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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가 많아 노송동이란 이름이 붙은 이곳은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으로 전국에 유명세를 떨친 마을. '천사'가 처음 노송동 주민센터에 성금을 기탁한 해가 2000년이니 올해로 만 10년째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안 오나?' 했던 지난해에도 천사는 28일 오전 11시 55분에 나타나 8000여만원의 성금을 동사무소 인근 세탁소 옆 공터에 놓고 갔다. 지난 9년 동안 천사가 기탁한 성금 총액수에 맞먹는 거액인 데다, 편지에 '어머니의 유지를 받들어서'라는 표현 때문에 주민들 사이에서는 이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소문도 돌았다. 한일수(55) 동장은 그분이 오고 안 오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면서, 전주시 최대 빈촌이었던 노송동이 최대 행복촌으로 변모한 것이 천사가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지만, 세인의 관심은 천사의 얼굴에 쏠리기 마련이다. 그 정체를 둘러싸고 노송동은 물론 전주시에는 10년간 갖가지 소문이 돌았다. 사업가일 것이다, 어린 시절 노송동에서 살면서 이웃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 그 은혜를 갚는 것이다,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일 것이다 등등. 지난해에는 전북의 한 지역신문에서 '포주'일 가능성을 제기해 논란이 일었다. 한 동장은 집창촌 포주가 자신의 죄를 사함 받으려고 나쁜 짓 해 번 돈의 일부를 선행에 쓰는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는데 말도 안 되는 상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천사를 이야기하며 혀를 내두른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은행에서 출금했는지 추적하지 못하도록 띠지를 제거한 뒤 고무줄로 지폐를 묶는 것이 대표적이다. 동사무소로 수거 장소를 알려주는 전화가 걸려와 직원들이 순식간에 뛰어나가도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단다. 기탁하는 방식도 매해 비슷하다. 크리스마스를 전후한 5일 시점, 그것도 오전 시간대에 전화가 걸려온다는 것, 40~50대 남성의 목소리라는 것, 지폐 다발과 동전이 든 돼지저금통이 A4용지 박스에 담겨 동사무소 인근 어딘가에 놓인다는 것까지. 그래서 '천사는 한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노송동에 연고가 있는 사람이란 소문이 가장 설득력을 얻는 데다, 천사를 찾지 말아 달라는 주민들의 완곡한 부탁 때문이다. 천사의 성금을 갈 곳 없는 다섯 명의 조카를 키우는 데 보태 쓰는 정곡간(61)씨는 노송동 살던 노부부가 부모 없는 아이를 하나 데려와 정성껏 키웠는데 그 아이가 자라 성금을 보낸다는 말들을 주민들이 많이 한다고 했다. 세탁소 주인 조장익(53)씨는 찾으려면 왜 못 찾겠느냐면서 다만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어 그분이 지속적으로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는 게 주민들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노송동일까? 인구 1만6259명의 노송동은 전주시에서 세 번째로 국민기초생활보장대상자(626가구 1138명)가 많은 동네. 체감 빈곤지수는 최하위라는 게 주민들 얘기다. 실제로 법적 영세민을 제외한 실제 소외계층 대상자가 858가구 1008명이나 된다. 한 동장은 신시가지로 개발된 효자동, 서신동 쪽으로 부유층이 옮겨갈 때 노송동에는 빈민계층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면서 아직도 연탄을 때는 가구가 상당수라고 전했다.
천사의 성금은 국가의 법적인 지원금을 받지 못하는 실제 소외계층을 위해 쓰인다. 멀쩡한 직업 가진 자식들이 있는데도 그들의 부양을 받지 못하는 노인들이 많다. 소년소녀가장들도 일정한 나이가 되면 기초수급자에서 제외된다. 55명의 통장과 주민자치위원들에게 소외계층 대상자를 추천받은 뒤 사회복지사를 통해 형편을 확인한 분들에게 천사의 성금을 보낸다. 또한 영세민 신청을 하러 왔다가 이런저런 사유로 자격이 안 돼 울면서 떠나는 주민들 이름을 따로 기록했다가 성금을 보내기도 한다. 국가가 도울 수 없는 사람을 천사가 돕고 있다.
얼굴 없는 천사가 10년간 기탁한 1억6000여만원의 성금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1401가구 주민들에게 전달됐다. 형편에 따라 가구당 10만~30만원 금액을 설, 추석 명절에 통장으로 입금한다. 성금을 동사무소가 직접 관리하지 않는 이유는 투명성 때문이다. 혜택 받는 사람들 수가 해마다 늘어나니 전주시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노송동으로 이사 가라는 말까지 나돈다고 했다. “천사 덕분에 노송동의 동격(洞格)이 얼마나 올랐는지 모릅니다. 전국의 동장들이 한 번씩 모여 회의를 하는데, 얼굴 없는 천사 동네에서 왔다고 하면 반응이 뜨겁지요. 참말 복 받은 동장입니다."
얼굴 없는 천사는 기부가 반드시 재벌급 부자들에 의해 이뤄지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도 했다. 성금 상자에 언제고 들어 있는 돼지저금통은 상징적이다. 10년 새 노송동에 나눔의 손길이 급증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21일 노송동 무료급식소 '소농의 집'에서는 아침 댓바람부터 팥죽 잔치가 열렸다. 동네 어르신들을 위한 동짓날 특식이다. 노송동 노인들만 오는 게 아니다. 인근에 아침식사 제대로 못 하고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한 끼 맛난 '아·점(아침 겸 점심식사)'을 얻기 위해 매일 아침 9시면 줄을 선다. 무료급식소는 4년 전 한 개인의 기부로 문을 열었다. 노송동과 이웃한 인후동에서 한식당을 운영하는 김진호(60)씨. 그는 내가 어릴 때 이웃의 도움을 받고 자랐다면서 어차피 식당에 필요한 식재료이고, 그걸로 독거노인들에게 매일매일 한 끼 식사를 대접할 수 있으니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식당 주인 문금일씨는 한 달에 한 번 무료급식소에 갈비탕을 제공한다. 지난 설 명절엔 사골 500만원어치를 기부해 불우이웃들에게 나눠줬다.
2년 전에는 노송동 성당이 주축이 돼 주민들을 위한 작은 도서관이 문 열었다. 책만 읽는 곳이 아니고 노래교실, 춤교실 등이 무료로 이뤄진다. 신성건설이라는 업체에서는 직원들이 성금을 모아 노송동의 어려운 주민들을 위해 지정기탁하기도 했다. 노송동 동사무소에는 소소한 나눔의 손길도 이어진다. 천연비누를 만들어 보내는 사람, 아이와 함께 모은 돼지저금통을 보내는 사람…. 지난달에는 유치원생들이 연탄 나르는 봉사를 하겠다며 동사무소를 찾아와 직원들을 놀라게 했다.
전직 교장이었던 이진형(72)씨는 얼굴 없는 천사 이야기는 교육현장에서 가장 값지게 활용된다고 말했다. 놀이터에서 만난 초등학교 5학년 문단일(11)군은 "천사? 당연히 알지요. 그래서 저도 불우이웃 돕는 모금함에 300원 넣었어요." 하며 싱긋 웃었다. 소녀가장으로 네 명의 동생과 함께 사는 정유나(18)양은 얼굴 없는 천사는 우리에게 돈보다는 희망을 주었다면서"내 꿈도 얼굴 없는 천사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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