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산 사람 사무엘(2) / 삼상1:19~20 / 사무엘은 코드가 맞는 사람
(삼상 1:19) 그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의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삼상 1:20) 한나가 임신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
사무엘은 한마디로 말하면 코드가 맞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구와 코드가 맞는 사람이었을 가요? 하나님과 코드가 맞는 사람입니다.
사무엘 당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삼상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어린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 밑에서 여호와를 섬겼습니다.
그때는 여호와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환상을 보는 일도 거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도 찾을 수 없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줄 만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나타났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과 코드가 전적으로 맞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택하셔서 시대적인 일을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당시 최고 영적 지도자는 엘리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 대제사장은 이미 영적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여 성막에 와서 몸부림치며 기도하였습니다.
이때 한이 맺혀 몸부림치면서 기도하는 한나를 보고 술에 취한 줄로 알았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영적 분별이 없는 사람을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젖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온전히 하나님의 집에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애를 썼습니다. 이런 점이 하나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98세 된 엘리 대제사장을 쓰시지 않으시고 세 살 된 사무엘에게 눈길을 돌리셨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과 코드가 맞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택하여 세우셨습니다.
또한 사무엘은 부모와도 코드가 맞았습니다.
어머니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할 때 하나님께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삼상 1: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나님은 한나의 이런 서원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 아들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한나는 서원했던 기도를 지켰습니다. 아들 사무엘을 얼마나 자기가 기르고 싶었을까요?
그러나 젖떨어지자마자 엘리 제사장에게 보내어 성막 안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구별된 나실인으로 길렀습니다. 나실인이란 세 가지를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1. 포도주를 입에 대면 안 됩니다.
2. 머리를 깎으면 안 됩니다.
3. 시체를 보거나 만지면 안 됩니다.
이 세 가지를 사무엘 본인이 서원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 한나가 서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아무리 어머니가 서원하였어도 하나님께 어머니가 서원하였으니 자기가 지킨다는 심정으로 그대로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골프공과 자녀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부모 뜻이 있다고 할지라도 자녀가 듣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어머니와 코드를 잘 맞추었습니다. 어머니 뜻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무엘을 하나님은 선택하셔서 큰 사람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이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100살에 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올랐습니다. 이삭은 자기를 불태울 나무를 짊어졌습니다. 그리고 불씨도 손에 들었습니다.
이상하였습니다. 번제를 드리러 간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면서 다 가지고 올라가는 데 번제물만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은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여기 있는데 번제 할 양은 어디 있나요?“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때 사실은 네가 번제물이야>라고 말하면 도망칠 것 같아서 그랬는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하셨어.”
산에 올랐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사실은 번제물이 너라고 말했습니다. 이삭은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묶으려는 아버지에게 반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순순히 순종하였습니다. 아버지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따랐습니다. 아버지와 코드를 맞추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녀를 크게 들어 사용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자녀들은 부모와 코드를 맞추는 훌륭한 자녀들이었습니다.
사무엘도 그렇고, 이삭도 그랬지만, 입다의 딸도 그랬습니다.
입다가 암몬과 전쟁하러 나갈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삿 11:30)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삿 11:31)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하나님은 입다로 하여금 암몬에게 이기게 하셨습니다.
입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데 문 앞에서 제일 먼저 반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무남독녀 자기 딸이었습니다. 입다가 이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삿 11:35, 쉬운) 입다는 자기 딸을 보자 놀라고 당황해서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입다가 말했습니다. “내 딸아! 네가 나를 너무나 슬프게 하는구나. 내가 여호와께 약속을 했는데, 그것은 깨뜨릴 수 없는 것이란다.”
이 말을 들은 딸이 이렇게 아버지와 코드를 맞추면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여호와께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대로 하세요. 여호와께서는 아버지를 도우셔서 아버지의 적인 암몬 사람들을 물리칠 수 있게 하셨어요(36).
입다의 딸도 아버지에게 순종한 자녀입니다. 그리고 그는 죽었습니다.
놀라운 자녀들입니다. 아버지 어머니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자녀들입니다.
이같이 하나님은 부모와 코드를 맞추어 사는 사람을 들어 크게 사용하십니다.
세 번째 사무엘은 선지자와도 영성이 맞는 선지자였습니다.
사무엘은 자라서 선지자 학교를 세우고 총장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삼상 19: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이 말씀을 보면 분명히 사무엘은 선지자 중에 선지자였습니다.
그 이전에는 선지자 모임이 없었습니다. 선지 학교도 없었습니다.
선지자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제사장이란 누구입니까? 사람들의 말을 받아 하나님께 전하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제일 처음 전한 이는 엘리입니다. 대제사장에게 어린 사무엘이 선지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앞으로 엘리 가정에 이루어질 일을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자가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 자가 선지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가 바로 선지자입니다.
사무엘의 영성은 선지자 영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과 영성을 맞추었습니다. 선지자와 코드를 맞추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 사무엘의 죽음
(삼상 25:1)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사무엘은 신정정치에서 왕정 정치로 넘어가는 시기에 살았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을 몹시 존경하고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죽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퍼하였습니다.
바울은 히브리서를 쓰면서 11장에 구약에서 16명 믿음의 사람 중에 뽑혔습니다.
믿음의 거성들입니다. 거목이요 거인들입니다. 그중에 사무엘이 들어 있습니다.
(히 11: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사무엘은 죽어서도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죽어서도 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이름을 후대에 남길 수 있을까요? 우리의 기도 제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