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삼월,소방관들은 여전히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24시간 맞교대 속에서도 늘 밝은 웃음을 잊지 않는다. 매일같이 비상벨 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한달 위험수당은 단돈 3만원. 연간 건강검진 혜택이 주어진 것도 지난해부터다. 공상(공무 중 입은 부상)이라도 당하면 3개월 후에는 자비로 치료해야 하는 현실. 부족한 인원이지만 구조조정 명단에선 이들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그래도 이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소방관은 나의 천직입니다." 우리가 이 땅의 소방관들에게 늘 감사해야 하는 이유다.
19일 오전 5시29분 서울 서부소방서. 비상벨과 함께 지령실의 출동방송이 고즈넉한 2층 대기실을 뒤흔들었다. 김현진 반장(39) 등 4명의 대원은 부리나케 비상계단을 내려와 차량에 탑승했다. 화재 진압차와 구급차가 뒤를 따른다. 지난 24시간 사이에 처음 접수된 화재신고.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이들을 태운 '서부100호차'는 불광동의 한 산동네로 향했다.
10여분쯤 달렸을까. '자체진화'란 단어가 무전기 스피커를 타고 흘렀다. 덩달아 대원들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온다. 김형배 소방사(32)는 긴장이 풀린 듯 졸린 눈을 비비며 고개를 푹 숙인다. 현장에서는 앞서 출발한 펌프차가 불법주차 차량들 탓에 발이 묶였다. 불에 탄 것이 골목에 세워둔 포장마차였기에 망정이지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오전 8시40분 조회시간. 24시간 근무를 마친 대원들이 임무교대 대신 짐을 날랐다. 전날 기자를 태우고 내달린 서부100호차가 과로(?) 탓에 고장났기 때문이다. 스투 기자와 서부소방서 119구조대 갑반 대원들이 함께한 24시간.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비상출동!
'띠잉∼ 띵띵∼!'
하루 전인 18일 오전 8시43분. 통성명할 틈도 없이 구조대 차량에 올랐다. 도착하자마자 비상벨이 울렸기 때문이다. 달리는 차 안에서 방화복을 입고 산소통을 메는 모습이 마치 전쟁터 같다. 14분 뒤 도착한 증산동의 한 양옥집. 2층 베란다에서 50대 남성이 분신자살을 시도하고 있었다. 주위에 시너를 뿌린 채 라이터를 손에 쥐었다. "구청장,서장 나와라∼." 고함에 잔뜩 분이 섞였다.
"건물을 철거하려는 새 임대주에 맞서 임차인이 극한 방법을 사용 중"이라는 경찰의 설명. 대치상태가 1시간을 넘기자 웅성거리던 구경꾼도 대부분 사라졌다. 50대 남성은 관심을 끌기 위해 이리저리 고함을 내질렀지만 이미 가족의 설득에 기세가 한풀 꺾였다. 오전 10시5분 구급차와 펌프차를 남겨둔 채 구조대는 일단 철수했다.
돌아오는 길은 여유가 있다. 체격 당당한 대원들은 순박하고 어눌한 말투로 말문을 열었다. 유양수 소방사(30)는 "갑반 대원들은 부여 익산 전주 부산 등 팔도에서 모인 외인부대"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들 대부분은 특전사와 해병대 출신이다. 외모 또한 영화배우 뺨친다. 부친상과 폭설지원으로 인원이 빠져 이날은 7명이 근무했다.
손종한 부대장(42)은 "아이들이 아빠가 하는 일을 가장 좋아한다"며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특전사 중사 출신 손부대장은 지난 88년 구조대 1기로 소방서에 발을 들여놓았다. '아침에 퇴근하는 남자'는 중1 딸이 붙여준 별명이다.
#구조대=맥가이버+슈퍼맨
소방서라면 불 끄는 일이 대부분일 줄 알았는데 실제는 달랐다. 김반장은 "기르는 개,잃어버린 고양이를 찾아 달라는 신고가 하루 14건 들어온 적도 있다"고 말했다. 돌아오자마자 다시 벨이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문 따주러 출동(오전 10시24분)! 북가좌동의 한 다세대주택 3층에 4세 여아가 홀로 갇혔다는 신고다. 로프와 사다리를 이용,20여분 만에 상황 종료. 아이엄마는 감사표시로 사탕 한 움큼을 건넸다.
화재는 예방이 중요하다. 오후 1시59분 관내 한 14층 건물을 찾았다. 다소 한가한 오후시간을 이용,소화전과 지하시설물을 점검했다. 손부대장은 "보통 사고는 집중력이 떨어지는 오후 5시 이후에 몰린다"고 설명했다.
서부소방서 구조대는 지난 한 해 동안 총 3,115차례 출동했다. 하루 평균 8.5건이다. 서울시내 21개 소방서 중 가장 '빡센' 곳이다. 서대문구와 은평구 50여개동을 관할,불광동에서 신촌 현대백화점까지 동에 번쩍,서에 번쩍이다. 손부대장이 "북한산 인명구조도 담당하는데 관내에 하천까지 있었다면 우리가 먼저 죽어났을 것"이라며 농을 걸었다.
#보람을 먹고 산다
오후 3시30분. 달콤한 휴식을 취하던 구조대에 명령이 떨어졌다. "뭐예요?" "연희3동 길가에서 중년여성이 잠긴 차문을 열어달라네요." 순간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었다. 오후 5시께 남가좌동에서 '문 열어달라'는 신고가 또 들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당뇨를 앓는 노모가 의식을 잃은 것 같다는 다급한 내용. 퇴근시간이라 붐비는 도로 위 차들은 사이렌 소리에도 쉽사리 길을 터주지 않았다.
현장에서 구조대는 능숙한 솜씨로 문을 열고 안방에 쓰러져 있던 70대 노인을 구급대에 인계했다. 저녁식사 뒤 체력단련 시간이 이어졌다. 24시간 맞교대라는 살인적 근무환경 속에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다. "덕분에 대원 모두 배낭 메고 북한산을 쉼 없이 올라간다"고. 땀을 쏟는 도중 '갈현동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아이가 갇혔다'는 출동방송이 나왔다. 다행히 이동 중 '자체해결'.
한참 졸고 있는데 떨어진 구조출동(오전 1시45분)은 '홍은동 지하카페에 50대 남자가 갇혀 있다'는 내용이었다. "화장실 간 사이 주인이 문을 잠그고 퇴근했다"는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다. 주인 동의 없이 함부로 문을 부술 수 없어 잠시 실랑이가 벌어졌다. "일보다 사람 상대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푸념이 나왔다. 유압절단기 방화복 도르래 등을 가득 실은 서부100호차가 터덜거리며 돌아온 시간은 오전 2시가 훨씬 넘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