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그림은 네덜란드 신원미상화가의 1628년작 〈책들과 깃털펜 정물화(Still Life of the Books and a Quill)〉이다.
독일 고문헌학자·철학자·시인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1882년작(1887년 제2판) 《즐거운 학문(Die fröhliche Wissenschaft)》의 〈“농담, 꼼수, 응징”: 독일식 압운(押韻; 라임; Reim)을 원용한 서곡(序曲)(“Scherz, List und Rache”: Vorspiel in deutschen Reimen)〉에서 글쓰기, 독자, 책읽기를 가늠하는 자신의 생각들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여 표현한다.
한국의 세간에서나 시중에서는 이른바 “글을 발로 쓰냐?”거나 “괴발개발 썼네”라는 빈정, 비아냥, 핀잔이 통용되지만, 제52곡에서 “발(足)”은 굳건, 자유자재, 호쾌(豪快)를 은유한다. 제54곡에서 “소화력(消化力)”은 “소화기관(消化器官)”으로 대체될 수 있고, 제59곡에서 “샘”은 ‘잉크병(ink甁)’을 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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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2곡 발(足)로 글쓰기
나는 손(手)만으로 글쓰지 않네
나의 발도 나름대로 글쓴다네
굳건하고 자유자재하며 호쾌한 나의 두 발은
지면(地面; 땅바닥)과 지면(紙面; 종이바닥)을 질주한다네
제54곡 나의 독자에게
강력한 이빨들뿐만 아니라 우수한 소화력 ㅡ
나는 바로 이것을 그대에게 바라네!
그대가 나의 책에 동의하면
필시 나에게도 동의하리니!
제59곡 펜이 갈겨쓴다
나의 펜, 그것이 갈겨쓴다: 이곳은 지옥이야!
나는 갈겨써야 하도록 저주받았나?
나는 샘에 푹 담갔다가 꺼낸
펜촉에서 힘차게 흐르는 잉크의 아우성을 받아쓰네.
보라, 잉크가 어떻게 흐르는지, 얼마나 충만하게 얼마나 순수하게 흐르는지!
보라, 내가 갈겨쓰려는 글마다 어떻게 성공하는지!
그런 글들은 명쾌하지 않네, 결단코 ㅡ
그런들 어떠랴? 어차피 아무도 나의 글을 읽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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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니체는 《즐거운 학문》 제2부 제93절에서 글쓰기의 숙명 같은 이유나 까닭이나 사연을 다음과 같이 비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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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자네는 대관절 왜 글쓰는가?
A: 나는 젖은 깃털펜을 손에 쥐고 생각하지 않아. 하물며 의자에 앉아 뚜껑을 딴 잉크병을 앞두고 열정에 휩싸여 백지를 뚫어져라 노려보지도 않네. 나는 글쓸 때마다 짜증나거나 부끄러워. 나에게 글쓰기는 흡사 지릴 듯이 마려운 똥오줌 같지 ㅡ 심지어 이따위 직유법마저 몹시 불쾌하네.
B: 그런데도 자네는 대관절 왜 글쓰는가?
A: 아, 친구여, 내가 단언컨대, 여태껏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을 지워버릴 다른 방편을 찾지 못했어.
B: 그러면 자네는 왜 자네의 생각들을 지워버리고픈가?
A: 왜 지우고프냐고? 내가 정녕 그러고 싶겠나? 그리하지 않으면 내가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까 그러네.
B: 됐네! 그걸로 충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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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그림은 폴란드 화가 지그문트 아이두켸비츠(Zygmunt Ajdukiewicz; 아이두키에비츠, 1861~1917)의 〈폭풍을 피하려는 질주(Ucieczka przed burzą); 폭풍탈주(爆風脫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