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1장 구조를 보면 크게 1:1~9절과 1:10~2:1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한다면, 후반부는 하나님의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4~5절을 보면 “이스르엘”, 1:11절을 보면 “이스르엘”이 두 곳에 똑같이 나옵니다. 결국 “이스르엘”이라는 말이 심판과 구원의 이미지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호세아 14:4~8절을 보면 “그들은 곡식같이 풍성할 것이며 포도나무와 같이 꽃이 필 것이며”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의미가 이스라엘(“하나님이 심는다”)이라는 말에 담겨있습니다. 풍성한 열매와 곡식을 먹는다는 좋은 의미입니다.
그런데 호세아 1:4~5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범죄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 족속을 멸하실 것입니다. 이스르엘과 이스라엘의 발음 유사한 문학적 기법을 사용합니다.
“이스르엘”은 두 가지 문맥과 연결됩니다. 먼저 지명의 뜻과 관련하여서는 “비옥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르엘 실제 지명에 있는데, 가장 비옥한 평야 지대입니다. 다음은 지명의 역사와 관련되는데, 상당히 불행합니다. 아합의 가문이 완전히 멸망 장소의 배경이 이스르엘입니다. 아합의 아들 요람이 살해된 곳이고, 이세벨도 이곳에서 참혹한 죽임을 당합니다. 피, 살육의 장소입니다.
오므리 왕가는 아합과 그의 아들에게서 끝이 납니다. 지금의 북이스라엘 여로보암은 예후 가문에 속합니다. “이스르엘의 피”라는 말씀은 오므리 왕가의 피의 심판을 예후의 후손이 갚는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NIV : I will soon punish the house of Jehu for the massacre at Jezreel – 심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르엘의 학살 때문에) - 예후의 후손이 심판받는 것은, 그의 조상 예후가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예후 가문 심판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첫째, 예후의 피의 학살 때문입니다(열왕기상 19:16, 열왕기하 9:1~13). 예후가 오므리 왕가와 이세벨을 심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둘째, 예후 가문이 부패와 타락에 연루되었기에 심판받는 것입니다. 오므리 왕조의 피의 심판을 똑같이 전철을 밟았기에 피의 심판을 받습니다. 이 두 가지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갚다”의 히브리어는 “파카드”입니다. “파카드”는 “심판하다”라고도 번역이 되지만, 목적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달리 해석됩니다. 즉, “ ~ 때문에”, “ ~ 에게 심판을 행한다”, “ ~ 에게 처벌한다”입니다.
그러므로 예후 왕조를 심판하는데, 이스르엘의 피의 숙청 때문에 동일하게 내린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심판의 원인이 예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북이스라엘의 타락, 죄악에 있습니다.
호세아 1:11절을 보면 “이스르엘의 날이 클 것임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심판의 이스르엘(4~5절)이 회복의 이스르엘(11절)으로 바뀝니다. 반전이 나타납니다. 똑같이 “이스르엘”이란 말을 사용함을 통하여 심판에서 구원으로의 반전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마음은 그들을 심어서 곡식, 열매가 풍성하게 맺는 것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범죄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향한 마음을 바꾸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하나님이 심어서 많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구원으로의 반전은 호세아 자녀들의 이름이 바뀌는 것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강조됩니다. 6절을 보면 두 번째 딸이 등장합니다. “로루하마”는 “로(아니다)” + 루하마(명사형 레헴, “자궁” 의미)로서 “불쌍히 여기지 아니한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한다”의 의미입니다. 어미가 자식을 끝까지 품고 있는 사랑을 긍휼의 말로 번역합니다. 하지만 이런 긍휼을 더 이상 베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라함”(자비, 긍휼)은 출애굽기 34:6~7절에 등장하는 표현(“라훔”)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적 성실성을 거두시겠다는 의미입니다.
9절을 보면 “아들이 이름이 로암미라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로 + 암미)”의 의미입니다. “암미”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언약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결국 언약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언약 공식(레위기 26:12, 신명기 27:9, 예레미야 7:23, 11:4)의 역전입니다. 출애굽기 6:7절의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의 역전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원어로 “로 이흐예”로서 “나는 너희에게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다”의 의미입니다. 출애굽기 3:14절의 “에흐예”, 즉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의 역전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한 구원자,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 더 이상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호세아 자녀들의 이름을 통한 심판 내용(1:2~9)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즉, 호세아 1:10~2:1절은 이름을 통해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4절의 “이스르엘”이 “심판의 장소”였다면, 1:11절에서 “이스르엘”이 “번영의 장소”로 바뀝니다. 6절의 “로루하마”(긍휼이 없다)가 2:1절의 “루하마”(긍휼)로 바뀝니다. 9절의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가 2:1절의 “암미”(내 백성이다)로 바뀝니다.
10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라고 말씀합니다(창세기 13:16, 15:5, 22:17, 26:24, 28:14, 32:12). 아브라함의 언약 강조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기원)으로서 새 이스라엘의 탄생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면 “한 우두머리를 세우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우두머리”라는 말은 히브리어 “로쉬”입니다(민수기 14:4, 사사기 11:8). 구약성경에서 왕은 “멜렉”단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왕”이라는 단어 대신에 “우두머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새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왕조 이전 시대의 아브라함 후손의 연합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새 이스라엘의 탄생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해 가능,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세아 1:10절의 “바닷가의 모래”는 신약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 땅에서 올라오니”라는 말은 곡물의 열매를 거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심어서, 그 심은 것이 다시 올라온다”라는 의미입니다. 언약의 회복을 통해 가능합니다.
9~10절은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의 전환을 보여줍니다. 심판에서 구원으로의 전환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신실하심(헤세드)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 관계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 불의 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의 하나님 노릇을 하십니다.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불의하신 분이 되십니다. 하나님 편에서의 하나님 노릇을 해 주심,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언약적 신실함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편에서의 하나님 노릇을 해 주심,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입니다(누가복음 22:15~20, 고전 11:23-25, 히브리서 13:20). 예수님이 십자가에 하나님으로 하나님 편에서의 하나님 노릇을 해 주심을 통하여, 즉, 언약적 신실함을 통하여 저와 여러분에게 구원을 허락하여 주신 줄 믿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하나님 편에서의 하나님 노릇 해 주심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 편에서의 우리 노릇함으로 언약적 신실함을 드러내 보여야 하는데,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이중 사랑 계명입니다(마태복음 22:37-40).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