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단년도 : 1970년
연고지 : 웨트레흐트주 위트레흐트
홈구장 : 니우버 할렌바르트
주요전적 :리그우승1회(1958, DOS시절)
네덜란드 FA컵 우승1회(1985)
FC 위트레흐트는 1970년 7월1일 창단됐다. 유럽의 왠만한 클럽들의 역사가 100년이 넘는 점을 감안할 때 위트레흐트의 창단은 분명 매우 늦은 편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위트레흐트는 바로 DOS, 펠록스, 엘링크베이크 등 3팀이 합병해 생긴 팀이기 때문.
위트레흐트가 매우 특별한 형식으로 창단된 팀이긴 해도 세 팀의 역사를 따져보면 여타 클럽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세팀 중 가장 역사가 긴 팀은 DOS로서 1901년 3월23일 창단됐고, 펠록스는 1902년 5월12일, 엘링크베이크는 1919년 6월20일에 각각 창단했다.
하지만 아약스 암스테르담, PSV 아인트호벤, 페예노르트가 주름잡던 네덜란드 무대에서 DOS, 펠록스, 엘링크베이크 세팀은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1952년에야 1부리그로 올라온 엘링크베이크는 많은 어려움을 겪은 후 1961년 다시 2부리그로 강등됐고, 통합 직전에도 2부 리그에 속해있었다. 프트 크락, 니코 더 브레이, 레이니어 크레이어르마트, 험프리 메이날스, 에르빈 스파런담 등의 선수들이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공식대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펠록스의 경우는 더 심하다. 펠록스는 창단이래 한차례도 1부 리그에 진입하지 못한 아마추어팀으로서 2부리그 4위가 최고의 성적이었다.
세팀 중 그나마 괜찮은 성적을 거둔 팀이 DOS다. DOS는 46년부터 54년까지 1부 리그에 잔류했다. 특히 2차대전을 전후해 히허라트 판 류르, 피트 뒤모티에르, 코르 뢰이턴, 루이스 판던 보허르트 등의 네덜란드 국가대표를 배출한데 이어 한스 크라이, 토니 판 데어 린던, 헹크 베르비, 프란스 더 뮝크 등도 차후에 국가대표에 선발됐다. DOS는 이 멤버들을 데리고 58년 네덜란드리그 (에레디비지에) 우승컵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하지만 DOS 역시 경쟁팀들의 추격에 힘을 잃고 이내 중하위권으로 추락했다.
이 세팀이 1970년 7월 1일 전격적으로 통합을 결정하고 FC 위트레흐트로 재탄생했다. 당시 DOS가 에레디비제에(1부리그) 소속이었기 때문에 '통합팀' FC 위트레흐트는 자연스럽게 1부리그에 남을수 있었다. 통합 초기 베르트 야콥스 감독은 엘링크베이크에서 골키퍼 욥 렐리펠트, 미드필더 블라우, 공격수 흐루너데이크, 왼쪽 공격수 딕 튜니썬 등 4명을 영입한데 이어 펠록스에서 미들필더 마르코 카보만을 뽑아 기존 DOS의 멤버들과 팀을 구성, 전력을 다졌다.
위트레흐트는 베르허 감독 시절인 1981년 1부리그 3위를 한 이후 85년 FA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짧은 전성기 시절을 누렸다. 또 최근엔 프란스 감독 체제하에서 전열을 재정비, 성적이 조금씩 향상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00~01 시즌 '이탈리아의 명문' 파르마에 패해 32강 진출이 좌절됐지만 UEFA컵(유럽축구연맹컵) 4경기에 출전, 2승1무1패라는 성적표를 남겼다. 또 위트레흐트는 01~02시즌 암스텔컵 결승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아약스에 0-1로 아쉬운 패배를 기록했지만 당시 터진 아약스의 골은 업사이드 논란을 야기시켜 위트레흐트는 네덜란드 팬들의 동정표를 받기도 했다.
00~01시즌 득점 4위(18골)에 오른 이고르 글루세비치와 미드필더 반 덴 베르그가 위트레흐트의 간판 선수. 또 02~03시즌 득점 4위 (14골)를 기록중인 더크 쿠이트도 무시할 수 없다. 홈구장으로는 1만4,000명 수용의 나우버 할헌바르트구장을 사용한다.
첫댓글 현근아 수고했다 ㅋㅋ 짜식 근데 다음부터 관전평이나 니 생각같은거 올리는건 어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