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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21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사도 7,51─8,1ㄱ
복 음 : 요한 6,30-35
그때에 군중이 예수님께 30물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31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33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34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3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김 도형 스테파노 신부
오늘 독서에서 스테파노는 백성과 원로들과 율법 학자들 앞에서
당당히 신앙을 증언합니다.
성경은 그를 두고 “성령이 충만하였다.”(사도 7,55)라고 전합니다.
그와 반대로 그를 박해하는 이들은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7,51)로 묘사됩니다.
‘목이 뻣뻣하다’는 것은 자기 생각에 갇혀 고개를 숙이지 않는 완고함을 뜻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하였다’는 것은
마음이 닫혀서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오늘 복음의 군중도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눈앞의 기적과 현세의 이익만을 구하며,
조상들이 받은 만나가 그저 배를 채우는 빵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이들 또한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들은 결국 자기 생각에 맞지 않는 이들에게 ‘미움의 돌’을 던집니다.
스테파노에게 돌을 던졌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도 내 주변의 이들이 나와 생각이 다르고 내가 바라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마음속으로 ‘미움의 돌’을 드는 순간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돌 대신 ‘생명의 빵’을 든다면 어떨까요?
누군가를 상처 주려고 들었던 그 손으로 누군가를 살리는 사랑의 빵을 건네는 것,
이것이 “생명의 빵”(요한 6,35)이신 주님의 삶이며 우리에게 바라시는 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손에 무엇을 쥐고 있습니까? 돌입니까, 빵입니까?
누군가가 우리에게 돌을 던질지라도,
그 돌을 사랑의 열매인 빵으로 되돌려주는 우리가 되기를 청합시다.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신학생 때, 어머니께 “실망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방학 때, 친구들과 술을 엄청 많이 마시고 들어온 날이었습니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는데 그 시간까지 주무시지 않고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실망했다”라는 말씀을 하신 후에 방에 들어가셨습니다.
신부가 되겠다는 아이가 몸을 가누지도 못할 정도로 만취한 모습에 실망하신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의 실망하셨던 모습, 또 슬퍼하셨던 모습에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었고, 실제로 실망을 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람만 실망할까요? 주님께서도 실망하실 것 같습니다.
당신 사랑에도 멈추지 않는 우리의 교만과 이기심에 크게 실망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 실망을 드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분의 말씀을 철저히 따라야 하고, 언제 어디서나 그분과 함께해야 합니다.
오천 명이 먹은 기적을 본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요한 6,30.31)
빵의 기적은 바로 전날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또 다른 표징’을 요구합니다.
아마도 모세처럼 매일매일 하늘에서 빵을 떨어뜨려 주어
현세적인 굶주림을 영구적으로 해결해 주길 바랐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러면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조건부 신앙을 드러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요한 6,32)
예수님은 군중이 가진 두 가지 중대한 착각을 명확하게 바로잡아 주십니다.
첫째는 훌륭한 지도자 모세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만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광야의 만나를 먹은 이스라엘 백성은 육체적인 죽음을 결국 맞이했지만,
하느님의 참된 빵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곧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 그 자체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받아 모신 사람은 영적 허기와 갈증에서 벗어나
참 기쁨과 만족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공허함과 목마름 앞에서,
참된 위로와 생명이 되시는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 온전히 나아가고 있습니까?
이제 더는 주님께 실망을 드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충실한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어제 <복음>의 끝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묻는 군중들에게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요한 6,30)라고
표징을 요구 장면으로부터 오늘 <복음>은 시작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렇습니다. 이 빵은 인간이 만든 빵이 아닙니다.
선사되고 주어진 은총의 빵입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입니다.
이 빵은 더 이상 하늘에만 차려져 있는 빵이 아니며,
이미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빵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빵을 이 세상에서 먹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야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러니,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합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 빵으로 내어 주어야 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하는
사명으로 주어진 빵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한 빛과 소금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듯,
자신을 위한 빵이 아니라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자신이 받아먹은 ‘하늘에서 선사된 빵’을
세상에 생명으로 다시 내어놓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부활의 증거 되는 삶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호수 건너편까지 찾아온 이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양식으로 내어놓으십니다.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이신 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할 일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말합니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아모 8,11). 아멘.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
조 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군중들은 예수님께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30절)라고 묻는다.
이미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하고도
여전히 그분을 단순한 기적 행위자로만 이해하려 했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모세 시대의 만나에 머물러 있었고,
하늘에서 오는 참된 양식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32절)
이로써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빵, 곧 생명의 빵임을 드러내신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이는 단순히 육신의 허기를 채우는 빵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양식임을 밝히신 것이다.
성 치프리아노는 주님의 기도 해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이 빵을 청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몸인 교회와 떨어지지 않기 위함이다.”(De oratione dominica, 18)
따라서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이는 단순한 물질적 양식을 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청하는 기도이다.
성 암브로시오는 성체의 신비를 묵상하며 이렇게 가르친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 같지 않고,
이 빵을 먹는 이는 영원히 살 것이다.”(De Sacramentis 5,24)
성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는 성사다.
그래서 교회는 언제나 성체를 “모든 성사의 원천이자 정점”(교리서 1324항)이라고 고백한다.
주님께서 주시는 이 빵은 세상에서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삶을 영원으로 변화시키는 양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이 성체의 은총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설교에서 이렇게 권고한다.
“오, 자비의 성사여, 일치의 표징이여, 사랑의 끈이여!”(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26,13)
성체는 우리를 하느님과 일치시킬 뿐만 아니라, 형제자매들과도 하나 되게 만든다.
그러므로 성체를 모신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 경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사랑과 일치의 삶을 실현하라는 부르심이다.
군중들은 예수님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라고 청했다.
그러나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땅의 양식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참된 생명의 빵, 곧 당신 자신을 날마다 주시지만,
우리는 때때로 세속적 만족에만 마음을 두고 있지는 않은가?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며,
그분의 사랑과 생명을 나누는 삶으로 부활 시기의 기쁨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 ‘진품명품’이라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집에 있는 오래된 물건을 가져오면 전문 감정가들이 평가해 주는 프로였습니다.
단순한 항아리인 줄 알았는데 조선시대의 유명한 ‘백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걸려있던 초상화인데 알고 보니
조선시대 유명한 화가가 그린 선비의 ‘초상화’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판정이 나면 엄청난 가격이 정해지곤 했습니다.
반대로 고려시대의 청자인 줄 알고 애지중지했었는데
알고 보니 ‘모조품’인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의 서예 작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위조품’인 경우도 있습니다.
진품명품은 전문 감정가의 판단이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명품과 짝퉁’이란 말도 있습니다.
명품과 짝퉁을 구분하는 우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명품 가방은 비가 오면 가슴에 품고 걷는다고 합니다.
짝퉁 가방은 비가 오면 우산 대신 머리를 가리면서 걷는다고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옥석’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허영과 욕심 때문에 옥석을 구별하지 못하곤 합니다.
교회는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면서,
교우들의 신앙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여러 방법을 찾기도 합니다.
친교실을 만들어서 주일 미사 후에 식사를 준비하기도 합니다.
도서실을 만들어서 영적인 양식을 차려주기도 합니다.
카페를 만들어서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기도 합니다.
전례를 즐겁게 하려면 밴드를 전례 음악에 도입하기도 합니다.
교우들의 취미와 문학적인 소양을 돕기 위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합니다.
좌석을 늘리기 위해서 장궤틀을 없애기도 합니다.
쉽고, 빠르고, 편리한 것이 과연 교우들의 영적인 성숙에 도움이 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다.’ 또 ‘때가 가까이 왔다.’ 하고 말하겠지만 그들을 따라가지 마라.”
신앙인은 무엇이 진짜 신앙인지,
무엇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길인지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명예도, 권력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
사람들은 지배한다는 말과 다스린다는 말을
폭력으로 억압할 수 있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착취하고, 빼앗아도 좋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배와 착취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신분, 계층, 세대, 이념, 피부, 성으로 차별하는 역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배고프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목마르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그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모두가 평화롭게 가진 것을 나누었고,
특히 가난한 이와 아픈 이를 돌보았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삶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페스탈로치는 신앙의 원천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인류의 아버지이시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죽음이 없다.
인류의 순수한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이 깃들어 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감사와 사랑에 대한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 이것이 신앙의 원천이다.”
페스탈로치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인간, 그리스도, 시인, 모든 것을 남에게 바치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축복이 있을지어다. 그의 이름에 축복이 있을지어다.”
삶은 사름의 준말이고, 사름은 사르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삶은 사르는 일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한 줌의 재로 남은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사라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첫 번째 순교자 스테파노는 죽음의 순간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그렇습니다.
삶은 고난의 순간에도, 죽음에 이를지라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부활의 꽃이 피고,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만나’는, 먹을 것이 없어서
광야에서 굶어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양식이었고,
동시에 자주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의 ‘신앙’을 위한 양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나’는 하느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을 보살피신다는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 탈출기에 있는 ‘만나’ 이야기를 보면(탈출 16장),
사람들이 하느님께 감사드렸다는 말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느님께 감사드리기는커녕
‘만나’를 지겨워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이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민수 11,4-6)
그들에게 ‘만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은총의 양식이 아니라,
먹기 싫지만 억지로 먹어야 하는 지겨운 음식이었습니다.
또 그들은 자신들이 왜 이집트를 탈출했는지를 잊어버리고,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을 그리워했습니다.
사실 그게 더 큰 문제였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만 있다면,
자유를 잃고 노예로 살아도 좋다.”라는 생각은,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나중에 지옥 가도 좋으니,
사는 동안 마음껏 부귀영화를 누리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2)
초대교회에서 있었던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1-4)
사도들이 그리스계 유대인들을 차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과부들에게 생활비나 생필품을 배급할 때,
그 일을 담당한 실무자들이 따로 있었을 것이고,
사도들은 그 일을 감독했을 텐데,
히브리계 유대인들이 그 실무를 맡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히브리계 유대인들 가운데 일부가
그리스계 유대인들을 차별하는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 교회 공동체 안에 ‘편 가르기’가 있었고,
자기편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모습은 날마다 ‘만나’를 받아먹으면서도
하느님께 감사드리지는 않고,
매일 똑같은 것만 먹으니 지겹다고 불평했던
구약시대 백성들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 모습은 ‘썩어 없어질 양식’만 찾는 모습과 같습니다.>
어떻든 그 일에 대해서 사도들이 한 말은,
‘종교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종교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 공동체입니다.
만일에 기도하지도 않고, 말씀을 듣지도 않고,
‘썩어 없어질 양식’을 두고서 다투기만 한다면,
그 모임을 종교라고 말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3)
유대인들은 누구나,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모세가 아니다. 하느님이시다.” 라고 강조하신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모세와 같은 지도자’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임금이 되어달라고 요청한 일과(요한 6,15)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이
‘몸의 배부름’만 원하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는,
“하느님께 ‘몸의 배부름’만 청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청하여라.”입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는,
“나는 정치 지도자가 되려고 온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왔다.”이고,
“나를 믿어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오는 사람’과 ‘나를 믿는 사람’은 같은 말이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을 뜻합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혼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을 뜻합니다(묵시 7,16).
인간적 완숙이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줄곧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하느님께 더 감사하게 되고
저에게도 고맙다고 할 수 있어서 요즘 저는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의 할례와는 거리가 멀던 제가
조금은 고개를 숙일 줄 알게 되고 하느님 말씀은 물론 남의 말도
조금씩 더 잘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60세에 이순(耳順)이라고 한 것에 참으로 공감하고 동의하며
지금 제가 스테파노의 적대자들과 같지 않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 스테파노의 적대자들과 같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제가 곧 스테파노와 같이 된 것은 아니기에 안타깝습니다.
그렇습니다.
악인과 같지 않은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성인과 같아야 하는 것인데 제가 바로 그런 형국입니다.
그리고 공자가 70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
곧 욕심대로 해도 법에 어긋나지 않음을 얘기했는데
이 경지에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70이 되면 세상 욕심이 더 이상 없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경지가 되어야 하고,
신앙적으로 얘기하면 이 나이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는 내가 이미 되어있어야지요.
사실 이것도 욕심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런 욕심은 거룩한 욕심이고,
우리 영성 생활에서는 성령께서 이뤄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완숙(完熟)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실 요즘 저의 문제는 안주이고
그래서 성덕으로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음입니다.
풀어 얘기하면 옛날처럼 교만하고 주장대로 하고
그래서 부대끼는 그런 것이 별로 없기에
거의 모든 관계가 순리적이고 원만하며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에 만족하고 안주합니다.
오늘 스테파노처럼 성령 충만하지 못하는데도
더 나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사도행전이 얘기하는 스테파노는 성령 충만입니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인간미가 완숙한 내가 아니라 성령이 충만한 내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제 그리고 앞으로 저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 저는 인간적으로 안주하고 있기에 발심(發心) 자체가 문제이고 과제입니다.
그러나 너무 무책임한 얘기인지 모르지만
이 또한 주님께서 해주시리라,
제가 못하니 주님께서 해주시리라 믿고 희망하고 기도합니다.
우리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생명의 빵, 예수님”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어제에 이어지는 주님을 찾는 자들과
주님과의 대화가 우리에게는 큰 깨달음이 됩니다.
좌우간 물어야 답이 나옵니다.
표징을 보고 찾은 것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에 찾아왔지만
점차 질문과 더불어 생명의 빵이신 주님 가까이 이르고 있음을 봅니다.
마지막 부분이 대화의 절정이자 오늘 복음의 결론이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정작 먹어야 할 참된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빵임을 깨닫게 됩니다.
구도자들로 바뀌어 가는 이들이 즉각적 질문이 이어집니다.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바로 인간의 근원적 갈망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어도 무한한 가슴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어 늘 허기 속에 지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늘 영적으로 배고파하고 목말라 합니다.
어제 갑자기 집무실을 찾았던 어느 자매가
요즘 자주 느끼는 허무감을 이야기 했습니다.
즉시 다음 <삶>이란 시를 전해 주며 견뎌 내라고 했습니다.
“삶은
외로움을
견뎌 내는 것
외로움 중에도
묵묵히
꽃들 피워내는 것
하늘이
별들 피어내듯
땅이 꽃들 피어내듯”<2001.8.17.>
그러나 미흡한 답변입니다.
외로움과 쓸쓸함은 바로 생명의 빵 주님을 찾으라는 신호입니다.
인간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은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뿐임을 다음 예수님 답변이 분명히 합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답변이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이 생명의 빵, 예수님을 모시고자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아멘”하며 생명의 빵 성체를 받아 모실 때
우리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은 비로소 해소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I AM the bread of life)”
그대로 하느님의 이름 “나다(I AM)”의 신적 존재,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신원입니다.
인간 궁극의 배고픔과 목마름은 하느님만으로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스테파노가 이런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의 일치의 모범입니다.
생사를 넘어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하나 되어 영원한 삶을 사는 스테파노입니다.
최고의회에서 긴 열정적 설교(사도7,1-53) 중 후반부에서 스테파노는
목이 뻣뻣하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을 준열히 꾸짖습니다.
이어 성령이 충만한 스테파노는 영안이 활짝 열려 고백합니다.
“보십시오, 하늘이 열려 있고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이 보입니다.”
이어 분노한 이들은 일제히 스테파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에게 돌을 던집니다.
증인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놓으니
비극적 순교 현장을 고스란히 목격하는 장래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바오로 사도를 예비하고 있음을 봅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라는
테르툴리안의 말이 입증되는 장면입니다.
스테파노의 두 임종어 역시 감동이요 그대로 예수님의 임종어를 닮았습니다.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스테파노는 이 말을 하고 순교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랑의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이런 순교의 죽음은 주님 품안에 잠드는 것이요 영원한 생명으로 직결되니
주님 안에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스테파노입니다.
죽어서만 순교가 아니라 살아서도 영원한 생명의 순교적 삶을 살았던 분이
바로 오늘 기념하는 성 안셀모 주교입니다.
성 안셀모 사후에 생긴 성공회에서는 제36대 캔터베리 대주교로서
역대 교주장으로 안셀모 성인을 공경합니다.
“아름다운 박사(Doctor Magnificus)”로 불리는 캔터베리의 안셀모는
1033년 이탈리아 반도 북부 사보이아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유명한 학교들을 방문해 교육을 받았고,
마침내 노르망디 베크의 베네딕도회 수도회에 입회하여
밤낮으로 학문 연구에 몰두합니다.
안셀모는 1067년 이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1078년에는 베크 수도원의 원장이 되었으며,
간곡한 거절에도 불구하고 1093년에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서임됩니다.
그는 영국 국왕과의 마찰로 2차례나 로마로 망명길에 올랐고,
1106년 영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영국 국왕으로부터
영국 내 가톨릭교회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성직자들의 생활을 수도원 생활에 기초한 방향으로 쇄신하고자 노력합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 모토였던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안셀모는
망명생활 중에도 저술 활동을 멈추지 않아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 <왜 하느님은 사람이 되셨는가> 등
다수의 저작을 남겼습니다.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색과 묵상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1109년 성주간 수요일에 사망하였고 유해는 캔터베리 대성당에 안치됩니다.
참으로 파란만장한 순교적 삶중에도 한 결 같이 충실하고 부지런했던,
주님의 종이자 목자이자 학자, 성 안셀모 역시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깊은 일치의 삶을 사셨음을 봅니다.
우리의 영육의 근원적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는
생명의 빵,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아멘.
왜 모세가 만나를 주었다고 생각하면 계속 배가 고플까?
전 삼용 요셉 신부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요한 6,32)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을 수 있도록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겠습니까?" (요한 6,30).
어제 보리 빵 다섯 개로 배불리 먹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그들은 자고 일어나니 또 다른 기적을 구걸합니다.
그러면서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만나'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들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모세는 우리 조상들에게 하늘에서 빵을 내려주어 40년을 먹게 했다.
당신도 그 정도의 기적은 계속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치명적인 오류를 수정해 주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요한 6,32).
왜 예수님은 굳이 만나를 준 주체가 모세가 아니라 '아버지'임을 강조하실까요?
그것은 우리가 먹는 양식의 '출처'를 어디라고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존엄성'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삼위일체적 원리를 통해,
왜 우리가 세상의 빵을 먹으면서도 늘 허기에 시달리는지
그 근본적인 이유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인간이 겪는 모든 갈증과 배고픔의 끝에는 단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면, 아무리 화려한 빵을 먹어도 마음은 늘 텅 비어 있습니다.
배고픔은 위장의 문제가 아니라 소속의 문제입니다.
프랑스 루이 14세 시절, 34년 동안 얼굴을 철가면(실제로는 벨벳 가면)으로
가린 채 살았던 이름 없는 죄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1703년 바스티유 감옥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철저한 익명 속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 국왕의 특별 명령으로 상상도 못 할 최고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매일 갈아입는 최고급 비단 옷, 은식기에 담긴 산해진미,
심지어 간수들은 그가 식사할 때마다 모자를 벗고 예의를 갖췄습니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평생을 지독한 우울과 고독 속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종종 식사를 거부하며 벽을 보고 오열했습니다.
왜일까요?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비춰볼 거울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도 없었습니다.
훗날 역사가들은 그가 루이 14세의 친형이었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그는 왕족의 빵을 먹었지만,
자신이 '왕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단 한 순간도 얻지 못했습니다.
정체성이 거세된 채 주어지는 최고의 성찬은
그에게 양식이 아니라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모욕과 같았습니다.
이처럼 참된 해갈은 내가 '누구로부터 온 존재인가'를 발견할 때만 일어납니다.
정체성이 없는 포만감은 영혼을 굶겨 죽입니다.
(출처: 장 크리스티앙 프티피스, 『철가면』)
세상 사람들은 빵을 먹으며 배가 부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자녀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인간은 빵을 먹을수록 비참해집니다.
그 빵이 나를 살리는 양식이 아니라,
나를 이 땅의 감옥에 묶어두는 족쇄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머니가 주는 젖을 먹고 자랍니다.
아기에게 어머니는 우주 전체이며 생명의 공급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면 아이는 평생 어머니의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자녀의 눈높이까지 내려와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사회적 존재로 서고, 자신의 존엄성을 하느님 수준까지 끌어올리려면
반드시 '아버지'라는 존재를 통과해야 합니다.
현대 심리학의 '밀착된 관계(Enmeshment)' 이론에는
소름 끼치는 임상 사례가 많습니다.
35세가 되도록 직업도 없이 방 안에 갇혀 지내던 한 남성이 상담소를 찾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어릴 때부터
"아빠는 밖에서 딴 짓하느라 바쁘니 우리 아들은 엄마만 믿어라.
이 밥도 엄마가 너를 위해 직접 피땀 흘려 마련한 거야"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머니는 양식의 출처를 '아버지'와 단절시키고 오직 '자신'에게만 고정시켰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차려준 밥을 먹을 때마다
무의식중에 '나는 엄마 없이는 밥 한 끼도 못 해결하는 무능한 존재'라는
저급한 자존감에 갇혔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갈 용기를 잃었고, 어머니의 치마폭이라는
좁은 세계의 중력에 묶여 영적으로 말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심리 치료사는 어머니에게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밥을 차려줄 때 반드시 이 밥은 아버지가 밖에서
전쟁 같은 사회와 싸워 벌어온 것임을 알려주십시오."
어머니가 처음으로
"얘야, 이 맛있는 반찬은 아빠가 가족을 위해 고생해서 사 온 거란다.
너는 저 거친 세상을 이기고 돌아온 위대한 아버지의 아들이야!"라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 아들의 눈빛이 변했습니다.
자신의 출처가 집안의 엄마가 아니라
'거친 세상을 정복한 아버지'임을 인지하는 순간, 그의 자존감은 폭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그는 6개월 만에 방을 나와 취업에 성공했습니다.
어머니는 젖을 주는 '통로'일 뿐, 그 젖을 가능하게 한 '원천'은 아버지임을 아는 것,
그것이 인간을 거인으로 만드는 비결입니다.
(출처: 살바도르 미누친, 『가족과 가족 치료』 임상 사례 재구성)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군중은 모세라는 '엄마'가 만나를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 수준, 즉 땅의 기적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그 빵은 내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살과 피를 가지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즉, 우리의 수준으로 내려오신 '어머니'와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것은
어머니가 자녀에게 젖을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살과 피를 먹으면서
"예수라는 훌륭한 인간이 주는 빵이다"라고만 믿으면,
우리는 그저 '착한 인간' 수준에 머물게 됩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시며
"아, 이 빵은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당신 아들의 생명을 통해 보내주신 것이구나!"라고 믿을 때,
비로소 우리의 본성은 아버지와 같은 하느님의 본성으로 격상됩니다.
성체성사는 '인간 예수'를 먹는 예식이 아니라,
'예수라는 통로'를 통해 '아버지의 신성'을 수혈 받는 신화(Deification)의 사건입니다.
표징이 단순한 기적과 다른 이유는,
그것이 보내신 분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줄 때,
그 출처가 '나'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랑은 상대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지배'가 됩니다.
하지만 그 출처가 하느님임을 알려줄 때,
그 사랑은 상대를 하느님 자녀로 부활시키는 '표징'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식탁으로 초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우리가 성체를 영하며
"이것은 하느님 아버지가 나에게 주시는 신적인 생명이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의 자존감은 땅바닥에서 하늘로 치솟을 것입니다.
여기, 그 믿음의 고백으로 지옥을 천국으로 바꾼 한 성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 다미안 신부님이 나환우들의 섬 몰로카이에 들어갔을 때,
환우들은 자신들을 '버려진 쓰레기'라 생각하며 자학했습니다.
당시 벨기에 정부가 물자를 보냈지만, 환우들은 그것을 받을 때마다
"우리가 불쌍해서 적선하는 거지?"라며 냉소했습니다.
구호물자를 먹을수록 그들은 자신이 비참한 거지임을 재확인했을 뿐입니다.
다미안 신부님은 가르침의 방식을 완전히 바꿨습니다.
그는 성체를 집전하며 환우들의 눈을 똑바로 보고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이 빵은 벨기에 국왕이 동정심으로 보낸 것도 아니고,
제가 여러분이 가여워 준비한 것도 아닙니다.
이 빵은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인 '여러분'을 먹이기 위해
하늘에서 직접 내려주신 당신 아들의 살과 피 입니다.
여러분은 버려진 나환자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식탁에 초대받은 고귀한 왕족입니다!"
교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 복음 강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무엇을 먹는지 보라.
그대가 하느님의 빵을 먹는다면 그대는 하느님이 될 것이다.
모세가 아닌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빵을 먹는 자만이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St. Augustine, Tractates on the Gospel of John, 25, 12).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