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거나 먹먹할 때 꺼내 든다. 수없이 읽었건만, 다시 읽어도 먹먹하다. 먹먹함으로 먹먹함을 지우는 거다. 때는 재로
닦아내고, 기름은 기름으로 씻어내지 않던가. 『사기 열전』의 첫머리, 「백이열전(伯夷列傳)」 말이다.
사마천은 열전의 맨 마지막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를
통해 백이를 맨 머리로 택한 이유를 밝힌다. “말세에는 모두가 이익을 다투지만, 오직 그들(백이와 숙제)만은 의(義)를 좇았다. 나라를 양보하고
굶어 죽으니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칭송했다.” 목숨과 바꾼 의리를 높이 산 것이다.
아마도 감정이입이 있었을 것이다. 죽음으로 지킨 백이의
‘의리’와 궁형이란 치욕을 감내한 자신의 ‘의리’를 교직(交織)한 것이 아닐까.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흉노에 투항한 이릉을 변호하다 한
무제(漢武帝)의 노여움을 샀다. 형벌은 거세였다. 주살(誅殺)과 50만 전의 벌금 대신 사내로서의 치욕을 택했다. 부친 사마담의 “역사서를
완성하라”는 유언을 받들었다지만, 모를 일이다. 누구라도 생사의 갈림길에서 지저분한 삶을 접고 깔끔한 죽음을 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생존은
본능이고, 의미는 붙이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가 백이를 전면에 내세운 바탕에는 정교한
복선(伏線)이 느껴진다. 하나는 소위 천도(天道)라는 것이 옳으냐는 것이다. 자신도 그렇지만, 백이 역시 사사로운 정이나 세속의 이익이 아니라
‘의리’를 추구했다. 그 결과는 아사(餓死)다.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 먹다가 굶어 죽었다.
사마천은 의문을 제기한다. “하늘의 도는 치우침이 없고,
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는데 정말 그런가?” 덕을 쌓고 착하게 행동하며 의리를 지킨 백이는 굶어 죽었다. 공자는 제자 가운데 안연을 가장
총애했지만, 그 역시 곤궁하게 살다가 요절했다. 하늘이 착한 사람에게 보상한다면, 어찌 이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반면 날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인육을 먹으며,
포악한 행패를 저지른 도척은 '평생 놀면서 쾌락[逸樂]' 속에 살았다. 백이와 도척은 그저 대표적인 사례일 뿐이다. 근세에도 품행이 도를 넘고,
금기하는 일만 저지르면서도 평생 즐겁게 살 뿐만 아니라 부귀가 대대로 이뤄진다. 그런데 땅도 골라서 밟고, 말도 때를 봐가면서 하고, 지름길로
가지 않고, 바르게 처신하는데도 재앙을 만난 사람이 수도 없지 않으냐는 것이다.
그러니 이른바 ‘하늘의 도[天道]’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것이며, 있다면 과연 옳기는 한 것이냐 하는 본원적인 회의(懷疑)이다. 주역의 ‘덕행을 쌓은 집안은 자손에까지 경사가 미친다.[積善之家
必有餘慶]’는 이런 회의를 갈무리한 글이다. 백이와 도척처럼 당대에는 ‘인과응보(因果應報)’가 이뤄지는 것 같지 않으니, 선행을 쌓은
사람[人]이 아니라 집안[家]에 경사가 있을 것으로 짐짓 뭉뚱그려 유예한 것이 아니겠나. 사기를 집필한 기원전 세상이나 21세기 당금 세상이나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 무엇보다 놀랍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작금의 상황도 소위 ‘금수저’들이 탁부(濁富)를 즐기며 대물림 하지
않는가. 금준미주(金樽美酒)는 만인혈(萬人血)이요, 옥반가효(玉盤佳肴)는 만성고(萬姓膏)라는 탄식이 어디 춘향전 소설에서나 있을 법한 일인가.
사마천이 ‘도(道)’에 대해 깊이 사유한 흔적이 있다.
「백이열전」에서도 ‘하늘의 도는 치우침이 없다[天道無親]’는 화두를 꺼낸다. 「노자열전(老子列傳)」에서는 ‘무위(無爲)의 도(道)’를 소개한다.
간략히 줄이면, 어느 날 공자가 노자를 찾아 ‘친구
하자’고 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한 일화이다. 유가(儒家)가 중시하는 이런저런 법도에 대해 ‘곡백오흑(鵠白烏黑)’이라고 물리친다. 고니는 본디
희고, 까마귀는 검은데, 흰 게 좋고 까만 건 나쁘다면 까마귀는 어쩌란 말이냐. 그저 생긴 대로 살도록 두라는 것이다.
‘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도 그 연장선이다. 천지는 어질지 않고, 만물의 생장성쇠를 자연스럽게 둔다. 성인도 백성을 다스림에
“이쪽이다, 아니 저쪽이다” 깃발을 흔들지 않고 스스로 조화롭게 살도록 둔다는 것이다. 이것이 꾸미거나 간섭하지 않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비틀즈의 ‘렛 잇 비(Let it be)’나 영화
겨울공주의 주제곡 ‘렛 잇 고(Let it go)’ 모두가 지향점은 같다. ‘케세라 세라(Que sera sera)’도 ‘될 대로 돼라’는
자포자기가 아니다. ‘그렇게 될 것이라면 필경 그렇게 되리라’는 뜻이다. 이런 오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작금의
이른바 ‘정치’라는 것은 어떤가.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 그때는 틀리고, 지금은 맞다.”는 작위(作爲)가 넘쳐나지 않는가.
백이의 복선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명성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 않던가. 탐욕스런 자[貪夫]는 재물에, 열사(烈士)는 이름에, 허세한 자[誇者]는
권세에 목숨을 잃는다. 그럼에도 죽은 뒤 명성이 드러나지 않으면 과연 군자라고 할 수 있느냐고 짚는다.
백이는 물론 훌륭한 사람이지만, 공자라는 걸출한 인물이
언급하면서 비로소 명성을 얻지 않았던가. 안연도 공자라는 천리마 꼬리에 붙어 명성을 남긴 것이 아닌가. 어디 백이나 안연 같은 인물이 더
없으랴만. 다만 청운(靑雲)의 선비를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고 한탄한다.
그런데 사마천은 그의 명성을 드높여줄
‘청운지사(靑雲之士)’를 만났는가. 아니다. ‘태사공(太史公)’으로서 스스로 명성을 창출했다. 무릇 부귀라는 것이 구해서 얻어지지 않는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바를 추구하는 것이 답이다.
온 세상이 혼탁하여 모두가 이익을 탐할지라도 눈 딱 감고
휩쓸리지 말 일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뜻을 세워 정진할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바를 좇으니 천지(天地)라는 역려(逆旅)에 세월과 더불어
찰나를 머문 과객(過客)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
글쓴이박종권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JTBC 시청자정책심의실장 및 사건반장 앵커
역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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