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기자명 이용택 기자 입력 2021.08.22 11:00
1945년 7월 16일 새벽, 미국 뉴멕시코 주 모래사막 한복판에서
거대한 불덩어리가 솟아올랐다.
곧 지축을 뒤흔드는 듯한 폭음과 함께 12km 상공까지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역사상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었다.
암호명은 삼위일체를 뜻하는 ‘트리니티(Trinity)’.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는 이렇게 성공했다.
그로부터 20여일 뒤인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이 원자폭탄은 미군 B-29 폭격기에 탑재돼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다.
길이 3m, 지름 71cm, 무게 4t의 원폭은
일본의 군사도시를 단번에 폐허로 만들었다.
히로시마는 섭씨 3만 도의 고열에 휩싸였고 14만여 명이 숨졌다.
7만 명이 즉사했고 그 해가 저물기 전에 7만여 명이 더 사망했다.
6만2,000여 채의 가옥이 파괴됐으며 35만여 명이 방사선에 피폭됐다.
끝까지 버티던 일본은 결국 항복했고 태평양전쟁도 끝났다.
일본 천황 항복 조인식
‘원폭(原爆)투하’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힘든 결정을 내린
미국 대통령은 해리 트루먼. 1945년 1월 부통령에 취임한 지 83일 만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급서로 대통령직을 승계했던 그에겐
숨 막힌 결단의 연속이었다.
일본 원폭투하 결정에서부터 유엔 출범, 트루먼독트린 선포,
마셜플랜 추진, 나토 창설, 한국전 파병에 이르기까지.
6·25전쟁을 이끌던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를 미 극동군 총사령관 겸
유엔군 총사령관 직에서 전격 해임한 것도 트루먼 대통령이다.
우리가 지금까지도 명언으로 기억하는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란 맥아더의 말은
군 전역을 기념하는 고별 연설에서 나왔다.
트루먼이 이 명언이 만들어지는데 큰 공(?)을 세운 셈이다.
하지만 트루먼은 “The buck stops here”라는
좌우명을 백악관에 걸어놓고 살았다.
‘buck’에는 ‘숫사슴’이란 뜻도 있지만
‘다음에 카드를 돌릴 사람 앞에 놓는 패’, ‘책임’이라는 의미도 있다.
여기서는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관용어.
그 유례는 서부 개척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커게임에서 딜러 앞에 손잡이가 사슴뿔로 된 칼(buckhorn knife)을
놓아두던 관습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모든 책임은 딜러인 나에게 있다’는 뜻이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라는
좌우명 아래 일본 원자폭탄 투하, 6·25전쟁 참전 등 난제를
하나씩 풀어나갔다.
사진 오른쪽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폭발장면.
트루먼은 이 좌우명을 가슴에 새기며 하나씩 고독한 결정을 내려나갔다.
국민들로부터 인기가 없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루스벨트의 죽음으로 인해 어부지리로 대통령 자리에 올라
재선엔 성공했지만 임기 내내 평탄치는 않았다.
특히 6·25전쟁 참전으로 지지율은 20%대로
뚝 떨어져 역대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혔다.
그러나 퇴임 후 위상은 달라진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용기 있는 결정을 내린 지도자로 재평가됐다.
지금은 역대 미국 대통령 가운데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유능한 대통령으로 꼽힌다.
그는 한국 정치에서도 자주 인용된다.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는 2018년 6월 13일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The buck stops here”라는 한 줄짜리 영어문구를 페이스북에 올리며
사퇴의사를 밝혔다.
정운찬 전 총리는 저서 <가슴으로 승부하라>에서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는 ‘트루먼의 리더십’에 대해 전하기도 했다.
여당 인사 역시 마찬가지다. 양정철 전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은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급락하자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의 여론조사나 여론이 아니라 옳고 그름에 대한
결단력”이라는 트루먼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해
“옳다는 확신과 신념이 있다면 무소의 뿔처럼 밀고 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야 인사가 앞 다퉈 트루먼의 좌우명과 발언들을 활용하는 것은
그만큼 그의 책임 있는 행동이 모두에 귀감이 되기 때문이리라.
그런 트루먼이 최근 다시 소환됐다.
여름휴가 중이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6일 아프가니스탄(아프간)
정부의 붕괴 소식을 듣고 다급히 백악관으로 복귀해 내놓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서다.
그는 미군의 아프간 철수 결정을 내린 데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면서
“저는 미합중국 대통령입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The buck stops with me)”라고 말했다.
아프간 철수의 비난과 책임을 모두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탈레반이 아프간 수도인 카불로 진격하자 아프간 대통령은
엄청난 양의 현금을 갖고 누구보다 빨리 국외로 도피한 것으로 전해진다.
비행기에 매달려 탈출을 시도하다 추락해 숨지는 참극이 벌어질 정도로
국민들은 아비규환에 빠졌지만 그는 국민들의 안위보다
자신의 목숨을 더 소중히 했다.
“탈레반이 내 나라의 국기를 떼 냈는데 국민들을 위해 싸우겠다던
대통령은 대체 어디 있느냐”
아프간 출신 기자의 울부짖음이 아프간의 참사와 오버랩 돼 계속
귓가에 맴돈다.
끝까지 책임지는 지도자가 있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달라지는 지를
뼈저리게 체득하고 있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