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행 지 : 광주 서구 백마산(162m), 개금산(177m)
◈산행일자 : 2015년 2월 19일(목) 오후
◈누구랑 : 마눌님과
◈날씨 : 포근한 오후
◈산행코스 : 송학초교(14:15)~△백마산(162m/14:40)~전평제(15:27)~△개금산(142m/16:07)~전평제(16:13)~
~만귀정(14:40)~송학초교(17:55)
◈산행시간 : 14:15~17:55(3시간 40분)
저녁에 본가에서 동생들을 만나로 했기에 아침에 인근에 있는 백마산과 개금산을 찾았다.
오래전부터 갈려고 준비를 해놓았었는데....
마눌님이랑 동행했다.
조그마한 야산이지만 관리를 잘 해놓았다.
백마산에서 멀리 보이는 개금산을 보고 마루금을 따라 갔는데...
결국 왕복할 때 보니 동라서 가는 길이었다.
전평제로 가서 개금산을 올랐다.
개금산에서 바라본 광주 모습이 색달랐다.
금당산과 화방산 모습도 눈에 익숙하지 않았고...
만귀정은 이름만 들었다가 구경도 하고
서청뜰과 함께하는 영산강 모습도 볼만했다.
<들머리>
<담장길을 따라서>
<이정표>
<안내도>
백마산은 그 모양부터가 새끼 말을 거느린 어미 말을 닮아 우리에게 무척 친근감을 주고,
그리 높지도 않고 가파르지도 않아서 오르기에 알 맞는 산이다
<걷기 좋은 길>
<안내글>
75년이라...고등학교 1학년때다
<영산강>
<영산강 뒤로 보이는 어등산>
<안내글>
김세근 의병장(1550~1592)은 경남 함안군 마륜동 출생이다.
김해김씨인 김세근 의병장이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은 그의 방조 김일손이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참살을 당하자
그의 아버지 김석경(金碩慶)이 식솔들을 거느리고 이곳 세하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하동은 그의 이름 '세(世)'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한일합방 이후부터는 세(細)를 쓰고 있다.
金海人(김해인), 號(호)는 揷峰(삽봉)으로 宣祖(선조)10년에 문과에 급제, 宗簿寺主簿(종부사주부)벼슬을 지내면서 外侵(외침)에
대비한 養兵論(양병론)을 주장하다가 용납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 뒤 西倉面(서창면) 세하동 세동마을로 옮겨온 후 1592년 壬辰倭亂(임진왜란)이 일어나자 自己(자기)가 기른 壯丁(장정) 수백명을
이끌고 秋城會盟(추성회맹)에 참가하여 柳澎老(유팽노), 金德弘(김덕홍), 安瑛(안영) 등과 더불어 高敬命(고경명),
擧義隊列(거의대열)에 합세하여 도처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陳中(진중)에서 病(병)을 얻어 歸鄕療病中(귀향요병중) 스승인
湖西義兵(호서의병)장 趙憲(조헌)의 부름을 받고 病(병)든 몸으로 다시 出征(출정) 全州(전주)에서 軍營(군영)을 정돈하던 중
적병이 錦山(금산)으로 侵入(침입)한다는 수식을 듣고 急(급)히 錦山(금산)으로 가서 奮戰中(분전중) 臥坪(와평)에서
고경명과 같이 殉節(순절)하였다. <서구청에서>
<백마산>
<백마산 삼각점>
<영산강과 어등산>
<안내도>
<개금산과 우측 금당산>
개금산은 서창관내 매월동에 있으며 높이는 142m 산봉우리가 세갈래로 크게 갈라져서 마치 닭의 볏(鷄冠)과 같다 해서「개관산」이
전화되어 개금산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산 남쪽은 주로 솔밭으로 이루어지고 경사가 완만하여 그 자락에 많은 민가와 음식업소가 들어서
이 근방 수려한 경관을 보고 찾는 광주시민이 줄을 잇는다.
그리고 동쪽 자락에 있는 「회산마을」은 임진왜란 때의 공신이며 나주목사 등을 지낸 회제(懷齊) 박광옥 선생의 생지로
선생에 대한 삽화가 있고 선생의 누이동생 속칭「주역각시」에 관한 설화가 있다. <서구청에서>
<개금산~금당산~화방산>
<전평제와 개금산>
<안내도>
<걷기 좋은 길>
<개금산 들머리>
<삼각점>
<금당산과 화방산>
<개금산 날머리>
<이정표>
<전평저수지>
<이정표>
수련골방향으로
<동하마을회관>
<안내글>
<만귀정 #1>
만귀정은 이곳에 동족마을을 살고 있는 흥성장씨의 낙남선조인 만귀장창우가 후학을 가르쳤던 옛터에 후손들이 그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1934년에 중건하였고 그 후 1945년에 중수한 것이다.
큰 연못 가운데에 세운 수중 정자인데 만귀정 외에 습향각, 묵암정사 등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한줄로 늘어서 있는 보기 힘든 정자군이다.
만귀정은 사방 2칸으로 정사각형 팔작 지붕이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동, 서, 남쪽의 3방 향에는 난간을 돌렸다.
습향각은 1940년 묵암 장안섭이 연못 중앙의 중도에 사방 1칸으로 날렵하게 지은 정자이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있는 묵암정사는 송정읍장으로 재직하였던 장안섭의 공로와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1960년 광산군민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역시 사방 1칸의 발작지붕이다.
만귀정, 습향각, 묵암정사 등에는 중건상량문, 중건기, 중수기 등과 만귀정원운과 팔경 등의 많은 시문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경내에는 만귀정시사 창립기념비가 세워져 있어 이곳이 문인들의 활동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마당에는 왕버들 나무가 있고, 만귀정에서 습향각으로 건너가는 다리 옆 한쪽은 취석, 다른쪽에는 성석이라 새겨진 긴석재가
놓여 있어 취흥을 돋운 만귀정 주인의 흥취를 느낄 수 있다. <서구청에서>
<만귀정 #2>
<만귀정 #3>
<만귀정 #4>
<다녀온 백마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