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피언
文 熙 鳳
노래 잘 하는 사람은 분명 그 분야의 참피언이다. 화가 이중섭같이 그림 잘 그리는 사람도 역시 그렇다. 그 분야의 참피언이다. 수준급 악기 연주자도 그렇고, 추사 김정희같이 글씨 잘 쓰는 사람도 그렇다. 그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모두가 참피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참피언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하고 괜한 상상을 하는 때가 있다.
오늘 방송에서 ‘전국노래자랑’ 프로그램이 방영됐다. 그 프로그램은 내가 즐겨 시청한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젊음을 과시하는 사회자의 재담과 능숙한 프로그램 운영, 출연진들의 개성미 넘치는 재주자랑이 나의 시선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웃을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그 시간만이라도 웃어보자며 일부러 시간을 낸다. 기발한 아이디어로 관중을 사로잡는 사회자의 익살 진행을 보면서 호탕하게 웃고, 개성적인 재능과 끼를 보여주는 출연자들 때문에 간드러지게 웃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 모두는 참피언이었다.
그러면 나는 어떤 분야의 참피언인가? 그 때마다 나는 확실하게 답을 할 수가 없다. 어느 한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꾸준한 노력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정말 나는 참피언이라는 직함을 가질 만한 사람인가?
수필문학 하계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로 향하고 있다. 비행기가 햇살 좋은 대기권을 벗어나 구름 위를 날고 있다. 무릉도원을 날고 있는 느낌이다. 하늘의 왕자인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지구가 이렇게 위대할 수가 없다. 지구뿐인가?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이 위대하게 보인다. 동화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 기분이다. 아스라이 펼쳐지는 풍경들을 글로 그려놓으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한다.
썩지 않는 생살로 영원히 사는 바다가 발 아래에서 위용을 자랑한다. 그곳에는 각종 보물들이 숨 쉬고 있다. 무진장한 보물들이 사는 곳이다. 그런 바다처럼 늘 생명수가 흐르게 하는 수필을 쓸 수 없을까? 바다 속처럼 신선하고 생생한 향을 발산하는 ‘아침 우유’ 같은 수필을 쓸 수 없을까? 마지막 생을 불살라 차가운 세상을 뜨겁게 달구는 숯을 닮은 수필을 쓸 수 없을까를 생각한다.
수필이란 자기 자신을 발가벗기는 힘겨운 작업이다. 창작은 산고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다 수태는 확실히 신비하고도 환희로운 일이다. 발가벗겨 놓은 내 글에서 싱그러운 오이 향, 달콤한 참외 향을 풍기게 할 수는 없을까를 생각한다. 과장되지 않은 이야기 속에 번득이는 기지가 기거하고, 그윽한 방향이 흐르는 수필이 일급 수필이다.
내 글 속에 아침 요기하러 나온 까치 부부들 오래 머물게 하고, 지평선 위에 붉은 노을 지피는 석양이 자리하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연초록빛 잎사귀 에 연방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산들바람이 살게 하고, 함박눈 내려 소담스럽게 그려진 수묵화도 살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뿐인가? 무채색 겨울들판 한구석에 홀로 핀 아기 민들레도 놀게 하고, 좁쌀을 튀겨놓은 듯한 추억을 조명하는 조팝나무도 살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세상을 수은으로 닦아낸 것처럼 맑게 만들고, 그믐밤 새색시 사각사각 옷 벗는 소리도 들리게 하겠다. 고향 어귀 물바가지에 떠 담던 접동새 소리, 그리고 반짝이는 별 몇 개까지도 세밀하게 그려 트럼펫소리, 섹스폰소리와 함께 살게 하겠다.
“깊은 물은 아무리 큰 돌을 만나도 소란스럽지 않다.” 했다. 내 글 속에 나만의 향기가 물컹물컹 진동하게 할 것이다.
목수는 집을 지어놓고 세상 소풍 끝낸다. 그것도 수백 년 갈 집을 짓고 떠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백 년, 이백 년이 지나도 독자들의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수필을 쓰는 일이다.
신선이 살고 학이 사는 이 땅에 수필가도 함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