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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운데 이경미의 회화가 접맥되는 지점으로 치자면 전자보다는 후자에 가깝다. 그리고 그 종류와 강도가 다를 뿐, 존재론적 상처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란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공감을 얻는다. 자신의 정신적 외상과 투명하게 대면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상처와 친해지고, 종래에는 그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회화는 화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서 일어날 법한 자기반성적인 과정을 재구성할 수 있게 해준다. ● 이경미의 그림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사실적이고 생생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정작 현실감과는 거리가 먼 어떤 의외성을 드러내는데, 마치 연극무대에 올려진 극중 장면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그 무대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고양이다. 대개는 도심의 정경을 배경으로 책들이 잇대어져 있고( 그 책들은 도심의 건물에 잇대어져 있어서 그 자체가 도심의 연장된 일부처럼 보인다), 건물 아래쪽 가로에는 범람한 듯 물이 흐르고, 그 물길이 화면의 전면을 향해 이어지고 있다. 배경화면의 도시와 전경에 포치된 책들이 어우러진 풍경 속에, 가로에 흐르는 물길 위에 고양이가 앉아있거나 어슬렁거린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 모든 정경이 그 위에 테이블보가 깔린 테이블 위에 통째로 올려져 있다.
근작의 주제 그대로 탁자 위의 거리다. 여기서 거리를 세계로 바꿔, 탁자 위의 세계로 고쳐 읽어도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는다. 탁자 위의 세계? 모르긴 해도, 테이블보가 깔린, 그 위에 책들이 세워져 있거나 쌓여져있는,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화면 밖의 작가가 구상해낸 세계, 상상의 세계일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작가가 테이블에 앉은 채 머릿속으로 구상해낸 세계다. 자신의 상상력을 공 굴려 만들어낸 세계는 그러므로 현실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정경을 재현한 일종의 심리풍경이며 내면풍경이다. ● 그리고 그 내면풍경의 끝자락이 작가의 무의식을 거슬러 유년시절에 가닿는다. 작가는 상당기간 어머니의 부재와 더불어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을 기억해낸다. 그럴 때면 작가는 마치 어두운 구석에 꼼짝없이 앉아있는 고양이처럼 어머니를 기다리며 어두운 방안에 앉아 있곤 했다. 부재의식이 작가의 내면에 외로움(아마도 작가의 존재론적 트라우마?)을 심어주었고 (예술은 결핍 위로 샘솟는 그 무엇이라는 토마스 만의 말에서도 암시되듯 부재의식은 예술의 원동력으로서의 결여 내지는 결핍의식과도 통한다. 과장해 말하자면, 부재와 결여와 결핍의식이야말로 예술의 진정한 자산이다), 이 외로움이 고양이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했다. ● 그러므로 고양이는 작가의 자화상이다. 고양이는 경제적인 동물이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좀체 움직이지 않는다. 고양이는 집안에 있다. 집안에서 집밖을 상상한다. 집밖으로 나가는 대신, 집밖에 있는 세계를 통째로 집안으로 옮겨다놓는다. 그렇게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방안에다, 상상력이 머무는 머릿속에다, 그리고 그 상상력이 투사된 테이블 위에다, 자신만의 성좌를, 성소를 축조한다. 그 성소에는 집밖의 세계와 함께 고양이가 싫어하는 물도 묻어 들어와 있다. 물은 아마도 바깥세상의 거친 세파를 상징할 것이다.
이러한 상징들의 연쇄를 좀 더 극명하게 보여주는 다른 그림이 있는데, 종이박스를 소재로 그린 그림에서, 그 위에 고양이와 함께 성 모형(아마도 작가가 머릿속에 축조한 성좌)이 포치해 있는, 쌓여진 책들 아래쪽으로 박스의 바닥 대신 거친 바다가 그려져 있다. 심연과도 같은 바다 위로 책들이 절벽처럼 포개져 있고, 그 위에 성채가 지어진, 이 모든 정경이 밑 빠진 종이박스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종이박스는 고양이가 사는 집이다. 그런데, 그 집에 밑이 없다면, 더욱이 심연과도 같은 바다가 그 밑을 대신하고 있다면? 작가의 이 그림은 밑이 없는, 허공에 떠있는 구조물 속에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인물을 그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가지의 상황 속에 던져진 부조리한 인간을 그린, 프란츠 카프카의 알레고리에 대한 또 다른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때로 고양이는 물밀며 들어오는 파도로부터 창틀 위로 몸을 피해보지만, 어느새 바다는 창틀 바로 밑까지 바짝 침범해 있고, 여차하면 방 안쪽으로 범람할 기세다. 물은 바깥세상의 세파를 상징하며,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상징하며, 그 밑을 헤아릴 길 없는 무의식적 심연을 상징한다. ● 그런데, 그 창틀 위로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마침내 어머니가 돌아온 것이다. 커튼은 작가를 보호하기 위해 되돌아온 어머니를 상징한다. 작가는 그렇게 되돌아온 어머니가 밤새 한복 짖는 일로 생업을 꾸린 것을 기억해내고, 한복과 커튼을 동일시하고, 그 보호막 뒤에 숨어 다시 안녕을 되찾았다고 생각한다(이와 함께 커튼은 고대 그리스에서 일루전을 놓고 서로 겨루던 화가들 간의 경쟁에 등장한 소재로서, 화가와 회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작가의 머릿속에서 떠올려진 것이며, 테이블 위에 얹혀진 책들로부터 구상된 것이다. 책은 말하자면 방안에 있는 작가가 방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해주는 실마리며 길잡이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작가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복원해낸 유년시절의 추억(어머니의 부재가 만들어준 존재론적 상처와, 다시 되돌아온 어머니가 만들어준 보호받는 느낌)과 자신이 읽은 책들의 합작품이다. 책들은 말하자면 작가로 하여금 상상력을 공 굴려 세상과 접속할 수 있게 해주는 매개다(책은 지성이라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의미를 상징하기도 한다). ● 그리고 작가를 대리하던 고양이는 마침내 보호막을 찢고, 상상력 밖으로, 세상 속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방안을 박차고 나갈 것인가, 말 것인가? 막상 나가면, 상상하던 세계와 바깥세상이 똑같을까, 아니면, 다를까? 책 위에 얹혀진 주사위가 결단을 기다리고 있다(주사위는 삶을 살아가면서 맞닥트리는 결단의 순간을 상징한다).
이경미의 그림은 미시적 스펙터클을 내재화한, 한 편의 성장소설처럼 읽힌다. 한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외상과, 심리적인 동요와, 존재론적 불안에 맞닥트려진다. 그리고 그 내면적이고 내재적인 요소들을 나 또한 공유하고 있음을 느낀다. ■ 고충환