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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고미숙의 ‘로드 클래식’ ② - 박지원 <열하일기>① 유목, 길 없는 대지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125 15.03.17 19: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고미숙의 ‘로드 클래식’ ②

 

- 열하일기① 유목, 길 없는 대지

 

“청 문명의 장관은 기와조각, 똥부스러기에 있다!”

 

고미숙 고전평론가

 

 

북벌에서 북학으로! 원수의 것이라 해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혼돈과 환상의 매트릭스 위에서 연암이 찾은 길은?

 

 

일러스트레이터 한유사랑 씨가 그린 연암 박지원 선생의 전신 입상.

 

 

십여 년 연암협에 은거하던 사람이(十載巖棲客)/

새벽녘 행장 꾸려 먼 길 간다고 고하네.(晨裝告遠遊)/

반평생을 책 속에서만 살더니(半生方冊裏)/

오늘은 황제의 나라 중국으로 떠나네.(今日帝王州)

 

-박지원 저, 김혈조 옮김 <열하일기> 3권 131쪽

 

연암의 처남이자 지기인 이재성이 연암에게 건넨 전별시다. 연암의 여행에 이재성의 가슴이 더 두근거렸나 보다. 하긴, 왜 안 그렇겠는가. 이때 연암의 나이 마흔넷, 당시로선 반백의 초로에 접어든 때였다. 절친인 홍대용은 15년 전에 중국을 다녀왔고, 이덕무와 박제가 등 ‘백탑파’ 후배들도 이미 연행을 마친 터였다. 서책과 풍문으로만 듣던 그 땅을 드디어 밟게 된 것이다. 건륭황제 만수절(70세 생일) 축하사절단에 정사 박명원의 자제군관으로 뽑힌 덕분이다.

 

때는 1780년 음력 6월 24일. 연암은 드디어 압록강을 건넌다. 강을 건너 요동으로, 요동에서 심양으로, 심양에서 다시 산해관. 이 관을 건너면 황제의 궁전인 자금성이 있는 연경이다. 하지만 황제는 연경에 있지 않았다! 동북방 피서지 열하에 있었던 것. 하여, 예정에도 없던 열하라는 여정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열하에서 다시 연경으로! 시간으로 따지면 5개월, 거리로는 총 3천여 리에 달하는 이 ‘대장정’의 기록이 바로 <열하일기>다. <열하일기>는 세계 최고의 여행기이자 천고에 드문 ‘절대기문’이다. 대체 그 길 위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강을 건너자 일행은 구련성이란 곳에서 노숙을 한다. 그 광경이 아주 볼 만하다.

 

“30여 군데에 화톳불을 만들었다. 아름드리 큰 나무를 톱으로 잘라 먼동이 틀 때까지 환히 밝힌다. 밤새도록 군뢰가 나팔을 불면 300여 명이 일제히 고함을 치는데, 이는 호랑이를 경계하기 위함이다. 한밤중이 채 못되어 소낙비가 마구 퍼붓는다. 위로는 천막이 새고 밑에선 풀 사이로 습기가 치민다. 피할 곳이 없다. 잠시 후 날이 개더니 하늘엔 온통 별이 총총하다. 손을 뻗치면 그냥 닿을 것만 같다.”

 

고달픔과 낭만의 교차! 노숙은 그 다음날까지 이어졌고 3일째 비로소 길을 나섰다. 하지만 7월 1일 통원보라는 곳에서 또 발이 묶였다. 새벽녘에 큰비가 내린 탓이다.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무려 닷새를 꼼짝없이 머물러야 했다. 7월 6일 불어났던 시냇물이 조금 줄어서 길을 떠나기로 했다. 대신 찌는 듯한 폭염이 시작되었다. 그렇다고 미적거릴 처지가 아니다. 제 날짜에 연경에 도착하려면 정신없이 달려야 한다. 그 폭풍질주의 기록이 ‘일신수필’(馹?隨筆, 달리는 말 위에서 휙휙 지나가는 단상을 적는다)이다.

 

 

18세기 조선 사신들의 연행 과정과 연경에서의 활동모습을 그린 연행도의 일부. 숭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정주(머묾)와 질주(떠남)의 이중주

 

머무를 땐 한없이 지리하고, 떠날 때는 ‘엑스피드’로 내달려야 하는 것, 이것이 이 여행의 리듬이자 특이성이다. 코스 자체야 수많은 사람이, 수없이 지나간 곳이다. 하지만 같은 길도 어떻게 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이 된다. 이렇게 느림과 빠름이 엇갈리다보니 연경에 들어가는 데만도 목숨을 걸어야 했다.

 

“물을 건널 때면 모두들 눈앞이 캄캄하여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간신히 건너편에 도달하고 나면 설상가상으로 더 험한 물이 기다리고 있다. 하루에 일고 여덟 번이나 물을 건너고 쉴 참을 건너뛰며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말들은 더위에 쓰러지고 사람들 역시 토하고 싸고….”

그렇게 해서 간신히 8월 초하루 연경에 닿았다. 휴~ ‘고생 끝 유람 시작’인 줄 알았건만, 웬걸! 전혀 엉뚱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연경에 도착하고 사흘쯤 되었을 즈음 황제의 명령이 도달했다. 조선 사신단을 당장 열하로 불러들이라는!

여전히 강물은 높고 산새는 험준한데 일정은 촉박했다. 덕분에 ‘무박나흘!’의 질주를 감행해야 했으니, 가히 ‘정글의 법칙’ 뺨치는 모험기라 할 수 있다.

 

열하에 도착하여 엿새간의 꿀맛 같은 유람과 친교를 나누던 차, 또다시 황급히 짐을 챙겨 쫓겨나듯 연경으로 돌아온다. 티베트 법왕의 알현 건으로 황제의 심사를 거스른 탓이다. 갈 때는 느닷없이, 올 때는 득달같이!

 

이렇듯, 이 여행은 시종일관 정주와 질주가 격하게 교차하는 이중주였다. 하지만 연암은 이 리듬에 휘둘리지 않았다. 거꾸로 그걸 능동적으로 활용했다. 발목이 묶일 때는 인정물태와 청 문명의 저변을 훑고, 질주해야 할 때는 사유를 통해 ‘심연과 산정’을 넘나들었다. 고담준론과 깨알 같은 에피소드, 화려한 레토릭과 황당한 해프닝, 풍속과 역사 등 아주 이질적인 담론들이 매끄럽게 공존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공간은 시간의 펼침이고, 시간은 공간의 주름이다. 시공의 펼침과 주름, 그것이 곧 리듬이다. 이 리듬에 고유한 강밀도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여행은 곧 유목이 된다. 연암의 여행이 바로 그러했다.

 

 

18세기 중엽의 의주부 지도.

 

 

‘통곡’과 함께 길이 열린다

 

머리카락 희게 세었다고 말하지 마라(莫云頭已白)/

천지의 무궁함도 별것 아닌 양 본다네.(天地忽無窮)/

필마로 요동의 들판을 가르니(匹馬遼東野)/

채찍을 내려치자 만리에 바람이 일도다.(一鞭萬里風)

 

- 같은 책 130쪽

 

연암의 친척뻘인 박남수의 전별시다. 연암의 호방한 기운과 이 여행이 몰고 올 파장을 멋드러지게 표현하고 있다. 이 예견이 고스란히 적중된 장면이 있다. 7월 8일, 강을 건넌 지 보름쯤 되던 날, 연암은 마침내 요동벌판에 들어선다.

 

열흘을 가도 산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평원을 보자 연암은 문득 이렇게 외친다.

“훌륭한 울음터로구나,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하도다!”

이름하여 ‘호곡장(好哭場)’! 천고에 보기 드문 광경을 만나서 웬 울음? 그의 도도한 논변을 들어보시라.

 

 

“기쁨(喜)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노여움(怒)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즐거움(樂)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사랑함(愛)이 사무쳐도 울게 되고, 욕심(欲)이 사무쳐도 울게 되는 것이야. 근심으로 답답한 걸 풀어버리는 데에는 소리보다 더 효과가 빠른 게 없지.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와도 같은 것일세.

 

지극한 정(情)이 발현되어 나오는 것이 저절로 이치에 딱 맞는다면 울음이나 웃음이나 무에 다르겠는가. 사람의 감정이 이러한 극치를 겪지 못하다 보니 교묘하게 칠정을 늘어놓고는 슬픔에다 울음을 짝지은 것일 뿐이야. 이 때문에 상(喪)을 당했을 때 처음엔 억지로 ‘아이고’ 따위의 소리를 울부짖지. 그러면서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오는 지극한 소리는 억눌러버리니, 그것이 저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 꽉 뭉쳐 있게 되는 것 일세.”

(박지원 저, 고미숙 외 공역 <세계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 상권> 139쪽)

 

요컨대, ‘희로애락애오욕(칠정)’이 모두 지극한 경지에 이르면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때의 소리가 바로 통곡이라는 것. 이 소리를 참고 누르다 보니 천지 사이에 엉겨버렸다는 것. 그런데 지금 하늘과 땅이 서로 맞붙은 요동벌판을 보니 그 누르고 엉긴 소리를 한바탕 풀어볼 수 있겠다는 뜻이다. 그럼 소리를 누르고 엉기게 하는 건 대체 무엇인가? 통념과 도그마, 허례허식, 미봉책 등 생의 능동적 에너지를 훼손시키는 온갖 규범일 터. 연암은 이로 인한 억압이 얼마나 지독한지 청년기에 이미 체험한 바 있다.

 

연암의 청년기는 꿀꿀했다. 17∼18세 즈음, 한창 과거공부에 매진하던 그때 연암은 우울증을 앓았다. 먹지도 자지도 못할 정도로 중증이었다. 칠정이 누르고 엉기어서 삶의 의욕을 잃어버린 상태가 된 것이다.

그때 그는 무엇을 했던가?  저잣거리로 나가 사람들을 만났다. 분뇨장수, 건달, 이야기꾼, 역관 등등 한마디로 자신과는 전혀 다른 ‘타자들’과 접속한 것이다. 타자란 자기와 ‘다르게’ 사는 존재들을 뜻한다.

 

그들을 통해 전혀 다른 인생, 전혀 다른 길이 있음을 발견하면서 꽉 막힌 기혈이 뚫리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거친 이후 그는 미련 없이 생의 노선을 바꾼다. 입신양명의 레이스를 벗어나 거리의 백수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울증은 청년기의 통과의례에 해당한다.

 

‘호곡장’ 역시 이 기나긴 여행의 서곡이자 문턱이다. 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를 통해 그는 전혀 다른 신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제 당당하게 중원의 대지 혹은 청 문명이라는 타자와 마주할 수 있으리라. 박남수의 예견대로 이제 가는 곳마다 ‘큰 바람’이 불어닥칠 것이다. 낡은 통념과 억압적 도그마를 한방에 날려버릴 ‘일진광풍’이.

 

‘마이너 리그’에서 놀아본 이력

 

요동벌판을 지나고 이틀 후 연암은 심양에 들어선다. 심양은 본시 청나라가 일어난 터전이다. 만주족 오랑캐의 발원지를 둘러보는 연암의 심정은 착잡하다. 하지만 그 심사를 나눌 지식인들은 그곳에 없다. 대신 그곳에서 장사꾼들과 접속한다. 예속재(골동품 가게)와 가상루(비단파는 가게)가 그들의 거점이다. 이들과 만나는 과정은 한 편의 첩보 시트콤이다.

 

“저녁 달빛이 더욱 밝다. 변계함에게 함께 가상루에 가자고 있더니, 눈치도 없이 수역에게 가도 좋으냐고 묻는다. 이에 수역의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성경은 연경이나 다름없는데 함부로 밤에 나다니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하는 바람에 변군의 기가 한풀 꺾였다.

…만일 수역이 알게 되면 나까지 붙잡힐까 두려워 일부러 알리지 않고 슬그머니 혼자 빠져나갔다. 장복이더러는 혹시라도 나를 찾거든 뒷간에 갔다고 하라고 일러 두었다.”(같은 책 172쪽)

 

속이고 눙치고 튀고. 연암만이 연출할 수 있는 장면이다. 과거를 폐한 이후 오랫동안 ‘마이너 리그’에서 놀아본 이력 탓이리라. 이들 장사꾼은 장장 5천여 리나 떨어진 오와 촉 땅에서 왔다. 그에 비하면 조선은 아주 가까운 나라다. 그들은 대부분 문맹이다. 또 글자를 안다 해도 지식이 몹시 일천하다. 하지만 사람살이에 대해서만은 녹록지 않은 연륜을 자랑한다. 연암은 이들과 격의 없이 교감을 나눈다. <후출사표>를 크게 낭독하기도 하고 붓을 휘둘러 그림도 그리고 글씨도 써댄다.

 

“여러 사람이 더욱 환호하며 서로 다투어 종이와 붓을 내놓고 빙 둘러서서 써 달라고 조른다. 검은 용 한 마리를 그린 뒤, 붓을 퉁겨서 짙은 그림과 소낙비를 그렸다. 지느러미는 꼿꼿이 서고 등비늘은 제멋대로 붙었고 발톱은 얼굴보다 더 크고 코는 뿔보다 더 길게 그렸더니, 모두들 크게 웃으며 기이하다 한다.”

 

이 용의 이름은 화룡으로 조선에선 강철이라고 한다. 가뭄을 몰고 오는 아주 지독한 놈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이 ‘강철’을 발음하기가 꽤나 어렵다. 그래서 ‘강-처!’, ‘강천!’이라 했다가, 다시 큰 소리로 ‘강청!’한다.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크게 웃는다. 이 웃음 속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속내.

 

“장사를 하는 것을 남들은 하류로 치지만… 하늘이 나를 위해 극락세상을 열고, 땅이 쾌활림을 점지해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거죠… 아무리 넓은 대도시라도 마음 가는 곳이 곧 집이요… 방편을 따라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또 우리들은 벗을 사귀는 일에 지극한 정성을 다한답니다. …천하의 지극한 즐거움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있겠습니까.”(같은 책 201∼202쪽)

 

그렇다! 그들이 장사꾼으로 떠도는 건 스스로 선택한 삶이다.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천하를 떠돌 수 있는 유일한 직업이 바로 장사였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자본의 흐름과는 정반대다. 전자는 정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후자는 오로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소유와 정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운동을 유목이라 한다면 이때 수반되는 윤리가 곧 우정이다. 우정 없는 유목이란 ‘앙꼬 없는 찐빵’, ‘오아시스 없는 사막’에 다름아니다. 이들이 왜 연암을 그토록 환대했는지를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이것이 연암이 타자들과 접속하는 기술이다. 탈주는 은밀하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그머니 궤도를 벗어난다. 하지만 현장은 더할 나위 없이 유쾌하다. 이 매끄러운 리듬 속에서 술과 웃음, 예능과 서사, 풍속과 윤리가 자유롭게 교차한다.

 

 

유리창(流璃廠) 거리의 현재 모습. 유리창은 북경 선무문 밖의 거리로 골동품과 서적, 문방사우 등을 판매하는 곳으로 명성이 드높았다.

 

 

인생 도처에 ‘반전’이 있다

 

8월 초하루, 마침내 연경에 도착했다. 짐을 풀자마자 연암은 곧장 유리창(流璃廠)으로 향한다. 유리창은 27만 칸에 달하는 문물의 집결지이자 연행의 목적지에 해당한다. 이국의 선비들과 지적 향연을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인 까닭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연암은 혼자였다. 유리창의 한 누각 위에 올라 난간에 기댄 채 이렇게 탄식한다.

 

“이 세상에 진실로 지기(知己) 한 사람만 만나더라도 아쉬움은 없으리라. …이제 나는 이 유리창 중에 홀로 서 있다. 내가 입고 있는 옷과 갓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이고, 그 수염과 눈썹은 천하가 처음 보는 바이며, 반남의 박씨는 중국 천하가 들어보지 못한 성씨이다…. 장차 그 누구와 더불어 이 지극한 즐거움을 논할 수 있으리오.”(같은 책 하권, 106∼107쪽)

 

이런! 우정과 친교의 달인이 이 흥성스러운 곳에서 외톨이가 되다니. 물론 연암은 이 ‘군중 속의 고독’을 충분히 음미한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 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느냐(공자)’와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다면 나는 참으로 고귀한 존재로다’(노자)는 성인의 말씀을 되뇌며 자신을 추켜세운다. 이처럼 연암은 우정의 달인이면서 동시에 ‘고독한 솔로’였다. 여행 내내 늘 누군가와 함께 했지만 놀랍게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언제나 혼자였다.

 

고북구 장성을 넘을 때,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널 때, 열하에서 첫날밤 벅찬 감회로 잠 못 이룰 때 등등. 아이러니 혹은 반전!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홀로 갈 수 있는 자만이 함께 갈 수 있다는 것. 고독이야말로 친교의 원동력이라는 것. 게다가 유리창에서의 고독,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또 다른 시공간으로 도약하기 위한 관문이었다. 만약 연암이 유리창에서 벗을 만나고 지성의 향연을 펼쳤다면 그는 결코 열하로 가지 않았을 것이므로.

 

“꿈결에 별안간 요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뭇사람들의 벽돌 밟는 발자국 소리가 마치 담이 무너지는 듯 집이 쓰러지는 듯 어지럽기 짝이 없다.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앉으니,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황급히 옷을 주워 입고 있는데, 시대가 엎어지듯 고꾸라지듯 달려 왔다. ‘곧 열하로 떠나게 되었답니다!’”(같은 책 하권, 149쪽)

 

열하는 동북방에 있는 장성 밖의 요충지다. 건륭제의 할아버지인 강희제 때부터 여름이면 늘 황제가 이곳에서 피서를 즐기곤 했다. ‘겉으로는 태평하게 휴가를 즐긴 듯 보이지만 그 속내는 험준한 요새인 이곳에서 몽고의 목구멍을 틀어막고자 함이다.’ 연경에서 열하까지의 거리는 공식적으로는 400여 리지만, 실제로는 700여 리다. 강희제가 신하들을 길들이기 위해 인위적으로 역참을 줄인 탓이란다.

 

열하행이 결정되자 연암은 머뭇거린다.

“먼 길을 겨우 쫓아 와서 안장을 끄른 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먼 길을 떠나자니 생각만 해도 끔찍한 노릇이요, 또 만일 열하에서 바로 본국으로 돌아가기라도 하면 연경 유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러자 정사 박명원이 이렇게 충고한다.

“열하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인데,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냥 놓칠 셈인가.”

결국 그는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이 순간이 여행의 전 과정 중에서 가장 극적인 반전 포인트다. 이 여행기가 단순한 ‘연행록’에서 <열하일기>라는 절대기문으로 바뀌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길 없는 대지-판타지아 혹은 카오스

 

 

청대 도시민의 분주한 일상. 당시 청나라의 주요 도시는 그 번화함과 부유함으로 연암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열하는 낯설다. 낯설다는 건 모든 것이 예측불허라는 뜻이다. 과연 그랬다. 일단 만수절 행사에 맞추기 위해 ‘무박나흘’의 강행군을 해야 했다. 그 와중에 견마잡이 창대는 말굽에 발이 밟혀 뒤에 처졌고, 연암은 야삼경 깊은 밤에 고북구 장성을 홀로 넘는다. 설상가상으로 장성을 넘자마자 하룻밤에 아홉 번 강을 건너는 대모험을 겪어야 했다. 주야불고, 생사불고, 오매불고…. 그의 말에 따르면 ‘마치 소경이 꿈결에 지나친 듯’한 기막힌 여정이었다.

 

연암은 당대 집권세력인 노론 명문가의 유망주였다. 하지만 일찌감치 권력의 장을 벗어난 탓으로 연암의 생애는 겉보기엔 대체로 밋밋하다. 그 흔해빠진 정쟁과 음모, 유배와 국문 같은 사건을 전혀 겪지 않은 탓이다. 그래서 그의 캐릭터를 다소 나이브(naive)한 ‘비정치적’ 문장가 정도로 간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정치를 권력의 소유 여부로 판단하거나 혹은 거대담론으로 환원하는 통념이 자리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연암은 바로 그런 식의 배치로부터 탈주한 것이다. 따라서 이 탈주는 투쟁과 불화가 아니라 창조와 생성의 벡터를 지닌다. 삶과 사유의 새로운 형식을 창안하는 것, 연암의 화두는 오직 거기에 있었다.

 

그 저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장면이 바로 열하로 가는 과정이다. 굶주림과 잠고문 속에서도, 생사를 오락가락하면서도 그의 신체와 사유는 더할 나위 없이 명징하였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말한 ‘위대한 건강’이리라.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존재의 무게중심을 잃지 않는 강철 같은 체력! 또 빛나는 명랑성! 예측불허의 상황 속에서 늘 반전을 야기할 수 있는 동력도 거기에 있다.

고독한가 하면 왁자지껄하고, 위기인가 싶으면 순식간에 출구가 열리고, 백척간두가 곧 ‘깨달음’의 현장이 되는 식으로. 그렇다. 유목민에게 있어 길은 늘 반전의 연속이다. 여행이든 삶이든.

인생도처유‘반전’!

 

 

“요술쟁이는 커다란 유리 거울을 탁자 위에 놓고… 사람들을 불러서 거울 속을 구경하게 하였다. …여러 층 누각과 몇 겹 전각이 단청을 곱게 했는데, …어여쁜 계집들이 서너 명씩 짝을 지어 보검을 지니거나 금병을 들고, 혹은 생황을 불고 혹은 비단 공을 차는데 구름 같은 머리와 아름다운 귀고리가 묘하고 곱다…. 요술쟁이는 구경꾼들을 꾸짖어 물리치고 거울 문을 닫아 한동안 보지 못하게 한다.

 

사방을 향하여 무슨 노래를 부르고는 다시 거울 문을 열어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전각은 적막하고 누각은 황량한데 아름다운 여인들은 어디론가 가고 없고 한 사람이 침상 위에서 옆으로 누워 자는데 옆에는 아무런 기물도 없다. …잠자던 사람은 기지개를 켜면서 깨어나려다가 또 잠이 드는데 갑자기 두 다리가 수레바퀴로 바뀐다.”(같은 책 하권, 338쪽)

 

 

열하의 저잣거리에서 감상한 요술의 한 장면이다. ‘아바타’ 영화 뺨치는 판타지아다. 이 현란한 요술은 물론 눈속임이다. 더 황당한 건 요술쟁이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들이 자신의 눈에 속는다는 것. 그래서 눈을 크게 뜨면 뜰수록 더더욱 속는다. 그럴 땐 차라리 눈을 감아야 한다! 이처럼 열하는 역설의 도가니였다.

 

 

노년기의 청 황제 건륭제의 모습. 강희제, 옹정제의 뒤를 이어 청대의 극성기를 완성한 유능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허울 뿐이었던 ‘소중화주의’와 ‘북벌론’

 

연암이 중원으로 간 까닭은? 당연히 청 문명의 진수를 직접 목격하기 위해서다. 왜? 청나라는 만주족 오랑캐가 세운 나라다. 게다가 그들은 병자호란 때 조선을 무릎 꿇린 원수의 나라가 아니던가.

이후 조선은 스스로를 ‘소중화’라 자임하면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을 공식이념으로 내세웠다. 이 소중화주의와 북벌론의 기치를 높이 내건 당파가 노론이고 송시열 학맥이다.

 

연암은 바로 그 라인에 속한 인물이다. 대의 자체야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헌데, 문제는 늘 현실이다. 청나라는 역대 어떤 왕조보다도 더 역동적인 문명을 이루었다. 그에 반해 조선의 ‘소중화주의’와 ‘북벌론’은 그저 허울뿐이었다. 청나라를 되놈이라고 부정하면서 내부의 동력을 억누르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었던 것.

 

연암은 이 사상적 배치를 전복한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비록 원수라 해도 배울 것이 있다면 배워야 한다!

오랑캐의 나라는 저토록 활발한데 중화를 표방하는 조선은 왜 이토록 무력한가? 학맥이나 당파로는 주류적 라인에 속했음에도 연암은 이 불편한 진실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청 문명의 장관은 기와조각과 똥부스러기에 있다!” “이용이 있은 연후에야 후생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을 이룰 수 있을 것” 이라는 파격적 테제들, 수레·온돌·벽돌 등에 대한 생생한 관찰 등은 다 거기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이런 식의 문명지(知)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 이곳은 오래 전 명나라와 청나라 군사들이 피비린내 나게 싸우던 전쟁터가 아니던가. …이 싸움에서 청군은 명나라 병사 5만 3천 700명을 죽이고, 말 7천 400 필, 낙타 60필, 갑옷과 투구 9천 300벌을 노획했다.

…청나라 군사는 실수로 다친 자가 겨우 여덟에 불과할 뿐, 나머지는 코피도 흘리지 않았다. 아아, 슬프다. 이것이 이른바 송행(송산과 행산) 전투다.

…당시 명나라는 13만이나 되는 대군이면서도 수천 명에 불과한 청의 군사에게 포위되어 마치 마른 나무가 꺾이고, 썩은 가지가 부러지듯 무너지고 말았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면 실로 운수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겠다.”(같은 책 상권, 279∼280쪽)

 

시비선악은 본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청의 황제는 모두 문무를 겸전하여 150년이 넘도록 태평천하를 이루고 있으니 이는 한·당 시대에도 없던 일이었다. 아, 이 또한 하늘의 뜻이란 말인가?

 

“무릇 천하의 일이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양쪽에서 줄을 당기는 것과 같습니다. 줄을 당기다가 줄이 끊어지면, 끊어지는 곳 가까이 처했던 쪽이 먼저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힘이 대등하게 겨룰 만하기 때문에 천하에는 거스르는 것과 순종하는 차이, 즉 밀고 당기는 차이는 있어도 어느 쪽이 옳다든지 어느 쪽이 틀렸다든지 하는 것은 없습니다.”(김혈조 역, <열하일기> 2권, 419∼420쪽)

 

결국 인연과 배치에 달려 있을 뿐, 시비선악이 본디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역사와 진리 혹은 도(道)는 늘 무상하게 움직인다. 하여, 매순간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정해진 방향이나 목적 같은 건 없다! 그런 점에서 연암이 열하에서 티베트불교와 조우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18세기 조선의 지성사는 두 개의 흐름으로 양분되었다. 연암그룹과 다산학파. 이 둘은 당파적으로 노론과 남인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보다는 사상적 차이가 더 극심했다. 전자는 명청 교체기의 양명좌파와, 후자는 서양기술 및 천주교와 연결되었다. 물론 연암그룹도 천주교와 서양문명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술적 차원이었을 뿐 교리적 차원이 아니었다. 그래서인가. 인연이 계속 어긋난다. 연경에 도착하자마자 천주당을 찾아가지만 아무도 만나지 못한다. 열하에서도 두루 탐문해보지만 선이 영 닿질 않는다. 대신 엉뚱하게 티베트불교와 마주친다.

 

건륭황제는 판첸라마(티베트 법왕)를 만수절 행사에 초대했을 뿐더러 그를 위하여 황금궁전을 지어주었다. 거기다 조선사신단에 직접 법왕을 알현하게 해주는 은혜를 베푼다. 하지만 그건 은혜가 아니라 재앙이었다.

조선 성리학의 입장에서 보자면 티베트불교는 이단 중의 이단이기 때문이다. 법왕에게 머리를 숙일 수 없다며 뻗대는 조선사신단과 황제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중국관리들 사이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이로 인해 황제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졌다. 황급히 짐을 챙겨 쫓기듯 연경으로 돌아와야 했던 건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연암은 티베트불교에 대해 온갖 정보를 수집한다. <황교문답> <반선시말> <찰십륜포> 등 무려 세 장을 거기에 할애할 정도로 방대하다. 법왕의 환생제도와 각종 이적 및 기이한 내력을 마치 ‘갈고리로 후벼 파’냈다고 할 만큼 샅샅이 찾아냈다. 처남 이재성은 그에 대해 이렇게 논평한다.

“신령스럽고 환상적이며, 거대하고 화려하며, 밝고도 섬세하여 아주 특이하고 이색적인 글이 되었다.”

 

천주교가 코스모스라면 티베트불교는 카오스다. 전자가 근대를 향한 빛의 유토피아라면 후자는 근대 ‘너머’의 헤테로토피아다. 이 카오스는 기존의 표상에 포획되지 않기 때문에 혼란스럽다.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황홀하다. 저 요술의 세계가 그러하듯이. 이처럼 연암과 열하의 마주침은 18세기 당대는 물론 지금 우리의 시선으로 보아도 낯설고 이질적이다. 카오스이자 판타지아인 세계, 이 매트릭스 위에서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가?

 

여행의 입구였던 저 요동벌판에서 외친 “인생이란 본시 어디에도 의탁할 곳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은 채 떠도는 존재일 뿐”이라는 탄식이 열하라는 시공간을 만나 한층 더 강렬하게 변주된 셈이다. 결국 연암의 시선에서 보자면, 인생이란 ‘길 없는 대지(크리슈나무르티)’ 위를 걸어가는 여행이다. 길이 있어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길이 되는 그런 여행! 이 ‘길 없는 대지’ 위에선 잠들었던 말들이 웅성거리고 천지의 비의가 그 자태를 드러낸다. 그때 길은 글쓰기의 향연장이자 전쟁터가 된다. 그 이야기는 다음호에서….

 

 

/ 월간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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