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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情)
“...미안해, 리나.”
“....”
쏴아아-
비가 내린다.
그리고 그 빗줄기 사이로 그의 음성이 파고들었다.
“정말로... 정말로 네가 소중하지만... 리나 네가 바라는 그런 시선으로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 미안해.”
2년 만에 간신히 전한 그녀의 마음.
하지만 그는 너무나도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젓는다.
‘미안해’ 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너무도 안타까워서 그녀는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린다.
쓰고 있던 우산은 바닥으로 떨어뜨린 지 오래.
잔뜩 찌푸린 어두운 저 하늘만큼 그녀의 마음도 새카맣게 타들어간다.
그리고 그 타들어간 자리에는 그녀도 몰랐던 감정이 새로이 매워져 가기 시작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군요.”
어두컴컴한 방에 소리 없이 나타난 그는 탁자 위에 놓여진 등에 불을 붙였다.
갑작스런 빛에 슬쩍 치켜든 눈꺼풀이 파르르 떨린다.
다시금 눈을 감아버리자 한숨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갔다.
덜커덩-
묵직한 소리와 함께 찬 바람이 밀려온다.
그리고 빗소리-
“열지마!”
콰당탕.
갑작스레 몸을 일으키는 반동에 대충 모양세만 갖추어져 있던 낡은 의자가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두 눈에 광기를 담고 창가로 뛰어가던 그녀는 창가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그에게 잡히고 말았다.
한 팔로 가볍게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그는 미친 듯 발버둥치는 그녀를 감당하느라 애를 먹어야했다.
“닫아! 닫으란 말야!”
차갑게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불빛은 그녀를 더욱 더 흥분하게 만들었다.
“싫어! 듣기 싫어! 저 소리... 저 소리... 아아.. 닫아줘! 제발 닫아줘! 부탁이야아아-!!”
“....”
한 팔로 그녀의 광기를 저지하며 조용히 생각에 잠긴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거칠게 밀어냈다.
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동댕이쳐진 그녀에 의해 탁자 위에 놓여져 있던 등이 흔들리더니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등불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의 변화에 넘어진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고 창가로 다가간 그의 짧은 손짓에 의해 등불은 그대로 사그라진다.
어둠이 이어지자 그녀는 짤막한 비명 소리를 내질렀다.
창문이 닫기는 소리에 그녀는 또다시 작게 몸을 떨고 만다.
빗소리가 작아지자 조용해진 방 안.
간간히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크게 들릴 뿐, 다른 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방안에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침묵.
그러나 등 안에서 타오른 불꽃의 웃음소리에 그 침묵은 깨어졌다.
짧은 손동작으로 불을 피워 올린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사방으로 흐트러진 붉은 머리칼을 정리하며 일어난 그녀는 두 눈의 광기를 지우고는 넘어진 의자를 바로 세웠다.
고요한 방 안에서 물이 흐르듯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주기 충분했다.
“무슨 일로 온거야? 너한테는 볼일 따위 없어.”
“뭔가 이상해요.”
잔뜩 움츠린 채 붉은 눈동자에 경계심을 담은 그녀를 보던 그가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그러자 또다시 그녀의 눈동자가 등불처럼 흔들린다.
“무슨 뜻이지?”
“이런 기운, 리나 씨 답지 않군요. 무슨 일 있으셨나보죠?”
마치 구석에 몰린 들고양이 마냥 자신의 앞에 다가온 그를 쏘아보는 그녀.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닿는 것은 어두운 밤하늘.
“...저 빗소리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으....”
“그만! 그만해!!”
“흐음. 그런거군요.”
눈동자 가득 밤하늘의 어두움을 담고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지금도 ‘그’ 를 원하나요?”
그의 낮은 목소리에 그녀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제로스!!”
“이런, 정곡을 찔리셨나보군요.”
그녀는 여전히 몸을 움츠리면서도 닿으면 베일 것 같은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지 마세요.”
두 손을 내저은 그는 은근슬쩍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가여운 리나 씨. 당신의 기분, 이해할 수 있어요.”
귓가에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미끄러지는 듯한 유혹적인 그의 목소리는 굳어져 있는 그녀의 어깨를 누그러트리기에는 충분했다.
“정말... 인거야?”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손이 그의 망토를 부여잡았다.
“정말... 인거야... 제로스..?”
“그럼요. 이해하고말고요.”
슬그머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는 그의 입꼬리가 소리 없이 올라간다.
“그리고 저라면... 리나 씨 곁을 떠나지 않고 계속 같이 있어 드릴텐데 말이죠.”
부드러운 머리칼 사이로 느껴지는 차가움과 함께 들려오는 작은 도발.
짙은 와인향을 풍기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 그녀의 눈동자에서는 서서히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계속... 같이..”
“그래요. 계속 같이.”
오랜 세월동안 같이 있었고 언제까지고 같이 있을 것 같던 소중한 존재가 사라진 그녀는 너무나도 나약해졌다.
그런 그녀의 어두운 곳을 파고 들어가는 것은 식은 죽 먹기.
그는 불빛에 반사되어 더욱 붉은 빛을 뿌리는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 사이로 손을 넣어 천천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언제까지고 같이 있을 수 있어요. 물론...”
“물론...?”
이제는 순순히 그의 말을 따라온다.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던 그는 미소 지었다.
어두운 보랏빛 머리칼이 차갑게 흔들린다.
“저와 계약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는 당신을 떠날 수 없어요.”
그의 옆에 있길 바랬다.
하지만 그는 난처한 미소와 함께 등을 보이며 떠나고 말았다.
빗속에서 아련히 흔들리는 그의 뒷모습조차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언제까지나 내 옆에 있어야해.
반짝이는 금발의 아름다운 그.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어도 좋아.
그냥 아무 말 없이 곁에 있어도 돼.
하지만 그것조차 안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계약을 하면 이 사람은 나를 떠나지 않아...’
투명해진 눈을 들어 바로 앞에 있는 그의 투박한 보랏빛 눈동자를 담는다.
위태하게 흔들리는 등불만큼 떨리는 손을 들어 그의 얼굴에 가져가자 느껴지는 차가움.
하지만 그 차가움조차 반갑게 느껴진다.
‘그 사람이 아니라도 좋아.. 대신할 것이 있다면...’
소중한 것이 뭔지 알아버렸다면 그것을 잃고는 살아갈 수 없어.
하지만....
“제로스.”
차갑게 얼어버린 입술이 열린다.
“너와 계약하겠어.”
그가 미소 지었다.
현 여왕, 아멜리아 윌 테슬라 세일룬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는 그가 죽은 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성왕국 세일룬은 평화로웠다.
긴 세월동안 세일룬은 새로운 부군을 맞이하고, 그를 환영하고, 새로운 정부의 도입에 제르가디스를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리나는 그를 잊지 못했다.
자신의 무책임함에 스러져버린 그.
제로스와의 계약이 어찌되었건 막아야만했다.
그랬으면 지금처럼 언제까지고 피투성이의 그가 따라다니는 일만큼은 없었을 것이니 말이다.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새하얀 벌판.
그리고 그 위로 붉은 피를 떨구며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그.
오늘도 어김없이 그의 피를 두 손 가득 물들이며 잠에서 깨는 리나였다.
방 안에 놓여진 항아리의 물로 씻는 것으로도 모자라 왕족 전용 욕실에 들어가 온 몸에 눌어붙은 듯한 피를 씻어내는 것이 아침 일과가 되어 버린 그녀.
언제부턴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는 두 명의 시녀도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
“여왕폐하께서 아침식사 전에 만나 뵈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는 거울에 비친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내뱉는 시녀를 빤히 바라보던 리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장대 위에 금빛의 빗을 내려놓은 시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뒤로 물러나 무언가를 들고 온다.
언젠가부터 하지 않게 된 검은색 머리띠 대신 백색의 망토를 받아 든 그녀는 또다른 시녀가 열어준 방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세일룬은 겨울이다.
무언가 근심이 있는 듯 짙은 회색빛 하늘도, 간간히 눈물을 흘리는 듯한 이 작은 눈발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순백의 작은 눈덩어리는 그녀의 새하얀 망토에 스며들어 그녀의 어깨를 조금씩 적셨다.
마치 그녀 자신의 죄를 조금이라도 씻기 위해서인 것처럼.
“어머, 리나님이야.”
스쳐지나가는 복도 멀리에서 한 시녀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그녀를 자극한다.
“저분이야?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10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세일룬의 여신이?”
“바보야. 나이도 먹지 않는 괴물이 어딜 봐서 여신이야?”
“쉿. 들리겠다. 목소리 좀 낮춰.”
리나가 40년이 지난 지금도 18세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은 누구나 다 의문으로 갖고 있는 사실.
오히려 의문을 갖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그러나 그들의 여왕은 예전과 변함없는 태도로 리나를 대했다.
그렇기에 표면상으로 그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이젠 익숙하다.
그렇기에 리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가 있었다.
여왕인 아멜리아의 집무실 앞에 서 있는 보초병들과 시녀들은 유독 리나만 보면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이번도 예외는 아닌 듯, 백색의 망토가 펄럭이자 흠칫 몸을 떨었다.
그들의 눈에 담겨 있는 것은 공포.
그들 또한 리나에 대한 의문점을 두려워하는 듯 했다.
현재 인간이 영원한 젊음과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위마족과의 계약.
“아멜리아. 들어갈게.”
두 번 두드리는 노크소리에 맞춰 놀라는 모습이 우습기만 했다.
“들어오세요, 리나 언니.”
과거와는 다른 톤의 목소리.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은 리나가 아니다.
낮이 익은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이제는 주름살이 많이 늘은 노부인이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토록 아름다웠던 흑발을 조금씩 회색빛으로 물들이는 그녀.
쉰 살의 나이를 넘어선 그녀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외모의 리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더니 온화하게 미소 지어 보인다.
“아침부터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거야?”
“서서 이야기 하지 마시고 일단 앉으세요.”
이들의 관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마치 모녀로 보일만한 광경.
평소와는 다른 아멜리아의 분위기에 리나는 저도 모르게 신경을 곤두세우며 그녀의 말대로 앉아야만 했다.
리나의 맞은편에 앉은 아멜리아가 탁자 위의 작은 종을 흔들었다.
맑은 종소리와 함께 미리 약속이라도 해 놓은 듯 문 밖에 있던 사람들의 기척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잠시 뒤 종은 탁한 소리와 함께 다시 탁자에 놓여졌다.
“사람들까지 다 물러가게 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거야?”
긴장감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올린 것을 금방 후회해버린 리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눈앞의 아멜리아를 바라보았다.
침묵을 지키던 아멜리아가 입을 연 때는 그녀의 표정이 다소 달라진 후였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두려움 섞인 아멜리아의 군청색 눈동자가 흔들린다.
“당신은... 당신은 제가 알던 리나 언니가... 맞나요?”
아멜리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리나는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세게 부딪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는 애써 미소 짓던 표정은 산산조각 부서지고 말았다.
“전 이제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에요. 물론 살아온 세월을 몸에 새기면서 살아왔죠. 하지만 리나 언니는 달라요.”
가늘게 떨리던 그녀의 눈동자는 망설임 없이 굳어버린 리나를 비추고 있었다.
“어째서 언니는 세월의 흐름을 받지 않은거죠? 어째서죠?”
“아멜리아...”
“나는 이렇게 늙어가는데, 언니만 그대로라니 이건 불공평해요! 싫어요!”
갑작스레 탁자를 치고 일어나는 아멜리아에 의해 탁자 위에 앉아 있던 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돌로 된 바닥에 부딪힌 종은 엄청난 소리를 내며 신경이 곤두선 둘을 깜짝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불편한 정적이 흐르고 리나의 시선은 떨어진 종으로 향했다.
“...네 생각을 안했구나. 미안해, 아멜리아.”
방금 전까지의 긴장은 거짓말이라는 듯 차분한 표정을 하고 있는 리나는 조용히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설마... 궁 안에 떠도는 소문대로...”
“...그 설마가 사실이야. 나는 마족과 계약을 했고, 그 계약의 대가로 영원한 생명과 젊음을 얻었지.”
“마...말도 안돼요!!”
아멜리아는 마치 불결한 것이라도 보았다는 듯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대충 그러하리라 예상을 한 리나는 상처 받은 눈을 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그런 그녀의 반응이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으세요, 리나 언니? 마족과.. 마족과 계약이라뇨?”
“그때의 나는 계약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하지만 이해해 달라고는 하지 않겠어.”
반듯한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슬픈 빛을 띄었다.
“어차피 나는 영원의 생명을 살아도 너에게 용서받지 못할테니까.”
‘그래, 용서받을 수 없어.’
지금껏 애써 부정하던 것이 사실로 밝혀지자 아멜리아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리나는 그런 그녀를 동정하지도, 도와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러는 것이 아직은 깨끗한 그녀를 더럽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리나는 아멜리아를 등진 채 그녀가 들어왔던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무언가 걸리는 듯 덜컥 걸음을 멈췄다.
여전히 아멜리아는 말이 없었다.
“미안해, 아멜리아. 하지만 나는... 혼자 남는다는 것이 너무 두려웠어.”
되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침묵.
리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힌다.
“그런만큼.. 너에게 말할 수도 없었어... 너도 이미 나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이니까...... 갈게.”
그렇게 아멜리아와의 문은 닫히고 말았다.
오랜만에 나와 보는 거리.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만큼 외출을 꺼리게 된 리나의 올해 첫 외출이었다.
일부러 입고 다니던 백색의 망토도 벗어버리고 외투조차 입지 않은 채 리나는 이 추운 겨울 홀로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내리는 눈은 무언가를 덮어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세일룬을 새하얗게 물들여가고 있었다.
마치 그 무언가 중 하나가 되려는 듯 리나의 머리와 어깨 위에는 새하얀 눈들이 쌓여 굳어가고 있었다.
자줏빛 옷자락은 이미 많은 눈이 스며들은 듯 어두운 빛을 띄고 있었고 새하얀 부츠조차도 무겁게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려 버린 두 손과 입술은 가만히 보기만 해도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추위조차 느껴지지 않는 듯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를 하고서는 한없이 거리를 걷고 있었다.
간간히 집안의 불빛만이 새어 나오는 거리를 걷던 그녀가 무언가에 걸린 듯 휘청거리더니 제법 쌓인 눈 위로 쓰려졌다.
짧은 비명소리조차 지르지 않고 쓰러진 그녀는 일어날 생각이 없다는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붉은빛의 긴 머리칼을 흰 눈 위에 흩뿌린 채 죽은 듯이 누워있던 그녀는 바스러지는 눈소리를 듣고서는 슬쩍 어두운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이래봤자 죽을 수 없다는 건 리나 씨 본인도 잘 아실텐데요.”
얼굴위에 느껴지던 차가운 눈의 기척이 사라지자 보이는 것은 목소리의 주인과 어울리지 않는 분홍색.
귀여운 고양이가 그려져 있는 분홍색 우산을 들고 있던 제로스는 우산을 어깨에 걸치고서는 몸을 구부려 누워 있는 리나를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리나의 차가운 손에 우산을 쥐어 주었다.
“뭐, 그렇지 않아도 제가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지만 말이에요.”
제로스의 어깨에 턱을 댄 채 안기듯 기대어 있는 리나는 그가 그녀에게 붙어 있는 눈들을 신속하게 치웠음에도 불구하고 우산을 떨구고 말았다.
제로스는 우산과 같이 들고 온 리나의 망토로 그녀를 감싼 뒤 그녀의 머리를 두어번 다독였다.
리나가 혼자 설 수 있도록 자신에게서 떨어뜨려 놓은 제로스가 눈 위에 아무렇게 놓여져 있는 우산을 들려고 했을 때 리나는 두 다리를 못 쓰는 사람처럼 또다시 주저앉았다.
우산을 쓰고 리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제로스가 추위에 얼어붙은 숨을 내뱉는다.
때 묻지 않은 새하얀 눈 위에 수놓아진 매혹적인 붉은 빛의 꽃잎.
“...마치 저를 유혹이라도 하시려는 것 같군요.”
아무렇게나 내뱉어진 제로스의 말에 리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런이런. 그렇게 도끼눈 뜨고 노려보실 힘이 있으시다면 일어나시지요. 언제까지 이러고 있으실 생각이신데요?”
“...단지 소중했을 뿐인데.”
“네?”
리나의 머리 위로 더 이상의 눈이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 우산을 가져간 제로스가 반문했다.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 있는 것도, 아무 말 없이 같은 장소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건... 소중했기 때문이었어.”
“그렇다면 저한테조차 아무 말 없이 세일룬에 있었던 것은...”
“가우리도, 제르도 없는 지금 나에게 남은 건 아멜리아 밖에 없었어...”
“하지만 그 두 사람 다 리나 씨가 죽였잖아요?”
피로 물든 듯한 붉은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더니 이내 제로스와 시선을 마주한다.
한순간 머리로 피가 쏠릴 듯이 빠르게 상체를 일으킨 리나는 그의 도발에 넘어간 듯 몸을 떨었다.
그러나 제로스는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묘한걸요. 자기 스스로 목숨만큼이나 소중했던 두 존재를 죽이고서 그렇게 괴로워 한다는 건 말이에요.”
“그만해!”
“하지만 어째서... 당신의 소중한 존재에 왜 제가 안 들어가는 겁니까?”
차가운 눈의 감촉에 얼어버린 듯 리나의 망토가 제로스의 손에 잡히자 조그맣게 소리 내어 울었다.
마치 누군가의 얼어붙은 마음속을 대신 보여주려는 듯 서걱거리며 울던 망토는 제로스의 손길이 떨어지자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눈 위에 흩어진 망토를 잡고 다시 리나의 머리에 씌워준 제로스는 의외인 그의 물음에 놀란 듯 아직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역시 저는 그 누군가의 ‘대신’ 이었던 겁니까?”
“제로스...”
“말씀해 보십시오! 소유할 수 없기에 죽여 버린 가우리 씨입니까? 아니면 저와의 계약이라는 것에 사로잡혀 죽음을 방관해버린 제르가디스 씨입니까?”
“그만! 그만해, 제로스!”
금방 상처가 난 곳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닮은 리나는 오래된 포도주의 향기만큼 매혹적이다.
스스로 더럽혀지길 원했고 더럽혀졌지만 언제든지 새하얀 은백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녀.
적어도 지금의 제로스에게는 사방을 뒤덮고 있는 새하얀 눈만큼 눈부신 존재였다.
그렇기에 사랑이란 것을 알아버린 그의 감정은 어린아이의 것처럼 격렬하다.
“아니면 당신의 변화에 등을 돌려버린 아멜리아 씨입니까? 대답해보세요, 당신에게는 누가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까?”
소유할 수 없어 죽여버린 존재.
죽기 전 자신이 아닌 사람과 행복함을 맛보았던 존재.
자신의 변화에 등을 돌려버린 존재.
그리고 그런 그들 중 누군가의 대신이라 생각해왔던 존재.
제일 소중한 존재는... 누구?
결국 돌아갈 곳은 등을 돌린 그녀가 있는 곳뿐.
날카로운 빗줄기로 변해버린 비를 맞으며 세일룬 성으로 돌아온 리나는 고개를 떨군 채 제로스가 가져다 준 타월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었다.
리나 자신조차 내릴 수 없는 결론을 내리길 바란 제로스는 시종일관 침묵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그의 무거운 침묵은 더더욱 리나를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등불도 켜지지 않은 어두운 방 안에서 보이는 것은 희미하게 보이는 제로스의 망토.
창밖에서 흘러나오는 옅은 불빛에 그의 망토는 여리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파른 망토 끝을 미끄러지듯 내려온 옅은 불빛이 바닥에 떨어져 부서질 때쯤 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다가갔다.
톡-... 톡-
다 털지 못한 물방울이 간헐적으로 나무 바닥으로 떨어져 내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한다.
느린 동작으로 제로스의 등 뒤로 걸어간 리나는 새하얀 두 팔을 내뻗어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제로스. 나는 모르겠어....”
제로스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움을 더 가까이에서 느끼겠다는 듯 리나의 두 팔에는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지...”
조그맣게 들려오는 리나의 목소리에 창 밖을 향해 있던 제로스의 시선이 그를 부여잡은 그녀의 손에 향한다.
가느다란 손가락.
제로스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손을 슬며시 쥐고는 그의 눈빛만큼 차가운 입술에 가져갔다.
“하지만 제로스, 지금 나는 네 곁이 있어... 그리고 계속 네 곁에 있을거야...”
지금 리나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언제나 마음속에 두고 있던 제로스는 그저 입가에 쓴웃음만을 지어보였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과 그녀가 무엇에 걸려 멈추어져 있는지 잘 알고 있는 제로스였기에 그저 씁쓸하게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려주면 필사적으로 자신을 부둥켜안은 이 손이 떨어질 것 같기에, 다시는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 버릴 것 같기에 그는 괴로워하는 그녀를 보고도 모른 척 웃기만 했다.
아주 짧은 삶을 사는 자를 향한 집착.
그가 아무렇게나 던진 미끼를 그녀가 서슴지 않고 잡기 전까지는 몰랐던 생소한 감정.
처음 깨달은 만큼 그것에 대한 중요도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어떠한 형태로라도 그녀를 눈앞에 둬야만 했다.
그리고 그는 계약을 이용했다.
“그 약속, 지키세요.”
“...응..”
단지 그 누군가의 대신으로서도 그녀는 그의 옆에 있었다.
그것도 또 다른 구실.
그녀가 이렇게 곁에만 있다면...
하지만 서로의 엇갈린 감정이 만들어내는 부드러움은 엇갈림만큼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콰당탕-.
추위로 굳어있던 문은 아주 작은 충격에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비명을 질러댄다.
열려진 문 사이로 보이는 사람은 중후한 분위기의 노부인.
아멜리아는 공식적인 이벤트에서만 쓰는 여왕의 지팡이를 들고서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체력은 약해졌지만 눈빛만은 예전 그대로인 그녀는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리나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아멜리아의 날카로운 눈빛은 리나에게서 조금 시선이 이동한다 싶더니 빗줄기가 부서지는 유리창처럼 옅은 흔들림을 더한다.
“역시나...군요, 리나 언니.”
“아멜리...아..”
차갑게 냉각된 숨을 들이마신 탓인지 온몸에서 시큰거리는 통증을 느끼던 리나는 제로스에게서 떨어져 나왔지만 그의 망토만큼은 움켜 쥔 채 놓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까 전, 제로스와 같이 들어오는 모습을 본 듯 하다.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리나의 표정을 담담하기만 했다.
“어째서... 어째서!!”
참기 힘든 듯한 고통을 담은 아멜리아의 격한 절규가 방안을 맴돈다.
“어째서 언니의 계약자가.....”
영영 잊고 싶었던 과거가 물밀 듯 밀려들어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 아멜리아는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리나 언니가 마족과 계약했다는 건 상관 안하려고 했어요. 언니가 자신의 살 일부를 깎아내는 듯한 고통을 마음속에 담고서 제 곁에, 이 세일룬에 남아주신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설사 마족과 어떠한 계약을 해도 언니는 리나 언니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하지만 이건 달라요, 리나 언니!”
마치 아멜리아의 모든 슬픔을 혼자 떠맡기라도 하려는 듯 리나는 힘주어 눈을 감았다.
“어째서 언니의 계약자가 제로스 씨 인가요?!”
번쩍-
그 순간 창문이 번쩍이는 빛과 함께 거칠게 흔들렸다.
아멜리아의 절규와 슬픔을 담은 듯 창 밖으로 떨어져 내린 번개는 스산한 역광을 만들어 내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갑작스레 소나기라도 내리는 듯 빗줄기는 굵어졌고 그 소리를 더해갔다.
언제나 세찬 빗줄기과 동반되는 가슴의 통증도 오늘은 웬일인지 저주스러울만큼 고요하다.
방 안을 어지러이 떠도는 여러 가지 감정들.
물론 그 무엇 하나 제로스에게는 반가운 것들이었으나 그는 무표정으로 고개를 떨군 채 울고 있는 아멜리아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너에게 사과는 하지 않을게, 아멜리아.”
굳게 입을 다문 채 침묵만을 지킬 것 같던 리나가 입을 열자 제로스의 무표정이 아주 잠깐 풀렸다.
“모든 것은 나로 인해 생겨난 것들이니까. 가우리가 죽은 것도, 세일룬 인근 마을이 괴멸 당한 것도.”
그 순간 아멜리아의 흐느낌이 멈춘다.
그 모습에 리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힌다.
“그리고... 제르가 죽은 것도.”
아멜리아가 편하게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절대로 입 밖으로 내뱉고 싶지 않았던 사실.
하지만 그 전에 알게 된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두통이 생길정도로 고민하던 그녀는 너무나도 쉽게 흘러나오는 말에 그녀 자신조차도 놀라고 만다.
“제르가디스 오빠...가 죽은 것도...?”
눈앞을 새하얗게 메우며 스쳐지나가는 제르가디스의 하얀 턱시도 차림.
그리고 그를 갉아먹어가는 붉은 빛.
“그렇군요... 언니의 계약자는 제로스 씨... 모를 리가 없겠죠.”
손 근처에 떨어져 있는 지팡이를 들어 몸을 의지한 채 일어나는 아멜리아의 드레스자락이 바닥을 스치며 스산한 소리를 자아낸다.
“그렇다는 것은, 언니는 공범자란 이야기군요.”
지팡이의 윗부분을 비틀자 두개로 분리되며 아멜리아의 손에는 짧은 단검이 들려졌다.
마치 아멜리아의 슬픔을 반사하려는 듯 창 밖으로 떨어지는 빛줄기의 비명소리가 단검의 날카로운 날에 반사되어 시린 빛을 흩뿌린다.
짧은 호흡.
아멜리아는 두 손으로 단검을 부여잡고 리나를 향해 내달렸다.
혹여나 입술을 물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물밀 듯 올라오는 아픔이 가려질까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은 아멜리아의 흐린 시야에 들어오는 리나의 붉은 눈동자는 힘을 빼는 듯 하더니 이내 그 아름다움을 눈꺼풀 속으로 감춰버린다.
바로 앞에 단검을 들고 덤벼드는 사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아버린 리나의 행동에 놀란 것은 아멜리아가 아니라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제로스였다.
피할 줄 알았던 리나는 단검이 꽂힌 왼쪽 어깨의 상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단검의 손잡이를 잡고 떨고 있는 아멜리아의 손을 잡았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의 아멜리아는 느린 동작으로 리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살짝 감은 리나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과 아멜리아의 떨림이 같아진다고 느껴질 때쯤 리나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 안에 아멜리아의 모습을 담았다.
“...여기가 아니잖아, 아멜리아.”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어깨에 박힌 단검을 뺀 리나는 상처의 고통에 눈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멜리아를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죽이려면 확실히 심장을 노려야지.”
마치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리나의 목소리.
짙은 피냄새를 묻힌 그녀의 유혹적인 목소리는 제로스조차 숨을 들이키게 만든다.
창문을 거칠게 흔들어대는 바람 소리가 단검 끝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물들이는 소리에 묻혀 들릴 때쯤 아멜리아는 다시 리나를 향하여 검을 들이댔다.
아멜리아의 모든 것을 수용하려는 듯 천천히 눈을 감은 리나는 날카로운 쇳소리에 놀라며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칠흑의 어둠.
리나가 들은 쇳소리는 아멜리아가 놓친 단검이 돌로 된 바닥에 떨어져서 나는 소리였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리가 없는 리나는 제로스가 자신을 향해 돌아설 때까지 매끄러운 바닥에 미끄러지고 있는 단검만은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짓을!”
“어...?”
리나는 제로스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서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
“뭡니까! 그 행동은! 그 표정은!”
“제로스...?”
“무책임하게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치려고 했던 겁니까?”
제로스의 격한 외침에 리나는 그대로 굳어버린 채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눈치 챘던 것이다.
그녀가 죽으려고 했다는 것을.
방금 전 그에게 했던 약속은 미련 없이 버려버린 채 말이다.
“죽지 못하는 당신에게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만 남는 짓인데!”
죽을 수 없다.
그렇다.
리나는 영원히 제로스의 곁에 있기 위해서 불사를 목적으로 한 계약을 맺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대가로.
그러나 그녀의 목적을 위해 희생된 사람은 그녀가 목숨보다도 소중해마지 않는 동료들.
“...그렇군요.”
제로스가 내리친 손등을 감싼 채 말 없이 서 있던 아멜리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없이 흐르던 눈물은 멈추어버린 지 오래.
“언니는 영원한 생명의 대가로 가우리 오빠와 제르가디스 오빠를 죽인거군요.”
“아... 아니야, 아멜리아!”
리나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설득력 없는 대답을 내뱉은 그녀는 차가운 아멜리아의 눈빛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을 죽이고서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부탁이 있어요, 리나 언니.”
벌겋게 부어오른 손 안에 단검이 잡힌다.
“제로스 씨와의 계약을 파기해줘요.”
높낮이 없는 어조로 말을 꺼낸 아멜리아가 단검에 묻은 피를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드레스로 닦아내었다.
어느 정도 피가 닦아지자 단검을 이리저리 돌려본 그녀는 다시 리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죽어줘요.”
리나는 슬며시 제로스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멜리아를 바라보고 있어서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자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제로스...”
“할 수 없군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창문 근처에 세워두었던 석장을 든 제로스는 리나의 머리칼보다 붉은 빛을 띄는 석장의 보석을 아멜리아를 향해 세워 들었다.
“아멜리아 씨. 당신만은 제가 죽여드리죠.”
“제로스?”
깜짝 놀란 리나가 제로스의 시린 푸른빛 체온보다 더 짙은 빛을 얼굴에 떠올리며 그에게로 달려갔지만 그는 매정하게 그녀를 밀어냈다.
그는 어느새 미소를 지운 채 아멜리아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원래 제 계획에 아멜리아 씨는 없었습니다만 하는 수 없군요. 사실 아멜리아 씨가 리나 씨를 죽이려고 할 줄은 몰랐거든요.”
“안돼, 제로스!”
온 몸을 휘감는 살기에 아멜리아는 리나에게로 가기는커녕 점점 다가오는 제로스와의 거리를 벌리기에 급급했다.
“안돼.. 그러지마, 제로스. 싫어... 아멜리아를 죽이지마..”
제로스의 담담한 뒷모습에서 그의 진심을 읽어낸 리나는 걸음조차 방해하는 떨림을 주체하지 못한 채 비틀비틀 제로스의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제로스가 그들을 향해 살기를 담고 바라본 적이 없던 터라 아멜리아는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공포를 느껴야만 했다.
“안돼...”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오른손을 이를 악물며 들어 제로스를 향해 내뻗어 보았지만 마치 환영인 양 그의 뒷모습은 잡힐 생각을 하지 않는다.
마치 안개가 낀 것 같은 흐릿한 영상.
그리고 슬로우 모션 같이 느리게 느껴지는 그의 동작.
“제로스.. 제발..”
두려움에 넋이 나가버린 아멜리아를 향해 석장을 들어 올리는 그의 모습이 비 내리는 창가처럼 어둠과 섞여만 간다.
제로스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고 생각될 때쯤 마치 오래된 와인을 쏟아놓은 듯한 붉은 피가 리나의 발을 적시고 있었다.
쨍강.
용병생활을 청산한 후, 작은 시골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정착하여 살고 있던 크로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한 인물의 방문에 들고 있 컵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아주 오래전에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그녀, 리나 인버스.
그 시절의 모습 그대로인 그녀는 다소 빛이 사라진 눈동자를 하고는 흐트러진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크로드..”
“리나?”
문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리나의 옷자락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붉은 얼룩으로 가득하다.
그녀의 등장에 다소 놀라 우두커니 서 있던 크로드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그녀를 붙들려고 하다가 그녀에게서 풍기는 진한 피비린내에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아멜리아와 마찬가지로 시간이란 것에 순응한 크로드의 금빛 머리카락에는 그가 살아온 시간이 새벽의 새하얀 별빛이 되어 박혀 있었다.
그러나 리나는 나이든 그의 모습에서 옛 모습을 찾아내고는 안도의 미소를 띄웠다.
“크로드.. 나...”
데엥- 뎅 뎅-.
리나가 그를 향해 한발 내딛으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종소리가 집안 가득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리나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종소리에 놀란 크로드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슨 일이지?”
마을에서 꽤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들리는 종소리는 무언의 다급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창가로 가 창문을 열어 밖을 살펴보는 크로드의 뒷모습을 보며 리나는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크로드...”
단지 가우리와 닮았다고 하여 도피처로 삼았던 그.
작은 희망의 한가닥을 의지한 채 왔지만 그 끝에는 그가 없었다.
“...아멜리아가 죽었어.”
그렇다.
지금 울리는 저 종소리는 여왕의 서거를 알리는 종소리.
왕궁에서 살고 있던 리나가 모르는 일은 아니었으리라.
“크로드. 이게 뭔지 알아?”
리나의 부름에 그녀를 돌아본 크로드는 그제야 리나의 옷에 묻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는 미간에 주름을 만들어냈다.
“...여전히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거야?”
“이번은 달라. 이건 한 사람의 피거든.”
크로드의 말에 리나가 아무 거리낌 없이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녀를 추궁하지 않는 점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역시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크로드는 알 수가 있었다.
그녀의 옷에 묻은 피가 그에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왕 폐하를... 죽인건가...?”
“그래, 내가 그녀를 죽였지.”
죽어버린 아멜리아.
그것은 리나가 고통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도피처가 사라짐을 뜻했다.
가우리, 제르가디스, 아멜리아에게로 이어진 그녀의 집착.
그리고 그것은 이제 크로드에게로 이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그 사람... 그 사람이지? 여왕 폐하를 죽인 것은...”
“아냐. 내가 죽였어...”
도발적인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던 보랏빛 머리칼의 한 남자.
그와 리나가 알 수 없는 무언가의 관계로 얽혀져 있다는 것쯤은 크로드도 눈치채고는 있었다.
“소유할 수 없다는 것에 나온 애증이 가우리를 죽였고, 간신히 찾은 영원한 안식을 얻기 위한 무책임이 제르가디스를 죽였고, 용서할 수 없는 내 자신의 상처가 뒤집혀지는 괴로움이 아멜리아를 죽였어...”
“리나...”
“크로드. 나는 스스로 죽을 수 없어.”
크로드의 모습을 가득 담고 있던 리나의 눈동자가 조용히 감겼다.
“하지만... 당신이 죽으면 나도 죽을 수 있을거야. 크로드...”
전혀 예상치 못한 리나의 말에 크로드의 어깨가 작게 흔들렸다.
찬 바람이 창문을 통해 흘러 들어왔지만 이제는 짧아져버린 크로드의 머리칼은 흩날리지 않는다.
“제로스는 그걸 몰라. 그는 나에게서 소중한 존재들을 하나씩 빼앗아 버리면 내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지.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고 있어. 실제로 나는 지금까지 그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하지만... 이젠 아니야...”
리나는 두 손을 들어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눈을 덮었다.
“이건... 사랑이 아니야...”
비틀어진 사랑을 깨달아 버린 대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쓰라리다.
그렇기에 아멜리아의 핏자국은 온 몸을 짓누르는 깨달음의 상처가 되어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여리게 흔들리던 리나의 작은 어깨가 굳어 버린다.
크로드는 그런 그녀의 어깨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어차피 리나 씨가 갈 곳은 여기 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요.”
그림자 사이를 비집고 나온 손이 리나의 어깨를 굳게 잡아 쥔다.
두 손을 힘없이 떨군 리나는 눈물로 젖어 있는 눈을 들어 크로드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크로드...’
그녀의 눈동자에서 모든 상황을 읽어낼 수 있었던 크로드는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미소지어주었다.
그녀는 이 곳에 죽으러 온 것이다.
지금까지의 그녀의 도피처는 모두 제로스가 없애버렸다.
그녀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이제 마지막 남은 도피처는 크로드 자신.
크로드는 가우리와 비슷한 외모라는 이유로 그를 의지했던 리나를 탓하지 않았다.
그 역시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리나 씨 당신의 도피처는 저 하나로도 족하다고 생각해요.”
제로스가 이끄는 대로 그의 품에 안긴 리나는 또다시 자신의 무책임함을 탓하며 굳게 눈을 감아 버렸다.
마음에 담을 수 없던 상대를 감히 담아버린 죄.
엇갈린 인연이었지만 크로드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도피처가 됨을 행복해했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리나 씨...?”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목소리.
그가 아멜리아에게 내비친 살기만큼 두려움을 주는 목소리였지만 크로드는 떨지 않았다.
제로스의 석장이 그의 심장을 꿰뚫을 때까지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렇게 크로드는 리나가 갇혀 있는 새장의 문을 열어주고서 눈을 감았다.
급속도로 식어가는 크로드의 차가운 몸에서 석장을 뺀 제로스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리나의 붉은 머리칼을 살짝 쥐고는 그 머리칼에 키스했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보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의 품에서 빠져나간 리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은빛 바탕에 물방울 모양의 짙은 루비빛 보석이 박혀 있는 펜던트.
그 펜던트가 리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제로스는 비틀거리며 뒤로 한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리나 씨...?”
소중한 듯 두 손으로 펜던트를 들고 있는 리나를 바라보는 제로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린다.
“그걸 어쩌실 생각입니까...? 돌려주세요.”
뭔가 불안한 마음에 제로스는 성급히 손을 내민다.
그러나 리나는 더더욱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길 뿐, 제로스에게 내어줄 생각은 없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이 깨어진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거.. 알고 계시잖아요? 괜히 놀라게 하지 마시고 돌려주세요.”
“미안해, 제로스.”
“돌려주세요!”
잔뜩 움츠리며 고개를 숙이는 리나를 바라보던 제로스가 크게 소리를 내지른다.
“이제 슬슬 끝을 내야 할 때가 온 걸 깨달았을 뿐이야.”
식탁 위에서 조용히 타오르고 있는 등을 던지자 나무로 된 벽은 금세 사나운 불길의 먹이가 되고 만다.
매캐한 연기를 뿌리며 타오르기 시작하자 리나는 현관문 쪽으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리나가 가까이 오자 흠칫 놀라며 뒤로 빠진 제로스는 리나가 현관문에 다다를 때까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돌아가 줘.”
제로스를 바라보고 있지 않는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계약은 여기까지야.”
“리나 씨!”
제로스가 다가가려 하자 리나는 재빨리 허리춤에 매여져 있던 단검을 들어 펜던트에 가져다 대었다.
“가까이 오지마!”
제로스가 리나의 위협에 멈춰 설 수 없는 펜던트에 있었다.
리나와 계약을 맺기 이전부터 소중히 간직해왔던 펜던트.
리나를 닮은 듯한 그 루비는 제로스와 리나를 이어주는 계약의 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깨어짐은 계약을 파기를 의미했다.
“제로스. 이제는... 깨달아야 해..”
“또다시 도망가려고 하시는 겁니까? 어째서?”
“너에게 보기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돌아가 줘.”
“시작은 당신이 했지만 끝은 당신이 맺지 못합니다!”
쨍그랑 소리가 나며 유리창이 깨어졌지만 그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매서운 찬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길은 점점 커져만 가고 있었다.
찬바람 속에서 흘러나온 정적은 리나와 제로스의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 들어왔지만 아무도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이건 도망가는 게 아니야.”
리나는 흐르던 눈물을 닦아내고 제로스의 혼란스러운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제로스 너도 알다시피 내 도피처는 언제나 내가 소중해마지 않는 사람들이었어. 하지만 그건 소중함을 핑계로 도망친 것 밖에 되지 않아.”
잘못을 깨달아 버린 죄.
똑바로 응시할 수 있는 현실.
이대로 제로스의 곁에 있는 다면 똑같은 죄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이미 너를 사랑하고 있어... 그렇기에 나는 네 곁을 떠나려는 거야.”
씁쓸한 깨달음 뒤에 그녀를 바로 세운 것은 비틀어진 사랑이 아니다.
이것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제로스를 향한 동정일지라도 그 전의 감정과는 달랐다.
“어째서...!!”
“부탁이야. 돌아가 줘.”
지금까지의 여린 리나는 그의 앞에 없었다.
가우리를 잃기 전의 곧은 그녀만이 그의 앞에 있을 뿐이었다.
계속 리나를 봐왔던 제로스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디 안녕히.”
힘겹게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온 한마디.
그러나 그것은 리나를 미소 짓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문이 닫기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울리는 듯한 고통이 제로스를 암습했지만 그는 무표정했다.
작은 눈발이 서린 바람이 그의 망토를 어루만졌지만 흔들리는 것은 그의 목에 걸린 펜던트 없는 은빛 목걸이 뿐.
녹아내리듯 타오른 불길에 잠식되어 스러지기 시작한다.
불길 끝으로 붉은 불씨가 바람에 몸을 싣고는 흐린 하늘로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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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뵙습니다.
드디어 기다리던 기도 마지막화~(누가 기다렸다고!!;;)
에필로그는 쓸까 말까 고민중입니다만... 내용이 이렇게 끝나니 써야되겠죠?
(스토리 잡아놓긴 했답니다..)
저는 리나를 와인빛에 비유하기를 즐겨한답니다.
리나의 머리카락색을 진한 주홍빛 내지는 갈색으로 이야기 하기도 하지만 전 붉은색으로 이야기 하는걸 더 좋아해요.
솔직히 기도는 제가 예전에 썼던 [죄]만큼 애착을 갖고 썼다고 할 수는 없답니다..
여러모로 제 한계를 느낀 작품이기도 하고..
끝내고 보니 이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아직 멀은 것 같네요. 더 노력해야죠^^
그럼 언젠가 나올 에필로그도 봐주시길 바라며 미드는 사라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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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으아, 정말, 멋져 ㅠ_ㅠ 엇나간 사랑.. 이랄까, 말로 표현이 안되 ;ㅁ; 아, 그리고 백색이 가 아니라 백색의 아닐까 ; 에필로그 기대할게! <-
ㅠ_ㅠ 엄청난 필력이십니다;ㅂ;)! 에필로그 기대할게요!
이거 읽으면서 리트머스의 블루 들으니까... 한참 울었어요
아 멋있어요! <- 으흑흑 ~ 오래기달려 왔습니다아아아 ~ 에필로그 써주세요오오~ [붙잡고길게늘어진다]
아.... <- 다 못읽고 피시 시간이... 나중에 꼭 다 읽을게요;;
....乃
매우 즐감, 드라마틱한 글.
와아, 역시 미드언니라는 말밖에;ㅅ;!!! 어떻게 이렇게 글을 잘쓰는거죠?! 분명 비슷한 단어에다가 비슷한 문장구조인데 무언가가 확연하게 달라;ㅁ;!!! 아아, 너무너무 멋져요; 건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