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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리터리 발전사 - 암흑시대(800~1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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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마뉴(Charlemagne)의 등장으로 서방은 질서를 되찾나 했더니 그의 사후 서구는 다시 혼란에 빠져들었다. 전쟁은 수없이 많이 일어났지만 그리 중요한 전쟁은 얼마 없었다. 그리 뛰어나다고 할만한 장군들은 없었지만 비잔틴 황제 중에는 바실레이오스1세(Basil I), 니케포로스 포카스(Nicephorus Phocas), 요안네스 치미스케스(John Zimisces), 바실레이오스2세 등이 상당한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니케포로스가 제일 뛰어나다고 생각한다(이제 슬슬 개인의 주관을 집어넣기 시작하는군ㅡㅡ+++<=원래는 주관적이 아니었나?ㅡㅡ;;;). 혼돈에 빠진 중에서도 네가지의 중요한 역사적, 군사적인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첫째는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그리고 일본?)에서 봉건제도 시작된 일이다. 둘째는 비잔틴의 군사적인 우세이다. 마케도니아 왕조 치하에서 전성기를 맞은 제국은 병제와 튼실한 사회구조 덕분에 사방에서 몰아치는 파도 속에서도 굳건히 서있는 암초같은 단단함을 자랑했다. 세계를 강타한 이슬람의 충격을 그대로 받고서도 무너지지 않고 두세기가 지난 뒤에는 유럽과 아시아로 뻗어나간 비잔틴의 저력은 현대에 살고있는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이 될 것이다(왠 간지나는 말이냣?ㅡㅡ^). 세번째는 투르크족의 이동이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이들은 천천히 하지만 착실하게 이슬람 세계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투르크족의 이동과정에는 두가지 면이 있었다. 하나는 투르케스탄(Turkestan)이라 알려진 곳에서 서쪽과 남서쪽으로 이동한 부족들이 있고 또하나는 압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가 투르크인들의 용맹과 전술을 높게 사 투르크 용병들과 노예들을 받아들여 군사목적으로 이용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투르크인들 중 가장 중요한 부대는 유일한 상비군이자 전문군이었던 황실근위대로 이들을 통솔하는 투르크 장군들은 처음에는 지방의 지사가 되었다가 이집트같은 곳에서 독립왕조들을 이루기 시작했다. 네번째는 현대국가들의 선조라 할 수 있는 국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봉건제 서유럽 봉건제의 시작은 로마의 멸망 후 혼란이 오면서 로마 치하에서의 질서와 안정이 깨지고 제도와 법률들이 무너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무역과 거래의 기능이 마비됨에 따라 재산의 척도는 식량을 얻을 수 있는 토지가 되었고 이러한 토지를 소유한 야만족장들이 휘하의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신 그들로부터 대가를 받는 것이 봉건제의 시초였다. 이러한 추세는 샤를마뉴의 등장으로 멈추는 듯 했지만 그의 군사동원정책(휘하의 귀족들이 속민들을 군대로 제공하는 것)은 오히려 더욱 봉건제로 가는 디딤돌 역할을 하였다. 바이킹과 마자르(Magyar)의 횡횡은 더욱 봉건제를 촉진시켰다. 왕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속민들과 가축, 무역거점들을 지키고 싶어했다. 하지만 샤를마뉴의 후계자들 간의 분쟁은 습격자들을 막아내는데 힘을 모으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고 샤를마뉴같이 군사, 행정체계들을 재정립할 능력을 가진 지도자는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방어와 보호의 치수는 지방적으로밖에 머물지 못했다. 이러한 추세는 성의 발달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성의 목적은 농민들을 지키고 교통과 무역의 거점으로 이용함과 동시에 침략자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이었다. 이 시대 후반기로 갈수록 혼란은 전시대에 비해 줄어들었고 샤를마뉴의 병제는 스케일이 좀 작아진체 귀족들의 휘하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기병의 대세는 계속 이어졌고 상비병력의 경우 기사와 중장기병 등 거의 기병으로 이뤄졌다. 보병의 경우 영지내 동원가능한(안그럴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군사훈련은 어느정도 받았음) 남자들을 썼지만 이들은 불충분한 장비를 갖췄고 편제또한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었으므로 전장에서의 보병의 임무는 수동적이고 방어적이었다. 이러한 사회의 발달속에서 기사와 성으로 대표되며 강자가 약자를 지켜주는 대신 약자는 강자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봉건제가 등장하게 되었다. 독립적인 중간계층은 사라졌다. 어느정도의 재산이 있는 자유민들은 이웃에 있는 영주의 가신이 되었으며 가신이나 종자의 자격으로 기병이 되어 영주를 섬겼다. 가난한 자유민들은 상류계층(gentry)나 귀족(nobility)들의 농노가 되었다. 이들은 부름에 응할 의무가 있었지만 결집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은 영주의 성을 지키는데 동원되었다. 영주의 보호를 받는 농민들은 대가로 세금이나 군역을 해야했지만 바이킹이나 마자르족의 손에 운명을 맡기는 것보다는 낳았다고 생각했다. 봉건제도는 지방방어를 우선시하는 군사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대영주들은 왕으로부터 토지를 수여받는 형식을 취했는데 이 토지에 대한 대가로 그들은 왕이 부르면 일년에 정해진 기간 동안(대체적으로 40일) 자신의 구역을 벗어나 군대를 이끌고 왕의 군대에 참가하였다. 영주의 주임무는 자신의 영지를 우선으로 지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봉건제의 군사적인 결과는 공세를 위한 국왕의 부름으로 모인 군대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돌질성이 부족했고 왕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전체를 하나로 결집시켜주는 훈련, 편제 등이 없었다. 한가지 병사들이 동질성을 느끼는 부분은 기독교에 관련된 부분이었다. 이것은 중세를 대표하는 기사도를 이루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기사도는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멋있고 품위있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깊이 파고들어 가보면 원래 야만적인 풍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이킹의 침략은 브리튼의 봉건제에도 기여를 했지만 이 경우 앵글로색슨(나중에는 데인)의 상비병력은 거의 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것을 제외하고 브리튼의 봉건제는 대륙과 거의 비슷하게 발달했지만 축성술의 경우 브리튼이 현저하게 뒤지게 되었다. 대륙의 석조성곽 대신 브리튼에서는 작은 해자와 목책벽이 전부였던 것이다. 잉글랜드의 영주들과 군사지도자들은 thegn으로 불려졌다. 바이킹과 마자르의 침략은 점점 적어지고 곧 멈췄지만 귀족들은 지방의 경비임무가 중앙의 권한에 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였다. 그러므로 중세의 서유럽사는 거의 중앙과 지방, 성벽으로 보호되는 도시들 간의 권력투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슬람 이슬람에서의 봉건제의 출현은 처기에는 서유럽과는 맥을 달리하고 있었다. 초기 통합되어 있었던 이슬람은 지배력이 지나치게 넓어지고 내부에서 수많은 정치적, 종교적 분열이 일어나면서 점점 지방분권적인 형태를 띄기 시작했으며 이런 현상은 결국 다수의 독립공국들과 이단(혹은 타종파)공동체를 중앙의 권력과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하여 갈라진 이슬람세력들은 독립세력들과 중앙권력간의 경쟁과 서유럽과 비슷하게도 비잔틴, 하자르(Khazar), 투르크, 이베리아의 기독교 등의 공격과 더불어 지방 경비의 임무를 맡는 봉건귀족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무기와 갑주 이 시대의 무기는 유럽에서 다소의 변화는 있었어도 그리 큰 혁신은 없었다. 검은 무겁고 길어졌고 찌르기보다는 베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양날도끼는 유럽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이것은 중세에 화려하고 민첩한 기술보다는 힘에 더 의존하는 기술이 선호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활을 서유럽에 소개하려는 샤를마뉴의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비잔틴을 제외한 유럽에서 활은 북유럽(Norseman)인이나 투르크-스키타이(Turko-Scythia)계통의 유목민족인 불가르(Bulgar), 마자르(Magyar), 페체네그(Pecheneg)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노르만족의 경우 활은 전투에서보다는 사냥에 더 많이 쓰였다. 방어갑주의 사용은 유럽과 이슬람에서 효과적으로 널리 퍼졌다. 대표적으로 비잔틴이 있지만 그외의 지역에서도 진전은 있었다. 고대의 장식달린 투구는 사라졌으며 원뿔형의 투구로 대체되었으며 유럽에서는 투구에 코싸개를 더했는데 이것은 면갑의 시초가 되었다. 메일셔츠(mail shirt)는 갑주의 기본이 되었으며 힘이 강화되어 말을 탔을때 무릎을 보호할 수 있게 하였다. 서유럽 방어구의 혁신 중 하나는 연모양의 방패였는데 이것은 로마의 스쿠툼(scutum)과 작은 원형방패의 효과를 절충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기병들에게 원형방패보다 더 휴대하기 간편한 모양이었다. 또다른 혁신은 호버크(hauberk)의 발명이었는데 이것의 목적은 투구와 메일셔츠 사이의 목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지상전술 일반 전술적인 혁신은 별로 없었다. 기병은 그 우세를 세계적으로 이어나갔다. 비잔틴은 계속 전시대의 기세를 이어나갔고 적들은 비잔틴의 전술을 배우려고 했지만 그에 걸맞는 훈련과 편제를 갖추지 못했다. 축성술의 부활은 공성술에도 프리미엄이 붙게 만들었다. 비잔틴은 이번에도 모범이 되었지만 그리스의 불(Greek fire)을 제외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이상의 기술을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서유럽의 경우 무기와 기술은 로마가 천년전에 도입했던 것들과 비교해서 조잡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바이킹의 파리공성전같이 눈여겨볼 만한 사건도 있었다. 모든 전술적인 면에서 서유럽인들은 로마를 최고의 보기로 들고 그들이 이해하는만큼 로마의 전술을 무겁고 둔중한 기병들의 충돌에 적용시켰다. 이때 서방에서 유일하게 중요하게 여겨졌던 병법서는 베게티우스(Vegetius)의 데 레 밀리타리(De Re Militari)였는데 이것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상류계층(gentry) 이상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에게 필독서가 되었다. 바이킹의 전술 바이킹들은 본질적으로 습격자들로 정복보다는 약탈과 전리품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들은 호전적이고 전투를 즐겼지만 굳이 전투를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투를 피하려하지는 않았다. 숙련된 전사였던 이들은 서유럽에서보다 상대적으로 더 훈련받았으며 임시로 지정된 대장에 대한 충성이 기초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병으로 창, 검, 도끼 등으로 무장했으며 가끔씩 활을 가지고 다니기도 하였다. 방어갑주로는 투구, 둥근 방패, 가죽재킷 등이 있었는데 나중에는 메일셔츠도 많이 도입되었다. 처음 바이킹들은 수백명 단위의 소규모 부대로 약탈활동을 벌였지만 많은 숫자가 서로 연합하여 합동활동을 펴는 것도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885~886년 파리를 공격한 바이킹들의 숫자는 대략 삼만여명으로 추정된다. 바이킹들이 처음 서유럽인들과 싸울 때 그들이 처음 만나는 것은 숫자는 더 많지만 무장, 훈련, 지휘 등에서 빈약하기 그지없는 민병들인데 바이킹들은 방어-공세 전술을 사용하였다. 이 전술은 민병 다음으로 만나는 전문기병들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유럽인들은 그들의 관점에서 성체와 결합한 기병의 전문화가 바이킹 습격자들에게 효과적인 답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중장기병들은 큰 충격을 줄 수 있고 대등하게, 혹은 숫자적으로 열세가 아니라면 우월하게 싸울 수 있었다. 만약 이러한 중장기병들의 전면전만으로 결판이 나지 않는다면 그때는 빠른 전문기병들이 바이킹들의 진열과 어느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효과적으로 끈임없이 바이킹들을 괴롭혔다. 기병만이 아닌 다른 병종들과 함께 전투를 벌일 수도 있었다. 이러한 저항이 계속되자 바이킹들은 두가지의 대응책을 내놓았다. 첫번째는 뭍에 닿자마자 가까이에 있는 모든 말을 빼았아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빠르게 움직였다. 처음 말은 오직 이동할 때만 사용되었다. 나중에 적기병들의 대응이 더욱 강력해지자 그들은 물가와 반도, 섬 등에 잘 방비되는 대규모의 영구기지들을 차려놓고 자신들의 고유의 기병들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바이킹의 주력은 보병이었다. 마자르의 전술 마자르족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고대 스키타이족과 비슷했다. 그들은 경기병이 주력이었으며 경장이거나 아예 무장을 하지 않았고 무기로는 주로 활을 썼으며 특징으로는 기동력이 있었다. 그들은 서유럽의 중장기병과는 전면전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으며 되도록이면 전면전을 피하려고 하였다. 그들의 싸움방법은 대략 파르티아군이 Carrhae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한 것과 비슷했다. 일단 유럽의 둔중한 포메이션에 닿지 않도록 거리를 둔뒤 활로 적을 괴롭히고 적이 부상, 피로 등으로 진열에 틈이 생기면 그 틈으로 파고든다(주로 배후를 공격한다). 그리하여 진열을 산산조각내 각개격파하거나 떨어져나간 병사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서유럽 기병들을 만났을 경우 그들은 적기병들의 집중공격을 피해 재빨리 기동하거나 방향을 전환하였다. 하지만 적들보다 빠른 기동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성체가 발달하고 중장기병들의 대응도 점점 효과적으로 변해가자 곧 그들의 유목민족으로서의 전술은 여러 사회적 여건과 맞물려 점점 사라지고 유럽식 전술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해전 해전에서는 그리 중요한 진전이 없었다. 제대로된 효과적인 함대를 보유한 국가도 비잔틴뿐이었고 이것도 전시대보다 더 쇠퇴한 것이었다. 이시대 눈여겨볼만한 해상세력이라면 해적들인 서유럽의 바이킹, 지중해의 이슬람 해적(corsair, 디스럽션 웹으로 적을 무력화시키는ㅡㅡ;;;), 흑해의 바랑인(Varangian, Rus)들이 있다. 해적들은 바다에서의 전투보다는 배를 약탈하고 육지에서 싸웠기 때문에 해전은 되도록 마지막으로 돌려놓았다. 10세기에 이르면 다시 회복한 비잔틴의 해군이 해적들을 진압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로 지중해에서는 몇가지의 화려한 해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바이킹의 배는 지중해의 전선들과는 달랐다. 길이는 30m 이내였고 열개에서 열여섯개의 노가 양쪽에 있었으며 바람이 잘 불때는 충분히 배를 추진시킬 수 있는 사각돛을 달고 있었다. 처음 이 배는 60에서 백명의 인원을 태울 수 있었지만 9세기 후반에는 최대 이백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바이킹들의 선박조종술은 육상전만큼이나 우수했다. 잉글랜드의 알프레드 대왕은 해안지방을 바이킹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해군을 건설했다. 이것은 그의 후계자인 에드워드와 Aethelstan이 데인족과 스코트족에 대한 해상공세에 비교할만한 업적이었다. 보통 알프레드를 영국해군(Royal Navy)의 아버지로 부르는데 이것은 앵글로색슨의 함대가 9세기와 10세기에 걸쳐 사라지고 한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영국의 해군이 재건되었다는 사실을 비추어 볼때 뭔가 좀 빠진 듯하다. 니케포로스 포카스(Nicephorus Phocas)가 주도한 비잔틴의 크레타에 대한 육해 공동작전을 보면 비잔틴의 기술력과 독창성을 알 수 있다. 그의 운반선에는 경사로(ramp)가 달려있어서 기병들은 상륙하고 준비할 필요없이 곧바로 적지로 뛰어들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현대 LST의 프로토타입이었다. |
밀리터리 발전사 - 파티마 왕조(Fatimid Caliphate)
1099년부터 1107년까지 이집트는 해마다 우트르메르(Outremer, 십자군 왕국들)를 침공했는데 이들의 부와 통합성 그리고 편제 때문에 파티마 왕조는 잠재적으로 셀주크(Seljuk)보다 더욱 위협적인 적이었다. 왕조는 가능하다면 원하는 만큼의 군대를 야전에 투입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1101년 9월 1,1000명의 기병과 2,1000명의 보병을 투입한 Ramleh 전투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고도 이집트는 다음해 이만명의 군대를 동원하는데 문제를 겪지 않았다. 해군력에 있어서도 다른 이슬람 세력에 비하면 독보적이라 할만큼 강력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집트는 투르크와 달리 군사국가가 아니었지만 그 특유의 부로 많은 용병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정예부대는 왕실근위대(Halka)로 백인노예들로 이뤄져 있었으며 주로 다양한 투르크 부족들 중에서 뽑혔지만 슬라브, 아르메니아, 비잔틴, 수단인들 역시 포함하고 있었다. 투르크인들은 기병으로 활약했으며 수단인들은 보병이었다. 근위대는 몇개의 연대로 편성되어 있었으며 각 연대 중에서 두드러진 병사나 혹은 출신국가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비잔틴인으로 이뤄진 Rumiya(로마라는 뜻), 슬라브인들로 이뤄진 사칼리바(Sakaliba), 흑인들로 이뤄진 Sudaniya 등은 병사들의 출신국가에 따라 편성된 연대들이고 그외 Gafiziya나 Guyushiya라는 이름의 연대도 있었으며 근위대의 총병력은 오천명이었다. 그외 천영근위대라는 조직도 있었는데 총수 오백명 정도로 귀족가문의 젊은이들에서 뽑혔으며 군사와 관료수업을 받고 군사행정면에서 활약하였다. 이들 중 두드러지게 활약하는 사람은 수장(emir)이 될 수 있었다. 근위대는 전체군대의 핵심이었으며 전투 중 이들의 행동은 모든 군대의 사기에 영향을 미쳤다. 민약 이들이 패배하거나 전장을 떠난다면 전투는 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수장들은 그들만의 호위대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1160년대의 고관(vizier)이었던 Dhirgham은 오백명의 기병과 Barkiya라는 연대를 따로 거느렸다.
다른 군대는 주로 아랍, 베르베르, 수단인들 중에서 충원되었지만 이들의 전투능력은 셀주크나 프랑크군에 비해 낮았다. 수단인들은 보병과 궁병을 맡았는데 활을 사용할 때는 무릎을 꿇고 화살을 쐈다. 베르베르, 페르시아, 시리아인들도 보병연대를 만들어 움직였다. 아랍과 일부 베르베르 병사들은 창과 칼을 들고 기병으로 활동했지만 프랑크 기병들에 비하면 전투력이 낮은 대신 기동력과 숫적 우세로 승부를 봤다. 군대 중에 궁기병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궁기병의 필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동맹을 맺은 투르크인들이 군대에 참여하여 궁기병으로서 활약하였다. 군대는 셀주크의 영향으로 영토예비병체제로 지탱되었다.
아랍인들은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동부와 시나이 반도에 거주하는 아랍인들(Bedouin)들은 경기병으로 치고빠지기 전술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아이유브(Ayyub) 왕조에서도 활약하였다. 1249년 다미에타(Damietta)에서는 밤에 성벽 위로 기어올라가 밖에 나와있는 프랑크인들을 죽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다미에타가 십자군에게 점령항다기 직전까지 도시를 지켰지만 자신들의 임무에 그리 억매이지는 않았다.
베두인인들은 그때도 지금과 같이 살고 있었다. 여러 관계있는 가족들이 모여 씨족을 이루었고 하나 이상의 씨족은 그 밑의 지도적인 위치에 있는 지족에서 선출된 족장(shiekh)의 지도를 받았다. 이러한 씨족들이 여러개가 모여 부족을 이루었다. 사회는 가부장적이었고 전사들은 족장이 하는 일을 자원하여 따를 뿐 명령을 받지는 않았다. 이러한 것은 족장의 의사에 따라 얼마든지 약탈을 위해 승자쪽편으로 돌아설 수도 있었던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정규전에서 베두인인들은 별로 믿을 수 없었다. Banu Kinana는 베두인 부족들 중 군사력과 용맹성으로 가장 명성을 얻는 부족이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군대의 힘은 거대했으며 12세기 초 우트르메르를 침공한 것은 오직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군대의 세부적인 것은 1037~94년 사이에 가장 잘 알려졌지만 12세기의 군대와 왜 그렇듯 달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시기의 잠재적인 군사력은 구만명의 보병과 115,000명의 기병으로 기병의 경우 만명은 궁정근위대, 오만명은 베두인, 이만명은 튀니지아, 만오천명은 모로코와 알제리였고 나머지는 기타지역에서 모집되었다. 보병은 이만명은 모로코(특히 Masmudi족), 만명은 동방인(시리아로 추정), 삼만명은 페르시아와 투르크에서 차출된 병력이었다. 병종들의 균형은 전쟁 때마다 달랐는데 1167년 Ashmunein 전투에서는 메일을 입은 구천명의 기병(Askaris로 추정), 삼천명의 궁병, 차으로 무장한 만만명의 아랍보병이 참전하였다.
군대는 복잡한 계급체제에 의해 지휘되었다. 국가의 최고기관인 궁정회의는 "검의 남자"라고 불리는 관리들의 기관인데 고위직부터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고관(Vizier)
고위의전관(High Chamberlain)
원수(Isfehsalar) - 모든 군대와 궁전보호책임자
대수장(great emir)
군주(sword-bearer)
창군주(lance-bearer)
마필관리관(equerry)
카이로 방위사령관
푸스타트(Fustat) 방위사령관
군대에는 세 종류의 수장들이 있었는데 가장 높은 금사슬의 수장은 수많은 사단들을 지휘할 수 있었고 군주(sword-bearer)는 칼리프와 관리들을 호종하는 역할을 맡았다. 가장 낮은 계급들은 함께 모여 중장기마대를 형성했으며 그들의 종자들은 보다 가벼운 무장으로 기병부대를 이뤘지만 이들의 무장은 베두인 경장기병들보다는 중장이었기 때문에 중장인지 경장인지 분류하기 어려웠다.
십자군 시대 이집트의 해군력은 이슬람 중에 가장 강력했으며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 프랑크와 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해군기지들은 알렉산드리아, 다미에타, 아스칼론(Ascalon) 그리고 시리아와 홍해 등에 설치되었다. 해군에는 전함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각 지방과 항구에서는 일정한 수의 상선들을 공급하여 함대를 지원하였는데 이러한 전통은 아이유브 왕조 때까지 계속 되었다.
해군의 역할은 바다에서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각 전함들은 선장의 지휘를 받았는데 이들은 해병들을 주로 지휘했고 항해는 주로 부선장의 몫이었다. 해병들은 12세기에 최소 두가지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1183년 이집트를 출발한 이들은 홍해를 건너 베두인 말을 타고 메디나(Medina)를 공격하려는 샤티용(Chatillon)의 레날(Retnauld)을 패배시켰고 1189년에는 아크레(Acre)에 만여명의 해병들이 상륙하여 살라딘이 아스칼론 전투 이후 새로운 군대를 일으킬 때까지 프랑크인들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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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그러고보니 예를 든다는게 전부 십자군이라는ㅡㅡ;;; 그나저나 신재호님은 언제 사이트개편 끝내신답니까? 한달이라더니 이건 일년은 된거같은디ㅡㅡ;;;
밀리터리 발전사 - 전쟁의 부활(1000~1200)
혼란의 시대를 지나 어느정도 안정기로 들어선 이 시대는 로마의 멸망 이후의 무질서를 바로 잡고 서서히 체계가 잡혀가던 시대였다. 이러한 경향은 군사기술에도 영향을 미쳐 특히 서유럽과 투르크족의 융성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군사적인 분야에서 천재성을 나타낸 인물은 없었지만 몇몇의 뛰어난 능력을 가진 군인들은 가즈니(Ghazni)의 마흐무드(Mahmud), 잉글랜드의 리처드 사자왕(Richard the Lionhearted) 비잔틴의 알렉시오스(Alexius), 셀주크 투르크의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 이집트와 시리아의 살라딘, 시칠리아의 노르만인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 등이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군사적 역량 뿐 아니라 이 시대에 나타난 다음 네가지의 요소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첫번째는 전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흑해와 카스피해 북쪽과 남쪽으로 서진하는 투르크족이었다. 그중 북쪽에서의 움직임은 비잔틴과 슬라브족의 연합으로 페체네그(Pecheneg)족과 쿠마나(Cuman)족을 막아냄으로서 막을 수 있었지만 남쪽인 중동에서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았다. 이들은 비잔틴의 아시아영토를 대부분 빼았고 중동의 거의 전역으로 스며들었으며 십자군에게 침략을 받기도 했지만 이들의 팽창은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두번째는 첫번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비잔틴의 쇠퇴가 있다. 하드리아노폴리스(Adrianople) 전투가 로마의 몰락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처럼 만치케르트(Manzikert) 전투는 비잔틴의 운명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하지만 국력과 군사력의 쇠퇴에도 불구하고 비잔틴은 여전히 병법적 우수성에서 서구세계의 지도적인 위치에 군림했으며 놀라운 회복력 덕분에 제국의 수명을 몇세기 더 연장할 수 있었다.
세번째는 유럽국가들에서의 권력의 집중현상이었다. 지방분권적인 봉건제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었지만 민족적인 결집현상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특히 두드러졌고 독일, 스페인, 폴란드에서는 억제되었다.
마지막은 가장 유명하고 군사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십자군 전쟁이 있다.
무기와 갑주
새롭게 나타난 중요한 무기로는 석궁이 있다. 석궁은 말그대로 휴대용 노포라고도 할 수 있는데 기존의 활보다 무겁고 연사속도도 느렸다. 하지만 석궁의 화살(bolt)은 전통적인 가벼운 화살보다 더 멀리 빠르고 정확하게 나아갔으며 가장 중요한 점은 왠만한 투척무기는 견뎌내는 갑주도 뚫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휴대용 노포에 대한 실험은 중국과 로마에서 시도되었지만 서구에서는 로마의 몰락 이후 그 개념조차 사라져버렸다. 이 석궁은 11세기에 다시 부활했으며 헤이스팅스(Hastings) 전투에서 노르만군에 의해 사용되었다.
석궁은 투르크 기마궁술에 대한 서유럽의 답변이었다. 석궁병은 주로 보병이었으며 십자군은 기마석궁술을 시도했지만 그렇게 되면 기동성은 높아질지 몰라도 석궁의 정확도와 연사속도가 차감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미있게도 같은 시대 동남아의 참(Cham)인들은 기마석궁병을 운용했었다.
서유럽의 또다른 새로운 무기는 보병용 미늘창인 핼버드(halberd)가 있다. 핼버드는 기존의 창끝에 도끼머리를 단것으로 찌르기뿐 아니라 베기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무기들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서유럽인들이 한때 쓸모없고 기병의 보조용으로만 여겼던 보병의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석궁과 마찬가지로 핼버드는 보병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와 마찬가지였다.
또다른 무기의 발달은 이슬람의 시미터(scimitar)의 완벽함이 있다. 이 언월도의 주목할만한 점은 외형적인 면보다는 야금술의 발달에 있다. 특히 다마스코스(Damascus)와 톨레도(Toledo)의 장인들이 칼날의 제작자들로 유명했으며 이들이 만든 칼날은 유연하고 단단하며 날카로운 것으로 유명했다.
유럽에서는 방어갑주가 계속해서 진보하고 있었으며 중갑화되어갔다. 메일셔트(mail shirt)는 짧아졌고 긴 스커트는 메일브리치즈(mail breeches)로 대체되었다. 소매는 손목길이에 맞춰졌고 두건(coif)이나 메일드후드(mailed hood)가 종종 더 달렸으며 투구를 대신하기도 했다. 체인메일(chain mail) 한벌은 15~25kg 정도 나갔다. 착용자의 몸이 단단한 갑주의 표면과 마찰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갑주 안에 무거운 가죽코트인 펠트(felt)를 입었다. 보병의 경우 가죽이나 펠트재킷이 유일한 방어구인 경우도 있었다. 물론 이러한 방어구로 왠만한 가벼운 화살공격은 막을 수 있었지만 이러한 십자군 보병을 목격한 투르크 기록자는 이들이 마치 바늘겨레같았다고 표현했다.
투구 역시 발달했다. 코가리개는 길어지고 단단해졌으며 나중에는 캐스크(casque)의 발달로 시야와 호흡을 위한 구멍을 제외한 머리와 목 전체를 둘러싸는 투구가 나오게 되었다. 이런 투구는 너무 무겁고 호흡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보통 때는 안장앞머리에 달고 다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그제서야 착용했다. 이 시대 가장 흔했던 포트헬멧(pot helmet)의 겨우 7~10kg 정도 무게가 나갔다. 이 시대 말이 되자 끝이 뽀족한 투구가 나오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면에 맞았을 때 충격을 빗겨나가게 하고 투구가 착용자의 얼굴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고안된 것이었다.
이러한 갑주의 발달은 유럽에서 사상자들이 적게 나오는 원인이 되었지만 동방에서는 승패에 따라 사상자의 불균형이 심했다. 이겼을 경우에는 사상자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가볍지만 패했을 경우에는 무거운 방어구가 오히려 도망치는데 짐이 되어 엄청난 피해를 봤던 것이다.
축성과 공성
축성분야에 있어서는 거의 진전이 없었다. 하지만 십자군은 비잔틴으로부터 비록 다른 곳에 각각 적용했지만 서유럽을 완전히 바꿔놓을 축성과 도시방어에 대한 개념을 배워왔다. 비잔틴에게 있어 요새란 방어-공세를 위한 기지였으며 따라서 쉽게 군대를 지휘할 수 있는 접근이 용이한 곳에 세웠다.
봉건제의 제약으로 장기간의 대규모 군사작전이 쉽지 않은 유럽에서는 축성은 주로 방어를 위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요새나 성들은 되도록이면 접근이 용이치 않은 장소에 세웠다. 그렇기에 공격자가 요새나 성을 공격하기는 상당히 어려웠다. 하지만 이것은 수성측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성 밖으로 반격을 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성전에는 한가지 새로운 무기가 소개되었다. 트레뷰셰(trebuchet) 혹은 망고넬(mangonel)이라 불렸던 이 투석기는 돌이나 기타 투척물로 성벽을 부수거나 성벽 안으로 던져넣는 역할을 맡았다. 노포(ballista, catapult)와 다른 점은 노포의 경우 당김과 휨으로 힘을 얻어 발사하는 것에 비해 트레뷰셰는 투척물보다 무거운 물체를 갑자기 놓아서 그 반동으로 투척물이 날아가게 만드는 원리로 움직였다.
공성방법은 바뀌지 않았다. 이미 인간은 오래전부터 성벽을 부쉬거나 성벽 위에 올라가거나 밑으로 굴을 파고 들어가는 등 더이상의 새로운 공성술은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축성문화가 달랐기 때문에 동일하지는 않았지만 중세유럽에서도 고대 마케도니아와 로마와 같은 방법의 인공산(agger)을 쌓아 수성측의 우위에 서는 공성전술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왠만한 유럽의 군대는 인력부족으로 소규모인데다 공성할 대상의 위치또한 대부분 험한 지형에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전술은 자주 사용되지는 않았다.
상황이 이러니 대부분의 공성은 포위를 통한 기아의 유도였다. 봉건귀족들과 군주들은 언제까지고 기약없이 군대를 야전에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성측에서 준비만 잘하면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많았다.
지상전술
일반
기병은 주요병종이었지만 보병의 주요성은 높아져갔다. 십자군 이전에도 유럽인들은 보병을 잘만 이용하면 완전히 기병만으로 이루어진 적보다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병들은 기병들의 기동을 위한 발판이 되었으며 중요한 곳을 빼았거나 지킬 수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어떤 지도자들은 기사와 중기병(man-at-arms)의 일부를 하마시켜 신용이 안가는 모집병대신 군대의 핵심으로 삼기도 하였다. 어떤때는 보병 전체가 하마기사들일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기사들은 보통의 모집병들보다 훨씬 잘 무장되어있고 명예에 대한 의식 등이 그들에게 훈련과 비슷한 효과를 주어 보통의 민병(fyrd)들이라면 흩어져버렸을 기병의 돌격에 굳건히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싼 기병을 이런 식으로 매번 쓰는것은 비경제적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모집병들 대신 무장과 훈련이 잘된 보병의 상비군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십자군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 전투 중 기동에 능한 이슬람군과 싸우기위해 기병의 기동에 기초가 될 수 있는 보병의 진형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러한 십자군의 작전을 알아차린 이슬람군은 기병과 보병을 분리시켜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도입하게 되었다. 살라딘은 하틴(Hattin) 전투에서 이런 전술을 사용하였다. 이슬람의 이런 전술은 십자군으로 하여금 다시 기병과 보병의 밀착된 합동운용의 중요성을 절감하게 해주었고 아르수프(Arsouf) 전투는 그런 식으로 치뤄졌다.
보병과 기병의 합동전술은 발사와 이동과도 관계가 있었다. 석궁에 대한 의존은 십자군의 경험으로 촉진되었는데 투르크 궁기병들에 대항하려면 발사무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석궁으로 적들을 뒤흔든뒤 승패를 결정짓는 중장기병을 돌격시키는 것이 십자군의 전술이 되었다.
단일병종으로는 십자군을 괴롭힐순 있어도 패배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슬람은 역시 병종들간의 유기적인 운용이 필요함을 느꼈다. 살라딘은 아랍과 이집트 보병들과 맘루크(Mameluke) 궁기병들을 효과적으로 혼합하여 활용한 인물이었지만 이슬람군은 대체적으로 경무장을 했기 때문에 백병전능력이 십자군에 비해 떨어졌다.
보병전술
이시대 말이 될때까지도 보병은 기병에 비해 명성이나 효과에서 뒤떨어졌다. 보병의 전술적인 행동은 기병들보다 뒤처진 상황이었다. 보병의 목적은 기병의 돌격을 위한 기지로 쓰여지거나 적기병이 돌격할때 발사무기를 사용하여 적을 사살하는 것이었다.
기병전술
이시대 기병은 크게 세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번째는 비잔틴과 투르크의 궁기병으로 비잔틴의 것은 훨씬 잘 훈련되어 있었으며 중무장했고 두번째 기종인 중장충돌기병의 역할도 병행했다. 서유럽인들은 이 병종에 강했으며 세계 어디에서도 서유럽의 기사와 중기병들과 같은 숫자로 싸워 이길 수 있었던 군대는 없었을 것이다. 세번째는 경기병으로 창과 검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충돌기병으로 활용되었으며 아랍, 이집트, 북아프리카에서 사용되었지만 살라딘 이전에는 십자군들에게 피해를 입는 원인이 되었다.
비잔틴과 이슬람의 영향을 받은 십자군은 경기병을 받아들여 정찰에 사용하였으며 궁기병으로도 활용하였다. 일차십자군이 성공한뒤 경장궁기병종인 Turcopoles가 생겨났는데 이들은 주로 현지에서 태어난 2세대유럽인들로 이뤄져 있었다. 이베리아의 기독교왕국들도 같은 시기 비슷한 병종인 Genitours를 운용했는데 이들은 가벼운 창이나 투창으로 무장하고 정찰과 습격이 주목적인 기병들이었다.
십자군의 고생에도 불구하고 서유럽에 궁기병을 소개하려는 노력은 실패했다. 하지만 투르크와 헝가리의 용병 궁기병은 가끔씩 유럽의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세유럽의 군대
살펴본 바와 같이 충돌을 목적으로 한 중무장기병은 서유럽 봉건병제의 핵심이었다. 무기와 갑주는 비쌌기 때문에 처음에는 부유한 귀족들만이 무장할 엄무를 낼 수 있었다. 고대로마의 단어인 miles는 오직 이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여겨졌으며 이들 중장기병들은 기사로 불렸다.
두가지 원인은 상황을 바꿔놓았다. 첫번째는 귀족들과 국왕들은 전쟁을 일으킬때 병력동원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게다가 가신들이 상위군주들에게 군대를 제공하는 기간이 너무 짧아 수많은 군주들의 야망이 좌절되었다. 이것을 해결할 방법은 상위군주에게 능력이 있다면 평민들에게 무장과 말, 훈련을 제공하고 필요하면 어느때나 소환할 수 있는 일종의 상비군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들은 중기병(man-at-arms)으로 불렸으며 miles는 기사외에 이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러한 상비군을 유지하기 위해 군주들은 가신들에게 의무대신 돈을 받았으며 이것은 군주와 가신 모두를 만족시켰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모집된 민병들은 통 신뢰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와 중기병들이 말에서 내려 보병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것은 잘 훈련되고 무장된 전문보병들이 나타나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창병들이었으며 이들의 임무는 전투 중에 두터운 방진을 이룬후 석궁병과 아직은 둔했던 기병들의 행동을 엄호해주던 것이었다. 레냐노(Legnano) 전투에서 독일 기사들을 막아내고 밀라노 기병들을 엄호하여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Barbarossa)에게 패배를 안겨줬던 것은 다름아닌 보병들이었다. 아마 12세기 최고의 창병종들은 네덜란드에서 육성되었다.
그보다 전 잉글랜드에서는 민병들의 취약함을 고민하던 카뉴트(Canute)가 대규모의 호위대 상비군(housecarl)을 만들어 자신의 군대의 핵심으로 삼았다. 이들 하우스칼은 잉글랜드군의 주력으로 있다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전멸하였다.
어떤 귀족들은 용병들을 육성하여 상비군이 없는 군주들이나 자신의 병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 필요한 군대를 원하는 군주들에게 댓가를 받고 빌려주기도 하였다. 이들 용병들은 잉글랜드를 침략한 노르망디 공작 기욤(William)의 군대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해전
가장 주목할만한 현상은 이탈리아에 있는 해상국가들, 특히 베네치아, 피사, 제노바의 성장이었다.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국도 상당한 해군력을 보유했다. 12세기가 되면 4국의 해군들이 지중해 대부분을 장악하게된다. 한때 최강의 해상강국이었던 비잔틴은 투르크에게 해군의 근거지인 아나톨리아를 상실한뒤 해군력이 현저히 쇠퇴했다.
해운력은 십자군에게 결정적인 요소였다. 12세기 십자군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해상세력들에 의해 성지로 운반되었으며 병참또한 이들의 몫이었다. 만약 이슬람세력이 11세기에 지중해에서 세력을 잃지 않았다면 십자군의 성공은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함들은 전시대와 다름없이 길고 낮은 갤리선으로 노꾼들은 노예들이었다. 해전방법 역시 전시대와 마찬가지로 배를 적선에 들이받은 뒤 갑판에 올라가 선상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교회와 군대
서방교회
이론적으로 서유럽의 호전적인 야수성은 카톨릭의 교리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교회는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였으며 군대를 세속적이든 종교적이든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러한 것은 교황과 신성로마황제 간의 알력을 보면 알 수 있다.
역설적인 일은 사제들의 전투참여였다. 이들은 적극적인 참여는 아니더라도 군대의 요청에 거부하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이들 대부분은 신앙심때문에 성직자가 되었다기보다는 성직자가 누리는 특권을 위해 그길로 들어선 귀족들이었다. 한편으로는 많은 성직자들이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되는 전투에만 참전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아데마르 뒤 퓌(Adhemar du Puy)는 이교도 이슬람과 싸우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기여이며 신의 영광이라고 믿었다.
전쟁을 지배하거나 제한하려는 움직임은 이시대에 일어났는데 여기에 관한 세가지 징후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신의 평화"이다. 10세기말 프랑스의 교회는 군사작전 중에는 사제, 수도사, 수녀 등은 해칠 수 없다는 격언을 전파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목동, 학동, 상인, 여행자에게까지 확장되었다. 나중에 신의 평화는 더욱 확장되어 교회 자체나 일요일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포함되게 되었다. 신의 평화는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에게 별 문제없이 도입되었는데 이것이 군사활동에 저촉되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신의 평화보다 더욱 영향을 끼친 것은 사투중지령(the Truce of God)이었다. 이 계율은 11세기초 아키텐(Aquitaine)에서 처음 나타났으며 일요일에 싸우는 것을 금지했다. 이 계율은 처음에는 관망만 됐지만 나중에 주교들에 의해 모든 주말로 확장되고 나중에는 수요일 저녁기도 때부터 월요일 아침해가 뜰때까지로 연장되었으며 모든 사순절, 강림절, 성일 등이 포함되자 그냥 무시되었다.
세번째 교회의 계율은 확실하게 전쟁에 영향을 미쳤는데 바로 석궁의 사용금지였다. 1139년 석궁은 바티칸 칙령에 의해 기독교도들간에 쓰기에는 너무 야만스러운 무기라 하여 금지되었지만 이슬람을 비롯한 다른 이교도들에게는 사용이 허락되었다. 이것은 석궁의 효과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사건이었다.
동방교회
서유럽과 달리 통일되고 발달했던 비잔틴 제국의 정교회는 로마교회보다 전쟁과 살육에 대한 타협점이 적었다. 하지만 자기방어를 위한 살인은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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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날려버렸던 그글입니다;; 지난번에 썼을때는 쓰다만 글이었는데도 지금보다 더 많은 내용같았는데...;;
밀리터리 발전사 - 셀주크 투르크(Seljuk Turk)
압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를 섬기던 투르크군인들은 노르만인들이 기독교세계를 관통하여 원정을 다닌 것 같이 거의 모든 이슬람세계를 관통하였고 11세기에는 칼리프가 힘을 잃고 지방의 유력자들이 독립해나가자 거의 모든 독립국들이 투르크인 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집단은 셀주크 투르크로 지금의 중국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랄의 스텝지방에서 왔다. 셀주크군은 쇠퇴하던 사라센 제국으로부터 페르시아를 평정했으며 1055년에는 그의 투르크 고관(vizier)이 파티마 왕조와 함께 음모를 꾸미는 것에 대해 강력한 동맹의 필요성을 느낀 압바스 칼리프의 초대로 바그다드로 입성했다. 그들의 지도자인 토그룰-벡(Togrul Beg)은 이후 바그다드의 술탄임을 선포했으며 그의 형제인 차그리-벡(Chagri Beg)은 페르시아와 호라산(Khorassan)의 술탄이 되었다. 토그룰-벡의 후계자인 알프 아르슬란(Alp Arslan)은 두 술탄국을 병합했으며 파티마 왕조로부터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를 빼았고 비잔틴을 만치케르트(Manzikert)에서 물리치고 서아시아를 거의 지배함으로서 거의 모든 이슬람(주로 수니파)을 다시 하나의 지배체제하에 통일했다.
셀주크인들은 술탄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지방유력자들(주로 아랍인들)의 기본적인 군사편제는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크타(Iqta) 제도를 바꿔 순수하게 군사적인 임무에만 집중하도록 하였다.
총독들은 일년에 한번만 공물을 냈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충독 자신이 전비를 지출하여 무장시킨 일정한 양의 군대를 술탄의 지휘하에 참전시켰다. 페르시아에서만 투르크인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수장국(emirate) 사십개가 있었으며 이러한 제도는 투르크인들의 세력이 미치는 곳에 두루 퍼졌다. 물론 투르크의 지배를 받지않는 아랍가문들의 수장령들도 몇몇 있었는데 그중 샤이자르(Shaizar)는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어떤 지방에서는 수장들이 영토의 일부나 마을을 유력자에게 주고 그들이 거느리는 군대를 술탄이 수장들에게 군역을 받는 것과 같이 군역을 받았다. 이들 소수장들은 대부분 아랍인들이었다. 유럽의 봉건제와 비교해서 이들 전차인들은 술탄에게 가신의 의무를 지지 않았으며 이들이 섬기는 것은 오직 자신의 바로 위의 수장들이었다.
그러므로 셀주크의 군대는 술탄의 호위대와 근위대, 고용된 용병대 등과 이크타 제도에 의해 모인 지방수장들의 호위대, 노예, 가신, 모집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술탄의 호위대는 주로 투르크인들이었지만 투르드, 비잔틴, 아나톨리아, 슬라브, 그루지야 노예 등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기병이었으며 연대로 편성되었다. 이 정규군은 아스카르(Askar)로 알려졌으며 여기에 속한 병사들은 아스카리스(Askaris)라 불렸다. 진급은 복무기간에 따라 정해졌고 연대장은 수장이라 불렸으며 더 높은 지위의 지휘관은 하집(Hajib)이라 불렸다. 고위장교들은 노예들을 모아 자신들만의 사병중대를 만들 수 있었으며 이들은 주인이 죽으면 그 주인의 이름으로 연대명이 정해져 아스카르로 편입되었다. 시리아 아스카르에서는 자유인들도 지원할 수 있었으며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투르코만(Turcoman) 용병(궁기병)들과 카스피해 남서쪽 산악지대에 사는 다일람(Daylam)인들의 보병연대가 아스카르에 편입되어 싸우기도 하였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다마스코스와 이집트 아스카르에 편입되어 있었으며 다른 곳에 복무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스카르의 인원은 지휘관이나 수장의 능력에 따라 달랐고 정확한 편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차 십자군 전쟁 때 시리아의 대표적인 수장국들이던 알레포(Aleppo)와 다마스코스는 각각 이천명의 아스카르를 보유하고 있었고 1115년에는 그 두 도시와 마르딘(Mardin)은 야전군에 총 오천명의 아스카리스를 동원하기도 하였다. 소국이었던 샤이자르 수장국은 수백명 규모의 아스카르 밖에 보유하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의 아타베그(atabeg)들이 보유한 아스카르들은 훨씬 강력했는데 그중 알레포의 전통적인 적이었던 모술은 안티오케이아(Antioch)를 점령할때 만오천명의 야전군을 동원했다. 13세기 중반 바그다드의 칼리프는 대부분이 용병인 12만명의 기병을 지휘하였다. 이런 것을 보면 아스카르는 필요가 없을 때 타국에 빌려줄 수도 있었다고 보여지는데 1110년 시돈(Sidon)의 총독은 셀주크의 공격을 막기 위해 다마스코스로부터 투르크 궁기병을 빌린 적이 있다.
전투에서는 아스카르가 주력이었지만 모집병들도 필요할 때 빠질 수 없었다. 아랍의 이러한 민병제도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소아랍왕조들이 계속 되면서 존속했고 작은 아랍수장국들은 소수의 아스카르 밖에 거느리지 못했기 때문에 군대의 주력은 민병들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민병들은 북서아프리카와 쿠르디스탄(Kurdistan)의 이주자들과 함께 다양한 부족에 속한 아랍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금 다른 군대의 종류로는 땅을 수여받고 야전군에는 참전하지 않는 영역예비군이 있다. 이들은 12세기까지 이집트에 남아있었고 시리아에서는 초기 십자군시대까지 남아있었다. 유목아랍부족인 베우인(Bedouin)인들은 투르코만과 마찬가지로 따로 구성되어 있었다. 민병들과 영역예비군들은 모두 말을 탔으며 토종아랍인들은 창과 검으로 무장했고 원거리공격을 위해 투르크인 이주자들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두 군대에서 무기와 말은 본인부담이었지만 공동으로 출자하여 병기공장에 집단으로 주문하기도 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셀주크군의 주력은 기병, 특히 궁기병이었지만 세번째 열에서는 보병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방이나 시골에서 징집되어 오거나 지원자들과 비전투 종군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열정으로 사기는 높았지만 훈련과 무장 등은 형편없었고 군사적인 가치도 적었다. 알레포와 같은 대도시의 시민들로 이뤄진 부대는 달랐는데 이들은 용감하기로 유명했고 공병과 지뢰공병으로 크게 활약했다. 보병의 주된 임무는 요새, 성전, 진지의 수비를 맡거나 공성전에서 활약하는 것이었다. 무기는 각자가 알아서 부담했다.
야전에서의 병종비율은 작전 때마다 달라서 단정지을 수 없다. 하지만 아스카르가 주력인 것은 변함이 없었고 1167년에 있었던 아슈무네인(Ashmunein) 전투의 예를 든다면 쉬르쿠(Shirkuh)는 이천명의 아스카르를 보유하고 있었고 육천명의 각각의 지도자에 의해 지휘되는 투르코만과 투르크 용병 경기병들을 동원했다.
작전 중에 아스카르는 상당한 군수품과 마초들을 노새와 난타에 싣고 가는데 대체적으로 건조한 중동의 기후 때문에 마초의 비율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초동반은 아군의 영토에서 마초를 징발하는데 스스로 제한을 두게 만들기도 하였다. 아무튼 불충분한 병참은 작전기간을 겨울을 제외한 계절동안 두세달 정도밖에 지속시킬 수 없도록 만들었다.
군의들은 예전의 압바스 때와 같이 군대와 동행했는데 셀주크의 임시야전병원은 낙타 사십마리분의 의료품을 싣고다녔다.
위에서 본것과 같이 수장들은 아스카르에 절대적으로 자신의 권력을 의지하고 있었다. 아스카르 외에 봉건모집병들이나 지원자들로는 효과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아스카르가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이들을 잘 어루만져 주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아스카르는 특정한 인물에게 속해있는 집단이 아니라서 자신들이 섬기는 주인을 바꾸는 것은 색다른 일이 아니었다. 수장국들간의 끈임없는 전쟁은 더 많은 땅을 정복하고 더 많은 세금을 걷고 그를 바탕으로 하여 권력의 바탕인 아스카르를 강화시키거나 그들에게 지급하는 봉급을 늘리려는 의도로 인해 일어났다.
수장들간의 경쟁은 투르크와 아랍 왕조들간의 끈임없는 전쟁 뿐 아니라 수장과 그들의 피지배민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특히 시리아의 알레포와 다마스코스에서는 전통적으로 시민들의 힘이 강했기 때문에 일종의 시민군인 아흐다트(ahdath)가 형성되어 그들을 복종시키려는 지배자들의 야망을 억제했다. 파티마 왕조가 시리아를 정복했을 때 다마스코스의 아흐다트는 정복자에게 복종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아흐다트는 나중에 십자군이 침략해올 때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수장국들의 독립성과 형식적인 바그다드 술탄과의 예속관계는 예전의 사라센 제국이 그랬던 것처럼 셀주크 제국을 점점 붕괴시켜 나갔다. 상황은 셀주크의 왕자들과 지방정부들이 투르크 아타베그들의 손에 들어가면서 악화되기 시작했다. 아타베그는 왕실 아스카르 중에 뽑힌 해방노예로 대부분 킵차크(Kipchak)와 타타르(Tartary) 출신이었으며 술탄에 의해 왕실에서 뽑혀 군사와 행정경험을 쌓으며 진급했다. 자유민들은 먼 지방의 관리를 맡기는 것에 대해 통 신뢰감이 가지 않았고 토종 페르시아인들이나 아랍인들이 정복자들에게 바치는 충성심은 일시적이었기 때문에 술탄을 오랫동안 섬긴 노예출신 고위관료들은 술탄에게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다. 노예가 되는 것은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노예출신의 관료와 장군들은 많은 존경과 명예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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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셀주크인데 내용은 전혀 아니다;;;
밀리터리 발전사 - 아이유브 왕조(Ayyubid sultanate)
살라딘은 1169년 프랑크와 손을 잡고 살라딘과 그가 이끄는 투르크인들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민 파티마 왕조의 최고고문관을 참수함으로서 이집트의 실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살라딘의 실권장악을 못마땅하게 여긴 근위대의 수단부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살라딘은 이들의 병영에 불을 질러 가족들을 구하러 병영으로 돌아가는 반란군을 공격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아르메니아 부대는 반란에 참가하지 않았지만 병영에 불이 나는 바람에 타죽거나 뿔뿔히 흩어져 버렸다. 수단인들의 저항은 화제 이후에도 이틀간이나 지속되었고 살라딘은 이들을 도시 밖으로 나가도록 일단 허가증을 줌으로서 사태를 일단락지었지만 살라딘에 대한 저항은 1176년까지 이어졌다. 근위대가 해산되자 살라딘은 자기 가문의 가신 중 쿠르드 자유인 천여명, 이집트에서 자신에게 충성을 맹새한 아사드-앗-딘 시르쿠(Asad-ed-Din Shirkuh)과 누레딘(Nur ed-Din)의 아스카르(askar) 이천명을 뽑아 근위대를 새로 조직했다. 이들 새 근위대는 주인들의 이름을 따서 부대명이 정해졌는데 살라딘의 부대는 Salahiyah, 시르쿠의 부대는 Asadiyah로 이름지어졌다. 근위대 다음으로 살라딘은 군대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이집트는 1163년부터 조금이라도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려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제거하기로 유명한 Dhirgham의 철권통치를 받았으나 그는 프랑크 영토를 습격하는 것 외에는 대체적으로 방어적인 정책을 취했다. 살라딘은 기존의 봉건제도로는 자신의 목적을 성취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용병들에게 줄 자원도 부족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이크타(Iqta) 제도를 도입하여 이년 뒤 작지만 효율적인 군대를 만들었다.
모술과 같은 이슬람의 주요군주들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아직 봉건모집병들이 필요했다. 그의 1174년부터 83년까지의 정복활동은 주로 정예궁기병들과 이집트 창기병들의 활약에 크게 힘입었지만 그것도 모집병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그가 이집트 병력만을 데리고 1170년과 77년에 시도했던 원정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원정 중 소수장들은 스스로 자원하여 살라딘의 종주권을 인정했지만 알레포(Aleppo), 다마스코스(Damascus), 모술(Mosul)같은 대수장국들은 1183년 알레포가 함락당할 때까지 강하게 저항했다. 살라딘의 손에 들어온 봉건수장들은 살라딘의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 모술과 같은 경우 프랑크에 대한 지하드나 시리아 원정 등에 깊숙히 참여하기도 하였다.
십자군을 상대로 한 원정에서 살라딘의 군대는 셀주크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소속과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단 눈에 띄는 소속군대만도 그의 쿠르드 호위대, 맘루크(Mamluk, 그의 아스카르에 속해있음), 각 수장들의 호위병들, 쿠르드 궁기병과 투르코만(Turcoman) 용병 그리고 모집병들이 있다. 1177년 아스칼론(Ascalon)에서 그는 이만육천명의 군대를 이끌었는데 그중 팔천명은 그의 쿠르드 호위병 천명과 용병들을 포함한 정예였고 나머지는 티레(Tyre)의 기욤(William)에게 "낮은 서열의 흑인노예들"이라고 묘사된 창병과 수단궁병으로 이뤄진 구이집트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187년이 되자 정예의 숫자는 아스카리스(askaris)와 용병을 포함한 만이천명으로 불어났는데 이것은 보병으로 참가한 구이집트군 모집병들과 같은 숫자였다. 이 병력들은 이집트와 시리아. 자지라(Jazira)와 디야르-바키르(Diyar-Bakir)까지의 북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알레포, 모술, 마르딘(Mardin), Balad Sinjar, 에데사(Edessa), 하란(Harran) 등지에서 참가한 수장들의 병력을 포함하고 있었다. 아크레(Acre)에서는 다른 병력비율이 되었는데 이때는 모술, 디야르-바키르, 북시리아, Balad Sinjar, 티그리스의 쿠르드 참가병, 하란의 아스카르 그리고 살라딘의 직접 거느린 아스카리스들이었다. 2년 뒤 리처드1세와의 대결을 벌인 아르수프(Arsuf)에서는 투릌, 수단, 아랍, 베두인인들이 참가했다. 이것을 보면 그의 군대가 점점 정열된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결과인지 53년 후 그의 후계자는 가자(Gaza)에서 오천명의 정예기병과 만명의 콰리즘(Khwarism)인들을 이끌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살라딘은 베두인으로 이뤄진 정찰부대를 둬서 항상 프랑크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하였다. 군대의 핵심이 아스카리스와 투르코만 용병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하마(Hama) 참가병의 경우 살라딘은 그들을 항상 우익에 두어 신뢰감을 보였다.
살라딘의 주요문제는 전쟁 중 모집병들을 통제하는 일이었다. 원정에 참가한 수장들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의 보급과 무장을 스스로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특히 장거리원정에 경우 많은 경비를 지출해야했고 그렇게 되면 원정에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군사들의 사기는 몇주밖에 지속되지 못했고 충분한 전리품을 얻거나 추수철이 가까운 때와 겨울과 우기가 길어질 때에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용병들은 계속해서 봉급이 지불되거나 충분한 약탈을 하지 못한 경우가 아니면 싸우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신뢰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따라서 원정기간은 길어야 일년을 넘지 못했고 군대는 매년 봄마다 재편성되었다. 살라딘은 예외적으로 삼년동안(1190~3) 군대를 유지하는데 성공했지만 그역시 이슬람군대가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1188년 그는 북시리아 원정에 성공한뒤 안티오케이아(Antioch)를 정복하려 했지만 원정에 지친 그의 가신들이 압력을 넣는 바람에 도시정복에 실패한 적이 있다.
약탈의 유혹은 또다른 약점이었다. 1177년 살라딘은 보두앵(Baldwin)이 이끄는 기사 500명과 만났는데 보두앵은 살라딘과 싸울 뜻이 없었기 때문에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고 그의 병력은 흩어져 약탈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상당한 군대가 보두앵의 지휘를 벗어나 살라딘의 군대를 공격했고 이렇게 벌어진 몽기사르(Montgisard) 전투로 살라딘은 큰 피해를 입었다. 하틴(Hattin) 이후의 진격도 역시 약탈에 대한 군사들의 욕심 때문에 티레를 함락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말았다.
맘루크
맘루크들은 백인노예들로 전쟁에서 잡히거나 시장에서 팔린뒤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어린 시절부터 높은 계급의 수장들을 위해 군사훈련을 받아 호위대가 되었다. 맘루크와 비슷한 조직은 사라센 시절부터 있었지만 엄밀히 말해 그들은 맘루크가 아니었고 투르크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압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의 투르크 호위대는 투르크인만이 아니었고 슬라브, 아르메니아, 러시아인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이 순수히 투르크인만으로 구성되기 시작한 것은 1230년대부터인데 몽골의 침략을 받은 쿠만(Cuman)족이 킵차크(Kipchak) 스텝에서 도망쳐 대규모로 유입되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이들 호위대는 파티마와 프랑크로부터 약한 칼리프령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한 압바스 치하에서 강성해졌는데 누레딘과 살라딘의 지휘하에서는 더욱 숫자가 많아지고 강력해져 야전군의 절반을 차지할때도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살라딘의 후계자들에 의해 완벽해졌는데 봉건군대보다 뛰어난 이들의 자질을 깨달은 그들은 살라딘의 사후 일어난 내전에서 증원된 아스카르를 동원했다. 이후 호위대의 힘은 더욱 커져 자신들의 주인을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리는 경지에 이르렀고 술탄계승에도 영향을 미쳐 Kamili 맘루크가 엘-카밀(el-Kamil, Kamili 맘루크는 이 술탄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음)의 작은 아들 Es-Salih Ayyub를 술탄위에 앉히기도 하였다(1240).
아이유브(1240~9)는 왕조의 마지막 효과적인 술탄이었다. 술탄계승에서의 과정으로 그역시 같은 방법으로 쫓겨날 것을 우려한 아이유브는 Kamiliyah 맘루크나 군대의 쿠르드 자유민, 이집트와 아랍 모집병들 중 어느 하나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호위대없이 지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투르크인이 주류인 새로운 맘루크들을 수입해와 그중 천명 정도를 뽑아 푸스타트(Fustat) 반대편에 있는 al-Rawda 섬에 머물게 했다. 이들이 수도에 머물지 않은 이유는 카이로에서 술탄 비호하의 안하무인의 행동과 기존의 맘루크들과의 알력 때문이었다. 새로운 맘루크들은 바흐리(Bahri, 완전한 이름은 al-Bahriyah as-Salihiyah) 연대라고 불렸는데 bahr는 해외라는 뜻으로 새 맘루크들이 해외에서 수입되었기 때문이다.
아이유브는 1249년에 죽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몇몇 바흐리 지도자들은 자신들 고유의 맘루크까지 갖고있을 정도로 세력이 컸지만 계속 왕조에 충성을 바쳤고 바흐리의 본부는 Mansourah에 있다가 1250년 2월 이집트의 총사령관이 죽으면서 바흐리가 그자리를 차지하여 이집트의 군수권을 잡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들 바흐리를 이슬람의 템플기사단이라고 불렀다.
아이유브의 후계자는 같은해 모술에서 도착했지만 그는 자기 고유의 맘루크들을 이집트로 데려와 이들에게 실권을 줄 생각이었기에 바흐리와 다른 이집트 맘루크들의 지지를 잃어버렸다. 그해 5월 2일 그는 맘루크 바이바르스(Baibars)와 다른 바흐리들에게 피살당하고 아이유브의 아내는 고위 바흐리 사령관인 아이베크(Aybek)와 결혼함으로서 긴 맘루크 왕조가 시작되었다.
| 밀리터리 발전사 - 몽골의 시대(1200~1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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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두세기의 대부분은 한 세력의 독판이나 다름없었다. 서유럽을 비롯한 일부지역을 제외하고는 몽골의 말발굽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역사상 등장했던 천재중 한명인 몽골의 족장이자 문맹이었던 징기스칸에 의해 일어난 것이었다. 동시대의 어느 누구도 그와 같은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으며 그의 후계자와 부하들인 수보타이, 제베, 몽케, 쿠빌라이 등도 상당한 인물들이었다. 이외에 뛰어난 장군들로는 티무르, 잉글랜드의 에드워드1세, 프랑스의 뒤 게클랭(Du Guesclin), 맘루크(Mameluk) 바이바르스(Baibars), 오토만의 무라드(Murad) 등이 돋보였다. 그리고 전략적으로는 별로지만 전술적으로 많은 성공을 거두었던 에드워드3세도 충분히 주목할만하다. 투르크인들은 아직도 전장에서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위에 나열한 장군들 중 세명이 투르크인들이라는 것에서도 증명된다. 그리고 두명이 잉글랜드인이라는 사실은 잉글랜드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는 뜻이었다. 잉글랜드는 아직까지도 경직된 특성이 남아있던 중세의 전쟁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전장에서의 기병의 주도권은 넓게보면 몽골의 등장으로 그 정점에 이르렀다고도 볼 수 있지만 보병들의 우세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크레시(Crecy) 전투는 카레(Carrhae)나 하드리아노폴리스(Adrianople) 전투가 그랬던 것처럼 보병의 우세를 결정하는 전투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에드워드3세는 그의 할아버지 에드워드1세가 시작한 전술체제를 중장보병들의 견고한 방어와 강력한 장궁을 쏘는 경장궁병들의 기동성을 결합시켜 완성하였다. 이것과 기병을 이용한 반격은 여러 병종들을 유기적으로 최대한 활용하는 방법이 군사적인 성공의 길임을 입증하는 사례였다. 비록 그렇게까지 큰 영향력은 없었지만 화약무기의 등장은 군역사상 가장 큰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이 시대는 전사(戰史)에 많은 영향을 끼친 두 시기의 끝이기도 하였다. 한때 기독교의 수호자이자 유럽의 문지기였던 비잔틴은 4차십자군 이후 사실상 전사에 언급될 가치가 없을 정도로 몰락했고 비슷한 시기 중동의 마지막 기독교의 보루였던 아크레(Acre)의 함락은 십자군 시대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외 다른 형태의 이단이나 이교도에 대한 전쟁이 십자군의 이름을 걸고 일어났지만 진정한 십자군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갑주 야금술의 꾸준한 발달은 13세기 유럽에 판금갑옷(plate armour)이 소개되도록 만들었다. 처음 철로 된 판금은 신체의 중요한 부위인 어깨나 넙적다리 등을 감싼채 사슬갑옷(chain mail)의 속에 입었다. 중반이 되자 그것을 메일 밖에 입거나 어깨, 팔꿈치, 무릎, 정강이, 넙적다리 등 전보다 더 넓은 부위에 걸치게 되었다가 후반이 되자 동체갑옷과 흉갑이 체인셔츠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처음 이러한 사슬과 판금의 결합은 양쪽이 만나는 팔꿈치, 어깨, 무릎 부분이 제대로 보호되지 못하게 했으며 이러한 것들 때문에 잘 만들어진 판금갑옷이 14세기에 발달하고 메일을 완전히 대체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숙련된 유럽의 기술자들은 13세기 초 메일로 만들어진 벙어기장갑을 개발했으며 곧 메일장갑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사와 중장기병(man-at-arms)들의 판금갑옷은 당시의 무기로는 거의 불가침이었기 때문에 방패의 크기는 상대적으로 작아져 문장을 새기는 삼각형모양의 장식품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문장은 귀족들과 상류계층(gentry)의 필수가 되었는데 문장은 주로 방패나 겉옷(surcoat)에 수놓아져 장식용으로 사용되거나 서로를 구분할때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눈구멍과 숨구멍이 뚤려있는 포트형투구(pot helmet)을 받아들였지만 많은수가 편하고 간단한 메일두건(mail coif) 위에 걸치는 캐스크(casque)를 착용했다. 14세기가 되자 답답한 기존의 포트형투구 대신 얼굴쪽에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면갑(visor)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혁신들은 기사들의 갑주무게를 증가시켰다. 만약에 쓰러지거나 하마했을 경우 도움없이 간신히 일어설 수 있을 정도였으므로 말을 사살할 경우 불리했고 이런 우려는 마갑의 발달로 나타났다. 14세기 후반이 되자 말 한마리당 승마인과 마갑까지 합해 최소 60kg을 지탱했고 여기에 승마인의 몸무게까지 합하면 말의 부담은 더욱 늘어났다. 이것은 크고 느린 말들만이 중장기병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었고 이들은 겨우 속보(trot)나 보통 구보(canter) 정도의 속도로만 돌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갑주의 발달로 인한 확실한 효과는 전투에서 전체적인 사상자의 숫자가 줄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바꿔 말하면 도망갈때의 불리함으로 패배한 쪽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이 될수도 있었지만 이때의 전투는 섬멸전이 아니었고 포로를 붙잡아 몸값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 큰 학살은 없었다. 또다른 효과는 기병의 보호를 위해 기병의 특기인 기동력을 희생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것이 역이용되어 패배를 당하기 전까지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14세기에 일어난 사건들은 초중장을 한 기병들의 몰락을 예견하고 있었다. 크레시 전투와 화약무기의 발달은 기동력을 희생하면서까지 얻은 갑주의 보호력도 쓸모없다는 것을 거침없이 이야기한 사건들이다. 무기 화약이전의 무기 화약이 소개되기전 등장했던 중요한 무기는 잉글랜드의 장궁이었다. 원래 장궁은 웨일즈의 무기였지만 에드워드1세의 웨일즈 정벌 중 진가를 알아본 잉글랜드인에 의해 12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는 장궁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잉글랜드 보병(yeoman이라 불리던 계급이 주로 전담)들의 기본적인 무기로 삼았으며 스코틀랜드인들과의 전쟁에서 성공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3세는 역시 장궁을 이용하여 스코틀랜드를 굴복시켰으며 크레시에서 프랑스를 격파하였다. 장궁의 사정거리는 최대 350m, 그리고 200m 이내가 가장 효과적이었으므로 석궁보다 더 길었고 장전시간도 더 빨랐다. 경험이 많은 장궁병들은 더 정확하고 석궁보다 위력적인 관통력을 지니고 쏠수도 있었다. 장궁은 가볍고 다루기 쉬우며 전초전때 일제사격용으로 딱이었다. 장궁은 한동안 가장 위력적이고 효율적인 개인무기로 군림했다. ![]() 하지만 장궁 이외에는 그다지 주목할만한 무기나 장비는 없는 편이었다. 화약의 출현 화약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중국에서는 1161년 화약이 사용되었지만 소리를 내는 정도의 용도로만 사용되었을 뿐이다. 중국인들은 금과 몽골과의 전쟁에서 원시로켓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고 몽골인들은 이를 받아들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유럽에서는 14세기 화약을 이용한 미사일 추진체가 사용되었다고 잉글랜드의 로저 베이컨(Roger Bacon)과 독일의 수도사 베르트홀트 슈바르츠(Berthold Schwarz)가 전하고 있다. 유럽에서 최초로 화약무기가 사용된때는 크레시(1346)와 메츠(Metz, 1324), 알헤시라스(Algeciras, 1342) 전투 등 몇가지 설들이 있다. 에드워드는 3~5개의 roundelaide, 혹은 쇠물병이란 뜻의 pots de fer라는 무기를 사용했다는데 이것의 모양이 쇠로 만든 물병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후 초기형태의 대포가 백년전쟁 동안 잉글랜드와 프랑스에 의해 전장과 공성전에 쓰이기 시작했다. 이 무기는 독일과 이탈리아에도 같은 시기 나타났다. 초기의 화약무기는 화살같이 생긴 볼트(bolt)를 꽂는 작은 금속단지였다. 무게가 상당했고 내부에서 화약이 폭발할때 잡고있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작은 대포나 다름없었던 핸드건(handgun)은 별로 효율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화약무기는 계속 발달하여 이시대가 끝날무렵 포는 모든 유럽군대에게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 되었고 리투아니아와 러시아의 황금군단(Golden Horde)과의 전투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축성과 공성 축성과 공성은 그다지 큰 발전은 없었다. 비잔틴의 아나톨리아 요새들과 십자군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지었던 성채들을 따라 유럽에도 그를 따라한 성들이 대량으로 지어졌다. 축성술의 발달에 비해 공성술은 뒤처진 상태였다. 공성기술은 전시대와 달라진 것이 없었으며 사실 아직 화약무기가 도입단계에 있는 부분에서 인간의 창의력상 이상의 발달을 기대하는것은 무리였다. 특별한 공성무기는 등장하지 않았으며 설사 등장한다고 해도 다른 무기들과 마찬가지로 당김, 뒤틀림, 평행 등으로 추진력을 얻는 무기였을 것이다. 필립2세에 의해 가이야르성(Chateau Gaillard)이 함락된 사건은 충분한 자원과 병력, 의지를 가진 군주라면 아무리 강력한 방어라도 충분히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런것을 이룰만한 인내심, 부, 결단력, 기술 등이 중세에는 흔치 않았다. 공성을 위해 동원하는 봉건군대는 대략 모집병들과 용병들로 나뉘는데 모집병들의 복무기간은 몇주에 불과했고 용병들은 언제 끝날지 모를 공성에 동원하기에는 너무 비쌌다. 그 결과로 방어전략을 짤때는 공격능력을 먼저 감안해야했다. 이것과 맞물리게도 이 시대에는 다른 시대보다도 열린 공간에서의 회전이 적은 때이기도 했다. 힘이 약한 쪽은 굳이 회전을 치루려고 하지 않았으며 이기기 위해 혹은 최소 지지 않기 위해 요새 안으로 퇴각하는 방법을 자주 썼다. 보통 회전은 무모하거나 무능하거나 운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아니면 적보다 훨씬 우세하다는 사실을 확신한 다음에 치루었다. ![]() 지상전술 기병과 보병을 함께 균형을 맞춰 운용하는 전술이 보다 효율적이고 승리할 확률도 높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나면서 보병은 다시 주요병종으로 전장에 나타났고 크레시 전투에서 신무기인 장궁을 이용한 궁병들이 장갑창병들을 지원해주면서(실제로는 거의 전장을 주도) 보병전술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것의 진가를 알아본 것은 잉글랜드만이 아니었다. 14세기의 다른 지도자들은 잉글랜드의 예를 쫓아 중장기병들을 하마시켜 전투에 써먹으려고 했지만 그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잉글랜드가 승리한 비결은 하마한 기사들과 궁병들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잉글랜드는 두 병종과 함께 기병들을 예비대로 세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하마기병들과 장궁병들이 서로 상호보완을 하도록 함과 동시에 아무것도 모르는 적의 허를 찔러 승리를 쟁취한 것이었다. 잉글랜드, 플랑드르(Flanders), 스위스 창병들의 성공은 유럽의 전투를 방어측이 우세하도록 만든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방어측의 우세는 위에 언급한 불리할 경우 요새 안으로 들어가는 농성술의 연장선상에 있다. 14세기 유럽의 이러한 변화와 관련하여 만약 에드워드3세의 합동운용을 통한 방어전술과 13세기 세계를 재패했던 징기스칸의 기병을 이용한 공격전술이 맞부딪힌다면 어떻게 될지 가정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듯 싶다. ![]() ![]() 후기중세 서유럽의 군대 용병들이 숫자, 크기, 세력적인 면에서 힘이 커지는데 반해 형편없는 훈련에 급하게 모집시킨 봉건모집병들에 대한 의존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잉글랜드와 후의 프랑스에서는 두개의 양립하기 어려운 체제에 대한 부분적인 조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플랜태저닛(Plantagenet) 왕조에서는 일종의 도제제도를 시행하여 민병들과 용병들을 합치려는 체제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가신들로 하여금 병력을 제공하여 왕령을 지키도록 하는대신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였다. 명목상 이것은 가신의 의무와는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국왕이 이 민병들을 소집하는 일은 적었다. 이러한 상비병력은 결과적으로 영속적인 잉글랜드 육군의 시초가 되었다. 이 체제는 병력을 제공하는 귀족들이 자율적으로 하는 것으로 강제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로마나 현대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전문군대였다. 이들은 자신 스스로를 잉글랜드 군인이라고 생각했으며 비록 귀족들에 의해 제공되었지만 국왕을 따르는 무리였다. 하지만 이들은 용병이기도 했기 때문에 통제하기가 어려웠고 자주 약탈과 학살을 저질렀다. 잉글랜드의 상비부대는 주로 프랑스 내에 있는 플랜태저닛 왕가의 소유지에 주둔했기 때문에 도제제도는 잉글랜드 보다는 프랑스와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는 다른 유럽국가들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유럽에 많은 명성을 떨친 잉글랜드의 보병들은 사실상 하마한 기병들이었다. 이것은 군대가 이동할때 빠른 행군이 가능하게 해주고 전투에서는 말에서 내림으로서 기/보병의 장점을 십분 발휘한 에드워드3세와 그의 아들 흑태자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제목과 내용이 매치가 안되는듯 한데...몽골에 관해 따로 글을 써야되나-_-? |
밀리터리 발전사 - 몽골(1225년 경)
몽골 "호드(horde)"
호드라는 단어는 몽골의 부족이나 야전군을 가리키는 말인데 적은 수의 군대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한 그들의 서방의 적들에 의해 "수많은 무리"와 동일한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그 이유의 반은 자신들의 패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이고 나머지 반은 폭풍같이 세계를 재패한 몽골의 저력이 있게한 군의 편제를 유럽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3세기의 유럽인들은 몽골군이 엄청난 숫자였고 훈련되지 않은 무리였으며 자신들의 목적을 그저 우수한 숫자로만 이룬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징기스칸과 그의 몽골군은 현대군으로도 이루기 어려운 위업을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조직되고 훈련받은 최강의 군대를 통해 성취해냈다. 몽골군은 그들의 주요적들보다 더 적은 숫자였다. 징기스칸이 일으켰던 최대의 군대는 페르시아를 정복할때 동원했던 24만명이었다. 러시아와 중동유럽을 정복할때 몽골군이 동원했던 군사들의 수는 15만이 넘은적이 없었다.
편제
양이 아닌 질이 몽골군이 성공했던 원인의 기초였다. 이들의 간단한 편제는 가장 큰 특징이다. 일부 보조병들을 제외한 기병으로 이뤄진 전체군에게 이는 모두 동일했다. 편제는 십진법으로 이뤄졌는데 가장 큰 독립단위는 만명으로 이뤄진 투만(touman)으로 오늘날의 기마사단과 비슷한 부대단위였다. 세개의 투만은 하나의 군단을 구성했다. 한개의 투만은 천명으로 이뤄진 열개의 연대로 구성되었다. 이 연대 밑으로는 열개의 백인대가 있고 그밑은 또다시 열개의 십인대가 있었다.
전형적인 몽골군의 사할은 적과의 충돌을 위한 중장기병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패배한 적들이 저항할때를 대비하여 이들은 전신에 갑주를 착용했으며 갑주는 가죽이나 메일아머(mail armour)였다. 이들은 동시대 중국이나 비잔틴에서 사용하던 간편한 캐스트 투구(casque helmet)를 썼다. 중장기병들이 타고다니는 말 역시 보호를 위해 가죽으로 만든 마갑을 착용했으며 중장기병들의 주무기는 창이었다.
군대의 나머지를 차지하는 경장기병들은 갑옷을 입지 않았으며 최소한의 보호를 위해 투구만을 착용했다. 이들의 주무기는 반사궁(복합곡궁)과 투창, 올가미였다. 잉글랜드의 장궁보다 사정거리가 약간 짧았던 몽골의 반사궁은 스키타이-투르크 관습에서는 위력적인 무기였다. 각 경기병들은 두개의 화살통을 매고 다녔으며 보급을 통해 계속 화살을 충원했다. 경기병들의 임무는 정찰, 교란, 원거리공격, 소탕, 추격 등이었다.
기동력을 강화하기 위해 몽골기병들은 한마리 이상의 말을 가지고 있었다. 기수가 타지않는 말은 행렬 뒷쪽에서 몰고다녔으며 이동중 갈아타거나 심지어 전투 중에도 갈아타기도 하였다. 이러한 것은 전투와 기동성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경기병과 중장기병은 모두 시머터(scimitar)와 전부(battleax)를 들고다녔다. 질긴 비단으로 만든 셔츠는 거의 모든 몽골군이 착용하고 있었다. 이 셔츠는 화살에 관통되는 일이 별로 없었고 착용자가 화살에 맞으면 찰박상이나 뼈가 부러지는 등의 관통상보다는 경미한 상처를 입었다. 따라서 종군한 의사들은 부상자들을 치료할때 비단을 빼내기만 하면 화살촉은 비단을 따라 빠졌다.
훈련
몽골병사 개개인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잘 훈련받은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고비사막의 험악한 환경으로부터 단련된 강인한 인내력과 불굴의 정신을 가졌으며 무기를 다루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어렸을때부터 말을 다루었다. 이들은 험악한 자연환경 덕분에 강인한 육체를 가졌기 때문에 종군의사가 개입할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개인의 능력과 전장에서의 용기를 얼마나 보여주느냐에 따라 결정되었다. 지휘관들은 부하들에게 절대적인 권위를 행사했으며 또한 자신역시 상위부대지휘관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했다. 이러한 체제는 몽골군이 하나로 뭉쳐 유기적으로 움직이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징기스칸의 훈련방법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것은 몽골의 소조직 전술이 상당히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투의 정밀도는 상당한 연습과 근접한 지휘체계하에 가능했다. 몽골군이 수많은 전장에서 보여준 투만 내부와 투만 사이 그리고 더큰 부대끼리의 합동작전은 그것에 상당한 훈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전술
징기스칸의 기동력은 다른 지상군들과는 차원이 틀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군대란 집단과 속도를 제곱하면 가장 힘을 낼수있다는 사실을 이해한듯 하다. 그는 기선제압의 중요성을 잘 알고있었으며 전술이 방어적일때도 항상 공격상태를 유지했다.
작전이 시작되면 투만들은 최전선에서 넓게 포진하여 본진과는 두절되지 않을 정도의 연락만을 한채 진군한다. 적군이 발견되면 그것은 가까이 있는 부대들의 목표가 된다. 적들의 위치와 전력, 이동방향 등은 곧 중앙사령부로 전달되고 그다음 전군으로 퍼져나간다. 만약 적의 규모가 작다면 이들에 대한 대처는 일선지휘관만으로 처리했다. 하지만 적이 한부대만으로 처리하기 힘들 정도라면 전군이 전투준비를 하고 일전을 치뤘으며 어떤때는 적이 준비를 하기전에 재빨리 공격하여 흩어진 적들을 각개격파하기도 하였다.
징기스칸과 그의 부하들은 상투적인 전면전과 같은 전투들을 피했다. 적들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면 몽골군은 적의 배후나 측면을 공격했고 어떤때는 후퇴하는 척하며 추격하는 적들에게 화살을 쏘면서 괴롭혔으며 적들이 지치면 그때 미리 대기하고 있던 다른 부대나 혹은 예비용말을 바꿔타고 공격에 나섰다.
몽골군은 자주 경기병들을 앞세우고 그들의 뒤에서 평행행렬상태로 넓게 포진하여 진군했다. 이러한 진형은 군대의 유연성을 높여주었으며 적들이 막강한 상대거나 위치가 정확하지 않을 경우에 유용했다. 행렬들이 적을 만나면 상황에 따라 위치를 사수하거나 뒤로 물러섰다. 그동안 정면으로 적과 마주치지 않은 행렬들은 계속 앞으로 나가 적의 배후나 측면을 포위공격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연락망이 끈길까 두려워한 적은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보통 군대의 대형이 흩뜨러질때는 후퇴 중이기 때문에 몽골군은 이때를 틈타 전군이 공격에 나섰다. 이렇게 되면 적은 대부분 포위당해 무너지는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몽골기병들은 정밀성과 협동능력, 우수한 기동력 덕분에 적들이 아무리 수가 더 많고 무장을 잘했다고 하더라도 항상 우세할 수 있었다. 몽골의 민첩한 이동은 변함없이 결정적인 순간 우세를 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기선제압과 기동성의 극대화로 인해 전투의 향방을 결정짓는 것은 적들이 아닌 몽골군일때가 더 많았다.
전투진형은 한줄로 이뤄진 오열의 간격넓은 횡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장기병들은 첫 두열에 포진했으며 나머지 셋은 경기병들이었다. 이 횡열들과는 별도로 경기병으로 구성된 정찰 겸 전초부대가 가장 앞에 배치되었다. 적군과 마주쳤을 경우 배후에 있는 경기병 3열이 앞의 중장기병들의 틈사이로 빠져나와 적에게 투창과 화살세례를 퍼부었다.
잘 준비된 원거리공격은 아무리 견고한 적이라도 뒤흔들어놓기 마련이다. 어떤때는 이러한 원거리공격만으로도 접전없이 적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적이 원거리공격으로 흩뜨러졌다고 판단되면 지휘관들은 신호를 보내 경기병들을 뒤로 물리고 중장기병들에게 돌격을 명령했다.
원거리공격과 기동 등을 적절히 조화하기 위해서는 부대들간의 박자와 리듬이 잘 맞아야 했다. 적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병력의 일부가 적의 정면을 공격하여 적의 시선을 잡아두는 동안 몽골군의 주력은 틈을 노려 적의 측면과 배후를 공격하여 승리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공성전
처음 징기스칸이 중국을 공격할때 그는 도시들을 둘러싼 강력한 성벽들에게 좌절해야만 했다. 하지만 몇년뒤 중국의 무기와 장비, 기술 그리고 경험 등을 축적한 몽골군은 뛰어난 공성술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주요공성무기는 크기가 컸지만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원거리공격기구나 다른 장비들은 마차나 말 등에 싯고다녔다. 공성기구들을 다루는 것은 거진 중국인들이었다. 계약을 맺거나 징집되어 만들어진 공변군단들은 과거 알렉산드로스나 카이사르의 것 만큼이나 효과적이었다.
징기스칸과 그의 유능한 부하 수보타이는 자신들의 뛰어난 공병들을 이용하여 그 어떤 요새도 몽골군의 앞길을 막지 못하게 만들었다. 주요거점들이나 다수의 방어인원이 지키는 곳은 공병기구들의 지원을 받는 투만이 둘러쌌으며 본진은 그대로 계속 진군해갔다. 어떤때는 책략이나 대담한 공격으로 도시를 습격할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이 통하지 않으면 공성중인 투만과 공병들은 정기적인 공성작전을 펼쳤으며 주군은 적을 상대할 병력들을 뽑았다. 야전에서 변함없는 승리를 거두고나면 대부분의 도시나 요새들은 더이상의 저항은 포기한체 항복하였다. 이경우 주민들은 학살은 면할지 모르지만 상당한 고생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요새의 방어자들이 어리석게도 계속 저항한다면 징기스칸의 뛰어난 공병들이 나서 성벽을 뚫거나 다른 방식으로 방어를 무너뜨릴 것이다. 점령된 도시는 약탈과 파괴를 당했으며 살아남는 사람들은 얼마 없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해 징기스칸은 역사에서 가장 두려운 이름 중 하나로 기억되었다.
어떤때는 가장 강력하게 방어되는 도시들조차 몽골군이 근접해있다는 사실을 채 알아차리기도 전에 압도당하고 함락당했다. 선두에 있는 몽골 경기병들은 패배한 적들을 가까이 정력적으로 뒤쫓았기 때문에 패잔병들이 미처 성안으로 다 대피하기 전에 이미 그들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이런것을 사전에 알았다 해도 몽골군의 빠른 기동력으로 인해 몇분안에 공성진형이 완성되어 방어측은 쉴세도 없이 막다가 무너지는 일이 흔했다. 노포와 화살을 이용한 공격으로 방어측이 제대로 성벽을 오르는 병사들에게 대항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몽골군의 또다른 수법이었다.
참모와 지휘체계
징기스칸의 참모체계는 잘 알려진 것이 없다. 그에 대한 기록을 남긴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적들이었고 또한 그들은 그가 어떻게 성공했는데 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 그는 대부분의 작전을 자신이 직접 지휘했지만 나중에는 수보타이나 제베같은 유능한 부하들에게 맡길때도 있었다. 전략과 전술은 신중한 논의 끝에 완성되었다.
몽골군의 주요요소중 하나는 정보체계였다. 작전계획은 항상 정확하고 정밀하게 수집된 정보를 통한 신중한 논의와 분석 끝에 이루어졌다. 몽골의 정보망은 거의 전세계에 걸쳐있었으며 이는 중세시대의 모든 국가들의 정보수집능력을 능가하는 것이었다.스파이들은 보통 상인으로 위장하여 활동하였다.
수집된 정보에 대한 분석과 논의가 끝난 다음에는 몇개의 작전들이 세워지며 투만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목표에 따라 움직였다. 작전지휘관들에게는 넓은 범위의 권한이 주어졌다. 이들은 전체전략에 부합하는 선에서 군대를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명령과 전투정보교환은 기마급사를 이용했으며 칸의 사령부를 통해 빠르게 하급부대들에게 전달되었다. 그러므로 징기스칸은 넓은 전선에도 불구하고 전군의 통합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모든 전선을 통제할 수 있었다.
몽골군은 심리전에 숙련되어 있었다. 그들의 잔혹함과 야만성, 저항하는 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에 대한 소식은 의도적으로 널리 퍼뜨렸으며 그들의 다음목표가 될 적들의 저항의지를 꺽어버리는데 사용하였다. 물론 이런 소문은 과장된 것도 있지만 어느정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몽골군은 전쟁과 행정에 유용한 역할을 할수있는 상대가 투항해올 경우 이들이 잘못 대접받지 않도록 정성을 다했다.
몽골군의 참모체제는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유능한 상대가 투항해올 경우 이들은 단지 몽골의 편리를 위해 이용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능력과 자신들의 경험, 수집된 능력 등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여 역시 체계적인 훈련프로그램을 만들고 전문적인 참모들을 육성해냈다.
행정
작전 중 보급문제는 각각의 지휘관들의 재량에 달려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몽골군은 휴대와 처리가 간단한 콩으로 만든 메주 비슷한 음식과 말젖을 가지고 다녔는데 이런것은 특히 사막이나 산악지역에서 이용하기 편리했다. 비교적 평탄한 지역에서는 여자와 아이들이 가축을 몰고다니며 보급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이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작전지역을 약탈함으로서 보급을 해결했다. 후기에는 체계적인 보급이 이뤄지기도 하는데 이때 행정을 맡은 사람들은 포로로 잡힌 학자, 관리, 군의 등이었다.
목적은 확실치 않지만 몽골군은 아군과 적군의 사상자를 세고다녔는데 아군의 경우 출석부 등을 통해서 사상자의 수를 알수 있지만 적군의 사상자수를 셀때는 이를 위한 별도의 부대가 따로 있어서 전장을 돌아다니며 죽은 적의 머리에서 오른쪽귀를 잘라내 부대에 담았다. 이것의 목적은 아마 적과 아군의 사상자수 대비를 통해 체계적인 연구를 하려는 목적으로 추측된다.
연락
급사를 이용한 장거리 연락법은 이미 위에 언급하였다. 전술적인 움직임은 백인대장과 천인대장에 의해 흑기와 백기로 통제되었다. 대부분의 몽골지휘관들은 문맹이었으므로 문자를 통한 명령은 거의 없는 편이었고 따라서 역설적으로 이것이 더 정확한 명령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기를 이용한 연락은 목소리가 미치지 못하는 범위에서 사용되었다.
어두울때나 기를 보지 못하는 지형에서는 불화살을 사용하여 연락을 취했다.
책략
가끔씩 지나친 기사도정신에 물들어 바보같은 행동을 보이는 서유럽의 기사들과는 달리 몽골군은 자신들의 피해를 줄이고 적의 피해를 늘릴수 있다면 무슨 책략이라도 마다치 않았다. 이러한 책략은 작전중 예외적인 상황에서 일어날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몽골 지휘관들의 전술적 레퍼터리 중 일부인때가 더 많았다.
몽골군은 겨울철에 작전기간을 짜는걸 즐겼는데 얼어붙은 늪지와 강이 그들의 기동력을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몽골군이 기병들이 건너기에 충분할 정도로 얼어붙은 도하지점을 찾아다닐 동안 적들이 예상외의 반응을 보일때도 있었다. 1241년 몽골군이 도하지점을 찾아 보급용 가축들을 다뉴브 동쪽에 놔두고 간사이 그해초 몽골군에 의해 쫓겨났던 굶주린 피난민들과 패잔병들이 가축들을 탈취해버렸고 몽골군은 전략을 약간 수정하였다.
또다른 책략은 전술적인 행동에 더욱 가까웠는데 일종의 기만전술로 소부대가 특정지역을 습격하거나 방화하여 적이 그곳으로 시선을 집중하는 사이 본대는 그것을 이용하여 행동을 취하는 것이었다.
군정
몽골에 의해 정복된 지역에서 무력저항이 진압되고나면 몽골은 그때부터 파괴행위를 그만두고 계산된 재건을 시작했다. 이때 정복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된 행정기구는 오늘날로 치면 일종의 군정이었는데 이것은 20세기 이전 등장했던 군정들중 가장 잘 계획된 군정체계였을 것이다. 민간행정은 주로 몽골이 만족할만한 지도자에 의해 처리되었고 그들은 그 지방에 머무는 몽골군의 지원과 관리를 받았다. 점령지에서는 곧 인구조사가 실시되고 효율적인 세금기관이 설립된다. 징기스칸은 점령지가 경제적으로 그에게 부담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점령지에서 거둬들인 자금은 지방정부와 점령군을 유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카라코룸에 공물로 보내는데 사용되었다.
몽골은 점령지에서 분쟁이 계속되는 것을 절대적으로 금지했다. 법률과 질서는 가혹할 정도로 엄격하게 지켜졌다. 그 결과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는 몽골지배하에서 침략전보다 더욱 평화스러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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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밀리터리 발전사편에서 만약 크레시에서 프랑스군이 아닌 몽골군이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하고 은근슬쩍 언급하면서 반응들을 유도해내려고 했는데 아무도 언급을 안해서 삐졌음ㅜㅡ
밀리터리 발전사 - 맘루크(Mamluk)
맘루크의 술탄은 이슬람을 재통합하여 그 지배영역이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일부 상류 유프라테스 계곡, 아나톨리아 동남부, 히야즈(Hijaz, 아라비아 사막 서쪽 산악 지방), 수단 북부, 키레나이카(Cyrenaica)에 이르렀다. 그들이 첫번째로 한것은 몽골의 세력을 아인 얄루드(Ain Jalud)에서 제거한 것이었고 그다음은 모든 기독교인들은 성지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맘루크 지배하에서 계승은 세습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술탄좌는 곧장 강하고 세력이 큰 에미르에게 돌아갔고 이는 자신의 자리가 전복되거나 한 지방을 상실할 위협 때문에 먼 지방의 사령관을 임명할때마다 술탄에게 고민을 안겨주었다. 그러므로 한명은 지방총독, 한명은 요새책임자 이런식으로 두명의 사령관을 임명하고 자주 자리를 바꾸는 것은 지배계급들에게는 지극히 정상적인 행위였다. 술탄위의 안정과 권력은 술탄에 의해 이집트에 봉토를 하사받은 근위대 장교들의 충성심에서 나왔다. 이들 에미르들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자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봉토의 삼분의 이를 사병맘루크들에게 분배하고 그들의 충성심을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했다.
맘루크군의 주력은 세부분으로 나눠지는데 둘은 근위대의 두세력(근위대도 여러부대로 나눠지는데 진정한 의미의 근위대는 술탄이 제일 총애하는 부대였다. 여기서 "두세력"이란 술탄의 총애부대와 다른 맘루크들을 뜻하는 것이다)과 그들이 거느린 사병맘루크들이었다. 전체군대가 맘루크로만 이뤄지는것은 아니었고 베두인, 투르코만, 쿠르드 그리고 가끔씩 콰리즘(Khwarism) 용병들도 고용되어 군대의 세력이 늘어났다. 그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등지에서 모집된 모집병들도 있다. 이들 모집병들은 다른 이슬람 수장국들과는 다르게 질적으로 높은 수준이었으며 특히 알레포와 하마(Hama) 출신들이 유명했고 자지라(Jazira) 지방의 무라(Mura)족 전사들은 무장이 잘되어있기로 유명했다.
14세기초 근위대의 세력은 이천명의 병력에 사십명의 장교들로 이뤄져 있었지만 13세기에는 이보다 약간 적었을 것이다. 1281년 홈스(Homs) 전투에서 칼라운(Kala'un)이 일시적으로 고립되었을때 그의 맘루크는 천명뿐이었지만 삼년후 몽골이 사자를 보내왔을때 맘루크들은 천오백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가 가진 맘루크의 총수는 1290년경 만이천명에 달했다가 1299년에는 이만명으로 늘어났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이들은 모두 그가 직접적으로 거느린 군대가 아니고 천인수장(emir of one thousand)이라 불리는 에미르들이 이름대로 각각 천명씩을 거느렸고 그들의 밑에는 하위에미르들은 사십명씩을 거느렸으며 그들의 밑에는 최하위의 열명의 부대를 포함했다.
칼라운 휘하에서의 맘루크들의 급격한 증가는 그가 Burdjiyya 부대를 그의 근위대로 삼은것에 그 이유가 있다. Burdjiyya의 총수는 삼천칠백명으로 이들은 카이로 요새의 탑들에 숙영했기 때문에 탑이라는 의미의 Burdj가 이름에 붙은 것이다. 이들은 체르케스(Circassia)와 불확실하지만 아르메니아 출신들로 이뤄져 있었으며 전체맘루크의 삼분의 일을 차지했다. 다른 맘루크들은 킵차크인들로 이뤄져 있었으며 다수의 몽골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칼라운의 선임자들을 살해했으며 그들의 주인으로 하여금 권좌를 잡게 만들었다.
지방의 베두인 병사들이나 이제는 급격히 쇠퇴하는 바흐리 부대는 삼류로 취급되었으며 이들의 임무는 해안지방의 요새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때는 고위맘루크들이 이러한 임무에 종사할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단기에 그쳤고 명령이 내려지기도 전에 카이로로 돌아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압바스 시절의 특수부대들도 아직 맘루크군대에 남아있었다. 나프타 튜브로 무장한 오백명의 척탄병들과 알레포에서 충원된 공병들이 그들이다. 군사원정중에는 물자를 운반하는 낙타들이 동행했으며 노새는 가끔 쓰였고 바퀴는 오직 공성기구들에만 사용되었다. 군대의 규모가 클때는 팔백에서 천마리의 낙타가 경갑운반에 사용되었다고 하며 맘루크 한명당 두마리분의 짐을 날랐다고 한다. 짐의 비율은 비(非)맘루크 병사들 세명당 낙타 두마리였다고 하는데 낙타관리병들은 한명당 세마리의 낙타를 관리했다. 이것외에도 맘루크군은 곳곳에 보급창을 두어 식량과 예비용 말과 낙타를 비축해두었다. 그외 전염병과 그로인한 계획차질을 예방하기위해 종군의사와 약사, 의료품의 동행은 필수였다.
맘루크들이 전쟁만큼이나 신경쓴것은 바로 악대였다. 술탄의 악대에서는 사십개의 케틀드럼과 네개의 북, 네개의 오보에, 이십개의 트럼펫을 연주했다. 악대를 가지는 것은 상당한 영광으로 이를 허락받은 에미르들은 북의 군주(Lord of the Drums)라고 불렸다. 악대를 소유했던 사십인수장들은 삼십명인데 이들은 열개의 북, 오보에 두개, 트럼펫 네개를 연주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러한 악대는 전장에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는데 특히 북은 소리에 익숙치 못한 적기병의 말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1281년 홈스 전투에서 본대에서 고립된 칼라운은 모든 북들을 멈추게 하여 몽골의 시선을 끌지않으려 했다. 승리한 군대가 카이로에 들어가면 승전고는 칠일동안 멈추지 않는 경우도 있었으며 적에게 빼았은 북들은 찢겨지고 전리품으로 취급되었다.
군사동원은 북치는 소리와 깃발신호로 이뤄졌으며 이에 따라 전군이 훈련받은대로 사열했다. 이렇게 모인 맘루크들에게는 장비와 필요한 물품들을 위한 돈이 지급되었으며 명령서가 하달되었다. 군경찰들은 병사들이 제시간에 모이는지 감찰하는 역할을 맡았다.
맘루크군대는 맘루크 집권이후 항상 카이로 근처에서 모였으며 분쟁이 이집트에서 일어났을 경우 수도 근처에서 싸우기를 원했다. 1248년 아이유브(Ayyub)는 하이집트 북동쪽에 al-Salhiyya라는 마을을 세워 시리아 진군시 집결소 역할과 시나이 사막을 넘어 다시 되돌아왔을 경우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이용하게 하였다. 맘루크들은 이 마을을 단지 돌아올때 쉬는 장소로만 이용했다. 진군할때 주로 가는 길은 카이로-가자-Baysan-다마스코스-홈스-하마-알레포로 통하는 길이었다. 행군중에는 정찰병이 파견되어 사방을 정찰하고 다녔다.
가는 시간은 카이로에서 가자까지가 11~12일, 가자에서 Baysan까지는 5~6일, 다마스코스까지는 3~4일, 홈스는 2~3일, 하마에서 알레포까지는 2~3일이었다. 각 도시에서 쉬는 시간은 가자는 3~5일, Baysan 2~3일, 다마스코스 5~7일, 하마 2~3일이었다. 홈스에서 하마까지 걸리는 시간과 홈스에서 쉬는 기간은 얼마나 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바이바르스는 잘 조직된 포스팅-하우스(posting-house) 체제을 운용하여 제국의 각지와 수도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갈아타는 말들을 예비하도록 만들었다. 중앙과 지방과의 보고와 답변은 일주일에 두번씩 이뤄졌다. 아랍 칼리프령을 따라한 비둘기연락망도 있었는데 수도의 요새와 각지에는 이러한 비둘기집이 있어서 특정한 장소만을 날아다니도록 훈련시킨 비둘기들을 이용하여 연락을 취했다. 술탄의 특명을 전달하는 비둘기는 특별한 표시로 다른 비둘기들과 구분되었으며 오직 술탄만이 날려보낼수 있었다.
기본적인 진형은 tulb로 복수로는 atlab라고 한다. 맘루크들은 하나의 tulb를 이뤘는데 다른 tulb들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았다. Tulb는 느슨한 진형으로 병사들의 숫자는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보통 부족과 지역별로 하나의 tulb를 이뤘으며 각각 한명의 에미르들이 지휘했다. 맘루크들의 tulb는 다른 모든 tulb들을 다 합친것보다 더 강하고 세력이 컸다.
맘루크나 전임 아이유브 왕조는 해상세력이 아니었다. 1270년 맘루크가 보유한 전함대가 키프로스 해안가에서 난파당했는데 상당수의 제독들과 수백명의 선원들이 포로로 잡혔지만 그중 맘루크는 한명도 없었다. 해병이라는 뜻의 ustuli는 사실 기병인 맘루크들에게 모욕적인 단어로 받아들여졌다. 새로운 함대는 전의 함대가 보유한 전함들이 모두 폐선되고 난후에야 만들어졌으며 이런 현실때문에 효율적인 해군체제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아이유브 왕조와 맘루크들은 이러한 해군력의 부족을 자신들의 손에 들어오는 모든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항구들을 파괴함으로서 매꿨다. 하틴 이후 이런 정책들은 열정적으로 행해졌으며 아스칼론, 아르수프, 카이사레아 등은 현대까지 폐허로 남았고 야파(Jaffa)와 아크레는 16세기까지 작은 마을로 전락해있었다. 이러한 항구파괴정책은 결정적으로 경제적인 쇠퇴를 불러와 나중에 오스만 투르크에게 정복당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