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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1년 7월16일>
수행법회 문답
타이핑: 초벌)홍석원 완성)김도권
설법: 보산 김제원 교무님
원기 101년 7월 16일 청년 수행법회 질의응답.hwp
<어느 때 든지 교당에오고보면, 그지낸일을 일일이 문답하는데 주의할 것이요.>
Q. 김도권교우님
꿈에도 나올만큼 큰 집착을 가진 대상을 잊는 방법을 잘 알고 싶습니다.
A. 부처님도 고집멸도라 하셨습니다. 고통은 집착때문이라는 말씀이죠. 그러면 그걸 멸하기 위해선 도제.. 즉 삼학공부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원불교의 정신수양, 쉽게 말해 수양을 통해 집착을 비워버린다는 겁니다. 본래 집착없는 자리에 합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구를 통해서 집착의 실체있는지, 원인은 무엇인지, 나에게는 어떤 이득이 있을 것인지 연구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 집착이 올 때 마다 취사로 유념으로 삼고, 힘이 없다고 생각대거든 대치법을 사용합니다. 안해야겠다고 생각할것만이 아니라 내가 맡은 본인의 업무와 목표를 해서 집착을 대체하는겁니다. 회사일을 열심히 한다던가 기도를 한다던가 하면, 어느샌가 그 집착은 뒤로 밀려버리죠. 그래서 우리 삼학공부가 집착을 버리기위한 공부이며, 만약 힘들다면 그 중 하나만 잡고 쭉 가도 괜찮습니다.
Q. 김화중교우님
저는 이어서 같이 질문하고싶습니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면 고통이 너무 심해서 운동을 하는데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써 집착이 다가와서 너무 심해 다른 생각조차 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본인이 죽어버리고 싶은 사람은 자학적인 사람이고 죽여버리고 싶은 사람은 폭력적인 사람입니다. 그럼 세상 사람들이 연애하다 헤어지면 다 죽거나 죽이려고 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이건 시간이 약이 되기도 합니다. 더 들어가면 결국은 사랑한단것도 애착이라고 하는 집착 중 하나입니다. 헤어지자고 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지 못하는 것과 부모가 죽을 때 자식을 못 잊는 건 똑같은거죠. 그래서 우리공부가 필요한것이죠. 그런감정이 쓸대없다거나 의마없다는게 아니에요. 이런 집착이 들 때 어떻게 이걸 보류 할 것 인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죽으려고 약찾고 절벽찾고 강을 찾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도 몇 번 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교통사고도 처음 날 때는 큰일 난 줄 알지면, 몇 번 나보면 별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죠.
Q. 박진원교우님
열심히 하고 싶어서 열심히 했는데 하다보면 한계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내가 열심히 하고 있나 하고 다시 한 번 점검해보고 이런 부분에서 부족했다, 또 열심히 했다는 걸 확인하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해서 하다보면 또 힘들어서 한계에 부딪힐 때가 옵니다. 어떨 때는 내가 욕심이 많은 건지 제대로 하고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지치는 마음이 든것을 어떻게 잘 돌릴 수 있을지..
A.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답니다. 3일정도면 풀어진대요. 그걸 다시 조이고 조이고 하는 방법이 심고를 올리고 서원에 대조하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안 하는 사람은 자신의 목표에 대조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재미를 알면 열심히 하고 자신과 하는 일 과의 관계를 알면 정성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재미를 알면 거기에 들이는 시간과 돈이 안 가깝습니다. 이걸 함으로써 어떤 만족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아는거죠. 그래서 옷을 몇 천 만원짜리를 사기도 하고 비싼 차를 사기도 하죠. 왜? 나한테 만족이오니까.. 그래서 내가 하는 일과 나의 관계를 알아야하고, 그것을 알려면 진리적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적안목이 없는 사람은 칭찬을 해주고 인정을 해주지 없는 상태로 아무도 안 볼 때는 봉사를 못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진리, 인과의 이치가 동반되지 않으면 그 사람은 보일 때만 하는 거고 이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도 하는 거에요. 진리와 인과에 대한 확실한 깨침이 있을 때는 보이든 안 보이든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무엇을 할때는, 내가 이걸 언제까지 어떻게 하겠다는 걸 확실히 하고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마음을 조여가아죠. 법회를 보는 것은 시계를 조이는 것과 같고, 또 먼지가 쌓인 방에 청소하는 것과 같고 배고픈 사람이 밥을 먹는 것과 같아요. 정신의 양식이라고 표현하죠. 왜 우리가 이 법회를 수요일과 토요일에 하는가? 그건 이만큼은 해야 하기 때문이죠. 다 원리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항마위가 되기 전까지는 여러분을 믿지 마세요. 보통 자기가 자기 꾀에 넘어가고 자기에게 속고 스스로를 믿지 못할 일이 많습니다. 항마위가 되기 전까지는... 그래서 사용하는 잣대가 법, 스승, 서원, 목표죠. 자신이 자신을 믿고 사는 건 말이 안돼요. 김두환이 예전에 종로에서 싸움을 하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 한 목사님이 병문안을 갔어요. 그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했는데, 김두환이 듣고있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지 말라며 믿으라면 주먹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김두환은 주먹을 믿고 싶고 목사님은 하나님을 믿고 싶죠. 여러분은 무엇을 믿으세요? 돈을 믿는 사람은 여기에 못 옵니다. 돈을 숭배하는 것은 배금주의라고 하죠. 차라리 여기 올 시간이 돈 더벌고 돈을 더 벌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고 해야지 무엇하러 여기에 어떻게 오겠어요. 여기에 온 사람은 맑은 영혼, 대종사님의 일원주의 사상, 그리고 이 세상에 영생에 대한 영원한 행복을 가지려는 그런 맑은 뜻이 있으니 오는 거죠. 오직 관심이 돈, 노는 것, 쾌락주의에 있다면 당연히 여기에 못 오죠. 여러분 뭘 믿으세요? 주먹, 돈 , 권력을 믿으세요? 꽃이 10일 안에 대개 져요. 한 때 젊다고 좋은 때라고 거울보며 생각나지만 여러분도 곧 늙을 것입니다. TV 나오는 관에 누워있는 사람이 여러분이 된 다는 것입니다. 남 이야기가 아니에요.
Q. 양도인교우님
저는 경험부족에서 나오는 질문인 것 같은데 사회에서 지도인으로서 아랫사람들을 지도해야 할 역할이 주어졌고 이를 위해 수행해야 하는데 요즘에는 코칭이나 윽박지르는 방법이 아닌 본인 스스로가 방법을 찾을 수 있게끔 하는 방법들이 많이 대두 되고 있고 저도 그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지도자는 아랫사람에게 화를 내고 강경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지도인 밑에서 다른 사람을 제가 지도해야 하는데 막상 제 아랫사람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 방법이 생각나지가 않습니다.
A. 혜진이가 이번에 학교 선생님으로 갔잖아요. 두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한 사람은 너무 아이들을 좋아해서 첫 발령부터 너무나도 사랑하고 아이들의 응석을 다 받아 줄거라는 표현을 합니다. 그러면 그 학년은 실패입니다. 아이들 수준에 맞아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후진국에서는 독재보다 더 나쁩니다. 아이들이 볼 때 함부로 하면 안되겠는데 좋은 사람이라는 양면성의 생각이 들게 해야지, 한 쪽으로 생각하게 만들면 당연히 실패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의 착각 중 하나가 윗사람에게 올바른 코칭을 요구하고, 아랫사람에게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일이라는 건 그런데 상의할 게 있고, 지시할 게 있고, 일단 이해가 안 되고 수긍해서 해 보면서 나중에 이해하는경우도 있는데, 무조건 코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화살을 맞았을 때 이걸 얼른 빼버려야지, 아니 그 화살이 어디서 날아왔고 각도가 몇 도 인지를 생각하면 되겠어요? 상황따라 일따라 해야지.. 일방적으로 모든 일이라는 것은 한 방법으로만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내가 아랫사람일 때는 윗사람의 방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받아들이고 생각해서 그리고 내가 윗사람이 되었을 때는 문제점을 고치려고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윗사람한테는 자기뜻대로 요구하고, 아랫사람한테는 좋게만 대해버리고..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아까 근기이야기를 했는데..
어느 레스토랑에서 보면 사람들 눈높이에 맞춘서비스를 본적이 있습니다. 그렇듯 어린 아이들은 어린아이들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인격적으로는 부처로 생각해서 무시는 하면 안 되지만 때로는 웃으면서, 때로는 무섭게, 지시형으로 해야죠.. 즉 상황에 맞게 해야죠. 일방적으로 한 방법으로 대하면 안되죠. 여러분 빚쟁이가 왔을 때 웃으면서 대하겠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내 돈만 안 갚습니다.
Q. 김여주교우님
단순히 궁금해서 묻는 건데 안 물어보면 찝찝할 것 같습니다.
외할머니 제사 때 불경을 읽는데 눈물이 났고, 저는 그날 즐거웠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A. 그건 본인이 감정적이여서 그럴 수도 있고 할머니 생각이 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상과없이 갑자기 제사 중 예전에 억울했던 것이 생각나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울음이란 건 무조건 다 나쁜 건 아닙니다. 즉 기뻐서, 슬퍼서, 참회해서, 아파서 등 여러 가지 우는 이유가 있습니다. 감정은 하나의 표현이고 몸의 작용니까. 본인이 잘 생각해보세요. 원불교 학과에서 제가 제일 많이 운 사람으로 다섯 손가락안에 들 거에요. 저희 동기들은 잘 몰라요. 특히 저는 진실한 출가 감상담을 들었을 때 거의 웁니다. 왜냐면 출가한 사람들이 모두 출가 감상담을 하는데 총부 법회에서 들으면, 그건 내용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참 소중하고 내 감상담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해서 많이 운 것 같아요.
Q. 심하은교우님
자기 전에 아무 생각도 없이 자는 데 꿈을 꾸면 예지몽처럼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날 일들을 꾸곤 합니다. 누군가 학교에 합격하면 그 학교의 이름과 모습이나 이런 것들도 다 나와요.
보통 안 좋은 꿈은 말을 잘 안하는데, 사람들이 왜 말을 안 해주었냐는 핀잔을 들은 적이 있어서 이런꿈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런것들에 대해서 생각하지도 않는데..
A.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에서 무의식과 잠재된 의식이 걸림없이 나온다고 생각하죠. 또 램수면의 원리에 의해서 배우고 읽은 걸 정리하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잠이라는 건. 그런데 아버지가 나타나셔서 천도재 지내줘서 고맙다며 몸을 받아 간다는 말을 한 적이 많습니다. 강하게 인식이 된 것이 나온것이다거나, 어떤 영가가 꿈과 매칭이 되어 나오는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진짜 수행자라면 몽중일여라는 게 있어요. 낮에는 어떤 여자가 야하게 해도 그냥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밤에 꿈에서 같은 일이 생기면 보통 덮치게 되어있죠. 그런데 내 안에서 큰 수행심이 있다면 그걸 꿈에서조차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평상시에 생각이 많을수록 꿈이 더 복잡합니다. 의지력이 있으면 분별을 억제할 수 있지만, 의지력이 없을 때 힘을 기르는 것이 수행입니다. 이탈리아 명품은 절대 요란한 게 없습니다. 우리나라나 뉴 밸런스를 입고 다니지 유럽에는 브랜드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옷이 안 팔리거든요. 우리의 의식세계가 허상에 잡혀서 살면 꿈속에 훨씬 번뇌가 많아집니다. 내이야기를 할께요, 사람은 누구나 꿈을 꿉니다. 램수면 즉, 꿈을 꾸는 동안에 깨우면 꿈이 생각이 나요. 그러면 음식조절을 잘 하고 일기를 쓰고 잘 때 기도하고 단전호흡을 하다 잡니다. 노래를 듣거나 티비를 보다 자면 그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 노래가 이어져서 귓가에 맴돌고 티비에서 본 게 그대로 이어지죠. 그래서 최후의 일념이 최초의 일념입니다. 잘 때 서원을 새기면서 자면 거기에 힘이 생깁니다. 대종사님께서는 24시간 좌선하셨다고 하죠. 이상한 꿈도 안꾸게되고, 번뇌도 생기지 않습니다. 잠자는것도 수행으로 사용하는 이치가 있습니다. 그냥 아무생각없이, TV보다 자는게 아니고.. 마취를 했는데 어떤 교도가 떨면서 영주를 외웠습니다. 그런데 마취가 깨니까 외웠던 부분부터 다시 읊는답니다. 꿈은 여러 가지입니다. 영매가 있는 사람들은 꿈을 통해서 많은 부분들을 예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Q. 홍석원교우님
남 얘기(뒷담화) 하는 걸 좋아하고 신뢰감을 주지 않는 사람의 대처와 관계를 어떻게 해야할지 궁금합니다.
A. 80억중에 하나 안 만나면 되지 않겠어요? 이 중 여러 명이 있지만 다 다르잖아요. 사람은 다 다릅니다. 문제는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수용하면서 내 정체성을 잘 유지해 나가냐는 방법이죠. 그래서 안 만나면 되겠다는 건 감정적인 마음입니다. 안만나려면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걸 바라보는 내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잘 봐야 하고 그 사람이 타인과나 타인에 대해 넘겨짚는걸 보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나는 어떤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교에는 타의불교 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이 어울리되 거기에 내가 빨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예전에 전쟁을 할 때에는 미리 선전포고를 하고 갔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이 안 맞는 사람도 있고 한데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견이 안 맞는 사람도 그 사람 입장에서 보면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그런 사람에게 배울 것도 분명히 한 두 가지는 있을겁니다. 한 20대 초반일 때 보면 사람들을 관계에서 잘라버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디에나 가보세요. 석원교우가 말한 사람은 앞으로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름과 얼굴은 바뀌지만 그런 사람은 죽을때까지 만나야 합니다. 자신의 안경을 바꾸면 달리보입니다.
Q. 이중여 교우님
얼마 전에 밖에서 어떤 학회가 있었는데 원불교에서도 참여를 했고 통일교에서도 참석을 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도 이해가 안가는 게 통일교의 경우는 지탄을 많이 받는 종교고 사이비 아니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집단인데 왜 우리 집단에서 아무리 학회라도 서로의 성지를 교차방문하면서 서로 인정해주는듯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A.예전에 강원도에서 목사님하고 스님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 했다고 방송에서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스님은 그럼 그 원수가 어디있냐고 대답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