 것 하나 당당하지 못한 어머니의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차라리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해서는 안될 말을 해버렸어요.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수업료를 꼬박꼬박 챙겨주셨지요.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나를 불러 조용히 말씀하셨어요. “ooo야, 네 어머니께 잘해드려야 한다. 그리고 어제 주신 나물 맛있게 먹었다고 전해주거라.”
그후 17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가정도 이루었습니다. 처가(妻家)에서 병원도 개업해 주고 너무나 풍요로운 생활을 하면서 나는 어머니를 잊고 살았어요. 솔직히 잊고 싶었던 겁니다. 어머니에게는 매달 생활비를 보내드기는 했지만 한 번도 찾아가뵙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병원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오는데, 우리집 앞에서 한 노인과 가정부 아주머니가 싸우고 있는 거예요. 야윈 얼굴에 허름한 옷차림을 한 노인이었는데 다리를 절고 있었지요. 그 노인은 바로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보자 기뻐하면서 “애, oo아, 많이 좋아졌구나.” 하고 다가오시더라구요. 가정부가 보고 있어서 그랬는지 순간 나는 차가운 말로 어머니를 떠나보냈야 했습니다. “사람 잘못 보셨어요. 할머니. 저는 oo이가 아니라 최oo입니다.” 어머니는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뒤돌아가셨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자, 가정부는 “별 노망든 할머니가 다 있다”며 푸념을 늘어 놓았습니다. 그런 후에 나는 한 달 동안 악몽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한 나머지 나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찾아갔지요. 어머니는 내가 생활비를 보내주었지만 여전히 시장 한 귀퉁이에서 나물을 팔면서 기침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가만히 곁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았어요. 그때 나물을 사려는 한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할머니, 할머니는 자식이 없나요?”하고 물었어요. 어머니는 “아니여. 우리 아들은 서울 큰 병원 의사여. 자꾸 나보고 같이 살자고 하는디. 내가 싫다고 혔어. 내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 자식 신세를 져. 요즘도 자꾸 올라오라는 거 뿌리치느라고 혼났구만. 우리 아들같은 사람 세상에 둘도 없어. 우리 아들이 효자여, 효자.” 하며 자랑하시면서 나물을 듬뿍 주고 있었어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보고도 달려갈 수 없었어요. 곧장 어머니가 살고 있는 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집에 들러 방틈으로 돈 봉투
만 넣어두고 돌아왔습니다.
그일이 있은지 1년이 지날 무렵이었어요.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너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내려오라”는 부고였습니다. 부고를 받고 시장에 들렀는데, 정말로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어요. 집에는 선생님 혼자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저에게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잠시 후에 저를 불렀습니다. “oo아, 내 옆에 와서 잠깐 앉아라.” 선생님은 나에게 어머니가 쓰시던 낯익은 보따리를 주시면서 “풀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보따리를 풀어 보니 돈이 있었습니다. “이거, 돈 아닙니까?” “그래 돈이다. 네 어머니가 너에게 주시는 마지막 선물이다. 그동안 네가 돌아오면, 혹시나 네가 성공하지 못하면 다른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모아두신 돈이란다. 너 하나 믿고 무슨 미련인지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너를 기다리셨다. 너에게 잘해주지 못해 항상 미안해 하시더구나. 내가 가끔 네 어머니의 말 동무가 되어 드렸는데, 나에게 네 어머니의 유언을 전하도록 부탁하셨단다. 그리고 네가 모르고 있었던 사실들도 함께 말이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나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네가 아주 어렸을 적이었다. 너를 키워주신 부모님이 퇴근길에 집에 오는데, 네가 쓰래기통을 뒤지고 있는 것을 보셨단다. 마침 너의 부모님은 자식이 없던 터라 너를 데리고 가서 키우기로 했단다. 배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었지만 너를 데리고 와서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랐다고 하셨다. 어린 너를 혼자서 집에 둘 수 없어서 항상 공사판에 데리고 다녔는데, 네가 무너지는 철근 밑에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뛰어들었단다. 네 목숨이 위험하게 되자, 너의 아버지가 너와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셨는데 그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한쪽 다리를 잃게 되셨단다. 그러니 너는 아버지의 목숨과 어머니의 다리 덕에 살아났다는 거야. 다리를 다쳐 벌이가 시원치 않아 생활이 어려울 거라고 염려하던 주위 사람들이 네 어머니에게 “키워봤자 소용이 없으니 고아원에 보내라”고 했드는구나.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너를 버리지 않고 당신의 목숨보다 귀하게 키웠다는거야. 네가 의과대학에 다닐 때에 네 어머니는 암이 걸리셨는데, 그것을 알고도 네 학비를 대기 위해서 병원에 가지 않으셨단다. 그리고 네가 암 전문의가 되어 명성을 날리자, 네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너를 보려고 물어 물어 서울에 올라가셨다가 집에 내려오셨단다...”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 나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허울좋은 인간의 가식에 머리를 들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어머니의 영정을 바라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잔잔한 미소로 이 불효자를 바라보시고 계셨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용서를 빌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이 불효자를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부모님이 우리의 곁에 가까이 계신 것 같습니까? 아니면 자식들이 부모님 곁에 가까이 있습니까? 사람은 철이 들고나서야 비로소 부모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전문 지식을 가졌다고 해서 철이 든 것이 아닙니다. 나이가 들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철든 것이 아닌 것 같아요. 은혜를 알 때 비로소 철이 든 것입니다. 사랑의 깊이를 깨달을 때 철이 든 것입니다. 철들기 전에는 뭐든지 떨떠름합니다. 깊은 맛이 없어요. 철없는 사람에게 사랑은 아래만 보입니다. 내리 사랑만 하는 사람은 아직도 철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철들고 나서야 비로서 위를 바라보는 것 같아요. 부모를 공경할 줄 아는 것입니다. 철든 신앙인만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철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철들지 못한 사람은 청개구리처럼 비가 올 때마다 웁니다. 철들지 못한 사람은 어버이날이 다가올 때마다 불효자로서 우는 것입니다. 복은 받았지만 복을 누리며 살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이 복을 받고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신명기의 말씀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십계명 중에서 제 5계명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십계명이 두 곳에 나오는데, 하나는 출애굽기 20장에 나오고 다른 하나는 신명기 5장에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나온 십계명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 출애굽 1세대들에게 시내산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노예로 400년 동안 살아왔던 세대입니다. 그런데 이제 출애굽한 너희들은 바로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라고 하시면서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명기 5장에 있는 십계명은 모압평지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출애굽 2세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십계명에는 ‘오늘’ 이라는 단어와 ‘우리’ 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신명기 5장 1절에 보면,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아 오늘 내가 너희 귀에 말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그것을 배우며 지켜 행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계명은 과거에 너희 조상들에게 주셨던 말씀이 아니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주는 규례와 법도이다. 그러니 잘 듣고(세마 [m;v), 잘 배우고(뷔르마드템/라마드 ~T,d>m;l.W)., 잘 지켜(뷔스마르템/사마르 ~T,r>m;v.W) 행하라(라아스탐/아사 ~t'fo[]l;). 그러면 너희가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축복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거예요.
복은 부모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아비는 자식의 영화이다”
(잠 17:6)고 했습니다.
부모가 복의 근원이 되어야 자식들이 복을 받고 복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자손들이 귀를 기울여 듣고 따를 때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들을 때에 심령이 열리고 복을 받을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복된 말씀입니다. 축복의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첫째 계명에서 넷째 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계명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겁니까? 하나님만을 사랑하지 않으면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그런데 우상은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어요. 사람을 어리석게 만들거든요.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생각이 바르지 못해요. 눈의 초점이 흐립니다. 사탄은 인간의 마음을 두렵게 하여 영혼을 빼앗아갑니다.
무당에게 굿값으로 2년 동안 12억을 뜯긴 사람이 있습니다. 96년도에 딸이 학업 스트레스 때문에 신경질을 부리자 고민하던 부모가 무당을 찾아가서 사정을 이야기 했답니다. 그때부터 무당은 이런 저런 굿을 하라고 위협하여 굿값으로 12억 3천만원을 뜯기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가 무식해서 무당을 찾아간 겁니까? 아닙니다. 불안해서 찾아간 거예요. 이들 부부는 서울의 명문대학을 나온 사람들입니다. 남편은 국가투자 공기업 본부장을 지내고 부인은 30년 동안 영어선생을 했던 사람입니다. 굿값으로 가산을 탕진한 이들 부부는 동생 집에서 얹혀 살고 부인은 파출부 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우상에 빠진 영혼은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십계명 중에 다섯째 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는 사람들과 관계의 계명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네 이웃에게 나눠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자기 가족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있는 첫 계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주셨습니까?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어요. 아무리 철없는 사람도 내리 사랑은 잘해요. 자기 자식 귀한지 알거든요. 자식 사랑하는 것은 안가르쳐 줘도 잘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사랑을 받고 사랑을 먹고 자라났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중심에 사는 인간은 은혜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고 은혜를 받았는데 은혜를 잊어버려요. 부모로부터 생명을 얻었음에도 생명의 영속성을 잃어버립니다. 이게 타락한 인간의 성품에서 나온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고 가르치지 않으면 몰라요. 오죽했으면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 축복해주시겠다고 약속을 했겠습니까?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 것을 보면 누가 먼저 생각납니까? 부모님입니까? 자식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래요. 자식 사랑하는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아요. 자식이 열 있어도 남주기 싫다고 그래요. 그런데 두 분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힘들다고 그럽니다. 용돈 드리는 것은 할 수 있지만 모시는 것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각 가정마다 부모님 모시는 것 때문에 형제들이 싸웁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네 부모지만 공경하는 자에게 이런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장수하는 은총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복을 누리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어느 교황은 말하기를 “어머니는 모세와 같다”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지만 모세 자신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님은 우리를 좋은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생명을 바칩니다. 부모님께서 뿌려놓은 씨앗의 열매를 자식들이 거두어들입니다. 미국의 비평가인 호움즈 는 말하기를 “청춘은 사라지고, 사랑은 시들며, 우정의 잎사귀는 떨어지지만 어머니의 남모르는 깊은 사랑은 그 모든 것보다 오래 산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깊은 사랑은 가까이 있는 자가 알게 됩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재산은 없었습니다. 그는 가난과 배우지 못한 한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하기를 “경건한 어머니를 둔 자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 내가 배웠던 교훈 중에 가장 위대한 교훈은 어머니 무릎에서 배운 것이다.”고 했습니다. 경건한 부모가 있는 사람은 부자입니다. 경건한 부모는 그를 섬기는 자손들을 위해 항상 축복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인생 흉년기에 자신을 봉양했던 요셉을 축복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던 조오지 워싱턴은 그가 젊은 시절에 배를 타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선원이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어머니에게 허락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기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원한다고 하니 할 수 없이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드디어 떠나는 날이 다가오자, 워싱턴은 짐을 꾸려 하인에게 옮겨줄 것을 부탁한 뒤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어머니를 찾아 갔습니다. 아들의 인사를 받으며 그 어머니는 줄곧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워싱턴은 어머니의 눈물을 보더니 하인을 불러 마차에 실은 짐을 다시 내려 놓으라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을 상심시켜 드리면서까지 갈 수는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런 아들을 보며 어머니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부모님을 존중하는 자들에게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나는 그 약속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미국의 최고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을 가지신 부모님이 계십니까? 부모님께 감사하시고 극진히 공경하십시오. 경건한 부모의 기도는 자식들에게 영화의 면류관을 씌워줄 것입니다. 영화의 면류관은 의로운 길에서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잠 16:31) 부모님이 믿음이 없으시다면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공경하며 부모님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구원의 은총으로 복을 누리는 가문으로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예배에로 부름/
내 아들아 내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너의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너의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너의 깰 때에 너로 더불어 말하리라. (잠 6:20-22)
예배 기도/
하나님 아버지! 부활의 기간이 다해가는 이날에 부모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르쳐 주신 하늘 아버지께서 육신의 어버이를 영원한 하늘 나라로 인도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 불충하고 불효했던 저희들이 이날을 맞이해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부족한 저희들의 심령에 위를 바라보며 사랑하고, 공경하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고백의 기도
부모님을 공경하라 가르쳐 주신 주님!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만 흘리는 저희들을 긍휼히 여겨주옵소서. 부모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는 온 세상을 가지고도 바꿀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리 사랑을 할 줄 알면서도 부모님에 대한 공경과 감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소홀이 여기는 마음과 말로 서운하게 했던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사함의 말씀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