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붙여:이 글은 한겨레신문 5월 9일(월)자 30쪽에 있는 [유레카]에 님이 "에비타와 빈라덴"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칼럼입니다. 좋은 글이라 여겨 이곳에 그대로 옮겨 놓았읍니다. 읽으시기를 권합니다.
▲ 박창식(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박창식의 [유레카]
에비타와 빈라덴
아르헨티나의 에바(에비타) 페론(1919~1952)은 20세기 최고의 대중정치 슈퍼스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배우 출신인 에비타는 1944년 후안 페론 대령을 만나, 그의 정치 역정 내내 연인이며 동지로 활동했다. 페론이 대통령으로서 고위 인사들과 국사를 처리할 때 에비타는 전국의 노조, 여성단체, 빈민단체를 돌며 가난한 대중과 만났다. 에비타는 때로 선동적인 연설로, 때로는 부드러운 목소리의 라디오 담화로 사회개혁의 열정을 고취했다. 에비타의 절대적인 인기 덕분에 페론은 1951년 선거에서 상원과 주지사 모두를 석권하고 하원 149석 가운데 135석을 장악했다.
‘잠들지 못하는 성녀’ 에비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그가 1952년 33살 나이에 자궁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시작된다. 페론은 에비타의 주검을 미라로 만들어 노동복지부 건물에 안치했다. 장례에는 몇 백만명의 애도 인파가 몰렸다. 1955년 쿠데타를 일으킨 군부는 에비타의 주검을 빼돌려 병영에 숨겼다. 에비타 숭배를 마땅치 않게 여기고 싹을 자르려 한 것이다. 주검은 그 뒤 16년 동안 다섯 나라를 떠돌며 방랑의 세월을 보낸다. 1970년 페론 추종자로 구성된 좌파 게릴라단체 몬토네로스는 페드로 아람부루 장군을 납치해 주검을 숨긴 곳을 추궁하고 끝내 그를 살해했다.
우여곡절 끝에 에비타의 주검은 1974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남편 페론의 관 옆에 놓이게 된다. 이어 1976년 탈취를 막고자 보안장치를 한 레콜레타 공동묘지로 이장된다. 주검이 옮겨질 때마다 수많은 지지자와 반대자가 몰렸다. 지도자의 죽음과 장례가 대중을 강력히 결속시킬 수 있음을 실증한 예다.
미국이 오사마 빈라덴의 주검을 수장해버렸다. 묘지가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반미 항전’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것이다. 에비타의 사례도 참고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