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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노동자교류센터는 2003년 1월에 결성되어 한국, 일본, 필리핀, 태국, 호주 등 8개국 19개 노조가 함께하며 노동자들의 국제 연대를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이 철도, 버스, 전차, 해운 등 운송 관련 노조입니다.
국제노동자센터는 소속 조직인 JR서일본철도노(조)로부터 요나구니지마에서 46명의 위안부가 미군의 폭격에 의해 숨진 비극적인 사실을 2012년에 듣게 되었습니다.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이름 없이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전쟁으로 인해 여성·아이 등 사회적 약자가 희생당하는 일이 없어야한다는 마음에서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요나구니지마 위령제’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요나구니지마 위안부 사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섬 이곳저곳을 돌며 자료를 찾고 노력해 오신 나가타 선생님은 JR서일본철도노(조)의 퇴직조합원입니다.
작년 말 국제노동자교류센터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과 함께 요나구니지마 주민과 일본의 뜻있는 개인들이 주최하는 위령제 참가를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3월 22일부터 24일까지 열린 요나구니지마와 아카지마 위령제에 정대협 윤미향 대표와 관계자, 민주통합당 홍익표의원, 국제노동자교류센터 조귀제 국장, 제주 안복자 명창을 비롯한 예술인, 언론인 등 16명이 참가했습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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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구니지마(与那国島)가 품은 가슴 저린 슬픔
서쪽으로, 서쪽으로 날던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새하얀 구름들 사이로 언뜻언뜻 검푸른 바다가 얼굴을 내밀었다. 저 멀리 요나구니지마의 가느린 허리선이 드러나고 하얀 등대가 손짓을 한다. 바다는 너무 맑아 속살을 다 드러내고 있다.
그날도 이렇게 맑았겠지.
69년 전인 1944년 12월 어느 날 새벽, 요나구니 구부라항(久部良港)에 숨죽여 떠있던 기범선에 53명의 조선인 일본군위안부가 타고 있었다. 날아오는 비행기를 보며 위안부들은 손수건을 흔들었고 순간 비행기는 급강하해 기총을 쏘아댔다. 십수명의 위안부들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태평양전쟁에서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군은 기범선에 기총소사와 로켓탄으로 공격했고 결국 일본군에 의해 연행되던 위안부 46명은 목숨을 잃었다.
오키나와에서도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일본의 최서단 작은 섬, 요나구니는 그날의 진실을 바다 속 깊숙이 간직한 채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2013년 3월 22일 오전 9시 40분, 요나구니지마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위령제 참가자를 태운 비행기는 공항에 사뿐히 내렸다. 공항에는 위령제 실행위원장 타지마 코토에씨와 직무대행을 맡은 사키모토 토시오씨가 마중을 나왔다. 오키나와에는 상을 당하면 1년 상을 지내는 풍습을 갖고 있다. 안타깝게도 실행위원장이 며칠 전에 모친상을 당해 행사에 나가 인사를 할 수 없자 직무대행을 선임했다고 한다.
요나구니지마에서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46명이 미군의 총격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처음으로 들은 것이 2012년이었다.
당시 5·18 광주민중항쟁 기념식에 참가한 일본 JR서노(조) 간부가 그 이야기를 전하면서 일본 시민들이 위령제를 준비하고 있고 가능하면 한국에서도 참가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하반기 들어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요나구니지마 위령제 실행위원회’가 구성되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처음엔 위안부들이 돌아가신 12월에 위령제를 지내고자 했으나 요나구니지마 주민들의 결정과 준비가 늦어지면서 올 3월에 진행된 것이다.
위령제에 참가하기위해 JR서노(조)와 교류를 하고 있는 국제노동자교류센터를 비롯해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홍익표 의원, 예술인 등 한국 참가자가 정해졌다
우리는 우선 호텔에서 짐을 풀고 우선 위안부들이 탔던 배가 침몰한 구부라항으로 갔다.
요나구니지마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1년여 동안 자료를 뒤지고, 주민들을 만나 채증을 하며 역사를 발굴했던 나가타 이사무(長田 勇) 선생은 구부라항에 접해있는 가마(동굴)로 우리를 안내했다.
지금은 방파제와 커다란 정수장이 앞을 가로 막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탁 트인 바다가 바로 보였을 것 같다. 그 때와 달라진 것은 큰 배가 들어올 수 있게 만든 접안시설뿐, 작은 어선 몇 척과 연초록의 바닷물이 투명하게 빛나는 조용한 항구다.
구부라항 앞바다에서 미군기의 폭격에 의해 위안부 46명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당시 군의관으로 동행했던 이케무라 쯔네마사(村池 恒正)씨가 증언했다.
증언에 따르면 위안부를 태운 기범선은 한 밤중에 구부라항 근처에 도착해 얕은 바다를 들어올 수 없어 멀리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동이 트자 미군 비행기는 배를 발견하고 총격을 가했다. ‘아이쿠!’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아수라장이 되면서 배 밑으로 숨어들었지만 계속 된 폭격으로 기관부가 명중되면서 대다수가 목숨을 잃었다.
섬 주민들은 이미 미군의 폭격으로 부락이 불타자 대부분 산 속 가마에 피신해 있었다. 멀리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마을의 경방단(警防団)이 배를 내어 살아남은 사람을 구하고 시체를 수습했다. 구부라항에 딸린 낮은 모래언덕에 약 50구의 사체를 아단나무 가지를 모아 화장하고 매장했다. 당시 살아남은 위안부들이 기억하는 여성들의 성명을 기록해 간단한 묘표를 세웠다.
군의관은 살아남은 7명을 미야꼬섬(宮古島)으로 데려가 인계했고, 전쟁이 끝난 3년 뒤 쯤 아자(오키나와를 바로 떠나지 못했던 위안부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위연히 생존자 중 한명을 만났다고 한다. 그녀는 “2~3명이 나하에 있다”고 했다.
이케무라씨는 “화장하고 정중하게 매장했다고 생각하지만 전쟁 중이어서 전부는 알 수 없다. 언덕의 가마 안에 묻은 그대로 있을까”라고 증언하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마의 입구가 점점 메워진 상태라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그 속을 알아내긴 어려웠다. 이케무라씨가 생각한 대로 동굴 안에 위안부 유골이 매장된 채로, 이름을 쓴 묘표가 그대로 들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더욱 보수화 된 일본정부가 군 위안부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마당에 직접 메워진 가마 안을 조사할 수도 없다.
진상을 추적하던 나가타 선생에게 주민이 알려 주었다는 매장지로 추정되는 가마는 굳게 입을 다문 채였다. 가마는 요나구니지마 앞바다를 떠돌고 있는 위안부들의 억울한 넋들과 침묵의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군의 명령에 의해 위안부 53명을 대만에서 미야코섬으로 연행하는 과정이었다는 것, 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그 중 46명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 구부라항의 모래 언덕에 화장해 매장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위안부들의 억울한 죽음을 일본과 한국의 지인들에게 알리고 69년 만에 위령제를 지낼 수 있도록 노력한 나가타 선생의 노고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여기까지가 나가타 선생의 역할이라면, 역사적 진실을 널리 알리고 전쟁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저녁 무렵 구부라 다목적 집회소가 부산해졌다.
한국과 일본 각지에서 온 참가자와 섬 주민 등 100여명이 모여들고 전야제 형식의 ‘요나구니지마 아리랑 음악제’가 시작되었다. 고향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고 있을 넋들을 조금이라도 위로 할 아리랑, 살풀이, 가야금 병창, 대금연주 등 공연이 이어졌다. 요나구니지마의 전통노래, 제주 민요, 오키나와 예술가들이 함께 공연을 펼쳤다. 마지막으로 다 같이 손을 잡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위안부들의 한을 달랬다.
다음날 아침 6시 반 모든 짐을 챙겨 위령제가 열리는 구부라항 앞 북공원으로 향했다. 빡빡한 일정 때문에 아침은 위령제가 열리는 공원에서 샌드위치로 먹었다.
현수막이 걸리고 제주에서 온 오춘옥 심방의 주도로 제단이 차려지고 한국에서 직접 준비해간 곶감을 비롯한 제물을 정성스럽게 올렸다. 위안부들이 미군의 총격에 의해 숨진 지 69년 만에 처음으로 영혼이나마 위로하는 자리였다. 요나구니 주민들의 배려 속에 위령제는 한 시간 반 가까이 진행 되었고 억울하게 숨져간 넋들의 명복을 빌었다.
주민 1500여명이 세 개의 마을에 나눠 살고 있는 아름답고 작은 섬 요나구니 산비탈엔 백합이 만발해 있었다. 대만 가까이 있다 보니 일본군 자위대가 배치가 결정되었고 주민들은 유치에 반대하는 운동도 하고 있다.
자위대 예정지나 근처에 땅을 갖고 있는 사람 중에는 철망을 치고 소 몇 마리를 사다 놓고 보상금을 노리면서 찬성의 목소리를 낸단다.
등대 근처를 한가롭게 거닐든 소와 말들의 평화로운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돈을 노린 소들의 행진은 못 볼 것을 본 것 같아 씁쓸하다.
가슴 저린 슬픔을 간직한 요나구니가 어두운 전쟁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평화의 섬으로 남길 빌고 또 빌었다.
아카지마의 아리랑고개 너머에는
우리는 오키나와 종전 68년 3·24 아카지마(阿嘉島) 평화제와 위령제에 참가하기 위해 서둘러 10시행 비행기를 탔다. 요나구니지마에서 오키나와까지 가는 직항이 없어 중간에 있는 섬인 이시가키공항(石垣空港)에서 비행기를 갈아탔다.
오키나와 공항 식당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오키나와 항구로 이동해 쾌속정을 타고 섬으로 행했다. 배 멀미를 없애려고 먹은 약 때문인지 눈이 슬며시 감긴다. 50여분을 달려 아카지마에 도착했다.
아카지마 평화제 실행위원장을 비롯한 민박집 주인들이 마중을 나왔다. 섬 주민이 250여명에 불과한데 위령제를 위해 80여명이 왔으니 피서 철도 아닌데 섬 전체가 들썩인다. 날이 더워 모기가 설친다. 배 멀미약 부작용인지 기운이 없고 앞이 캄캄하니 손가락 끝이 저려온다. 행사준비까지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잠시 잠을 청해본다.
아카지마는 미군이 일본을 제압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이 섬을 점령하고 오키나와를 다 장악했다고 할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가졌던 곳이다.
이 작은 섬에도 7명의 위안부가 일본군에 의해 끌려왔었고, 6명의 조선인 군부가 배고픔 끝에 고구마를 훔쳤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한 곳이다. 전쟁의 막바지에는 식량이 부족하자 산속에 수용호를 파고 조선인 군부 50명을 가둬놓고 매일 곡식 몇 알을 주며 생명을 연명하게 한 잔인한 역사가 숨 쉬는 곳이다.
아카지마 평화제와 위령제는 4번째다. 섬 주민들도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온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평화제에 위안부들의 생존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카네시마 키쿠에(89세) 할머니와 신죠 요시코(78세) 할머니가 참가했다.
공연이 끝나고 위안부들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두 분을 인터뷰 했다. 카네시마씨는 당시 스무 살로 위안부들에게 밥을 해주는 등 위안소 일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18살에서 30살까지 위안부 7명의 이름(비록 일본식 이름이지만)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다. 고향에 아이를 두고 온 위안부도 있었단다. 위안부들은 아카지마에 3개월 정도 있었고 전쟁이 끝나기 전 군인과 같이 나하로 떠났다. 나중에 들은 얘기로는 전쟁의 폭풍 속에 대부분 죽어갔다고 한다.
70여년이 다 되가는 지금 한국 사람들이 와서 평화제를 열고 위령제를 지내는 것에 대해 “전쟁 당시 같이 얘기한 것처럼 그들이 살아 있다면 같이 얘기하고 싶다. 같이 고향 얘기도하고, 울기도하고, 화 내고 가족과 같이 지냈다. 지금도 이름을 잊을 수 없다. 식량이 부족해 들에 나는 풀과 이파리 등을 뜯어 먹을 땐 ‘우리도 이걸 먹고 자랐단다.’하던 것이 기억난다.” 며 당시를 회상했다.
얘기를 듣고 있는 동안 어느새 나의 볼에 눈물이 타고 내린다. 배고픔에 일본으로 끌려와 조그만 섬에 묶인 채 배고픔에, 고향 생각에, 두고 온 자식 생각에 몸과 맘이 타들어갔을 그들의 애환이 얼마나 컸을까.
위안부들이 자주 부르며 애환을 달랬다는 아리랑을 두 분에게 청했다. 틀니를 하고 목소리도 잘 안 나온다며 수줍어하면서도 한국말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요 넘어 간다.”를 나지막하게 부른다. 그 옛날 아리랑고개를 오르며 눈물을 삼키고 아리랑을 불렀을 여인들이 떠오른다.
24일 아침, 하늘에 검은 구름이 깔려 심상찮다. 위령제가 열리는 곳은 바닷가 절벽 위 언덕이다. 비가 올 것에 대비해 천막을 치고 제상을 차렸다. 위령제가 진행되는 동안 부슬비가 오락가락한다. 위령제가 막 끝났을 무렵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바람이 몰아친다. 천막이 날리고 제수용품이 뒤집혀질 정도다. 서둘러 정리하고 내려왔다. 마을로 내려오니 비가 언제 왔냐는 듯 말짱하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점심을 먹은 다음 평화 연수를 시작했다.
‘남풍장(南風莊)’, 위안부 7명이 머물렀던 위안소다. 오키나와에 위안소가 남아있는 곳은 두 곳 중 하나인데 깔끔하게 잘 보존되어 있다. 원래 민간인이 살던 집을 군인이 들어오면서 위안소로 만들었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 사람이 살았는데 돌아가셔서 지금은 빈집이다.
근처에 사는 카네시마 할머니가 나와 직접 안내를 한다. 당시에는 대나무 울타리였지만 지금은 시멘트로 바뀌었고 현관 앞엔 바람막이 방풍벽이 서 있다.
남풍장을 돌아 나와 마을 뒤쪽에 있는 아리랑 고개로 향했다. ‘아리랑 고개’라는 이름은 위안부들이 오르내리며 아리랑을 부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을 보고 마을 주민이 붙여준 이름이다. 고개는 생각했던 것보다 가파르지 않고 평탄한 편이다.
위안부들은 아리랑을 부르며 고개를 올라 바다 건너 고향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머나먼 고향 부모님과 가족을 그리워하며 깊은 바다에 호소했겠지. 제발 이 지옥 같은 삶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겠지.
고개는 당시에 흙길이었고 주변에 달래가 많았다고 한다. 위안부들은 달래를 캐다 양념장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달래 향에서 고향 내음을 느끼며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았을지 모르겠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신죠 할머니가 아리랑고개까지 따라와 참가자들과 같이 아리랑을 부른다.
70여명의 연수단이 산 중턱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궁지에 몰리고 식량이 바닥나자 일본군은 조선인 군부를 수용할 수용호를 만들었다. 섬의 높은 산골짜기에 커다란 구멍 두 개를 파 놓고 그 속에 각각 25명씩의 군부를 가두어 놓았다. 하루에 곡식 세 알과 녹차를 준 것이 전부라고 한다.
뼈만 앙상해지고 죽음의 문턱에 다다를 즈음 전쟁이 끝나 한 달여 만에 군부들은 풀려날 수 있었다. 잡풀이 무성해진 속에 현재는 참호의 형태만 어스름하게 남아 그때의 고통을 강변하고 있었다.
이어서 조선인 군부 6명이 처형당한 처형장 입구로 향했다. 배고픔에 고구마를 훔쳤고 주머니 속에 곡식 몇 알이 들어있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총알을 아끼기 위해 심지어 죽창을 사용했다고 한다. 배 시간이 촉박해 처형장까지 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발길을 돌려 아쉬웠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 분들의 넋을 위로해본다.
궂은 날씨에 세 시간여 강행군이었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진실을 조금이라도 마주하니 절로 숙연해진다. 이러한 사실들을 발굴하고 정리해 주신 나가타 선생님의 노고에 뭐라 감사의 마음을 표할길이 없다.
다시 오키나와로 향하는 배를 탔다. 68년 전 전쟁의 폭풍 속에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배 한구석에 웅크려 앉은 채 서로를 감싸며 두려움에 떨었을 여인들의 피눈물이 가슴을 옥죈다. 창자를 끊어내는 배고픔을 품은 채 이승을 떠났을 징용노동자들의 피울음과 통곡이 귓전을 맴돈다.
잊지 말아서는 안 될 역사, 반복해서는 안 될 역사의 무게를 안고 오는 발길이 무겁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기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